전구를 발명한 남자, 혹은 발명을 발명 한 남자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토머스 앨바 에디슨(Thomas Alva Edison, 1847~1931).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고개를 끄덕인다. 아, 전구 만든 사람! 그런데 잠깐. 전구를 만든 사람이 에디슨이냐고? 이쯤에서 역사는 슬며시 웃음을 감춘다.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한 사람이 아니라, 전구를 팔아먹는 데 성공한 사람에 훨씬 가깝다. 물론 그게 더 대단할 수도 있다. 세상은 발명가보다 장사꾼을 더 기억하는 법이니까.
1922년경 에디슨.(위키피디아)
오하이오 촌구석에서 태어난 문제아
1847년 2월 11일, 미국 오하이오주 밀란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에디슨은 어릴 때부터 문제아 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석 달 만에 선생님이 이 아이는 머리가 나쁘다 는 판단을 내렸고, 어머니 낸시 에디슨(Nancy Edison, 1810~1871)은 아들을 학교에서 빼내 집에서 직접 가르쳤다. 덕분에 에디슨은 평생 정규교육 기간이 석 달에 불과한 채로 살았다.
여기서 교훈 하나. 학교가 천재를 만드는 게 아니라, 학교를 못 다닌 천재가 학교의 한계를 증명한다. 물론 이 논리를 모든 수업 빠지는 학생에게 적용하면 곤란하다.
열두 살에는 기차에서 신문을 팔았고, 열다섯엔 전보기사로 일했다. 당시 전보는 오늘날의 인터넷이었다. 정보가 곧 권력인 시대에, 전보기술을 익힌 에디슨은 이미 네트워크 가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1861년 어린시절 에디슨.(위키피디아)
발명 공장, 혹은 세계 최초의 연구소 기업
에디슨의 진짜 천재성은 멘로파크 연구소(1876년 설립, 뉴저지주)에서 빛났다. 오늘날로 치면 연구개발 전담 기업 을 세운 것인데, 이게 얼마나 혁명적이었냐 하면, 그 전까지 발명이란 외로운 천재가 다락방에서 홀로 이루는 것이었다. 에디슨은 발명을 조직화 했다. 수십 명의 연구원을 고용하고, 체계적으로 실험하고, 특허를 양산했다.
그의 생애 특허 수는 무려 1,093개. 평균적으로 11일에 하나꼴이다. 물론 그 중에는 본인이 직접 만든 것도 있고, 직원들이 만든 것을 에디슨 이름 으로 낸 것도 적지 않다. 이른바 발명 공장 의 명암이다. 직원들 처지에선 억울할 법도 하지만, 에디슨은 이렇게 말했다. 천재란 1%의 영감과 99%의 땀이다. 땀은 직원들이 흘렸고, 영감과 특허는 에디슨이 챙겼다.
1873년 워드 스트리트에 위치한 에디슨의 뉴어크 공장 앞에서 직원들이 찍은 단체 사진으로 엽서로 제작되었다. 나무들은 잎이 나지 않았고 주변 건물들은 훨씬 작아 보인다. 에디슨은 4층 창문에서 살짝 얼굴을 내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는 사진과 함께 너무 바빠서 아래층으로 내려올 시간이 없었다고 적었다.(위키피디아)
전구 이야기, 발명인가, 개량인가
전구의 원리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영국의 험프리 데이비(Humphry Davy, 1778~1829)였다. 실용적인 백열전구를 거의 완성 단계까지 끌어올린 사람은 영국 발명가 조지프 스완(Joseph Swan, 1828~1914)이었다. 에디슨은 1879년 탄소 필라멘트 전구를 완성했는데, 스완도 같은 해에 비슷한 전구를 공개했다.
결국 두 사람은 특허 분쟁 끝에 합작 회사 에디스완(Ediswan) 을 세웠다. 이름 순서를 보시라. 에디슨이 앞이다. 이게 에디슨의 진짜 능력이었다. 싸워서 이기는 것보다, 자기 이름을 앞에 놓는 협상력.
그러나 에디슨의 공헌을 폄하할 수는 없다. 단순히 전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전기 공급망·계량기·배선 체계까지 전기문명 전체의 기반구조를 설계했다. 전구 하나를 팔기 위해 도시 전체를 재설계한 사람. 그게 에디슨이다.
1878년 4월, 워싱턴 D.C.에 있는 매튜 브래디의 스튜디오에서 에디슨이 자신의 축음기 두 번째 모델과 함께 있는 모습.(위키피디아)
직류 대 교류, 역사상 가장 찌질한 전쟁
에디슨의 생애 최대 오점은 아마도 전류전쟁(War of Currents) 일 것이다. 에디슨은 직류방식을 고집했고, 그의 옛 직원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 1856~1943)와 기업가 조지 웨스팅하우스(George Westinghouse, 1846~1914)는 교류방식을 밀었다.
기술적으로는 교류가 장거리 송전에 훨씬 유리했다. 에디슨도 그걸 알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직류 시스템에 막대한 돈을 투자해 놓았다. 그래서 그는 무엇을 했는가?
교류 전기로 동물을 공개 처형했다. 말, 개, 그리고 1903년에는 서커스 코끼리 톱시(Topsy) 를 교류로 감전시켜 죽이는 장면을 필름에 담아 상영했다. 교류는 위험하다 는 공포 마케팅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경쟁사 제품을 가짜뉴스로 때려잡는 행위다.
그러나 역사는 테슬라의 손을 들어줬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전기는 거의 모두 교류방식이다. 에디슨은 틀렸고, 졌다. 그리고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고집불통 기득권의 교과서적 표본이다.
에디슨이 1879년 12월 멘로파크에서 공개 시연에 사용한 최초의 성공적인 전구 모형.(위키피디아)
또 다른 발명들, 축음기, 영화, 그리고 탄소 마이크
에디슨의 발명목록은 화려하다. 1877년 축음기, 1891년 영화 촬영·상영 장치인 키네토스코프 (단, 실용적인 영화 상영은 뤼미에르 형제(Auguste Lumière, 1862~1954 / Louis Lumière, 1864~1948)가 먼저였다는 논쟁이 있다), 탄소 알갱이 마이크, 전기기관차 시제품 등.
특히 축음기는 에디슨 자신도 예상 못 한 발명이었다. 처음엔 전화 메시지를 녹음하려고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음악을 듣는 데 쓰기 시작했다. 에디슨은 오락용으로 쓰다니 격이 낮다 며 못마땅해 했다고 한다. 발명가가 자기 발명의 용도를 틀리는 전형적인 사례. 오늘날 소셜미디어를 만든 이들이 그것이 민주주의를 흔들 줄 몰랐다는 것과 비슷하다.
1889년 에디슨.(위키피디아)
에디슨이 한국에 던지는 질문들
에디슨의 삶을 한국 현실에 대입해 보면, 웃다가 씁쓸해지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첫째, 우리는 누구의 특허를 인정하는가? 한국에서 연구자·개발자가 회사에서 낸 아이디어의 특허는 상당수 회사명의로 귀속된다. 에디슨 연구소의 무명 직원들이 그랬듯, 땀 흘린 사람과 이름이 올라가는 사람이 다른 경우가 여전히 많다. 2020년대 한국 스타트업과 대기업 연구소에서도 이 구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둘째, 기득권은 교류를 죽이려 한다. 에디슨이 직류에 집착하며 기술변화를 방해했듯, 한국사회에서도 새로운 기술·산업·제도가 등장할 때마다 기존 이해관계자들의 저항이 격렬하다. 재생에너지, 인공지능 규제, 플랫폼 노동 등 굵직한 현안마다 에디슨의 코끼리 감전 에 해당하는 공포 마케팅이 등장한다. 이건 위험하다, 검증이 안 됐다 는 말이 때로는 진심이고 때로는 기득권 수호의 언어다.
셋째, 학교 석 달 짜리 에디슨을 우리사회는 어떻게 다루는가? 한국은 학벌사회다. 에디슨처럼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사람이 과연 한국사회에서 발명공장 을 세울 수 있을까? 대학 졸업장 없이는 기업 면접도 통과하기 어려운 구조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에디슨을 조기에 걸러내고 있는가.
넷째, 에디슨은 실패를 데이터 로 봤다. 전구 필라멘트 소재를 찾기 위해 6,000여 가지 재료를 실험했다는 에디슨의 일화는 유명하다. 나는 실패한 게 아니다. 안 되는 방법을 6,000가지 발견했을 뿐이다. 이 말을 한국 교육현장과 기업문화에 대입하면 어떤가. 한 번의 실패가 낙인 이 되는 사회에서, 6,000번 실패할 배짱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나올 수 있겠는가.
왼쪽부터 헨리 포드, 에디슨, 하비 S. 파이어스톤. 1929년 2월 11일 플로리다주 포트 마이어스에서.(위키피디아)
말년, 그리고 유산
에디슨은 말년까지 현역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당시 미국 해군 기술자문을 맡았고, 80대에도 천연고무 대체식물을 연구했다. 1931년 10월 18일,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던 날 밤, 미국 전역에서는 1분간 전등을 껐다. 그의 빛을 기리기 위해, 그의 빛을 잠시 껐다. 이보다 아름다운 추모가 또 있을까.
그는 위대했고, 탐욕스러웠고, 틀리기도 했고, 끝내 고집을 꺾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촛불 아래서 이 기사를 읽고 있을지 모른다.
발명은 완벽한 인간이 하는 게 아니다. 불완전하고 뻔뻔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이 한다.
에디슨은 그걸 삶으로 증명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그의 전구 아래서, 그를 비판할 자유를 누리고 있다.
1910년 뉴욕 타임스 특집 기사에서는 최고의 힘인 자연을 [에디슨은] 인정하고 존중하지만 숭배하지는 않는다. 자연은 자비롭고 사랑이 넘치는 존재가 아니라, 완전히 무자비하고 무관심하다 라고 언급한다. 에디슨은 또한 나는 개인이 아니라 세포들의 집합체이다. 예를 들어 뉴욕시가 개개인들의 집합체인 것처럼 말이다. 뉴욕시가 천국에 갈 수 있을까? 라고 말한 것으로 인용된다.(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