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에도 오판 원인 찾는 블랙박스 가 필요하다 [뉴스] 요즘 연일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는 판결이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내란에 동조해온 혐의가 짙은 사법기관장에 대한 입법기관의 책임추궁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가운데, 국가기강이 실추하고 있다는 불안이 엄습하고 있다.
이런 구조적 퇴행은 언제부터였을까.
아무도 세지 않는 오판
최근 사례부터 짚어보자.
2020년 겨울, 수원지방법원은 화성 8차 사건의 윤성여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는 이미 20년을 감옥에서 보낸 뒤였다. 재판부는 법원이 인권의 마지막 보루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 판결로 당시 윤씨를 검거한 경찰관들의 특진이 취소되었다.
그런데 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 판사들, 그 판결을 유지한 상급심 판사들에게는 무엇이 기록되었는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한 사건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재심으로 무죄가 확정된 사건이 모두 몇 건인지 모른다.
그중에는 국가가 인정한 국가폭력에 의한 오심사건 도 수백건이다. 그 원인이 허위 자백이었는지, 부실 감정이었는지, 증거 은폐였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국민들이 한이 맺혀 있다. 억울한 옥살이가 모두 몇 년이었는지, 그 책임을 진 판검사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세지 않기 때문이다.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잘못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보이지 않을 뿐이다.
검찰은 무죄 판결이 나면 담당 검사의 과오를 따지는 무죄 평정 을 한다. 그러나 2022년 1~8월 평정 대상 5056건 가운데 89.1%인 4506건이 법원과의 견해 차이 라는 이유로 과오 없음 판정을 받았다. 스스로를 심판하는 제도가 스스로를 무죄로 만든 셈이다.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는 것, 공자는 이를 과이불개(過而不改)라 했다. 진짜 잘못은 오판 그 자체보다 오판을 기록하지 않는 데 있다.
28일 오후 광주 동구 광주고등법원 앞에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의 피고인 부녀가 사건 발생 16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부녀는 2009년 독극물인 청산가리를 막걸리에 타 배우자이자 친모 등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돼 무기징역과 징역 20년을 각각 선고받아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받았으나, 지난해 재심 개시가 결정돼 이날 무죄를 선고받았다. 2025.10.28
세계는 대학이 기록한다
다른 나라는 다르다. 그리고 그 기록을 맡은 곳은 상당수가 대학이었다.
미국에서는 미시간대 로스쿨, 미시간주립대 로스쿨과 UC어바인이 함께 국립 오판 기록부(National Registry of Exonerations) 를 운영한다. 1989년 이후 3800건이 넘는 무죄 확정 사건을 쌓았고, 억울하게 잃은 자유의 총합이 3만 6000년을 넘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기록은 개별 사건을 넘어 허위 자백, 부실 감정, 증거 은폐, 검경 수사의 오류를 유형별로 드러냈다. 미국 각지 검찰에 유죄판결 무결성 검토부서 가 확산되는 흐름도 데이터로 뒷받침해 왔다.
영국 엑서터대 로스쿨은 1970년 이후 영국 전역에서 뒤집힌 유죄 판결을 원인별로 분류한 사법 오류 기록소 를 공개했다. 처음 공개될 때 346건이었던 이 데이터베이스는 이후 확대되어 500건 가까운 사건을 담고 있다. 시작은 법대생들의 여름방학 과제였다.
캐나다 토론토대 로스쿨의 연구진은 레지스트리를 만든 이유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강연 때마다 자국 자료가 없어 미국 통계를 빌려 써야 했다는 것이다. 우리 처지와 똑같다.
독일에서는 베를린자유대, 괴팅겐대, 빌레펠트대의 형법 교수들이 법대생 클리닉을 열어 오판 의심 사건을 검토한다. 국가 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재심 사건 전수조사도 진행했다. 네덜란드·스위스·독일 대학의 법심리학자들은 유럽 무죄확정 기록소 를 세웠다.
가까운 일본의 이노센스 프로젝트는 리쓰메이칸대 연구센터에서 출발해 올해 10년을 맞았다. 대만의 무죄평반협회 역시 대만대 법대 교수가 발의해 만들어졌다.
이 나라들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오판을 개인의 비극으로 남겨두지 않고, 누적 가능한 데이터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왜 대학이어야 하는가
왜 하필 대학인가.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객관성이다. 판결을 기록하는 일은 곧 판결을 평가하는 일이다. 정파성의 의심을 받는 순간 기록은 힘을 잃는다. 학술기관은 판단의 기준과 방법을 공개하고 동료 검증을 받는다. 그 절제가 기록의 권위가 된다.
둘째, 체계성이다. 오판을 바로잡으려면 먼저 유형화해야 한다. 오류를 확인한 주체에 따라 등급을 나눌 수 있다. 법원 스스로 인정한 재심 무죄, 상급심이나 헌법재판소가 확인한 오류, 진실화해위원회 같은 국가기구가 인정했으나 아직 시정되지 않은 사건, 전문가가 문제를 제기한 미확정 판결이 그것이다.
오류의 성격도 나눠야 한다. 사실오인에 의한 오판, 법리를 왜곡한 오판, 절차위반과 관련된 오판, 권력 개입에 의한 오판이 있다. 여기에 권력자에 대한 부당한 관용, 곧 유력자에게 내려진 부당한 무죄나 지나치게 가벼운 형이라는 역방향 오판 도 포함해야 한다.
그 위에서 수사부터 기소, 1심, 항소, 상고, 재심 저지까지 어느 단계에서 누가 잘못했는지 추적하고, 피해의 규모와 보상, 판검사에 대한 사후 조치까지 기록해야 한다. 이런 작업은 한 번의 보고서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몇 년, 몇십 년을 이어갈 연구 역량이 있어야 가능하다.
셋째, 지속성과 교육이다. 대학에는 해마다 새로운 학생이 들어온다. 법학도들이 판결문과 씨름하며 오판의 구조를 배우는 것은 그 자체로 미래의 판검사와 변호사를 기르는 일이다. 심리학과 통계학, 언론학이 함께하면 법조계의 관행에 갇히지 않는 시선도 확보할 수 있다.
최종심 인 대법원의 판결을 헌법재판소에서 다툴 수 있는 내용을 포함한 사법개혁 3법 이 공표된 첫날인 12일 서울 헌법재판소 민원실에 관련 안내문이 비치되어 있다. 2026.3.12 연합뉴스
한국에 씨앗이 없는 것도 아니다. 2013년 한 현직 판사가 1심 유죄, 2심 무죄 사건 540건을 전수조사해 한국 최초의 오판 보고서 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 연구는 상설 기록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씨앗은 있었으나 밭이 없었던 것이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남용된다. 사법·검찰 권력은 선출되지 않았고, 신분이 보장되며, 자기 오류를 스스로 판정한다. 이 구조가 민주적 주권을 얼마나 쉽게 비켜갈 수 있는지는 우리가 이미 여러 차례 목격했다. 과거 공안 조작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다. 권력의 오류를 기록하는 일은 견제의 첫걸음이자, 같은 오류의 재발을 막는 첫걸음이다.
대학 연합의 기록 체계를 만들자
법학전문대학원이나 법학과를 둔 대학은 가칭 〈 잘못된 판결 조사연구센터〉를 설치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다만 처음부터 전국 단위 데이터베이스를 만들 필요는 없다. 센터의 첫 과제는 크지 않아도 된다. 지난 수십 년간 재심으로 무죄가 확정된 사건들에 대해, 대학마다 관심 있는 유형별로 조사하는 일부터 시작하면 된다. 세부분야를 달리해서 기록하는 것이다. 법원이 이미 오판을 인정한 사건부터 기록하니 누구도 시비를 걸기 어렵다.
사건마다 원인과 과정, 피해와 책임을 같은 기준으로 기록하고, 그 결과를 해마다 보고서로 공개하자. 판결문 접근이 어렵다면, 그 어려움 자체를 기록하는 것도 첫 연구 성과가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각 대학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기록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사건 선정 기준, 원인 분류, 피해 산정, 책임 추적 방식을 공유하는 대학 연합체를 만들자. 개별 대학은 사건의 발굴과 검증을 담당하고, 공동 플랫폼은 분류·통합·공개·연간 보고서를 맡는다. 그래야 대학별 자료가 파편으로 흩어지지 않고, 비교 가능한 국가 기록으로 축적된다.
여기서 말하는 잘못된 판결 은 단순히 상급심이 뒤집은 판결만을 뜻하지 않는다. 사실오인, 법리 왜곡, 절차 위반, 증거 처리 오류, 권력 개입 등으로 무고한 사람에게 유죄가 인정된 사건, 그리고 반대로 권력자에 대한 부당한 관용이 나타난 사건을 함께 포함한다.
시민사회는 준비되어 있다. 〈 잘못된 판결 백서 추진위원회〉는 올해 추진간담회를 이어오며 자료를 모으고 피해자들을 만나왔다. 얼마전 7차가 열렸고 이제 8차가 준비되고 있다.
항공기가 추락하면 사람들은 먼저 블랙박스를 찾는다. 누구를 벌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사고가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그 기록이 쌓여 비행기는 가장 안전한 교통수단이 되었다.
우리 사법에는 아직 블랙박스가 없다. 대학들이 그 첫 장치를 달아주기를 바란다.
이원영 시민인권위 공동위원장 leewysu@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