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는 모두의 것 이라 했다가 기축옥사 몰린 정여립 [뉴스] 1589년에 일어난 역모 재판의 비극
정여립(1546~1589)은 전주 사람이다. 1567년 진사가 되고 1570년 문과에 급제했으니 스물넷에 벼슬길에 오른 수재였다. 처음엔 이이(1536~1584)의 눈에 들어 서인의 기대주로 대접받았다. 그러나 이이가 1584년 세상을 뜨자 동인 편에 서서 옛 스승을 헐뜯었다. 당을 갈아탄 사람이 욕먹는 건 예나 지금이나 같은데, 이번엔 임금이 먼저 나섰다. 선조(1552~1608)가 곱지 않은 눈으로 보자 정여립은 벼슬을 던지고 진안 죽도로 내려갔다.
정여립(나무위키)
활쏘기 모임은 어떻게 군대가 되었나?
죽도에서 그는 대동계를 꾸렸다. 양반이든 무사든 천민이든 가리지 않고 모여 매달 보름에 활을 쏘고 술과 음식을 나눴다. 신분 따지기를 밥 먹듯 하던 나라에서 한솥밥이라니, 그것부터 불온했다. 1587년 전라도에 왜구가 쳐들어오자 대동계가 나가 물리쳤으니 요즘 같으면 표창장감이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나라를 지킨 모임이 2년 뒤 반란의 증거로 둔갑하는 법이다.
더 위험한 건 말이었다. 서인의 손을 거쳐 고친 『선조수정실록』은 그가 천하는 모두의 것이니 정해진 주인이 따로 없다 는 ‘천하공물설’을 폈고, 누구를 섬긴들 임금 아니냐 는 ‘하사비군론’을 말했다고 전한다. 왕조 한복판에서 임금 자리의 주인을 따졌으니, 그를 공화주의자의 싹으로 높이는 후대의 평가도 일리가 있다. 다만 이 말들이 그를 죽인 쪽의 기록에 실려 있다는 점은 짚어야 한다.
정여립 생가터 공원 ⓒ 이완우
한강 얼음을 기다린 역모
1589년 음력 10월 2일, 황해감사가 임금에게 몰래 올린 보고서인 비밀 장계(狀啓)가 올라왔다. 정여립이 한강이 얼 때를 틈타 황해도와 호남에서 한꺼번에 서울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고변(告變,역모 신고)이었다. 10월부터 얼음 걱정이라니 역모치고는 느긋했다. 선조가 의금부 도사를 보내자 정여립은 아들과 죽도로 달아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살해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어느 쪽이든 죽은 사람은 말이 없고, 말 없는 사람의 죄는 가장 빨리 굳는다.
진짜는 그다음이었다. 수사를 이끈 위관은 서인의 우두머리 정철(1536~1593)이었다. 「관동별곡」을 지은 풍류시인이 동인을 추궁하는 자리에 앉았으니, 붓끝은 곱고 칼끝은 매서웠다. 동인의 거물 이발(1544~1589)을 비롯해 3년 동안 천여 명이 죽거나 귀양 갔다. 호남의 큰 선비 최영경(1529~1590)은 정체 모를 주모자 ‘길삼봉’으로 몰려 옥에서 숨졌다. 얼굴도 주소도 없는 주모자였으니, 인상착의 없는 수배령이 이만하다.
정철(위키백과)
남은 상처, 끝나지 않은 논쟁
동인은 크게 꺾였고 호남은 ‘반역향’이라는 낙인을 오래 짊어졌다. 그 낙인이 호남사람의 벼슬길을 얼마나 막았는지는 학계에서도 다투는 대목이다. 정여립이 정말 모반을 꾀했는지, 서인이 만든 사건인지도 400년 넘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1591년에는 정철이 광해군(1575~1641)을 세자로 세우자고 했다가 선조의 눈 밖에 나 귀양 갔고,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쪼개졌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조정은 숱한 인재를 잃어 헐거워진 채 전란을 맞았다.
정여립 생가터 조형물과 우물 ⓒ 이완우
오늘의 한국이 얻을 것
첫째, 수사하는 자와 이해가 얽힌 자가 같으면 안 된다. 정적이 판관이 되면 재판은 청산이 아니라 보복의 옷을 입는다.
둘째, 한 장의 고변에 천 명이 엮이는 일을 막으려면 사람의 권세보다 증거와 절차가 앞서야 한다.
셋째, 지역 낙인은 한번 찍히면 400년을 간다. 선거철마다 지역구도를 들먹이는 정치가 남아 있다면 기축년의 유산을 되살리는 셈이다.
넷째, 신분을 넘어 모인 대동계처럼 시민이 스스로 모여 힘을 합치는 일을 의심부터 하는 버릇을 버려야 한다. 나라를 지킨 모임을 2년 뒤 역적의 소굴로 만든 것이 1589년 기축년의 방식이었다
다섯째, 천하가 모두의 것이라는 말은 이제 범죄가 아니라 헌법 제1조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적혀 있다. 정여립은 그 말로 역적이 되었는데, 우리는 그 말을 헌법 맨 앞에 새겼다.
그러니 2024년 12월 3일 밤 윤석열이 저지른 일이 더 아프다. 국회와 정당의 활동을 막겠다는 포고령이 나왔고, ‘반국가세력’이라는 낡은 이름표가 다시 불려 나왔다. 역적 낙인을 정치의 도구로 쓰는 방식은 기축년 그대로였다. 그래서 내란을 청산하는 일이 또 하나의 기축옥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죄를 묻되 증거로 묻고, 방어할 권리를 끝까지 지켜 주는 것이 이긴 쪽이 할 일이다. 정여립이 정말 반역했는지는 지금도 가려지지 않았다. 다만 판결 없는 사건에 천 명의 형벌이 먼저 내려졌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