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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다석의 한글철학 ㊷] 이 집 저 놓(去彼取此), 나죽지 않

[다석의 한글철학 ㊷] 이 집 저 놓(去彼取此), 나죽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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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잘라 말해 ‘이’를 집고 ‘저’를 놓는 앙 다짐이다. 노자 늙은이는 72월에 절알고, 스스로 뵐라 않으며. 절사랑코, 스스로 고일라 않음. 므로 이를 집고, 저를 버림.”이라 했다. 18월에 저 아는 게 밝”이라 했듯이, 저를 알고 스스로 뵐라 않으며, 저를 사랑하고 스스로 고일라 않는 것이다. ‘스스로 뵐라’는 저가 제게 잘난 꼴이요, ‘스스로 고일라’는 저가 제게 높이는 꼴이다. 그러니 저는 아예 버려야 한다. 마음을 훅 터서 열되, ‘시픔/싶음’을 끊어내는 일이다. 이는 여기요, 속이요, 속알이다. 저는 저기요, 겉이요, 싶음이다. 여기에 살지 않고 저기를 사는 까닭은 무엇일까? 여기 이에 솟는 산알 불씨가 없기 때문이리라. 없으므로, 이에 기쁨이 없고 바람이 없고 제자리가 없기 때문이리라. 그렇다고 저를 좇으면 풀어 맺어질 수 있을까? 저기에 기쁨을 세우고 바람을 세우고 제자리를 세워도 여기가 아니니, 그것은 모두 헛꼴이요, 애타는 슬픔이다. 저기를 꾸며대는 겉꼴(外形)은 벗어야 한다. 이를 고파해야 하고, 저를 당겨 이에 세워야 하며, 꾸며도 꾸밈없이 꾸며야 하리라. 여기 ‘이’ 자리는 꾸밈없이 어여쁜 속꼴(內面) 차리는 자리다. 다석 류영모는 바뀌는 것은 겉나요, 바뀌지 않는 것은 속나다. 절대세계는 상대세계를 내포하기 때문에 바뀌면서도 바뀌지 않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변화하는 겉나(몸)에서 변화하지 않는 속나(얼)로 솟나면 무상(無常)한 세상을 한결같이 여상(如常)하게 살 수 있다. 얼나는 무상한 세상을 여상하게 살 수 있는 평상항(平常恒)이다.”라고 하였다. 속꼴 차리는 사나이가 씩씩하다. 다석은 사나이를 ‘산 아이’에서 온 말로 보았다. 산 아이에 계집 사내 따로 없다. 산알 깬 산 아이는 세상 꾐에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참 목숨을 골라잡는다. 해월 최시형은 향아설위(向我設位)라 했다. 저기가 아니니, 여기 이에 산 제사를 지냈다. 산 이에게 산 제사 지내야 한다. 다석도 그것은 정신이 육체를 먹는 일이며 내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아님께 가는 길은 자기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길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사람은 나날로 죽어 산다. 그러니 나날로 부활이요 나날로 생명이다. 여기에 지금을 세우면 나죽지 않는다.   갈림길 사람살이는 눈 뜬 뒤로 마지막 눈 감을 때까지 이것저것 골라잡는다. 끊임이 없다. 노자 늙은이는 12월에 사람살이 바탕을 ‘저(彼)’와 ‘이(此)’ 사이로 보았다. 다석은 배 때믄이지, 눈 때믄 이 아니오라. 이 집고, 저 버리 오라.”(작은 글씨는 뺌)라고 하였다. ‘사이’가 들뜨면 그곳은 늘 세찬 골라잡기 싸움질이다. ~와/~과”는 사이 벌림이다. 늙은이가 말하기를 ‘씻어난이(聖人)’는 배 때문이지 눈 때문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배는 ‘이’에 빗대고, 눈은 ‘저’에 빗댔다. 저는 밖에 뵈는 고운 꽃세상 꾀임이다. 맨지(살갗) 느낌을 불러내 겉치레를 부추긴다. ‘몬몬(唯物)’에, 아니 몬몬이 퍼붓는 값어치다. 다석은 눈이 다른 곳에 마주치면 달라진다. 어지간히 조히조히 자라난 사람이라도 눈 마주치면 달라진다. 이는 실컷을 쫓으려는 데서 나오기 때문에 이 실컷을 빨리 깨뜨리는 데 온갖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눈(眼)에 살지 말고 몸에 살지 말아야 한다.”라고 했다. ‘이’는 속에 소리 없이 여물어 뵈지 않는 산알이다. 곧 낌새 없이 속으로 영글어 속치레로 높오르는 얼나요, 속알이다. 그러므로 ‘이’와 ‘저’는 어쩌면 갈림길이다. 다석은 노자 늙은이가 ‘거피취차(去彼取此)’라 한 것을 이 집고, 저 버리 오라.”로 풀었다. 이는 집어야 하고, 저는 버려야 한다. 이 집고 저 버림에 차례 따위는 없다. 집고 버리는 ‘이저’는 한 가지다. 둘 중 하나가 아니다. ‘이’는 ‘나’이니 늘 나(吾)로 나(生)야 한다. 그래서 다석도 내가 자꾸 나아가는 것이니까 죽어서 나아진다면 몸뚱이의 자살은 하지 않을지언정 정신의 자살은 얼마든지 하여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 한다... 내가 나를 죽이고 내가 나를 낳아가는 것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씩씩한 우리는 몸을 입고 있어 눈에 뵈는 것이면 쉽게 마음을 뺏긴다. 돈 부리는 힘과 이름 높이는 일이 주는 달콤함, 주먹이 꾸민 꽃 부림. 그렇듯 세상에 비치는 힘 있는 겉꼴은 눈을 홀리고 넋을 빼앗는다. 저를 세우는 힘이요, 달콤함이요, 꽃 부림이다. 그래서 ‘배-이(腹-此)’, ‘눈-저(目-彼)’로 잇닿아 놓았다. 배에 ‘이’로 속알 들고, 눈에 ‘저’로 겉꼴 드는 법이다. 눈을 홀리는 겉꼴 꾸밈에 자꾸 매달리면 속알은 시나브로 쪼그라든다. 쪼그라들어 쭉정이가 된다. 네가 내 눈에, 내가 네 눈에 들어 ‘눈부처’로 속알 뜨지 못하면, 속눈은 내내 잠겨서 뚫리지 못한다. ‘이 집’에 곧바로 속눈 떠서 ‘저 놓’이어야 한다. ‘저 놓’에 곧바로 속눈 떠서 ‘이 집’이어야 한다. 바라기만 하는 눈 고픔은 저가 부추기는 ‘싶음’이다. 다석은 몸뚱이만 가지고 맘을 내면 견물생심(見物生心)이 된다. 몸뚱이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죄악이다. 무슨 맛을 그리워하는 것은 못 쓴다. 무엇을 좀 갖겠다든지, 좋은 소식을 좀 듣겠다고 하는 것은 실제 마음이 거기에 머뭇거리는 증거이다. 이런 생각은 하나의 ‘우상’이니 삼가야 한다.”라고 했다. 세상으로만 깜빡이는 곱고픔을 거두어들일 때 비로소 어둠에 가린 ‘참빛’이 뵈어 나리라(眞光不輝). 또 다석은 태양의 빛은 가(假)빛이다. 태양의 빛은 가리는 빛이다. 우리 눈앞에 전등불을 바짝 대는 것과 같다. 먼지라는 장난꾼 때문이다. … 이 세상은 온통 먼지의 허영에 홀린 것이다. 거짓 것은 온통 이 세상에 있다. 이 가짜 빛처럼 우리의 원수는 없다. 이것을 실감으로 느껴야 한다. 진리는 이치만이 아니라 실감을 해야 한다. 이 세상은 온통 먼지다 태양도 큰 먼지다. 참빛은 이 세상을 초월하여 있다.”라고 했다. 곱고운 꽃세상이 저를 높이고 기리거든 놓아버려라! 손뼉 소리로 치켜올리거든 귀를 닫아라! 버리는 마음이 씩씩하다. 씩씩해야 굳세다. 그 마음을 바라야 한다. 끈질긴 저 붙들림과 저 매달림을 내려놓아야 빛이 꺼지지 않는다. 그래야 제나 그물에서 헤어나 올 수 있다. 이제야 저절로에 다다른다. 비는 마음 세상 꾀임에 붙들린 ‘저’를 끊고 내려놓았다면, 이제 우리는 산알 밑바탕인 ‘이’가 저절로 솟아오르리라. 다석에게 ‘이’는 우리 속에 든 ‘배’, 곧 속알이 들어앉은 있꼴(存在) 속 가온(中)이다. 배에 속알을 채워야 온통이 된다(다석은 ‘왼통’이라 하였다). 이때 속에 든 속알은 검얼(神靈) 깃든 산알이다. 사람이 바라야 할 말씀은 속알에 있다. 어쩌면 그것이 오직 하나뿐인 값어치일지 모른다. 있꼴 가온에 검얼 깃든 속알이 들어야 참사람(眞人)이지 않겠는가! 밖으로 깜빡이며 나남있이 눈 부신 빛은 가짜다. 그런 빛은 언젠가 꺼지고 만다. 속으로 깜빡이며 나남없이 눈 부신 빛은 얼이다. 속으로 타오르는 얼빛은 ‘이’다. 다석은 나는 빛이라고 한다(요한 12:46). 빛은 정신이다. 얼이다. 정신의 자각 그것이 나는 빛이라는 말이다. 내가 있다는 것은 내가 깨있다는 것이다. 밝은 것이 빛이듯이 깬 것이 빛이다.”라고 했다. 얼빛을 붙잡는 일이 ‘이 집’이다. 밖으로 깜빡이는 빛은 남에게 다 보인다. 속으로 깜빡이는 빛은 나에게만 보인다. ‘이 집’은 나에게만 뵈어 스스로 홀리는 ‘깨끗’이다. 그러니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따위는 말아야 한다. 오직 ‘모신 하나님’으로 없이 계시는 성소에서 야무지게 여무는 속알이어야 한다. 온 마음을 그 자리에 모아야 한다. 지극정성으로 비는 마음. 예수가 말한 ‘마음이 가난한 자’란 마음에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지저분한 것이 도무지 없는 가운데의 가운데, 속의 속을 충(忠)이라고 한다. 속이 비어 있고 곧은 것을 말한다.”(다석어록) 늘 산알 알맹이를 쥐는 것, 그것이 참으로 가는 오롯한 길이다.   열매 다석은 ‘이 집 저 놓’ 알맞이(哲學)를 꽃과 열매에 빗대어 환히 밝혔다. 꽃은 눈을 즐겁게 하고 향기롭지만, 눈 깜짝할 새에 피었다가 덧없이 져버리는 껍데기다. 열매는 거칠고 투박하지만, 그 안에 산알 씨앗을 품고 있는 단단한 ‘참몸(實體)’이다. 다석은 꽃이 아니라 꽃을 둘러싼 빈탕을 보라고 했다. 빈탕은 열매 속에 있다. 산알 씨앗이 가진 ‘앗숨’이 그것이다. 씨는 앗숨을 터서 싹을 낸다. 씩씩한 기상과 꿋꿋한 절개는 앗숨이 낸 싹에 있다. 산 아이는 ‘싹’을 터서 자란다. 다석은 땅 밑 씨알의 싹이 하늘 높이 있는 태양이 그리워서 그…… 하고 터 나오는 것을 그린 것이 긋이다. 싹의 긋이 터 나와서 끄트머리를 드러낸 것이 끝이다. 끝이 나왔다 고 나(生)다, 나(我)다.”라고 하였다. 겉치레(꽃)를 좋아하고(좋이) 높이는 세상은 싹을 내지 못한다. 그러니 아무도 보지 않는 깊은 속에서 묵묵히 속알 맺는 삶을 살아야 하리라. 꽃은 고운대 질 줄을 몰라 탈이다. 꽃이 지고 열매가 맺히는 것이 좋다. 꽃 지고 열매 맺어 마치여 가을을 이룬다(落花着實終秋成).”(다석어록) ‘이 집 저 놓’을 밑둥치로, 또 그런 밑둥치에서 자란 우듬지로 삼은 씨알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오직 깊은 속에서 산알 열매가 익어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속알살이’ 임자로 당당하게 걸어간다. 꾸밈에 미치면 하늘길이 안 보인다. 맨얼굴 ‘생얼(날 것 그대로)’에 빛살이 환하다. 다석은 말한다. 내 몸은 수레지만 내 정신은 속알이다. ‘속알’이란 덕(德)이란 한자의 옮김인데 창조적 지성 이란 말이다. 솟구쳐 올라 앞으로 나아가는 지성(知性)이 속알이다... 우리는 영원한 속알을 실은 수레지기로 자기 굿(나) 머리를 밝히고 나가면 된다.”라고. 하늘길 ‘이 집 저 놓’이야말로 땅을 바라는 손길에 하늘 바라는 눈길이 한꼴로 이어지는 거룩한 길이다. 늙은이는 2월에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라 했다. 일이룬데 붙어있지 않으오라.”로 풀었다. 77월에 공성이불처(功成而不處)라 했다. 일 이룬데서 지내지 안ᄒᆞ니,”로 풀었다. 다석은 세상에 머물러 묵는(住)다는 것은 실상은 몸뚱이만 묵는 것이지 나(얼)가 묵는 것이 아니다. 묵(住)는 것은 묶이(束)는 것이다. 몸이 묶이지 나(얼)는 자유다. 나(얼)에는 묵는다는 것은 없다. 상대적 존재인 몸이 묵(住)지 절대 존재인 나(얼)는 묵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 세상에서 응당히 묵지 않는 얼나로 살아야(應無所住而生其心) 한다. 머무를 것 없는 것이 참 생명인 얼이다.”라고 하였다. 77월은 하늘길은 그 활브ㅓ리는거 같을가. 높은것은 누르고, 낮인것은 들고, 넉넉ᄒᆞᆫ것은 드ᅟᅥᆯ고, 모자라는 것을 채운다. 하늘길은 남는걸 덜어다가 모자라는걸 채우는데. 사람의 길은 그러칠 않다. 모자라는걸 덜어서, 남음이 있는델 받드니,”로 시작한다. ‘하늘길’을 꿍꿍해야 한다. 그렇다고 ‘이 집 저 놓’이란 것이 꿍꿍으로 붙잡는 없꼴은 결코 아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며 마주하는 ‘오늘살이’가 하늘길이다. 땅에 새기는 하늘길이란 이야기다. 다석은 영원한 미래와 영원한 과거 사이에서 ‘이제 여기’라는 것이 접촉하고 있을 뿐이다. 지나가는 그 한 점 그것이 ‘이제 여기’인 것이다. 그 한 점이 영원이라는 미래를 향해 가고 있다. 이렇게 보면 산다는 것은 ‘이제 여기’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나. ‘이’에 하늘길이 있다. ‘이’에 땅길도 있다. 오직 ‘이’를 집어야 땅하늘이 한꼴로 길을 연다. 그러니 ‘이’를 사람 속에 줏대로 세워야 하리라. 그래서 다석도 디긋이란 딱딱한 땅을 딛고 사는 우리의 긋(나)을 말한다. 머리를 하늘에 두고 곧곧하게 땅을 딛고 반드시 서야 우리는 산다. 곧이 곧게 하늘을 그리워하는 것이 정신이다.”라고 한 것이다. 자기를 보는 이것이 정견(正見)이다. 자기를 보아야 한다. 자기를 알아야 한다. 자신의 참나(眞我)를 알게 하기 위하여 예수가 오신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내가 죽지 않는 생명임을 알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다. 내가 하늘에서 온 씨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도 씨요, 나도 씨다. 이 육체는 나가 아니다. 참나(眞我)를 실은 수레라고나 할까. 참나인 얼, 나는 보이지 않지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도 보이지 않지만 예수가 있다. 한아님도 보이지 않지만 한아님도 있다. 얼의 나는 보이지 않지만 얼의 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얼의 나는 예수의 얼의 나, 한아님의 얼의 나와 한 생명이다.”(다석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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