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어지는 미국 패권의 그늘 속 한국의 선택 [국제] 2026년 9월 하순 워싱턴과 뉴욕에서 잇달아 펼쳐진 한국 미국 중국간 정상외교는 재편되는 국제정세의 본질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11년 만에 미국을 국빈 방문하고 3시간 넘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해 ‘건설적 전략 안정 관계’를 선언했다. 이에 비해 한미 정상회담은 유엔총회를 계기로 약 30분간 전격적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회담 시간과 무관하게 핵추진잠수함, 원자력 협력, 조선·MRO, 전작권 전환 등 한미관계의 미래를 좌우할 핵심 사안들이 테이블에 올랐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워싱턴 실무협의까지 매듭지어졌다.
미·중 정상회담과 한미 정상회담은 분리된 사건이 아니다. 미국이 세계질서를 관리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있다는 구조적 변화가 두 정상회담의 기저를 관통한다. 미국은 세계 최강의 경제·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으나, 세계 안보공공재를 과거처럼 일방적으로 제공할 수 없는 한계에 직면했다. 두 정상회담을 관통하는 흐름을 읽어내는 핵심 렌즈가 바로 니얼 퍼거슨의 ‘퍼거슨 한계(Ferguson Limit)’와 레이 달리오의 ‘거대 부채 사이클(Big Debt Cycle)’이다.
레드 카펫 위에 부인들과 함께 선 미국과 중국 정상들. 이코노미스트 9월 25일
미국 패권의 구조적 제약: 재정과 국채 공급의 한계
퍼거슨은 2025년 발표한 논문 「퍼거슨의 법칙(Ferguson’s Law)」을 통해 강대국의 순이자비용이 국방비를 추월하는 지점을 ‘퍼거슨 한계’로 정의했다. 부채이자 상환 재원이 군사력 유지 비용을 넘어서는 순간 국가는 전략적 선택의 한계에 봉착한다. 미국은 2024년 이미 이 임계점을 통과했다.( 미국 패권의 시대는 저무는가 , 조성렬, 민들레, 2025.11.4) 미 의회예산국(CBO) 전망치 역시 2026년 미국의 순이자지출이 1조 달러를 돌파하는 반면, 국방지출은 약 9180억 달러에 머물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자 비용의 역전은 과거 제국들이 겪었던 재정적 잉여의 고갈을 의미하며, 늘어난 순이자지출은 예산 편성에서 경직성 경비로 작동해 실질적 국방비 증액을 가로막고 첨단 전력 획득이나 해외 전개 비용을 잠식한다.
세계 최대 헤지펀드 브리지워터를 이끈 레이 달리오는 2026년 8월 21일 발표한 특별기고문 「국가는 어떻게 파산하는가: 거대 부채 사이클의 동학(How Countries Go Broke: The Dynamics of the Big Debt Cycle)」에서 퍼거슨의 경고를 금융공학적 메커니즘으로 입증했다. 달리오는 대제국의 흥망성쇠를 관통하는 거대 부채 사이클을 분석하며, 미국의 부채 누적이 1단계(부채의 지속적 팽창)를 지나 2단계인 ‘이자비용 잠식 한계’에 봉착했다고 진단했다. 미국 정부가 천문학적인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국채 발행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고 있지만, 해외 중앙은행을 비롯한 글로벌 투자자들의 수급 여력은 오히려 둔화되고 있다. 특히 최대 채권국인 일본 등이 자국 통화 방어와 포트폴리오 다변화를 이유로 미 국채 매입을 줄이면서, 국채시장은 만성적인 공급 과잉과 장기금리 상승 압력에 직면했다.
달리오 분석의 핵심은 이 부채 수급 불균형이 단순한 금융 불안을 넘어 제국의 ‘정책 실행력 마비’로 직결된다는 지적이다. 민간과 해외에서 소화되지 못한 미 국채로 인해 금리가 급등하고 이자 부담이 폭증하면,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결국 미 연방준비제도(Fed, 연준)이 발권력을 동원해 국채를 직접 인수하는 3단계, 즉 ‘부채의 화폐화’뿐이다. 그러나 이는 달러 가치의 급격한 침식과 통화 패권의 균열을 초래한다. 결국 ‘퍼거슨 한계’와 ‘달리오의 부채 사이클’이 가리키는 종착지는 명확하다. 파국적 통화 위기를 피하기 위해 워싱턴은 대외 군사개입과 동맹 지원책을 유지할 재정적 기동 공간을 축소하고, 글로벌 안보공공재 공급을 선택적으로 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중 정상회담 합의의 본질: ‘퍼거슨 한계’ 탈피를 위한 비용 통제
이번 9월 미·중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이 도출한 합의 내용은 철저히 상호 충돌방지와 현상유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양국은 백악관이 제시한 ‘존중·공평·상호주의’ 원칙을 수용하며 공식적으로 ‘건설적 전략 안정 관계’ 수립을 선언했다. 핵심 합의사항으로는 대만해협을 비롯한 주요 분쟁해역에서 우발적 군사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군사당국 간 고위급 핫라인 및 작전급 대화채널의 전면 복원, 첨단기술 및 공급망 분쟁의 무제한 확산을 방지할 정례 실무메커니즘의 가동, 그리고 기후·마약·인공지능(AI) 군사안보 가이드라인 등 다자적 현안에서의 조건부 협력채널 유지가 포함되었다.
재정과 부채 사이클의 관점에서 볼 때, 이 회담의 본질은 ‘퍼거슨 한계와 부채 사이클 3단계(부채의 화폐화)의 덫’을 피하려는 미국의 필사적인 비용 통제형 패권 관리다. 미국은 유럽·중동·인도태평양이라는 3대 전략 축에 동시 개입하면서 국방비 지출을 감당할 수 없는 임계치에 도달했다. 이 상황에서 중국과의 군비경쟁이나 군사적 대치 비용까지 전면적으로 짊어지는 것은 미 국채 시장의 붕괴와 달러화 파국을 재촉하는 길이다. 따라서 트럼프 행정부의 1차 목표는 중국과의 충돌을 막을 안전판(Guardrails)을 세워 고비용 군사 대치를 저비용 관리형 영역으로 전환하고, 대외 군사비 지출을 억제해 재정적 질식을 면하는 데 있다.
이러한 미·중 간 합의와 전략 변화는 한국에 중대한 위기이자 기회이다. 미국이 재정 한계로 인해 저비용 관리 국면에 진입한 만큼, 한국이 진영 논리의 선봉에 서서 대중 전선의 총대를 메는 ‘외교적 연루(Entanglement)’의 위험을 방지할 수 있는 명분과 공간이 열렸다는 점에서는 기회다. 하지만 미국이 부채 압박을 덜기 위해 동맹국에 방위 분담과 군사적 역할을 떠넘기는 과정에서, 미·중의 타협에 밀려 한반도 현안이 종속변수로 전락하는 ‘한반도 패싱’의 위험성 또한 엄중해졌다는 점에서는 위기다.
이에 대응하는 한국의 전략은 명확하다. 미국이 비용 통제를 위해 중국과의 관계를 안정화하는 흐름을 포착하여, 한국 역시 독자적인 대중 전략대화 채널을 선제적으로 복원해야 한다. 미·중이 관리 모드로 들어선 틈을 타 공급망 리스크를 완화하고, 북·러 밀착을 견제하는 데 중국의 건설적 역할을 유도하는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해야 한다. 미·중 갈등의 종속적 하위 파트너에 머물지 않고, 미국이 중국과 대화하듯 한국도 중국과의 외교적 공간을 넓히는 독자적인 행보가 필수적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8월 20일 5년만에 재개된 국가안보실장(위성락)-중앙외사공작위 판공실 주임(왕이) 간의 고위급 전략대화는 큰 의미를 갖는다.
20일 회담에 앞서 사진기자단을 위해 악수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는 위성락 실장과 왕이 주임. 2026.8.20
한미관계의 전환: ‘일방적 보호’에서 ‘능력과 역량의 거래’로
미국이 부채 사이클의 압박 속에서 해외 국방비 지출을 억제하고 동맹국의 역량을 빌려 패권을 유지하려는 구조는, 역설적으로 한국에 전례 없는 협상 레버리지를 안겨준다. 미국은 자국의 쇠락한 제조·방산 기반을 메우기 위해 한국의 산업역량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은 함정 건조 및 MRO(유지·보수·정비) 능력이 심각하게 부족하고, 원자력 공급망에서도 구조적 공백을 겪고 있다. 반면 한국은 세계 정상급 조선 역량과 원전 시공·운영 기술, 첨단 정밀제조 역량을 완비하고 있다. 과거 미국이 안보를 일방적으로 제공하고 한국이 비용을 보전하던 수동적 관계는 끝났다. 이제는 미국의 전략자산과 한국의 핵심 제조·산업 역량이 대등하게 맞물리는 ‘능력과 역량의 거래’가 한미관계의 본류가 되어야 한다.
한국의 대미 조선 투자와 MRO 기여를 지렛대 삼아, 미국으로부터 핵추진잠수함 건조 지원, 민수·해군 원자력 프로그램 협력, 우라늄 농축 및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절차 지원 등을 이끌어내는 상호 교환구조가 가시화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국의 재정적·산업적 취약점이 한국의 안보적 협상력을 극대화하는 자산이 되고 있다.
워싱턴 실무협의가 일단락된 현시점의 핵심 과제는 이 기회의 창이 닫히기 전에 합의된 틀을 실질적인 전략자산으로 제도화하는 일이다. 핵추진잠수함은 선체 설계, 추진체계 기술 표준, 20% 미만 저농축 우라늄(LEU)의 안정적 공급선을 구속력 있는 협정으로 확정지어야 한다. 원자력 분야 역시 평화적 농축과 파이로프로세싱 등 재처리 기술의 독자적 운용 권한을 명문화해 에너지 및 핵연료 안보를 매듭지어야 한다. 아울러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은 한국군 주도의 연합방위체제를 완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재래식 전력은 한국군이 완전히 주도하고 미국은 확장억제와 전략자산을 제공하는 균형 잡힌 역할 분담이 핵심이다.
다원 외교 전략 확립과 자강평화 역량 확보
이제 한국이 나아가야 할 길은 명확하다. 한미관계를 안보의 기본축으로 확고히 유지하되, 미·중 정상회담이 열어놓은 완충 공간을 활용해 대중·대일 외교의 유연성을 극대화해야 한다.
조성렬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초빙교수
중국과의 고위급 전략대화를 정례화해 공급망 리스크와 한반도 긴장을 완화하고 북·러 밀착을 견제하는 지렛대로 활용해야 하며, 일본과는 과거사 현안과 실리적 안보 협력을 분리 대응하는 투트랙 기조를 다져야 한다. 미·중·일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당하는 처지를 벗어나, 각국이 필요로 하는 우리의 산업·군사적 역량을 바탕으로 외교적 기동 공간을 넓히는 것이 중견국 한국의 실질적인 생존법이다.
안보를 일방적으로 위탁하던 시대는 끝났다. 세계 안보 공공재를 단독으로 떠받칠 수 없게 된 미국은 상대국의 전략적·산업적 가치에 기댈 수밖에 없고, 이는 한국 외교에 전례 없는 자율적 공간을 제공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미 합의의 이행 과정에서 우리의 산업 역량을 독자적 억제력과 안보 주권 확대로 냉정하게 치환해 내는 실행력이다. 확고한 자강평화 역량을 바탕으로 전략적 패키지 딜을 최종 완결 짓는 실용적 결단이 요구되는 시점이다.조성렬 전략노트 insscs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