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원칙은 공개했지만 감원 위험은 숨겼다…기술기업 공시 사각지대 [뉴스] 지난 7월 세계벤치마킹연합(World Benchmarking Alliance·WBA)이 발표한 ‘기업 AI 거버넌스의 노동력 사각지대 해소’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주요 기술기업들이 인공지능(AI) 윤리 원칙과 관리체계를 마련하고 있지만 AI가 고용과 직무에 미치는 영향은 대부분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자리 40%, AI 대체위험에 노출됐지만…기업 87%는 고용 영향 침묵
세계벤치마킹연합(WBA)의 ‘기업 AI 거버넌스의 노동력 사각지대 해소’ 보고서/WBA
AI가 노동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제조업 자동화를 넘어 사무직과 전문직으로 확대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전 세계 일자리의 약 40%가 AI에 노출돼 있으며, 선진국에서는 이 비율이 약 60%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미국에서는 전체 일자리의 93%가 업무 일부에서 AI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그러나 기업의 AI 공시는 데이터 보호와 편향 방지, 인권 존중, 책임 소재 등 윤리 원칙에 집중돼 있다. AI 도입으로 직무가 사라지거나 인력 구조가 바뀔 가능성을 평가한 사례는 드물었다.
WBA에 따르면, 글로벌 기술기업 200곳 가운데 AI 원칙을 공개한 기업은 77곳(39%)이었다. 반면 AI 관련 문서에서 고용이나 노동력을 언급한 기업은 26곳(13%)에 그쳤다. AI 도입과 재교육을 고용 영향과 연결해 설명한 기업은 13곳(6.5%)이었다. AI가 일자리를 대체하거나 노동 수요를 줄일 수 있다고 명시한 기업은 독일 도이치텔레콤 한 곳뿐이었다.
국가별 격차도 컸다. 조사 대상 일본 기업 가운데 AI 원칙을 공개한 비율은 64%로 가장 높았다. 유럽연합(EU)은 58%, 미국은 42%, 중국은 18%였다. 인권 존중을 AI 원칙에 포함한 기업 비율도 일본은 43%였지만 중국은 4%에 불과했다.
WBA는 일본 정부의 기업용 AI 지침과 주요 7개국(G7)의 ‘히로시마 AI 프로세스’, EU AI법 등 정부 차원의 기준이 기업 공시 확대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했다.
다만 전체적인 AI 거버넌스 수준은 여전히 낮았다. 조사 대상 기업의 약 60%는 WBA가 평가한 AI 거버넌스 요건을 하나도 충족하지 못했다. 전체 요건의 절반 이상을 충족한 기업도 13%에 그쳤다.
EU·한국 AI 규제….직무 전환·감원 위험 공시는 빠져
AI로 인한 일자리 대체 위험이 커지고 있지만, AI 규제 및 공시에서는 관련 내용이 빠져 있다./ChatGPT 생성 이미지
현재 ESRS, ISSB, GRI 등의 주요 지속가능성 공시 기준은 인력 구성과 교육, 근로조건, 구조조정 등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AI 도입에 따른 직무 전환이나 인력 감축 위험을 별도 공시 대상으로 명확히 규정하지 않고 있다.
AI 규제도 비슷하다. EU AI법은 채용과 근로자 관리에 사용하는 AI를 고위험 시스템으로 분류한다. 기업은 AI에 대한 관리체계를 갖추고, AI 사용 사실을 근로자와 근로자 대표에게 알려야 한다. 한국의 AI 기본법도 채용 등 고용 관련 AI를 고영향 AI로 규정하고 있다.
다만 EU와 한국의 AI법은 특정 AI 시스템의 안전성과 위험관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기업 전체의 직무 구조가 어떻게 바뀌는지, 몇 명이 감축 위험에 놓이는지, 재배치와 재교육에 얼마를 투자하는지에 대한 정보는 공시 대상에 포함하지 않고 있다.
WBA, 기존 인적자본·노동 공시 기준에 AI 영향 추가 제안
WBA는 새로운 AI 고용 공시제도를 별도로 만드는 대신 기존 인적자본·노동 공시 기준에 AI를 인력 변화의 원인으로 추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기업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AI 도입 사업에 대해 영향을 받는 직무와 인원, 직무별 노출 수준, 재배치·재교육 투자액, 교육 참여율과 의사결정 구조를 공개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정부에는 일정 규모 이상 고용에 영향을 줄 수 있는 AI 도입을 노동당국에 사전 통보하도록 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산업별 AI 도입률과 직무 노출도, 재교육 투자를 추적하는 조기경보체계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재교육 지원은 고용 형태나 소속 기업이 바뀌어도 근로자가 계속 활용할 수 있는 방식이 제안됐다.
싱가포르의 ‘스킬스퓨처(SkillsFuture)’나 프랑스의 개인훈련프로그램처럼 개인별 맞춤형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AI 도입으로 인력을 줄이는 기업이 전환기금이나 의무 재교육을 통해 비용을 분담하는 방식이다. AI 노출 직무에 대한 재직자 교육비에는 세액공제 등 인센티브를 제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