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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생존을 허 하지 않는다 … 생사람 잡은 국가보안법

생존을 허 하지 않는다 … 생사람 잡은 국가보안법
[뉴스]
일본에서의 차별에서 벗어나 고국에서 새로운 삶을 꿈꿨던 20대 재일유학생 동포 강종헌, 이철은 1975년 국가보안법에 의해 ‘재일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조작된다. 희망을 품고 왔던 조국에서 사형을 선고 받으며 들은 말이 ‘생존을 허하지 않는다’였다. 많은 사람들의 투쟁으로 무기로 감형 받고 13년 만에 감옥에서 해방된다. 일본에서 조국의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위해 살아가던 이들은 마침내 36년 만에 국가보안법 재심 무죄 판결을 받는다.  지난달 14일 민족통일애국청년회(민애청) 주관, 이주희 더불어민주당, 손솔 진보당, 한창민 사회민주당 의원 공동주최로 국회의원회관에서 진행된 를 재구성한 것이다. 민족적 차별을 견뎌내기부터 국가보안법에 의한 탄압까지, 재일 동포의 목소리를 들어본다.    증언 프로젝트에 참석하고 있는 강종헌, 이철 씨 재일동포, 청소년 강종헌 : 우리 민족은 원하지도 않았던 식민지가 되어 일본 제국주의 밑에서 식민 통치를 36년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일본에서 태어났죠. 그런데 문제는 해방 후에도 식민 통치 종주국이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일본이 과거에 지배했던 조선 민족에 대해서는 철저한 멸시, 차별이 뿌리 깊이 남아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물론이고 일본 국민들한테도요.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우리의 유년 시절은 멸시와 차별 속에 살 수밖에 없었어요. 1965년 한일 국교를 정상화하지만 과거사를 정리해서 한 정상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식민지 지배는 잘한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이 발전한 것 아니냐’는 오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것이죠. 그러니까 재일 동포는 사람 취급도 안 하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유년기를 지내다 보니 늘 열등감이나 고뇌가 있었죠. ‘그럼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 그런 고민을 쭉 사춘기 때 하는 겁니다. 우리는 조선 민족, 한민족이니까 분단된 조국을 바라보며 민족적인 정체성, 아이덴티티를 형성하는 고민의 시간이었습니다. 사실 일본 학교를 다니면서 일본어 교육을 받았는데 그런 교육 체계에서 민족 정체성을 찾는다는 것은 참 힘듭니다. 중학교 3학년 때인가, 한국에서는 주민등록증 제도가 있으니까 사진 찍고 지문 날인하는거야 당연한 일처럼 느껴지겠지만 일본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에서 지문 날인을 하는 것은 무법자 취급을 하는 것이죠. 그때 외국인 등록증을 만든다고해서 사진 한 장 들고 동사무소를 가요. 거기서 지문을 날인하는데 나에겐 엄청난 충격이었어요. 이걸로 증명서를 만든다는 건 하나는 ‘너는 일반 국민이 아니다’ 라는 뜻이고 또 하나는 ‘너는 늘 우리가 감시해야 될 위험한 존재다, 예비 범죄 집단이다’ 그런 메시지가 담겨져 있는 것이죠. 그런 현실을 딱 마주하게 되니까 ‘알았다, 나도 그럼 각오하겠다. 내가 이제부터는 조선 사람, 한국 사람으로 살겠다’ 그런 분노의 마음을 가졌어요. 그래서 교과서나 공책에 있던 ‘나가시마’라는 일본 이름을 전부 다 지워버렸어요. 그리고 ‘강’이라는 이름을 썼어요. 충동적으로 한 것이었죠. 그렇게 고등학교에 가서는 ‘조선 문화 연구회’를 만들어 조국을 숨기고 사는 학생들과 우리 역사도 배우고 문화도 배우고 그렇게 서클을 만들어 지냈어요. 이철 : 저도 국민학교 시절 동사무소 직원이 와서 지문을 날인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는 민족 차별이라든가 그런 걸 느끼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어린 시절 차별을 많이 받았습니다. 무언가에 반대 의견을 내면 하나는 공산주의자, 또 하나는 조센징이라 불렀어요. 그 시절 어떤 아이가 ‘조센징!’ 하면서 제 손을 연필로 내리찍어 연필심이 지금도 제 손바닥에 박혀 있습니다. 그래서 나를 얕보지 못하게 해야겠다 해서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너는 조센징 아니다, 한국 사람이라고 대답해라’고 하시는데 나로서는 조센징이나 한국 사람이나 그게 똑같은 거니 하나도 위로가 안됐습니다. 아버지는 민단 활동도 하시면서 한국 사람으로서의 자긍심이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매년 우리 6남매를 앉혀놓고 안중근 선생과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박정희 정부에서 표창장도 받으셨지만 ‘박정희가 언젠가는 김일성한테 나라 팔아먹을지도 모른다’고 말하실 정도로 반공 사상도 강한 분이셨습니다. 제 유년 시절은 특별히 민족 교육을 받진 않았지만 민족 차별은 느꼈던 것 같습니다.   증언대회에 참석하고 있는 강종헌 씨 고국으로의 유학 강종헌 : 고등학교를 마칠 때쯤 민족 정체성을 찾기 위해 어디서 공부할 것인가 고민을 했어요. 먼저 모국어를 알아야 된다는 생각이 간절했고 두번째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에 소양이 있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세번째를 제일 중요시했는데 시대 정신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언어와 역사는 일본에서도 열심히 하면 배울 수 있어요. 그런데 시대 정신을 논하고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은 나같은 또래 세대가 함께 생활을 해야만 제대로 공유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모국 유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커졌죠. 고등학교 졸업하고 1년 간 재수 생활을 했는데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일이 일본 석간에 조그마한 기사로 났어요.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고민하고 또 괴로웠으면 자기 목숨을 내놓고 외쳤을까, 나도 함께 느끼기 위해 역시 조국을 찾아가야 되겠다 생각해 모국 유학을 결심 했죠. 1972년에 서울대 문리대 의학과에 들어갑니다. 6개월 정도 어학연구소에서 배운 우리말 실력은 너무 부족했지만 친구들하고 대화하는 데는 불편이 없었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인 1972년에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죠. 나는 학생들이 굉장히 호응할 줄 알았는데 별로였어요. 처음으로 남북이 정치 회담을 하고 통일 3원칙을 합의한 역사적인 경사였는데 학생들이 열광하지 않은 거에요. 친구들과 얘기하며 반공 사상이 뿌리 깊다는 걸 느꼈고 ‘반공이 국시’라는 것은 참 무서운 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듬 해인 73년 10월 2일, 박정희 정권이 김대중 선생을 일본에서 납치하고 이에 서울대 문리대에서 반독재 시위를 하게 됩니다. 그때 지도부 학생들이 나눠준 유인물에 써있던 문장, ‘학우여 궐기하라’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나도 당장 시위를 하고 싶은데, 그때도 재일 동포가 쉽게 나서면 안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때 평소에는 정치적인 발언도 거의 안하던 친구가 쓱 일어나더니 교재를 가방에 넣고 따라 나서더라고요. 궐기라는 문장 하나를 행동으로 옮기는 그런 용기에 정말 많은 감동을 했죠. 그 순간만으로도 나는 유학 온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스포츠도 열심히 했어요. 서울대학교 의대 대표로 100m 달리기에서 우승을 했어요. 내 나름대로는 굉장히 낭만적인 유학 생활을 보냈습니다. 이철 : 저는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습니다. 우리 대학교에는 코리아 문화 연구회라는 학생 모임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조총련계 학생도 있고 민단계 학생도 있어서 아주 복잡했어요. 서로 경쟁하면서도 균형 있게 잘 운영했습니다. 제가 대학에 다니던 60년대 후반은 일본 학생운동 전성기였습니다. 그때 학생 사회는 전공투라는 조직으로 통일돼 있었고 핵심적으로는 1970년 미일 안보조약 갱신을 반대하는 운동을 많이 했었죠. 그리고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니까 반전 운동도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 1년 중에 수업을 받은게 아마 반도 안 될 거에요. 그 중 제가 다니던 학교가 학생운동의 메카였습니다. 자연스레 진보적인 서적도 읽고 맑스, 레닌부터 마오쩌둥, 김일성도 알고 체 게바라가 죽었을 때 다같이 애도했던게 기억이 납니다. 우리 학교에 재일 동포 학생들이 140명이 있었어요. 엄청 많죠. 근데 내가 왜 아는가하면 학적과에 가서 다 조사를 했단 말입니다. 제가 그 당시 조직을 담당하는 섭외부장 역할이었거든요. 그때 나도 아이고 이거 이렇게 일본 이름으로 다니면 안되겠구나 싶어 그 자리에서 한국 이름 이철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본명 선언을 한 거죠. 이름도 바꾸고 대학의 진보적인 분위기를 체험하면서 나에게 모자라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역시 한국 사람으로서, 민족의 한 사람으로서의 자각이 없구나. 민족성을 되찾아야 되겠다 하는 마음이 점점 커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말을 처음하지만 한국 학생들은 학생운동은 열심히 하는데 뭔가 구심과 일관성이 없는 것 같아 일본의 겸험이 도움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마음도 있었고요. 또래 학생들하고 시대 정신도 나누고 민족성도 배우고 하면서 한국에서 지내면 좋겠다는 마음이 커져갔습니다. 1973년 고려대 대학원에 들어가 75년 말까지 학교에 다녔는데 그 시기가 제일 행복한 시기였습니다. 애인이자 동반자이자 동지도 생겼고요. 대학원에 입학할 당시 1,2,3 지망까지 모두 고려대라고 적었습니다. 왜냐하면 민족성이 강한 학교고 그다음에 데모도 열심히 하는 학교였으니까. 사실은 고려대학교 3학년 생으로 편입하려고 했는데 그 당시 고려대에는 편입 제도가 없었어요. 그래서 대학원에 들어가기로 한 겁니다. 매일같이 막걸리를 마시고 노래 부르고 여러가지 세상 얘기도 하고 이러면서 아주 좋은 시절을 보냈는데 그러는 사이에 우리에 대한 뒷조사가 다 이루어졌던 것 같아요. 우리가 1971년도에 서울공대 어학 연구소에 다녔는데 그때 우리에게 언어나 역사를 가르치는 교수들도 중앙정보부, 보안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자들이었어요. 우리 일행 중에도 정보기관의 말을 잘 듣는 사람들이 5~10명 정도 늘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몰랐어요. 우리는 그냥 재미있는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정보기관 사람들로서는 언제든지 어항 안에 들어 있는 금붕어처럼 잡아 올리면 사건화 할 수 있는 존재였던 거죠. 유신 독재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높아지고 사회가 시끄러워지면서 재일동포 간첩조작 사건이 조금씩 터지기 시작했어요. 중앙정보부와 보안사에서 경쟁하듯 교대로 발표를 했습니다. 독일이나 일본처럼 제 3국에는 북한과 관련된 사람들이 오고갔기 때문에 재일 동포는 정보기관에게 간첩 조작하기에 맞춤한 먹잇감이었습니다.   증언대회에 참석하고 있는 이철 씨 연행 그리고 사형선고 강종헌 : 서울 의대 안에 진보적인 학생들의 동아리가 있었습니다. 사회의학연구회라고요. 저는 시대 정신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운동 하는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죠. 그래서 사회의학연구회에도 정식으로 가입은 하지 않았지만 동료들이 불러주어 고마운 마음에 맨 뒷자리에 앉아 친구들에게 배웠습니다. 그 서클 자체는 비합법적인 존재였고 독재 정권에서 본다면 탄압의 대상이었죠. 그런데 일반 학생들은 잡아가도 다시 또 풀어줘야 하고 국제 여론도 안좋아지고 했습니다. ‘결정적인 사건을 터뜨려야 학생 운동을 당분간 잠재울 수 있다’ 그러한 필요성이 남산 중앙정보부나 서빙고 보안사에서는 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군사 독재가 말기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면 결국 탈출구는 분단 상황을 이용하고 공안 사건을 만들고 간첩 사건을 조작해내는데, 거기에 재일동포라는 존재는 안성 맞춤이죠. 1975년 11월 22일 날 중앙정보부에서 공안검사 김기춘 국장이 ‘학원 침투 북괴 간첩단’이라는 이름의 사건을 발표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잡혀갔고 우리도 많은 긴장감과 불안감 속에 살았습니다. 한 편으로는 ‘첫 번째 파도가 지나갔으니 이제 나는 괜찮지 않을까’하는 낙관론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12월 초에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연행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나니 수사권도 없는 보안사령부였습니다. 그때는 중앙정보부 밖에 몰랐으니까요. 그래서 보안사령부에 들어가서 난생 처음으로 그런 무자비한 공권력, 폭력에 노출되었죠.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게 며칠 동안 두들겨 맞고 진술서 쓰고를 반복하니 진짜 내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공포심 밖에 남지 않았죠. 그때 수사관들 눈은 인간의 눈이 아니었습니다. 맹수의 눈이었습니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자기들 원하는 대로 진술할 때까지 고문을 했습니다. 물 고문, 전기 고문, 인간 도살자인 거죠. 그런 경험을 한 번도 안 해본 재일 동포 학생이 도저히 감당을 못합니다. 압도적인 국가 폭력 앞에서는 아주 초라한 존재가 돼버리는 거죠. 두 달정도 서빙고 보안사에 있었지만 보안사에서 원하는 자술서를 쓰기 전에는 끝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포기해 버렸습니다. 내가 감당 못 하겠다, 이 고문의 고통을 하루라도 빨리 면하고 싶다는 마음에 가지도 않은 곳에 갔다고 하고 받지도 않은 돈을 받았다고 했어요. 애초에 다른 학생들에게 내가 지도하거나 지령을 내리거나 그런 관계가 아니었고 나보다 훨씬 의식적으로 뛰어난 동료들이었지만 내가 주범이 되어야만하는 사건이었으니까요. 그때 서울 의대 동료들 10명 가까이가 잡혀들어가는 엄청난 사건이 만들어졌습니다. 저때문에 학생 사회에도 커다란 상처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나를 친구로 사귄 거 외에는 아무런 죄가 없어요. 보안사 처장인가 과장인가하는 사람이 마지막에 이야기 하더군요. ‘니가 억울하다는 건 내가 안다. 하지만 시국이 이런 시국인데 학생들을 잠재워야 하니까 큰 사건이 필요하다. 니가 그 역할을 맡아라. 우리도 사람인데 세월이 지나면 풀어줄테니까 지금은 일단 협조하라’는 식으로요. 지금 돌아보면 말이 안되지만 그때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이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믿고 희망을 가졌습니다. 부채감, 위축된 마음 상태가 재판 내내 이어졌습니다. 그러한 정신 상태가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으로 1심 사형이라는 판결을 들을 때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생존을 허용하지 않는다.’  나는 일본에서 앞이 안 보이는 희망 없는 사회가 싫어서, 차별과 멸시가 싫어서 내 조국을 찾아왔는데 이 땅에서 나의 생존을 허용할 수 없다니. 공포보다 참 서글픈 마음이 들대요. 내 나라가 이런 나라인가하는 마지막 희망을 끊어버리는 거 아닙니까.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너가 죽으라고 하니 죽어주겠는데 그냥 죽지는 않겠다.’ 그래서 법정에 내가 어떤 마음으로 조국을 찾아왔는지 말을 해야겠다해서 하는데 판사에게 계속 제지를 당했습니다.  사형을 구형받고 그렇게 서대문 구치소로 돌아오니 보안 계장이 사형수에게는 수갑을 차고 생활하는 규칙이 있다며 ‘오해 하지마라. 극단적 선택을 방지하기 위해 너를 보호하기 위해 수갑을 채운다’라는 거에요. 표정은 너 같은 놈은 죽어야 된다 하는 표정으로 말이에요. 오전에는 너를 살려둘 수 없으니 죽인다고 하고 오후에는 죽는 것도 너 마음대로 죽을 순 없다. 그래서 너의 목숨을 통제한다 그런 뜻인데 오히려 이런 권력한테 내가 굴복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무기수로 감형될 때까지 6년 간 수갑을 찬 채로 생활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짐승의 시간이었습니다. 내 20대는 24살에 감옥에 들어가 사형을 받고 1982년 30살 때 무기수로 감형 받을 때까지는 짐승만도 못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그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어서 어떻게든 보람을 찾으려 했습니다. 사회생활이라고 한 번도 안 해본 어린 학생이 반공을 국시로 하는 나라에서 사형수로 살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짐승의 시간이었지만 내가 내 나라를 배우는 아주 소중한 시간이었죠. 나한테도 귀한 세월이었습니다.    국가보안법 피해자 연속 증언 프로젝트 에서 강종헌, 이철씨가 증언하고 있다. 이철 : 1970년대 한국에서 일어난 간첩(조작) 사건 배후를 발표할 때 꼭 조총련이 지령을 내렸다고 나옵니다. 나는 그 당시에는 왜 인혁당, 민청학련, 울릉도 사건도 그렇고 김대중 씨 납치 사건도 그렇고 왜 전부 조총련의 지령문과 자금을 받고 움직였다고 했는지 몰랐는데 나중에요 일본에서의 통일 운동 바람이 한국에 들어올까봐 이 사람들이 그걸 막으려고 그런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일본에는 북한과 협력하는 조총련이라는 재일동포 조직이 있기 때문에 남북해외 협력을 막아야 하고 또 조작하기도 쉬우니 공안 당국이 미리미리 손을 쓴 거죠. 그런 시대였습니다. 저는 1975년 12월 어느날 갑자기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는데 하루만 매 맞아도 ‘여기서 죽겠구나’ 생각이 들고 공포심에 사로 잡힙니다. 들어가자마자 속옷까지 벗긴 채로 두드려 패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너가 여기 왜 들어왔는지 니가 잘 알겠지?’라고 묻습니다. 내가 ‘모릅니다’라고 말하면 그때부터 구타가 이어집니다. 일부러 방문을 열어두는데 고문실에서 들리는 매 맞는 소리, 비명 소리 아비규환입니다. 아마 역도산 같이 힘 센 사람이 들어와도 버틸 수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고문의 프로란 말이에요. 우리는 무방비 상태의 아마추어고요. 30일 동안 진술서를 고쳐쓰고 진짜 간첩이 되었습니다. 아주 비참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이 저를 회유할 때는 ‘빨리 나가가지고 결혼식을 올려야 될 거 아니냐’고 했어요. 제가 당시 약혼자와 결혼식을 두 달 앞두고 있었거든요. ‘우리 말 안 들으면 너 약혼녀와 장모하고 데리고 와서 니가 보는 앞에서 벌거 벗겨 우리가 범해버리겠다’고 협박을 했어요. 그리곤 제 성기를 붙잡고 담배불로 지지는 성고문도 자행했습니다. 정말 겁이 납니다. 제발 약혼녀와 장모에게는 그런 짓을 하지 말아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렇게 39일 만에 서대문 구치소로 보내졌는데 감옥에 들어가는게 참 행복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 사람들 안 만나도 되잖아요.  그렇게 저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심 사형을 받았습니다 ‘이철 같은 놈은 사회에서 영원히 말살해야 한다’ 말살이라고 했어요. 내가 그래도 우리 나라를 찾아와서 좋은 한국 사람이 되려고, 진정한 한국인이 되려고 왔는데 그게 왜 영원히 말살돼야하는 이유가 되나 여러번 생각했죠. 거기에 약혼녀도 서대문 구치소에 들어와 있었어요. 제 활동을 알고도 묵인해줬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뒤늦게 죄책감과 자괴감이 몰려왔어요. 사형 선고를 받아 마땅하다,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죄없는 사람이 나 때문에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사형을 기다리는 공포심이 늘 있었습니다. 특히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면 언제든 집행을 할 수 있으니까요. 어느날은 이틀 동안 12명이 사형당하니 내가 13번째겠구나 각오도 했어요. 그래서 옷도 갈아입고 밥도 안먹고 기다리고 있었죠. 그랬더니 교도관이 이번 사형 집행 일정은 다 끝났다고 안심하고 자라고 하더군요. 무슨 잠이 옵니까. 당시에 여정남이라는 학생도 사형이 집행되던 시절이었기에 박정희 정권이 재일 동포인 나를 사형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국가보안법 피해자 연속 증언 프로젝트 행사를 마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감옥에서의 13년, 1988년 해방 그리고 이후의 삶 강종헌 : 많은 분들이 가셨습니다. 일반수도 그렇고 국가보안법으로 사형 받았던 남민전이나 울릉도 사건 피해자들도 돌아가셨습니다. 그런 가슴아픈 시간 속에서도 나를 지켜준 것은 민가협을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우리를 지켜주셨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자유를 되찾은 것입니다. 감옥 안에 있으면 자기 개인의 안락보다 좀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겠다는 청년학생, 노동자들이 계속 들어와요. 그걸 보고 나는 이 나라에 미래가 있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감옥 안에서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을 통해 신념에 대해 고민하고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서른일곱에 13년 만에 나와서 뭘 하겠는가 고민을 했죠. 결국 나의 원천으로 돌아가서 나고 자란 일본 땅에서 사회 운동을 하자는 마음이 굳어졌습니다. 재일 동포를 위해 또 해외의 통일 운동에 약간의 기여라도 할 수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의사의 꿈은 버렸지만 평화학을 전공해 강연도 하고 글도 쓰고 남북, 해외 3자 연대 통일운동에도 동참해 왔습니다. 그런 시간을 20여 년 보내다가 재심 신청을 해보자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재심 운동이 개인의 명예회복이나 진상 규명 문제도 있지만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운동 자체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강하게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재심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더라고요. 내가 제일 나약하고 형편없었던 그 시절을 또 한 번 마주하고 용서해야만 하니까요. 그래서 재일동포 유학생 사건 피해자 중 사형수로서 제가 맨 먼저 재심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검찰도 ‘빨갱이들’, ‘간첩들’한테 무죄를 줄 수 없다는 강한 사명감을 갖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2013년 고등법원에서 무죄를 받았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 나라를 식민 통치한 36년의 세월 만에 저도 무죄를 받은 거에요.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는 말이 있는데 그래도 나는 무조건 환영했습니다. 그냥 이 상황이 고맙더라고요. 이철 : 사실 가족 면회도 1심이 끝난 뒤부터에나 시작됐어요. 그 때 가족들이 와서 ‘일본에서 우리 친구들이 구원회를 조직해 얼마나 열심히 구원 운동을 하고 있는데 너가 여기서 똑바로 안 살면 그 친구들에게 부끄럽지 않냐’고 어머님께 꾸지람을 듣기도 했어요. 그래서 모든 잘못은 나에게 있다는 다람쥐 쳇바퀴를 깨야겠다고 마음먹고 내 자신을 재확립하는 그런 과정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1979년에 무기징역 감형을 받고서야 수정을 풀게 되었습니다. 감옥 안에서의 시간도 똑같거든요. 내 청춘의 시간 아깝지 않게 살기 위해 공부도 많이하고 특히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에게 삶의 태도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당시 참혹했던 감옥 내 인권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들도 많이 벌였고요. 안동교도소에서 개천철 특사로 나오고 한 달 만에 약혼녀와 오랜 약속을 지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감옥에 들어간 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제가 교도소에 있을 때 돌아가셨기 떄문에 부모님 묘소도 들르고 구원회 동료들도 만날 겸 아주 가벼운 짐을 가지고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 길로 고국 방문의 길이 막혔습니다. 통행증만 받아서 일본에 갔는데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려는데 한국에서 여권 발행을 안해주는 거에요. 저희 부부는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의 도움도 받았고, 또 저희들의 투쟁 과정에서 재일 동포에 대한 인식도 많이 바뀌어서 한국에서 평화 통일 운동을 하며 남은 생을 보내려고 했죠.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여권을 발행해주지 않아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고국 땅을 밟기까지 13년이 걸렸습니다. 어쩄든 일본에 살아야하는 모양이다 해서 양심수 동우회를 만들고 제가 회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 거처를 마련하는 문제와 북한 동포들 홍수 피해가 났을 때에도 모금 운동도 벌였죠. 제가 만약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평범한 재일동포의 한 사람으로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감옥에서 분단의 아픔을 느끼고 감옥을 나와 일본 땅에서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여정에 동참할 수 있게 됐으니 감옥에 갇힌 삶이 오히려 고마운 것 아닌가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국가보안법은 시민들의 힘으로 없애야만 진정한 해방을 맞이할 수 있어요 강종헌 : 솔직히 말하면 민주 정부도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를 적극 다루고 있지 못하죠. 당사자 의식이 없으면 이 문제를 꾸준하게 추구하기는 어렵습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있다든가 하며 국가보안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분명 있습니다. 저는 그걸 하나의 신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평화 공존을 위해 북한을 적대하는 악법을 없애는 제도적 노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국가보안법 하에서 생각을 자기 검열해야하는 것도 우리가 늘 계엄 상태에 있는 것과 같다는 생각도 해보았으면 합니다. 일본에도 치안유지법이 있었습니다. 이 법이 국가보안법의 모태가 되기도 했죠. 일본에서 치안유지법은 패전에 따라 자연스레 사라졌습니다. 다시 말해 일본 시민들의 힘으로 없앤 것이 아닙니다. 일본 민주주의는 악법을 시민의 손으로 없애본 경험이 많지 않아 허약한 편입니다. 국가보안법은 우리 시민들의 힘으로 없애야만 진정한 해방을 맞이할 수 있다는 말씀도 보태고 싶습니다. 그런데 지금 시기에 국가보안법을 없애려면 그 헌법적 근거인 헌법 3조 영토 조항을 같이 개정해야 합니다. 엄연히 눈앞에 있는 민족 구성원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것도 모자라 대한민국 영토로, 점령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냉전 시대에나 어울리는 시대 착오적인 조항입니다. 당사자 의식을 갖고 힘을 모아나갔으면 합니다. 이철 : 이승만이 1948년에 만든 국가보안법이 70년을 버티며 수많은 간첩을 조작해 냈습니다. 저희들이 그 증인입니다. 이 법을 없애는 다른 이유가 필요할까요. 아울러 그 법을 이용해 저희를 잡아 가두었던 지금의 국가정보원도 필요 없습니다. 이러한 공안 제도들이 남아 있다면 그들은 활동 실적을 필요로 할 것이고 그렇다면 국가보안법을 반드시 이용할 겁니다. 재일동포 사회도 국가보안법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김태중 시민기자 ktj628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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