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로그인   회원가입   초대장  
모니터링&뉴스레터   페투미X사회혁신
페투미X사회혁신   서비스 소개   아카이브   이야기   이용 안내
페이지투미는 사회혁신분야의 새로운 정보를 일주일에 3번, 메일로 발송해드립니다.

link 세부 정보

정보 바로가기 : 내 삶의 궤도를 바꾼 박재순 떠나보내다

내 삶의 궤도를 바꾼 박재순 떠나보내다
[사람들]
박재순 박사가 떠났다 박재순 박사가 2026년 9월 20일,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부고를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언젠가 다시 만나 밥 한 끼 나누며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그 시간은 이제 오지 않는다. 그는 내게 단순히 함석헌(1901~1989)을 연구한 학자가 아니었다. 내 삶의 방향을 바꾼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박재순(생전의 고인 제공) 퀘이커 여름수양회에서의 만남 1980년대 중반, 서울 불광동 기독교수양관에서 열린 퀘이커 서울모임 여름수양회. 20대였던 나는 그곳에서 박재순 박사를 처음 만났다. 한울회 사건으로 2년 반의 옥고를 치르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는 원망이나 패배감보다 공부하는 사람의 열정이 더 크게 어려 있었다. 그날 그는 씨알사상과 민중신학 을 주제로 강연했다. 함석헌의 씨알사상과 안병무(1922~1996)의 민중신학이 어디서 만나고 어디서 갈라지는지, 한국 민중의 고난을 어떻게 사상적으로 읽어야 하는지를 거침없이 풀어냈다. 그때는 몰랐다. 그 강연이 훗날 내 인생의 진로와 이어질 줄은. 철도공무원에서 함석헌 연구자로 1989년 2월 4일 새벽, 함석헌 선생의 부고를 듣고 나는 서울대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날로 8년을 다니던 철도청에 사표를 냈다. 다른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 씨앗의 일부는 박재순 박사의 강연에서 왔다. 나는 영국으로 건너가 함석헌을 주제로 학사·석사·박사 논문을 쓰고, 귀국 후 《함석헌 평전》을 펴냈다. 지금 나를 《함석헌 평전》 저자 라 소개할 수 있게 된 길, 그 한가운데 박재순 박사가 있었다.   1988년 1월 2일 함석헌 선생 댁에서. 김성수 시민기자 감옥에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았던 사람 그의 삶에는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장면이 깊이 새겨져 있다. 박정희(1917~1979) 정권 때 민청학련 사건으로, 1981년 전두환(1931~2021) 정권 때는 한울회 사건으로 다시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그는 감옥을 빼앗긴 시간으로만 기억하지 않았다. 생전 인터뷰에서 그는 그 2년 6개월이 책을 읽고 자신을 돌아보며 정신과 학문을 단련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억울함 속에서도 복수의 언어에 머물지 않고 생명과 자유와 인간에 대한 사유로 나아갔다. 그것이 그가 함석헌과 씨알사상을 만난 방식이었다. 소아마비를 앓은 몸으로 쉽지 않은 수감 생활이었다. 한울회 사건의 1심 재판장은 훗날 대통령 후보에 오른 이인제였고, 대법원에는 이회창이 있었다. 김대중 정부에서 고인은 이 수감 사실을 인정받아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표창을 받았으나, 2015년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서울고등법원과 대법원에서 같은 사건으로 다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고인은 이후 2기 진실화해위원회에 한울회 사건의 진실규명을 신청했지만 끝내 그 결론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다. 씨알 을 학문이 아니라 삶으로 그의 학문은 유영모(1890~1981), 함석헌, 안병무를 따로 떼어놓지 않았다. 그는 씨알을 민중 이라는 정치적 개념으로만 가두지 않고, 생명을 품고 스스로 움직이는 존재, 하늘과 땅 사이에 선 인간,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주체로 해석했다. 2013년 펴낸 《민중신학에서 씨알사상으로》는 이 작업의 결정체다. 그에게 씨알은 박물관에 보관할 사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살아 움직여야 할 것이었다. 2007년 설립된 재단법인 씨알을 통해 그는 유영모와 함석헌의 생명·평화사상을 잇는 일도 꾸준히 이어갔다. 함석헌을 연구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함석헌의 문장을 설명하는 일과, 그가 던진 질문을 자기 삶으로 끝까지 붙들고 사는 일은 다르다. 박재순은 후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만날 때마다 이어지던 긴 이야기 한국에 갈 때마다 나는 꼭 그를 찾아갔다. 특별한 의제 없이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함석헌 이야기가 안병무로, 한국 정치와 교회 이야기가 유영모로, 어느새 건강과 가족 이야기로 흘러갔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끝까지 들어주는 그의 태도였다. 그와 마주하면 학문과 삶의 경계가 흐려졌다. 씨알사상이 무엇인가를 묻다가 결국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로 돌아왔다. 그것이 박재순의 힘이었다. 이제는 우리가 씨알이다 그가 떠난 지금 느끼는 상실감은 한 사람을 잃었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함석헌·유영모·안병무를 잇고, 한국의 고난과 생명, 민주주의와 평화를 사상으로 연결해주던 한 세대의 증언자가 떠났다는 무게다. 그러나 씨알사상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다. 씨알 하나가 땅에 묻히면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을 남긴다. 한 사람의 사상도 마찬가지여서, 살아 있을 때보다 떠난 뒤에 더 많은 이들 속에서 다시 싹틀 수 있다. 1980년대 중반 어느 여름날, 퀘이커 서울모임에서 들었던 그의 강연은 20대 청년의 마음에 씨앗 하나를 심었다. 그 씨앗은 함석헌 연구로, 영국 유학으로, 마침내 《함석헌 평전》이라는 책으로 자라났다. 이제 그 씨앗을 심어준 사람은 없다. 하지만 씨앗은 남았다. 박재순 박사님, 올곧고 깊고 따뜻했던 분. 고난을 사상으로, 사상을 삶으로 바꾸었던 분. 함석헌의 씨알을 붙들고 평생 걸어온 분. 이제 편히 쉬십시오. 마지막까지 곁을 지킨 박경미 교수의 마음을 생각하며 깊은 위로를 전한다. 씨알은 누구인가. 씨알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마 그가 마지막까지 붙들었던 질문도 이것이었을 것이다. 이제 그 질문은 우리 몫이다. 그를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의 책을 책장에 꽂아두는 것이 아니라, 그가 평생 붙들었던 질문을 우리 삶 속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씨알 하나가 땅에 묻혔다. 그러나 씨알의 사상은 아직 살아 있다. 박경미 교수는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신약학 교수였고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신학자다. 성소수자 혐오와 정면으로 맞서며 『성서, 퀴어를 옹호하다』를 썼다. 딸 박예람이 함께 자리를 지킨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 장례식장 9호실, 입관예배는 21일 오후 7시, 천국환송예배는 다음날 오전 9시 성북교회 주관으로 열린다.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최근 3주간 링크를 확인한 사용자 수

검색 키워드


주소 : (12096) 경기도 남양주시 순화궁로 418 현대그리너리캠퍼스 B-02-19호
전화: +82-70-8692-0392
Email: help@treeple.net

© 2016~2026. TreepleN Co.,Ltd. All Right Reserved. / System Updated

회사소개 / 서비스소개 / 문의하기 /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