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따라·민중음악 노래패 연대로 탄생한 ‘공장의 불빛’ [사람들] 1978년 여름, 연립주택 공사장에서 막노동할 때였다. 한 고교 선배가 찾아왔다. 김민기는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주변의 이야기를 모아보면 고교 선배 신동수였다. 1970년대 서울대 운동권의 ‘당수’로 통하던 인물이었다. 모를 리 없었다. 만약의 사태를 위해 잊을 건 잊고 기억할 것만 기억하는 김민기였고, 게다가 드러나지 않게 ‘암약’하던 신동수였기에 선배를 위해 기억에서 지웠을 수는 있겠다.
그날 이런 대화가 오간 것으로, 김민기는 기억했다.
요샌 노래 안 만드나?”
그딴 거 이제 관심 없어요.”
그냥 던져보는 물음이 아니었다. 신동수는 김민기가 짊어지고 살아가는 ‘마음의 빚’을 잘 알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막노동도 그 빚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공장 다니던 시절) 생각 안 나?”
아니나 다를까, ‘그때’ 이야기를 꺼내자, 김민기의 마음이 흔들렸다.
2022년 11월 서울 창신동 뭐든지소극장에서 무대에 오른 공장의 불빛 공연 장면. 사진출처:국민일보(아트브릿지 제공)
김민기는 대학 시절 야학도 했고, 제대하고는 비록 창고 관리직이긴 했지만, 공장에 딸린 사무실에서 노동자들과 엉켜 지냈다. 점심 자투리 시간엔 따돌림과 피로에 찌든 어린 누이뻘의 노동자와 함께 공장 마당에 둘러앉아 기타 치며 노래하거나 노래를 불러 주었다. 공부에 목마른 이들을 위해선 새벽마다 영어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가난 때문에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는 동거 노동자들의 합동 결혼식을 주선하고, 결혼식 축가 ‘상록수’를 지어 그들 앞에서 불렀다. 열악한 근로 환경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것에 가슴 아파 했고, 다치고 병들어 떠나는 이들을 생각하며 눈물짓고는 했다.
‘기관’의 방해로 1년여 만에 공장을 떠나야 했지만, 함께 근무했던 공장 노동자를 생각하면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앞섰다. 김민기는 선배가 말하지 않아도 무엇을 요청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1978년 2월 21일 동일방직에서 전대미문의 똥물 투척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여성 노동자들이 똥물을 뒤집어쓴 모습을 사진관 주인 이기복씨가 촬영해 역사의 기록으로 남겼다. 공장의 불빛은 이 사건을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사진 출처:시사인(동일방직 복직 투쟁위원회 제공 )
신동수에 앞서 한국교회 사회선교협의회(‘사선협’)는 김민기에게 작곡을 부탁했다. ‘사선협’은 도시빈민, 노동자, 농민의 권리를 찾기 위해 사회운동에 뛰어든 기독교의 여러 단체가 모여서 결성한 단체였다. 가톨릭농민회, 가톨릭노동청년회 등 가톨릭의 6개 단체, 개신교의 도시산업선교회(‘도산’) 등 13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었다. 당시 초미의 관심사는 ‘똥물 투척 사건’으로 노동 탄압의 민낯을 드러낸 동일방직 노동자에 대한 전대미문의 폭력 사건이었다.
언제는 안 그랬을까마는, 유신체제는 말기로 갈수록 사용자 편향이 심했다. 민심 이반이 가팔라지는 가운데 믿을 자는 똘똘 뭉친 ‘권력’과 ‘돈’의 카르텔밖에 없었다. 사용자들이 가장 귀찮아하고 또 저지하려던 게 노동조합 결성이었다. 조직된 노동자의 저항이 두려웠던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법이 보장한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데에도 노동자들은 해고를 각오하고, 심지어는 생명의 위협까지 느껴야 했던 건 그런 까닭이었다.
사용자는 노동조합 결성 조짐만 보여도 주동자들을 지방이나 엉뚱한 사업장으로 발령하거나 아예 쫓아냈다. 부당노동행위였지만, 정부는 외면하거나 묵인했다. 그런 탄압도 통하지 않으면 구사대를 동원해 폭력을 행사했다. 정보기관, 경찰, 노동부 등 공권력이 뒷배 노릇을 하니 사용자는 겁날 게 없었다. 충돌이 생기면 공권력은 무조건 이들을 도왔고, 그들이 부리는 구사대의 폭력을 방조하거나 측면에서 지원했고, 그것도 안 되면 노동자의 저항을 직접 진압했다.
약자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연대. 그러나 3자 개입 금지 때문에 노동조합 상급단체나 동종 혹은 같은 지역 노동단체도 지원할 수 없었다. 학생 혹은 노동운동가들은 물론 징역을 각오해야 했다. 당시 이들이 의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단체가 도시산업선교회나 가톨릭노동청년회 등 양심적인 종교단체뿐이었다. 유신 정권 후반으로 가면서 노동자의 저항과 투쟁이 학생운동권 이상으로 ‘과격’, ‘불온’해진 건 그렇게 막다른 골목으로 노동자를 몰아버린 탓이 컸다. 노동자들은 이판사판이었다.
김민기가 삼진통상에서 일하던 1977년 노동 현장은 대학가 이상으로 긴장이 고조돼 있었다. 사업장 곳곳에서 참고 참았던 분노가 터져 나왔다. 학생운동권처럼 ‘유신 철폐’ 구호를 전면에 내세운 건 아니지만, 단결권, 교섭권, 쟁의권 등 노동권 쟁취를 위해 사용자 나아가 정부와 맞서는 것만으로도 유신체제를 뿌리부터 흔드는 도전이었다. 유신 정권을 떠받치는 두 기둥이 바로 물리력(군의 무력이나 경찰 검찰 등의 공권력)과 자본이었기 때문이다. 자본은 정권을 위해 아낌없이 실탄(돈)과 인력과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으니, 자본에 맞서는 쟁의는 정권과 맞서는 시위와 다름없었다. 따라서 ‘민주 노조 설립’ 노력은 학생 시민사회의 ‘유신 철폐’ 싸움과 출발은 달라도 이르는 곳은 같았다.
1960~197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의 이른바 고도성장은 노동자, 농민의 일방적인 희생 위에서 이루어졌다. 저임금, 초장시간 노동과 산업재해가 일상화된 노동 환경은 수출주도 고도성장을 떠받치는 토대였다. 살인적인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한 또 다른 정책이 저곡가였다. 노동자가 떠안는 저임금의 고통 가운데 일부를 농민에게 떠넘긴 것이었다.
이런 정부 정책의 결과, 기업은 고속으로 성장하고 기업주는 고도로 부유해졌지만, 노동자의 살림은 변함없이 가난했고, 노동자의 몸은 병들었다. 노동자에게 적정 임금을 지급해야 내수도 진작하고 대외의존도도 줄여 안정 성장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는 ‘균형 성장’ 주장이 꾸준히 제기됐지만, 정권이 수용할 리 없었다. 정권과 기업주에게 그건 ‘빨갱이 경제’였다.
그러나 수출주도 성장은 세계 경제가 좋을 때나 가능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계속됐던 세계적인 호황은 1970년대 초반 정점을 찍고 하강하기 시작했다. 선진국 경기에 감기가 들면, 폐렴에 걸리는 게 한국경제. 유신체제 출범을 전후해 두 자릿수 성장률이 갑자기 한 자릿수로 추락했다. 거기에 1974년 1차 석유 파동이 덮쳤다. 내수 기반이 철저하게 파괴된 한국 경제는 기댈 데가 없었다. 내일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경기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1차 파동은 쏟아지는 ‘오일 머니’에 기댄 중동의 건설경기 붐에 기대 가까스로 넘기는 듯했다. 경기침체로 쏟아진 실업자를 중동 건설 현장으로 보냈다. 정부는 중동에서 들어오는 달러를 내수 진작에 쓰지 않고 중화학공업 건설에 쏟아부었다. 그런데 2차 석유파동이 1978년 말 시작돼 1979년 본격화하면서 한국 경제는 급격한 침체에 빠졌다. 수출공단들이 잇따라 가동을 멈췄고, 민생 바닥 경제는 그야말로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한국경제의 고질적인 병폐 가운데 하나는, 호황의 혜택은 기업인에게 돌아가고 불황과 침체의 피해는 노동자에게 전가되는 구조였다. 호황으로 기업의 이윤이 넘쳐나도 임금은 물가인상률 정도만 올랐다. 반면 경기가 나빠지면 우선 임금을 삭감하거나 지급을 미루고, 저항하면 해고하고, 그래도 버티면 직장을 폐쇄했다. 이런 행패가 최고조에 이른 게 2차 석유 파동 때였다. 노동자들은 살기 위해서도, 노조 결성과 노동쟁의를 넘어서 ‘정치 투쟁’ 즉 유신 철폐, 박정희 퇴진 투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유신체제를 떠받치던, 수출주도 불균형 성장 정책이 역설적으로 유신체제의 종말을 앞당기는 원인이 된 것이다.
그 신호탄이 1978년 ‘우리는 똥을 먹고 살 수 없다’라고 절규했던 동일방직 사건이었다. 1979년 8월엔 노동자 김경숙 씨를 죽음으로 내몬 YH 노동조합 사건이 터졌다. 결국 1979년 10월 마산자유무역지역 전용 공단 노동자들이 대거 참여한 부마민주항쟁이 터졌다. 부마항쟁에서 유신 철폐, 박정희 퇴진 투쟁의 선봉에 선 이들은, 바로 노동조합조차 조직할 수 없었던 마산 수출자유지역 노동자였다.
유신체제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렸고, 그 벼랑 끝에서 내부 갈등과 내부 총질로 박정희는 피살당하고, 유신 정권은 자멸했다. 노동자들의 몸부림이 비록 노동 조건을 개선하려는 노력에서 출발한 것이라도, 이를 억누르는 유신체제의 총체적 폭력에 맞서는 거대한 파도가 되어 폭력의 몸통을 집어삼킨 셈이었다.
동일방직 분규는 유신정권 몰락의 신호탄이라는 의미에 앞서, 이런 1970년대의 모순을 집약한 사건이었다.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1972년 오랜 싸움 끝에 노동자의 뜻을 대변하는 ‘민주 노조’를 설립했다. 이후 사용자는 권력의 지원을 받아 끊임없이 노조 파괴 공작을 벌였다. 결국 1978년 회사는 구사대를 동원해 ‘노동자의 노조’를 파괴하고 ‘사용자의 노조’를 결성했다. 당시 ‘노동자의 노조’를 지키려 했던 건 1,200여 명의 여성 노동자였고, 회사의 조종을 받아 이를 강제로 해체하고 어용노조를 결성한 건 50여 명의 남자 직원들이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노조를 재건하기 위해 뭉쳤고, 기업주와 정권은 이런 노력에 철퇴를 가해 다른 사업장 노동자들의 본보기로 삼으려 했다. 회사는 이 과정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파렴치한 인권 유린을 저질렀다. 회사는 경찰과 정보기관은 물론 노동조합 상급단체인 한국노총과 섬유노조연맹마저 회사 편이었으니 눈치 볼 게 없었다. 구사대를 동원해 여성 노동자들에게 감금, 폭언, 협박, 폭행을 가했으며 부서 이동, 사표 강요, 해고 등 가능한 모든 부당노동행위를 저질렀다.
머잖아 세상에 나올 12, 13번과 17, 18번 노래는 이 과정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다. ‘난입’, ‘유린’, ‘연행’, ‘해고’라는 제목의 노래들은 당시 저질러진 노동 탄압의 전형적인 과정이자 문법이었다.
경찰은 그런 자들을 지원하고 거들었다. 노동자들의 마지막 수단인 점거 농성이라도 하게 되면 압도적인 물리력으로 해산시켰다. 정보기관은 여성 노동자를 빨갱이로 몰았고, 노동부 등 행정기관은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재취업을 막았다. 사법부는 노동자의 권리 행사를 제한하고 처벌하고, 탄압을 정당화했다.
1978년 2월 21일 회사는 결국 전대미문의 야만을 저질렀다. 이날 여성 노동자들은 회사 쪽의 방해를 뚫고 민주 노조 재건을 위한 대의원 선출 투표를 강행했다. 이에 대해 구사대는 대의원 선출과 대의원회 구성을 막기 위해 여성 노동자들을 감금하고, 투표함을 탈취해 부숴버리려 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이에 맞서 온몸으로 투표함을 지켰다. 그런 이들에게 구사대는 똥물을 퍼붓고 문대고 먹였다.
1980년 4월 25일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이 해고노동자 복직, 구속된 동료의 석방을 요구하는 대자보를 쓰고 있다. 사진출처: 경향신문
고무장갑을 낀 남자들이 똥을 바께스(방화수통)로 들고 와 머리서부터 뒤집어씌우고 손으로 찍어 우리들의 입속에 쑤셔 넣고 걸레에 묻혀 얼굴에 문대어 똥으로 뒤범벅이 된 눈은 뜰 수가 없었으며 귓구멍에 틀어박힌 똥 때문에 말을 들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무지막지한 깡패들은 저희들의 머리채를 나꿔채 뒤로 젖히고 이빨로 입술을 물어뜯는 등 이리와 같은 행동을 했습니다.”(동일방직 노동자들의 호소1, 1978년 2월)
그 장면은 다행히 한 동네 사진관 사장님의 카메라에 담겼다. 여성 노동자들이 즐겨 찾던 공장 인근의 우일영상 이기복 씨였다. 동일방직 전 노조위원장이었던 이총각이 우일영상으로 달려가 도움을 요청했고, 이기복은 현장에서 그 인면수심의 현장을 필름에 담았다.
뒤늦게 촬영 사실을 알고 구사대가 사진관으로 들이닥쳤다. 사진을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렸지만, 이기복은 끝까지 버텼다. 그러자 이번엔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들이닥쳐 사진관을 샅샅이 뒤지고, 뒤집어놓았다. 이기복은 이미 여공들에게 사진과 필름을 건네줬노라고 잡아뗐다.
동일방직 민주 노조 탄압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중앙정보부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중정은 당시 뜨겁게 타오르던 노동쟁의의 열기를 냉각시키기 위해, 동일방직 노조를 타깃으로 삼아, 이 모든 불법을 기획, 통제, 지휘했다.
당시 여러 언론사가 사건 현장에 있었다. 그러나 이 처참한 사건을 보도한 언론은 거의 없었다. 말로만 떠돌던 ‘똥물 행패’의 실상이 세상에 드러난 건 사회선교협의회 등 종교단체가 ‘똥물 테러’의 현장이 담긴 사진을 세상에 알리면서부터였다. 중정은 언론 보도를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
당시 비슷한 시련을 겪고 있던 청계피복노조, 원풍모방, YH무역, 해태제과, 삼원, 방림, 남영 나이론 여성 노동자들이 연대에 나섰고, 대학생들은 동일방직 주변과 노동자들이 농성하는 명동성당 일대에서 규탄 시위를 벌였다. 동일방직 노동쟁의는 더러운 권력과 자본, 양심적인 시민사회의 대결로 바뀌었다.
연립주택 건설 현장에서 등짐 지는 막노동에 파김치가 되는 날들이었지만, 김민기도 동일방직 사태의 실상을 잘 알고 있었다. 우울한 날들이었다. 똥물을 뒤집어쓰고, 실신할 때까지 두들겨 맞은 여성 노동자들은 바로 몇 달 전 그와 함께 일하고, 함께 노래 부르고, 함께 공부했던 이들이나 다름없었다. 희망을 잃지 않도록 어떻게든 돕고 싶었던 이들이었다.
김민기의 내리깐 눈이 끔벅거리고 있었다. 이번엔 ‘사선협’에서 요청받았을 때와 달랐다. 그때는 ‘못 한다’라고 했었다. 그러나 이번엔 하기는 하는데 과연 할 수 있을까? 쪽으로 고민의 추가 기울어 있었다.
저 참혹한 현장을 노래로 재현할 수 있을까. 그들의 고통을 노래가 담아낼 수 있을까? 그 노래가 그들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을까?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신동수는 그런 그를 그저 묵묵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났다. 발끝만 쳐다보고 있던 김민기가 고개를 들었고, 신동수와 눈이 마주쳤다. 복잡한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았다. 다시 김민기의 시선이 발끝으로 떨어졌다.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하던 김민기에게 노래를 부탁하고 공장의 불빛 제작자로 이름을 올린 1970년대 서울대 운동권의 당수로 불렸던 신동수 씨알살림축산 대표. 사진출처: 네이버블로그 꽃밥에피다
‘그렇다고 하자, 그러면 어떤 형식의 노래여야 할까. 단형의 노래 두세 곡만으로는 안 된다.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 극적이어야 한다. 있는 그대로 현실을 드러내고, 고통과 슬픔 그리고 한을 표현하고 또 씻어내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할 수 있어야 한다. 더 서사적이면서 더 극적이고, 더 냉정하면서 더 비감하고, 더 서정적이면서 더 이성적이어야 한다. 노래굿?’
‘그렇다고 각 노래들이 전체 서사에 묻혀서는 안 된다. 노래들은 각자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서 완결성을 가져야 했다. 여러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골라 부를 수 있어야 한다!’
‘좋다. 그러면 내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것은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어머니가 가장 걱정하시던,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이어 그로서는 가장 힘든 질문에 답할 차례였다. ‘그런데 내가 그 일을 해도 되는 걸까? 내게 그것을 할 자격이 있을까?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지, 그들의 고통을 내가 함께 겪은 건 아니지 않는가?’
김민기는 지독한 결벽주의자였다.
자세는 달라졌지만, 그 자리에서 결론이 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며칠 뒤 신동수에게 연락이 왔다.
형님이 저를 도와주셔야 해요.”
?”
제작을 맡아 주세요.”
‘제작’이 뭔지도 모르는 신동수이지만 도리가 없었다. 머잖아 세상에 나오게 될 의 제작자가 ‘신동수’로 되어 있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돌아온 김민기는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어떤 내용에 어떤 형식으로 지을지는 이미 그때 결정됐다. 외마디 외침이 아니라 서사적 구조를 가진 음악극 혹은 노래굿 형식으로”.
현실적인 고민 하나가 남았다.
노래굿이라면 어떻게든 공연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전문 연행 집단의 공연은 불가능했다. 공윤의 사전검열을 통과할 수도 없으려니와 무리하게 공연했다가는 참가자들 모두가 작살날 수 있다. 그렇다고 노래굿 한 편, 악보만 던져놓고 말 순 없다. 학생이든 노동자든, 노동 현장이든 종교단체든 이 음악극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손쉽게 재생할 수 있어야 하고, 널리 보급할 수 있어야 하며, 그걸 이용해 노동자건 학생이건 교회건 저희끼리 공연도 할 수 있어야 한다.
문득 스쳐 지나가는 장면들이 있었다. 삼진통상 시절 기숙 노동자들이 둘러앉아 짧은 여가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노동자들 가운데에는 언제나 카세트테이프 레코더가 있었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조용히 듣거나 함께 불렀다. 노래 테이프는 음반 가게에서 산 것도 있었고, 빈 테이프에 그들이 직접 녹음한 것도 있었다. 군 내무반처럼 되어 있던 기숙사엔 이런 카세트테이프 레코더가 방마다 한 대 정도는 있었다.
그걸 이용하면 언제 어디서나 음악을 무제한 재생할 수 있다! 빈 테이프만 있으면 무제한 녹음해 전파할 수 있다! 제작하기 힘든 엘피(LP)판도 필요 없고, 비싸기만 하고 활용성은 떨어지는 전축도 필요 없다!
작업에 뛰어들고 불과 두 달여 만에 김민기는 음악극 한 편을 완성했다. 노래굿 이었다. 동일방직 사건이 한국 노동 운동사의 한 분기점이 된 것처럼, 한국 음악사에서 한 이정표가 된 작품이었다. 민중가요, 노동가요 나아가 저항 가요의 정점을 찍은 작품이기도 했다. 김민기 개인적으로는 소리굿 에서 시작한 민중 주체 민족문화의 형식에 대한 오랜 모색의 결실이기도 했다.
1978년 김민기가 만든 공장의 불빛 카세트테이프. 사진출처 : SBS 뒷것 김민기 화면 갈무리
2004년 10월 15일 발매된 공장의 불빛 CD 이미지.
다음 문제는 연주와 녹음이었다. 작곡은 혼자서 골방에서 하면 됐다. 그러나 노래를 녹음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집단 연희인 만큼 노래를 부를 많은 보컬이 필요했고, 노래의 성격에 따라 편곡과 반주를 할 전문 연주자들이 필요했고, 노래를 제대로 녹음할 기계도 필요했고, 녹음실도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건 김민기에게 큰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낭만 가객’부터, 전문 연주 집단, ‘운동권 노래패’에 이르기까지 형이나 친구 혹은 동생들이 많았다. 보기와 달리 그는 대한민국 음악계 최고의 마당발이었다. 녹음할 장소는 송창식 형이 자신의 연습실을 내줬다. 들키면 치도곤을 당하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송창식은 흔쾌했다. 반주는 이장희가 함께했던 ‘동방의 빛’이 맡기로 했다. 당시 가요계 최고의 밴드였다. 구성원은 모두 시국 사태 혹은 노동운동과는 거리가 먼 ‘딴따라’들이었다. 다만 ‘1975년 대중음악 학살 사건’을 겪고 난 뒤 유신체제에 대해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음악인들이었다.
공장의 불빛 녹음실은 송창식(사진 왼쪽)이 제공했고, 반주는 이장희(왼쪽에서 두번째)가 함께했던 동방의 빛이 맡았다. 자료사진은 학전 20주년 기념공연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김민기의 친구들에 출연한 송창식 이장희 윤형주 조영남 김세환. 사진 오른쪽 노영심 옆에 사진속에는 보이지 않지만 뒷것 김민기가 앉아 있다. 사진: 학전 제공
보컬은 모두 노래 운동권 가객들이었다. 판이 벌어지기만을 기다리던 노래패였다. 서울대의 ‘메아리’, 이화여대의 ‘한소리’, 경동교회 ‘빛바람 중창단’ 등. 성악 전공의 민중가요 가수 안혜경과 조영래 변호사의 동생 조중래도 참여했다. 녹음된 반주(MR)에 보컬을 입히는 것은 이화여대 방송실에서 처리했다.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볶아 먹기였다. 그러나 빛나는 연대였다. 노동 현장에서는 노동자와 노동자, 노동자와 학생, 노동자와 정치권이 연대했고, 에서는 ‘딴따라’와 ‘운동권’ 그리고 교회가 연대했다. 이효재 전 교수 등 원로들은 경제적으로 지원했다. 경계가 없었던 김민기만이 이룰 수 있는 ‘연대’였다.
훗날 김민기는 을 작곡하고 녹음하고 테이프를 제작할 때 심정을 다음과 같은 내용의 메모로 남겼다.
감옥 아니라 그보다 더한 처지에 놓이건 말건 달려들어 만들기 시작한 것이 노래굿 이었다.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거칠 필요도 없는 이 명백한 불법 카세트테이프에서 나는 비로소 내 이름 석 자를 떳떳이 밝힐 수 있었고 내용과 형식 면에서도 기존의 상업가요 틀을 마음껏 벗어던질 수 있었다.”
김민기는 마스터 테이프를 3개, 그리고 복사본을 2000여 개 만들었다. 후배들은 대학가에 뿌리고 교회 조직을 통해 노동 현장에 배포했다. 법을 지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법을 어긴 것도 아닌 비공식, 비합법적인 제작과 유통이었다. 테이프 앞면은 보컬이 있어 감상과 학습용이고, 뒷면엔 반주만 있어 실전용이었다. 노동자들이 뜻만 모으면, 테이프의 반주에 따라 노래도 배우고,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춘 스무 곡의 노래에 따라 공연할 수도 있었다.
1979년 2월 박형규 목사의 서울제일교회에서 채희완의 안무로 공연한 공장의 불빛 공연 장면. 사진출처: 나무위키 동영상 갈무리
테이프는 빛의 속도로 보급됐다. 순식간에 지하 시장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음악적 완성도는 물론 호소력도 뛰어났지만, 무엇보다 노동 현장엔 가뭄의 단비였다. 참혹한 그들의 현실을 드러내고, 처참하면서도 처연한 그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반드시 지키고 싶은 그들의 꿈을 담은 노래는 그때까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김민기가 물꼬를 튼 이런 시도는 1980년대 초반부터 새로운 음악극을 제작하고, 민중가요 테이프를 제작해 전국적으로 유통될 때 그대로 차용됐다. 정보기관은 이 불온 테이프를 눈에 불을 켜고 찾아 색출하려 했다. 그러나 엘피판과 달리 카세트테이프 레코더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복제할 수 있고 전달할 수 있었으니, 색출은 물론 차단도 할 수 없었다. 닭 쫓던 개가 됐다.곽병찬 언론인 chankb195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