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 의 뒤집힌 세상 보여준 L 캐럴, 공정 꿈꾸다 [사회혁신] 토끼를 쫓다 굴에 떨어진 소녀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지은 이가 영국 옥스퍼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수학을 가르친 수학자였고, 말더듬이 있었으며,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틈만 나면 투표제도를 계산하던 사람이라는 사실까지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의 이름은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 본명 찰스 러트위지 도지슨(Charles Lutwidge Dodgson, 1832–1898)이다.
1857년의 루이스 캐럴(위키피디아)
제 이름부터 뒤집은 사람
도지슨은 영국 체셔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공부하고 수학을 가르쳤다.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였고 사진가이기도 했다. 1861년 영국 성공회 부제가 되었으나 사제는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확정되어 있지 않다. 말더듬 때문에 설교를 꺼렸다는 설명도 있지만 그것만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필명도 독특하다. 자신의 이름 찰스와 러트위지를 라틴어식으로 바꾼 뒤 순서를 뒤집어 루이스 캐럴이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제 이름부터 뒤집은 사람이었다.
1856년경, 24세 루이스 캐럴(위키피디아)
1862년 7월 4일, 토끼굴이 열리다
1862년 7월 4일, 도지슨은 크라이스트처치 학장 헨리 리델(Henry Liddell, 1811–1898)의 딸들과 템스강에서 뱃놀이를 했다. 열 살 앨리스 리델(Alice Liddell, 1852–1934)이 이야기를 청했고, 그날 들려준 이야기가 훗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었다.
도지슨은 이 이야기를 글로 써달라는 앨리스의 요청을 받아 직접 글을 쓰고 그림까지 그렸다. 1864년 손수 만든 필사본을 앨리스에게 선물했고, 이를 크게 고쳐 1865년 책으로 출간했다. 삽화는 존 테니얼(John Tenniel, 1820–1914)이 맡았다.
앨리스는 훗날 결혼하여 앨리스 하그리브스가 되었다. 1932년 루이스 캐럴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미국을 방문했고, 5월 2일 컬럼비아 대학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5월 4일은 앨리스 자신의 여든 번째 생일이었다. 열 살 소녀가 자신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든 사람의 탄생 100주년 행사에서 박사모를 쓴 셈이다. 현실이 이상한 나라보다 더 이상할 때가 있다.
앨리스 리델, 20세 시절(위키피디아)
아이에게서 훈계를 덜어낸 책
당시 어린이 책은 교훈투성이였다. 루이스 캐럴은 그것을 뒤집었다. 아이작 와츠(Isaac Watts, 1674–1748)의 교훈시에서 부지런한 꿀벌 대신 악어를 등장시켰고, 로버트 사우디(Robert Southey, 1774–1843)의 점잖은 시는 엉뚱한 노인의 문답으로 바꾸었다. 착한 아이가 교훈을 얻는 이야기가 아니라, 말이 안 되는 세계에서 아이가 스스로 묻고 판단하는 이야기를 내놓은 것이다.
1871년에 나온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재버워키」는 루이스 캐럴이 만들어낸 낱말로 가득하다. 뜻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말인데도 소리와 리듬만으로 상상력을 움직인다. 그 가운데 일부는 영어에 정착해 오늘날까지 쓰인다.
아이작 와츠 초상화(위키피디아)
동화 뒤에 숨은 투표 계산
루이스 캐럴의 진짜 관심은 동화만이 아니었다. 그는 선거제도를 수학적으로 연구했다. 세 후보가 경쟁할 때 A가 B를 이기고, B가 C를 이기는데 C가 다시 A를 이기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그렇다면 누가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후보인가. 단순한 다수결만으로는 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프랑스의 니콜라 드 콩도르세(Nicolas de Condorcet, 1743–1794)가 먼저 연구한 이 문제를 캐럴도 깊이 파고들었다. 그는 1870년대부터 선거방식과 의회 대표제 문제를 다루었고, 선거 결과가 실제 유권자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는지 따졌다.
20세기 중반에는 정치학자 덩컨 블랙(Duncan Black, 1908–1991)이 루이스 캐럴의 선거관련 연구를 다시 찾아내 학계에 소개했다.
루이스 캐럴은 선거만 계산한 것이 아니다. 1883년에는 잔디 테니스 대회의 대진 방식까지 분석했다. 대진 운 때문에 실력이 뛰어난 선수가 초반에 강자를 만나 탈락하고, 상대적으로 약한 선수가 더 높은 순위에 올라갈 수 있다는 문제였다. 누가 이겼는지 만 볼 것이 아니라, 이기는 사람을 가리는 방식자체가 공정한지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1794년 이전의 콩도르세 초상화(위키피디아)
선고가 먼저, 평결은 나중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하트 여왕 법정은 상식이 뒤집힌 공간이다. 결론을 먼저 정하고 증거와 절차를 그 뒤에 끼워 맞추는 듯 한 모습이 희극적으로 그려진다. 동화에서는 웃고 지나갈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2024년 윤석열의 12·3 불법계엄 이후 내란관련 재판을 지켜보는 시민에게 필요한 것도 결국 기본원칙이다. 증거가 먼저이고 판단은 나중이어야 한다. 절차가 먼저이고 결론은 뒤따라야 한다. 권력이 원하는 결론을 먼저 정해 놓고 법과 절차를 맞춰서는 안 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험프티 덤프티(Humpty Dumpty)는 자신이 사용하는 낱말의 뜻은 자신이 정한다고 우긴다. 말의 뜻을 권력이 마음대로 바꾸기 시작하면 법도 민주주의도 이상한 나라가 된다.
1863년 루이스 캐럴(위키피디아)
선거와 교육을 다시 생각하다
루이스 캐럴이 오늘의 한국선거를 보았다면 투표용지부터 들여다봤을 것이다. 승자독식 방식에서는 득표율과 의석비율이 크게 어긋날 수 있다. 2024년 총선에서는 비례대표와 위성정당 문제가 겹치면서 표를 어떻게 세느냐가 의석수를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선호투표, 결선투표, 비례대표제 등 여러 선거제도를 비교하고 시험해 볼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그 표를 어떤 방식으로 계산해 민의로 바꾸느냐 이기 때문이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캐럴은 수학을 가르치면서 환상의 세계를 만들었다. 논리와 상상력, 숫자와 언어를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함께 움직였다. 셈하는 머리와 이야기하는 머리는 따로 나눠 맡겨야 할 능력이 아니다. 한 사람 안에서 함께 놀 수 있다.
말년의 캐럴(위키피디아)
두 배로 달려야 제자리를 지킨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붉은 여왕의 나라는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에 있는 세계다. 그곳에서는 제자리에 있기 위해서도 있는 힘을 다해 달려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내란청산도, 사법개혁도, 자본으로부터 언론의 독립도, 미룬다고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말만 무성하고 실제 변화가 없다면 제자리조차 지키기 어렵다.
루이스 캐럴은 1898년 1월 14일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떠난 지 128년이 지났지만 이상한 나라의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누가 이겼는가. 누가 다수인가. 누가 말의 뜻을 정하는가. 그리고 판결을 먼저 정해 놓고 절차를 나중에 끼워 맞추고 있지는 않은가.
토끼굴은 동화 속에만 있지 않다. 민주주의가 이상한 나라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그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한다.
길퍼드 마운트 묘지에 있는 루이스 캐럴의 무덤(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