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의 험난한 여정과 독립 자금 실체 [사람들] 1947년 3월 김구가 국가재건의 인재 양성을 위해 서울 원효로 원효사에 세운 건국실천원양성소 1기 수업 기념사진. 명예 소장은 이승만, 소장 김구, 이사장은 장형이 맡았다.
독립운동을 하는 데는 의외로 돈이 많이 듭니다. 개인적인 삶을 유지해야 하고, 투쟁하는 데도 많은 경비가 필요합니다. 잔혹한 일제 치하에서 살아남으려면 자금이 꽤 많이 필요하고, 나라를 되찾겠다는 뜻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게 너무 많았습니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김구는 경무국장으로 시작했습니다. 경무국장이란 임정 경비원들의 책임자였지만, 김구는 밀정들을 잡고 일제에 전향하는 사람들을 차단하고, 비리자들의 수사와 재판, 그리고 임정의 길·흉사까지 도맡아서 처리했습니다. 처음 출범하는 조직이라 체계가 잡혀 있지 않았지만, 김구는 밀정에 대한 사형 집행과 사망자의 염습까지 험한 일을 맡았습니다. 그래서 임정에 엄정한 규율을 세웠고, 일제가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소박한 질문 하나를 던져볼 수 있습니다. 김구는 무슨 돈으로 살았을까? 많은 일을 도맡아 하려면 돈도 그만큼 필요했을 텐데, 돈을 어떻게 충당했을까?
## 1. 독립운동에는 의외로 많은 돈이 든다
상해 임정이 성금을 기대할 수 있는 중요한 곳이 미주와 하와이의 동포들이었습니다. 재미 한인 독립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임정 초기에 모금을 통해 모은 돈은 10만 7000여 달러였고, 이중 임정에 보낸 돈은 4만6454달러였습니다. 1919년 9월 이승만이 별도로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해 모은 돈은 14만9600여 달러로 이중 임정에 보낸 돈은 1만6000여 달러에 그쳤습니다. 이승만은 미국과 유럽에서 벌이는 외교·선전사업에도 돈이 필요하다고 했고, 상해 임정의 불만은 컸습니다.
그런 가운데 터져 나온 것이 김립 피랍사건입니다. 김립 사건은 1922년 2월, 경무국 요원인 오면직, 노종균 등이 임정 국무원 비서장 출신의 김립을 상해 거리에서 암살한 사건입니다. 발단은 1920년 국무총리 이동휘와 한인사회당이 한형권을 모스크바에 보내 레닌 정부로부터 독립 지원금(200만 루블 중 1차분 40만 루블)을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이 자금이 임정의 공금인지, 아니면 자금을 직접 받아온 한인사회당(고려공산당 상하이파)의 당비인지를 두고 임정 내에서 극심한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1. 레닌이 보낸 독립운동 자금의 소유권과 사용처를 두고 이르쿠츠크파 및 임정 민족주의 계열과 갈등을 빚은 한인사회당 멤버들. 공산주의 이념 그 자체보다는 조선 독립을 위한 방편이자 수단으로 사회주의와 소련의 지원을 활용하려 했던 민족주의 성향이 짙은 사회주의 계열이었다. 앞줄 왼쪽부터 신원미상, 임정 국무총리이자 한인사회당 당수 이동휘, 코민테른 파견대표 박진순, 선전부장 김립. 뒷줄은 모스크바 자금 결산 책임 김철수, 역사가 계봉우, 신원 미상.
김립을 비롯한 한인사회당 측은 이 자금을 임정 정식 회계에 편입하지 않고, 자신들의 당비 및 사회주의 운동 자금으로 사용했습니다. 이에 임시정부는 신규식, 이동녕, 노백린, 김인전, 이시영, 손정도 등의 명의로 이동휘와 김립을 성토하는 포고문을 발표했습니다. 김립은 이동휘와 서로 결탁하여 마침내 국금을 횡령하여 사낭(私囊, 개인 주머니)을 살찌우고 제 무리들을 숙취하여 공산주의운동의 미명 하에 숨어서 간모를 하고 있어 그 죄는 극형에 처할 만하다.” 이 성명이 발표된 직후 경무국 요원들이 김립을 추격하여 살해했습니다.
이 사건은 김립을 비난한 『백범일지』를 보거나 김철수의 회고록, 암살자들의 소속 관계를 따져볼 때 김구의 지시설이 상당한 개연성을 갖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김구가 비판을 받는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김구가 직접적으로 암살을 지시했다는 문서적 증거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훗날 코민테른 문서(얀손의 감사 보고서)는 레닌이 이 돈을 한인사회당에 지원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독립운동 내부의 좌우 대립과 자금 통제권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이 폭력적 암살로 이어진 사례입니다. 사료 간 견해가 여전히 엇갈리고 있으며, 김립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도 못한 상태입니다.
1920년대 후반에 가면 임정의 형편은 더욱 어려워집니다. 청사의 한 달 집세는 30원이었고, 심부름하는 사람들의 월급은 15~20원이었습니다. 정부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돈이었지만 임정엔 그 돈조차 없었습니다. 집세가 밀리자 집주인과 여러 차례 송사까지 벌여야 했습니다. 임정은 초기 사람들이 몰려들던 때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초기 지도자들이 대부분 상해를 떠났고, 독립운동 세력 내부의 갈등도 심했습니다. 1926년 말에는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마저 폐간됐습니다.
임정으로서는 가장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국무령 자리를 맡으려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홍진이 가까스로 내각을 구성했다가 몇 달 만인 1926년 12월 총사직했습니다. 이동녕의 끈질긴 설득 끝에 결국 김구가 국무령을 맡았습니다. 김구의 모친은 상해에서 굶어 죽겠다며 두 손자를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부인을 잃은 김구는 홀로 임정 청사에서 잠을 자고, 돈을 버는 교포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밥을 얻어먹었습니다.
그런 어려움을 거치며 한인애국단이 만들어졌고, 이봉창 의거가 계획됐습니다. 임정의 특무부대였던 한인애국단은 철저한 비밀 결사였기 때문에 창설 당시 전체 예산 규모가 장부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금은 사탕수수밭과 농장에서 일하던 미주 지역 한인 동포들이 보낸 자금이 핵심 기반이 되었습니다.
김구가 이봉창 의거 직전 확보한 가용 총액은 중국 대양 약 4000원으로 추정됩니다. 그가 추진한 ‘편지 정책’에 감동된 교포들이 피땀 흘려 모은 돈을 아낌없이 보냈습니다. 이중 이봉창에게 도쿄 출발 여비로 300엔, 도쿄 도착 후 1차 전보 송금액 100엔, 2차 전보 송금액 200엔을 집행했습니다. 그리고 상해 병공창 김홍일 장군의 협조로 특수 수류탄 2개를 제작·테스트하고 현지로 은닉 수송하는 데 중국 은원 수백 원을 집행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 시에는 윤 의사에게 전달한 거사비 중국 은원 200원(5원권 지폐 40매), 상해 병공창이 물통형·도시락형 특수 폭탄 2개를 설계·제작하고 안전 테스트하는 데 중국 은원 약 500~600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홍구공원 사전 답사, 일본군 기념행사 정보 수집, 현장 동선 확보 등을 위해 중국 은원 약 100~200원이 추가로 소요되었습니다.
윤봉길 의거의 직접 집행액은 중국 은원 약 1000원 수준입니다. 이봉창 의거 때보다 자금 사정이 한결 여유로워진 덕분에 폭탄의 정교함과 사전 공작의 완성도를 한층 높일 수 있었으며, 남은 후원금은 의거 직후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탈출하여 이동하는 재정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김구는 미주와 하와이 동포들이 보낸 거사 자금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두꺼운 광목 전대를 만들어 돈을 넣고 꿰맨 뒤 허리에 차고 생활했습니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수색이나 피신 상황에 대비한 것으로, 『백범일지』 및 당시 상해 독립운동가들은 백범이 이렇게 말했다고 증언합니다. 이 돈은 내 목숨보다 무겁다. 내가 죽기 전에는 단 한 푼도 헛되이 새어나가지 않을 것이다.”
## 2. 구걸하지 않고 당당하게 돈을 요구하다
중경 시절에 이르면 김구가 다루는 돈의 단위는 크게 달라집니다. 중일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중국의 물가는 무섭게 올랐습니다. 중경에는 임정 요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가족들이 있었고, 중국 각지에서 찾아온 한인들이 있었습니다.
1941년 12월부터 중국 국민당 정부는 임시정부 측에 매달 6만 원을 정기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중경의 전시 인플레이션이 너무 심했습니다. 처음에 큰돈이었던 6만 원으로는 수백 명의 생활과 임시정부의 활동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김구는 직접 돈을 조달하러 다녔습니다. 1942년 6월에는 중국 국민당 중앙조직부장 주자화(朱家驊)를 통해 중국 정부에 미화 50만 달러의 신용차관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돈을 정중하게 요구했지만,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이 먼저 한국 독립운동을 실질적으로 원조하면 다른 연합국도 뒤따를 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중국 재정부장 쿵샹시(孔祥熙)는 중국도 전쟁으로 외화가 절박하다며 난색을 보였습니다.
50만 달러 차관이 무산되자 김구는 정기 지원금을 20만 원으로 올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의 활동비뿐 아니라 중경에 거주하던 한인교포 약 340명의 생활비도 포함된 액수입니다. 중국 측은 1943년 6월부터 월 20만 원을 지급했고, 전시 물가가 계속 폭등하면서 지원 규모도 다시 커졌습니다. 1944년에는 수십만 원에서 100만 원 단위로, 전쟁 말기에는 수백만 원 단위로 올라갔습니다.
1945년 초 탈출 학병 50여 명이 중경에 도착했을 때 중국 행정원은 이들을 위한 구제비 200만 원을 지급했습니다. 계속 지원을 요청하니까 손 벌리는 데 이골이 난 것처럼 보이지만, 김구는 주저하지 않았고 당당하게 요구했습니다. 한국인이 일제와 투쟁하는 것은 중국과 인류 전체의 평화를 위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라는 확신과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45년 11월 김구가 환국했을 때도 돈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경교장은 김구 개인의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환영위원회에서 광산업으로 큰돈을 번 최창학에게 제공하도록 한 집입니다.
김구는 돈에 관해 엄격했습니다. 어느 날 경교장 2층에서 김구의 큰 호통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래층에 있던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아무도 손님이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잠시 뒤 김석황이 한 사람을 데리고 옆문으로 황급히 빠져나갔습니다. 그 사람은 박흥식이었습니다.
박흥식은 화신백화점 등을 경영했던 거부였지만 일제강점기 전시체제에 협력한 대표적인 친일 기업인으로 지목되던 사람이었습니다. 김석황이 박흥식을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경교장 2층으로 데리고 올라갔고, 박흥식은 정치자금으로 써달라며 돈보따리를 내놓았습니다. 김구는 돈을 받지 않고 호통을 쳤습니다. 김석황은 박흥식을 데리고 서둘러 나갔습니다. 백범의 비서 선우진의 회고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1946년에는 상공회의소 부회장 강익하가 경교장을 찾아와 정치자금으로 쓰라며 수표로 300만 원을 내놓았습니다. 김구는 이것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승만 박사에게 갖다 드리시오.” 강익하는 300만 원은 상공회의소에서 김구 몫으로 결정한 돈이고, 이미 이승만에게는 500만 원을 보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래도 김구는 받지 않고, 이승만에게 드리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김구가 이승만에게 돈을 요구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중국에서 돌아온 임시정부 요인들 가운데 일부는 경교장 주변에 집을 얻어 살았고, 일부는 한미호텔에 머물렀습니다. 한미호텔에 있던 임정 요인들이 점심을 굶는 날이 이어졌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이승만에게 도움을 청해보라고 했습니다. 김구는 마지못해 돈암장으로 이승만을 찾아갔다가 이승만이 난색을 보이자 그냥 돌아왔습니다.
몇 주 뒤 조완구와 엄항섭이 다시 사정을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굶고 있으니 돈이 필요했습니다. 김구가 다시 이승만을 찾아갔습니다. 이번에는 30만 원을 얻어왔습니다. 그 돈은 한미호텔에 머물던 임정 요인들의 경비로 사용됐습니다. 이승만은 입을 실룩거리며 말했다고 합니다. 남들은 모두 내게 돈을 주는데, 백범은 내게서 돈을 가져가는구먼.
그러나 임정의 재정난이 심화하면서 현실적인 타협의 그늘이 드리워진 것도 사실입니다. 대표적인 친일 단체인 대화숙(大和塾)에 관여했던 신흥우를 비롯해 일제 강점기에 부를 축적한 지주와 대자본가들이 임시정부 후원회를 통해 정치자금을 제공했고, 당장의 정부 운영과 정당 활동이 시급했던 임정 측은 이를 수용했습니다. 박흥식의 자금 역시 후원회라는 공식적 창구를 거쳐 임정의 정치 활동비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이어졌습니다.
이 딜레마는 김구 개인보다는 해방 정국의 구조적 한계에 가깝다고 할 것입니다. 임정 출신 인사들은 미군정에 의해 집중적 견제를 받았습니다. 정치자금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이승만처럼 미군정과 유착하거나, 친일 자본가의 지원 없이 정치 활동을 유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김구의 돈 문제는 독립운동가의 청렴과 정치인의 현실 사이에서 벌어지는 근본적 긴장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나 독립운동 상징이었던 김구가 친일 세력의 자금을 받음으로써 독립운동의 엄정함을 약화시켰다는 비판은 결코 무게가 가볍지 않습니다.
## 3. 독립운동가의 청렴과 정치인의 현실 사이
1946년 6월 무렵까지는 임정 환영위원회에서 경교장의 살림을 지원했지만, 그 지원이 끊어진 뒤부터 형편이 어려워졌습니다. 경교장은 큰 석조 건물이어서 겨울이면 몹시 추웠는데, 불을 많이 땔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김구는 그해 겨울을 이길호의 집에서 지냈습니다. 의사인 이 씨는 재정 형편이 좋았습니다. 장준하를 통해 백범을 알게 된 이 씨는 혜화동 따뜻한 자신의 집에 모시겠다고 해서 한동안 신세를 졌습니다.
경교장 살림이 어려워도 백범은 그런 사정을 잘 몰랐습니다. 생활비가 부족해 경교장 식구들은 보리밥을 먹어야 했습니다. 백범에게는 상을 따로 봐서 2층에 올려드리고, 나머지는 식당에서 보리밥을 먹었습니다. 어느 날 백범이 식당에 내려와 사람들이 보리밥을 먹는 것을 보고는 왜 보리밥을 먹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보리밥을 좋아한다”고 답하자, 백범이 말했습니다. 그러면 나도 내일부터 함께 보리밥을 먹겠다.” 그러면 불편해서 안 된다고 했지만 아니야, 나도 같이 먹겠소”라고 해서 한동안 모두 식당에서 보리밥을 먹었습니다.
김구가 평생 관계했던 돈 가운데 가장 단위가 큰 것은 환국 무렵 중국 측이 마련한 미화 20만 달러입니다. 1945년 11월 임정 요인들이 중국을 떠날 무렵 장개석은 한국 독립운동 세력의 귀국 이후 활동을 돕기 위해 20만 달러를 지급했습니다. 선우진과 김신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중 10만 달러는 중국에 남아 청산 사무를 담당할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의 운영비 등으로 현지에서 소비되었고, 나머지 10만 달러는 미군정의 검열 때문에 한국으로 가져오지 못하고 미국 은행 쪽에 보관했습니다.
1947년 미국 은행에 보관한 돈을 찾는 과정에서 주한 중국 총영사 유어만(劉馭萬, 류위완)이 등장합니다. 유어만이 10만 달러를 찾아와 김구에게 연락했습니다. 그런데 김구는 그 돈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고 선우진은 회고합니다. 김구는 이승만에게 전화를 걸어 그 돈을 받아 쓰라고 했습니다. 이승만은 그날 오후 서둘러 유어만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유어만은 이승만에게 주는 것은 거절했습니다. 장개석이 김구에게 전달하도록 한 돈이므로 자신은 김구에게 전달할 의무밖에 없다는 취지였습니다. 김구가 받은 뒤 이승만에게 주는 것은 김구가 결정할 일이지만, 자신이 직접 이승만에게 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이 임정 요인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조완구와 엄항섭 등은 김구가 이 돈을 이승만에게 넘기는 데 반대했습니다. 결국 김구 측에서 돈을 받아 관리하게 됐습니다. 그 돈은 한미호텔에 머물던 임정 요인들의 생활비, 『백범일지』 출판 비용, 차량 구입비, 실종된 안공근 가족과 김좌진의 가족 등 독립운동가 유족 지원비 등으로 사용됐다고 합니다.
## 4. 김구가 남긴 재산은 얼마?
1948년 겨울 서울은 추웠습니다. 2차대전과 해방, 귀환과 월남으로 인구가 몰려든 서울 곳곳에는 집 없는 사람들이 천막과 판잣집에서 겨울을 나고 있었습니다. 염리동, 이촌동, 금호동, 숭인동, 장충단, 청계천 주변에는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김구의 어록을 보면 겨울을 지내는 동안에 서울 안에서만 강시(길거리의 시체)가 61명이고, 행려병사자가 1월 한 달 동안에만 111명이다”라고 애통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3. 1949년 1월 강제 동원되거나 피난 갔다가 해방 후 빈손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살던 서울 금호동 전재민(戰災民) 주거지역에 세운 백범학원 개원 기념식
김구는 그때 90만 원을 내놓았습니다. 이 돈은 어머니 곽낙원과 아내 최준례, 장남 김인의 유해를 중국에서 이장하는 과정에서 들어온 부의금, 차남 김신의 혼례 때 받은 축의금을 모은 것입니다. 김구는 그것을 가족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돈으로 백범학원을 세웠습니다. 1949년 2월 1일 백범학원 개교식이 열렸습니다. 학생은 470명이었습니다.
그는 이촌동에서 빈민을 돌보던 권연호 목사에게도 20만 원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정작 자기 이름으로 집 한 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아들 김신은 경교장을 비워줘야 했습니다. 김신에게는 아버지의 영정을 모셔갈 집조차 없었습니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유어만이 자신은 UN 대사로 간다면서 살고 있던 충정로 2가의 ‘금화장’을 사용하라고 내주었습니다.
금화장은 정부 귀속 재산인 적산가옥 중에서도 규모가 크고 관리가 잘 된 집으로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비롯해 김용우 전 국방부 장관 등 당시 정계의 유력 인사들이 눈독을 들였다고 합니다.
김구는 마포 염리동에도 자신의 아명 ‘창암’(昌巖)을 딴 창암공민학교를 세웠습니다. 1949년 3월 14일 개교했습니다. 학생은 350명가량이었습니다. 김구는 학교의 장래를 걱정했습니다. 학교 관계자에게 자신이 죽고 나면 재정이 걱정이라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공민학교에는 오르간도 없었습니다. 김구는 오르간을 하나 마련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1949년 6월 26일 일요일, 학교 책임교원 강영희에게 낮 12시까지 경교장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오르간을 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4. 1949년 3월 극빈층들이 살던 서울 염리동 천막촌에 세운 창암공민학교 개원 기념식
강영희는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었습니다. 경교장 가까이에 도착했을 때 총성이 들렸습니다. 김구가 안두희의 총탄을 맞은 것입니다. 김구는 끝내 창암공민학교에 오르간을 사주지 못했습니다.
백범은 학교를 세우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이 돈은 내 것이 아니다. 나는 사랑하는 여러 친구의 심부름을 한 것뿐이다. 공덕은 전부 그분들의 것이다. 적은 돈을 나누려 하니 분배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임순만 언론인 ysm@mindl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