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높은 목표’보다 ‘실행 가능한 목표’…달라지는 기업 넷제로 전략 [칼럼] 펩시코가 새롭게 발표한 재생농업 목표/Pepsico
지난해 5월, 펩시코가 탄소중립 목표를 대대적으로 수정했습니다. 2021년 내걸었던 ‘2040년 넷제로’ 달성 시점을 2050년으로 10년 늦췄습니다. 2030년까지 Scope 1·2 배출량을 75% 줄이겠다던 목표도 새로운 기준연도를 적용해 50% 감축으로 다시 설정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반(反) ESG 움직임과 경기침체로 인해 글로벌 기업의 기후 목표가 후퇴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펩시코가 같은 날 발표한 다른 목표를 보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재생농업을 적용하겠다는 농지 규모는 기존 700만에이커에서 오히려 1000만에이커로 높였습니다. 2024년 기준 산림·토지·농업에서 발생하는 배출량은 펩시코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의 24%를 차지했고, 이 가운데 약 94%가 농산물 조달 과정에서 발생했습니다. 펩시코는 기존 Scope 3 목표도 산림·토지·농업과 에너지·산업 부문으로 나누고 각각 다른 감축목표를 세웠습니다. 한쪽에서는 탄소중립 목표를 낮췄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목표를 높인 셈입니다.
모든 기후 목표를 일괄적으로 낮춘 것이 아니라 실제 배출량이 어디에서 발생하는지 다시 살펴보고, 온실가스 배출량이 높은 핫스팟(Hotspot)을 파악한 후 자사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곳에 힘을 더 실었습니다.
최근 글로벌 기업들의 탄소중립 전략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보입니다. 처음 세운 목표를 그대로 끌고 가기보다 실제 감축 성과와 기술·인프라 여건을 다시 점검하고, 달성 가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목표와 실행계획을 현실적으로 재조정하는 ‘피봇(Pivot)’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2030년까지 4년…이제 목표보다 실행을 검증할 시간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기업이 얼마나 야심찬 지속가능성 목표를 수립했느냐가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판단하는 핵심 기준이었습니다.
2050년보다 2040년을 제시한 기업이 더 지속가능하다고 평가됐고, 감축률 역시 30%보다 50%를 제시한 목표가 더 높은 수준의 기후 대응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당시에는 탄소중립 중간목표 시점인 2030년까지의 시간도 충분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현재 2030년까지 남은 기간은 4년에 불과합니다. 몇 년 전에 발표한 목표와 실제 감축 실적을 비교하고, 당시 세웠던 계획이 현실에서 작동하는지 확인해야 하는 시점이 됐습니다.
실제 지난 7월, 글로벌 지속가능성 싱크탱크 콘퍼런스 보드(The Conference Board)가 S&P500 기업을 분석한 결과, 84%가 이미 기후 목표를 수립했습니다. 하지만 지속가능성 담당 임원 가운데 기후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확신한 비율은 24%에 불과했습니다. 특히 Scope 3 목표를 수립한 기업의 62%는 2021년 이후 배출량이 줄지 않거나 오히려 증가했습니다.
목표 수립은 쉽게 할수 있지만, 실제 감축 단계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기업들은 전력망의 재생에너지 비중이 빠르게 높아지고, 협력사들도 재생에너지 전환에 동참하며, 수소·탄소포집 같은 저탄소 기술의 가격과 공급 여건도 개선될 것이라는 전망을 바탕으로 중장기 목표를 수립했습니다. 실제 이행 과정에서는 이런 가정들이 계획대로 맞아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전력망 전환은 예상보다 더뎠고, 공급망의 감축 속도에도 차이가 컸으며, 일부 저탄소 기술은 여전히 높은 비용과 인프라 부족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2030년이 가까워지면서 기업들은 과거의 가정을 다시 점검하고, 이를 실제 투자계획과 기술 도입, 공급망 관리에 맞춰 조정해야 하는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목표를 재조정하는 방식은 기업마다 다릅니다. 기술과 인프라의 변화 속도를 반영해 감축경로를 다시 짜는 기업이 있는가 하면, 실제 배출구조를 다시 분석한 뒤 더 큰 감축 효과를 낼 수 있는 영역으로 관리의 중심을 옮기는 기업도 있습니다.
온실가스 배출의 88%가 제품 사용…월풀, 목표 하향했지만 핵심 배출원 관리 수준은 높여
월풀의 넷제로 전략 피봇 주요 내용/ChatGPT 생성 이미지
탄소중립 목표 조정이 가장 크게 드러나는 곳은 제조업입니다
일례로 지난 2021년, 월풀(Whirlpool)은 2030년까지 전 세계 30여 개의 제조공장과 대형 물류 시설에서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Scope 1&2 기준) 하지만 2025년 목표를 수정하면서 2030년 사업장 배출량 목표를 2021년 대비 65% 감축으로 변경했습니다. 사업장만 놓고 보면 분명 기존보다 목표 수준을 낮춘 셈입니다.
하지만 월풀의 전체 배출 구조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2024년 기준 월풀의 가치사슬 간접배출량 가운데 88%가 냉장고와 세탁기 등 판매한 제품을 소비자가 사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했습니다. 핵심 배출이 자사 운영가치사슬이 아니라 제품이 판매된 이후에 있었던 것입니다.
월풀은 목표를 수정하면서 이 배출 구조를 반영해 온실가스 관리범위를 오히려 넓혔습니다. 2030년까지 판매 제품 사용 단계의 배출량을 2021년 대비 25% 감축하겠다는 목표를 수립하고, 2050년에는 사업장뿐 아니라 제품 사용과 구매한 제품·서비스의 배출량까지 각각 90% 감축하는 장기목표를 새로 설정했습니다. 새 목표에는 이전보다 더 많은 사업장과 제품군도 포함했습니다.
실행의 중심에는 제품 설계가 있습니다. 월풀은 제품 전과정평가를 통해 주요 배출원을 파악하고, 가전제품의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것을 Scope 3 감축의 핵심 전략으로 두고 있습니다. 실제, 유럽연합(EU)도 제조업의 탄소 감축에 대한 핵심 요인으로 ‘제품설계’를 꼽고 있는데요. EU집행위원회는 순환 설계(Circular Design)를 통해 제품의 친환경성을 극대화할 경우, 환경영향이 최대 80%까지 줄어들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SBTi도 방향 틀었다…‘목표 설정’에서 ‘감축 이행’으로
SBTi는 2026-2030 전략을 통해 앞으로의 역할을 ‘목표 설정자’에서 ‘전환 파트너’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SBTi
과학기반 감축목표 이니셔티브(SBTi)도 최근 감축목표의 이행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SBTi는 2026~2030 전략에서 앞으로의 역할을 ‘목표 설정자’에서 ‘전환 파트너’로 확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기업의 기후대응 과제가 목표를 수립하는 것에서 이를 이행하는 단계로 넘어갔다는 판단에서입니다.
지난 6월 발표한 ‘기업 넷제로 표준(Corporate Net-Zero Standard) 2.0’에도 이런 변화가 반영됐습니다. 새 기준은 기업이 목표 달성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감축 수단을 동원하는 ‘최선의 노력(best-efforts)’ 원칙을 도입했습니다. 동시에 직접적인 감축이 어려울 경우에는 전력망이나 물류망, 공급망처럼 기업이 속한 공통 시스템에서 감축 수단을 찾고, 구조적인 한계가 있다면 업종 차원의 대응까지 확대하도록 했습니다.
예를 들어,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 자체를 바로 저탄소 전력으로 바꾸기 어렵다면 전력망 차원의 재생에너지 확대에 참여하고, 공급망을 직접 바꾸기 어렵다면 글로벌 이니셔티브에 참여에 공급망 전환을 지원하는 식입니다. 개별 기업이 모든 조건을 직접 통제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목표 미달의 이유로 남겨두지 않고 기업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를 단계적으로 넓히도록 한 것입니다.
SBTi 2.0은 목표와 실제 감축 실적 사이에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대신 어떤 감축 수단을 활용했고 어디에서 어려움이 발생했는지 투명하게 공개해야 합니다. 단순히 목표 숫자를 유지하는 것보다 실제로 어떤 감축 수단을 동원했고, 감축이 어려운 부분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를 함께 보겠다는 방향입니다
넷제로 목표 재조정, ESG 실무자는 무엇을 다시 봐야 하나
그동안 기업의 넷제로 전략을 볼 때 가장 먼저 확인했던 것은 목표연도와 감축률이었습니다. 정해진 기한 내에 얼마만큼의 온실가스를 감축하느냐가 기업의 기후변화대응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가장 쉬운 기준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그 숫자 뒤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기업의 온실가스는 어디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는지, 그 중 회사가 직접 의사결정을 내려 바꿀 수 있는 부분은 어디인지, 협력사와의 계약이나 구매력을 통해 움직일 수 있는 영역은 어디인지, 기술과 인프라 등 외부환경이 갖춰져야 감축할 수 있는 부분은 어디인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특히 제조업에서는 이러한 구분이 더 중요합니다. 공장 설비와 생산공정은 한번 투자하면 오랫동안 사용합니다. 미래에 수소가 저렴해질 것이라는 전망만으로 지금 수천억원짜리 설비투자를 결정하기도 어렵고, 반대로 신기술이 개발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결국 2030년까지 달성해야 할 단기 과제와 2040~2050년을 위해 장기적으로 준비해야 할 감축 계획을 구분해서 관리해야 합니다.
목표를 수정한다면 설명도 그만큼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왜 처음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는지, 어떤 전제가 달라졌는지, 수정된 목표는 어떤 투자와 기술을 토대로 계산했는지 보여줘야 합니다. 목표를 낮춘 만큼 실행계획의 구체성은 더 높아져야하는 것입니다.
목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언제나 가장 좋은 선택일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목표를 낮췄다는 이유만으로 현실적인 전략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넷제로 피봇의 핵심은 목표를 낮추는 데 있지 않습니다. 목표를 세울 당시의 가정을 실제 데이터와 사업 여건으로 다시 검증하고, 기업의 기후 책임을 명확히 한 상태에서 실제로 감축이 가능한 부분에 투자와 실행력을 집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임팩트온 송선우 리서치센터장
임팩트온 송선우 리서치센터장은 분석 기사를 통해 ESG 공시, 프레임워크, 트렌드 등 글로벌 ESG 주요 현안에 대한 인사이트를 제공한다. 네이버의 ‘E커머스 ESG전략 사내 세미나’, SK경영경제연구소의 ‘탄소중립 사례연구’, 현대모비스의 해외법인 ESG 교육커리큘럼 등 ESG 관련 리서치와 국제 표준 분석 등의 연구작업도 함께 참여했다. 미국 애리조나주립대학교에서 지속가능경영과 재생에너지 분야를 공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