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 하나로 미국 대중문화 바꾼 베이브 루스 [뉴스] 공 하나보다 무거웠던 시대
조지 허먼 루스 주니어(George Herman Ruth, Jr., 1895~1948), 곧 베이브 루스는 야구선수였지만 야구장 안에만 갇혀 있던 인물이 아니었다. 그를 설명하는 가장 짧은 말은 홈런왕 이지만, 가장 정확한 말은 미국 대중문화를 바꾼 사람 이다. 그는 공을 멀리 날렸고, 그 공은 미국사회의 풍경까지 바꾸어 놓았다.
루스가 태어난 1895년은 미국이 아직 산업화의 열기에 들떠 있던 시기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1948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새로운 국제질서가 시작되던 때였다. 그의 생애는 미국이 변방국가에서 세계강국으로 성장한 과정과 거의 겹친다. 그러니 루스를 단순한 운동선수라고만 부르면 마치 세종대왕을 한글 만든 사람 정도로 소개하는 셈이다.
1920년의 루스(위키피디아)
문제아가 영웅이 되다
루스는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부모는 감당하지 못했고, 결국 그는 세인트 메리 소년 산업학교에서 자라게 된다. 오늘날 표현으로 하면 비행 청소년에 가까웠다. 하지만 인생은 종종 성적표보다 우연을 더 좋아한다. 그곳에서 야구를 배웠고, 그의 재능은 곧 눈부시게 드러났다.
잭 던(John Joseph Dunn, 1857~1924)이 그를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데려갔고, 어린선수였던 루스를 사람들이 베이브 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기 라는 별명이 평생 따라다녔지만, 정작 그가 휘두른 방망이는 결코 아기 장난감이 아니었다.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 있는 루스의 출생지(위키피디아)
야구의 규칙은 그대로였지만 야구는 달라졌다
처음 루스는 뛰어난 투수였다. 그러나 그의 진짜 재능은 방망이에서 폭발했다.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뛰던 그는 1919년 한 시즌 29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당시에는 믿기 어려운 숫자였다. 이어 뉴욕 양키스로 이적한 뒤 1920년에는 무려 54개, 1921년에는 59개, 1927년에는 60개의 홈런을 날렸다. 당시 다른 여러 구단 전체보다 혼자 더 많은 홈런을 친 해도 있었다.
오늘날에는 홈런이 흔하지만, 당시에는 홈런보다 희생번트와 도루가 미덕이었다. 루스는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왜 잘게 썰어 먹나. 통째로 삼키면 되는데.
그는 야구의 계산법 자체를 바꾸었다.
베이브 루스의 부모인 조지 허먼 시니어와 캐서린(위키피디아)
미국은 루스를 소비했고, 루스는 미국을 키웠다
루스가 등장하기 전 야구는 인기 있는 운동이었다. 루스가 등장한 뒤 야구는 거대한 산업이 되었다. 수만 명이 경기장을 찾았고 신문은 그의 기사로 팔렸으며 라디오는 그의 이름을 외쳤다. 광고가 붙고 기념품이 팔리고 선수는 유명인이 되었다.
오늘날 거대한 운동산업의 출발점에는 루스가 있다. 그는 현대 스포츠 스타의 원형이었다. 잘 치고, 잘 웃고, 잘 먹고, 잘 떠들고, 사고도 곧잘 쳤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경기력과 화제성을 동시에 갖춘 초대형 유명인이었다. 다만 오늘날 소셜미디어가 있었다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을 것이다. 아침에는 홈런이 실시간 검색어, 저녁에는 술자리 사건이 실시간 검색어였을 가능성이 높다.
1913년 메릴랜드주 세인트 메리 소년 산업학교에서의 베이브 루스(뒷줄 가운데 위키피디아)
금주법도 그의 입맛까지는 막지 못했다
루스는 술을 좋아했고 음식도 좋아했고 여성 편력도 적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1920년부터 1933년까지 금주법이 시행되었다. 나라에서는 술을 금지했지만 사람들은 법전을 읽지 않았다. 루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정치인들은 술을 금지하면 국민이 착해질 것이라 믿었다. 국민은 술을 숨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결국 법은 남았지만 술도 남았다. 루스는 그 시대의 모순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았고 영웅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의 허점까지 포함해 사랑했다. 영웅에게 필요한 것은 성인이 되는 일이 아니라 사람 냄새를 잃지 않는 일이라는 사실을 그는 보여주었다.
1912년 메릴랜드주 세인트 메리 소년 산업학교에서의 베이브 루스(맨 윗줄의 왼쪽 위키피디아)
대공황 속 희망이 된 홈런
1929년 미국은 대공황을 맞았다. 실업자가 넘쳐났고 공장은 멈추었다. 지갑은 얇아졌지만 야구장은 오히려 사람들로 붐볐다. 루스의 홈런은 빵을 만들어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절망을 잠시 잊게 해 주었다. 경제학자는 숫자를 설명했지만 루스는 웃음을 만들어 냈다. 배고픔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희망은 조금 늘어났다. 그것도 사회가 굴러가는 힘이었다.
1914년 볼티모어 오리올스 소속의 루스가 담긴 야구 카드(위키피디아)
흑인 선수들과의 관계는 시대를 앞서 있었다
루스가 활동하던 시절 미국 프로야구는 인종차별로 흑인선수들의 출전을 허용하지 않았다. 재키 로빈슨(Jack Roosevelt Robinson, 1919~1972)이 메이저리그의 벽을 허문 것은 1947년이었다. 루스는 흑인선수들과 함께 친선경기를 벌였고 그들의 실력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물론 오늘날 기준으로 완전한 평등운동가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당시 분위기를 생각하면 적지 않은 의미가 있었다. 야구공은 흰색이었지만 실력에는 피부색이 없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깨닫기 시작했다.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투구하는 루스(위키피디아)
숫자는 기록이지만 영향력은 역사다
루스는 통산 714개의 홈런, 2873개의 안타, 2214개의 타점을 남겼다. 미국 야구 명예의전당이 처음 만들어진 1936년, 그는 첫 선정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숫자는 시간이 지나면 깨진다. 기록은 언젠가 새 주인을 만난다. 그러나 시대를 바꾸는 영향력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루스는 야구를 구경거리에서 문화로 만들었고, 운동선수를 직업인이 아니라 사회적 상징으로 바꾸었다.
1916년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 타격 연습 중인 루스(위키피디아)
오늘의 한국은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한국 역시 운동선수의 활약에 열광한다. 그러나 때로는 승패만 남고 사람은 사라진다. 선수는 기록제조기가 되고, 팬은 성적표만 바라본다. 잘하면 영웅, 못하면 역적이라는 분위기도 낯설지 않다. 루스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다. 실수도 많았고 구설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회는 그의 재능을 최대한 살렸고, 실패까지 포함해 한 사람의 가능성을 품었다.
한국사회도 이 점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 번의 실수로 미래를 닫아 버리는 문화는 없는가. 결과만 따지고 과정을 잊지는 않는가. 성적만 보고 재능을 판단하지 않는가. 야구는 실패가 많은 경기다. 세 번 타석에 들어가 두 번 실패해도 훌륭한 타자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한 번의 실패에도 인생전체를 판정하려 드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홈런을 치겠다고 큰소리를 치는 사람은 많다. 막상 방망이를 들면 번트도 제대로 대지 못하는 일도 흔하다. 국민은 점수를 보고 싶은데, 어떤 정치인은 타석에서 심판 탓, 공 탓, 날씨 탓만 한다. 베이브 루스는 적어도 방망이는 휘둘렀다. 삼진도 당했고 홈런도 쳤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공만 비판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늘 한국에 필요한 것도 어쩌면 이런 태도일지 모른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 사람을 결과보다 가능성으로 평가하는 문화, 기록보다 사회적 희망을 만드는 지도력 말이다. 베이브 루스는 야구공을 담장 밖으로 보냈다. 그가 남긴 더 큰 홈런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담장 밖으로 날려 보낸 일이었다. 공은 떨어졌지만, 그가 보여준 가능성은 아직도 떨어지지 않고 있다.
원조 양키 스타디움의 모뉴먼트 파크에 있는 베이브 루스 헌정비(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