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승계 흔들리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 [뉴스] 주진오 역사학자·상명대 명예교수
국가를 비롯해 어떤 사회, 기관에도 권력이 존재하지요. 따라서 권력을 어떻게 장악할 것이며 그것을 안정적으로 계승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권력은 독점적인 속성이 있어서, 부자 간이나 형제자매 간에도 나눌 수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아무리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권력을 갖기 위한 투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을 배신하지 않으면서, 권력을 이어갈 수 있는 인물을 잘 양성해서 넘겨주고 싶은 것 또한 자연스런 일인데요. 많은 경우 세습 또는 지명을 원하지만, 그들이 제대로 하지 못하면, 아예 권력을 적대세력에게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국가나 조직의 장래보다 사적인 이해관계가 적용되었을 때, 권력 자체가 무너지고 마는 모습을 역사에서 찾아보려 해요.
적장자가 잇따라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 조선 왕조 후기
조선의 가장 이상적인 왕위 계승은 왕비가 낳은 큰 아들인 적장자가 왕위를 이어받는 것이었습니다. 원자가 세자로 책봉되어, 세자수업을 받은 후에 안정적으로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조선 후기 숙종 이후, 왕비들이 자식을 낳지 못했습니다. 유일하게 순조의 왕비였던 순원왕후가 효명세자를 낳았으나, 왕위에 오르기 전에 죽고 말았지요.
숙종에게는 인경, 인현, 인원왕후가 차례로 왕비에 올랐지만 모두 자식이 없었습니다. 경종의 어머니였던 장희빈은 잠시 왕비에 올랐지만, 다시 후궁으로 격하되었다가 사사되었지요. 경종에게도 단의, 선의왕후 둘이 있었고 영조에게도 정성, 정순왕후가 있었지만 모두 자식이 없었습니다. 영조의 아들 효장세자와 사도세자는 모두 후궁이 나았어요.
정조의 왕비 효의왕후도 자식을 낳지 못했습니다. 일찍 죽은 문효세자와 순조를 낳은 것은 후궁들이었어요. 순조의 순원왕후가 낳은 효명세자는, 나중에 신정왕후가 되는 세자빈과의 사이에서 세손을 낳아 헌종이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하지만 헌종 역시 효헌, 효정왕후에게서 모두 아들을 낳지 못했어요. 따라서 영조의 혈통이 단절되었습니다.
조선왕조 쇠락의 분수령 이룬 효명세자의 죽음
효명세자는 1809년(순조 9년) 순조와 순원왕후의 적장자로 태어났습니다. 왕비의 원자 탄생은 헌종 왕비 명성왕후가 숙종을 낳은 이래 150년 만의 경사였어요. 1812년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819년에 가례를 치렀습니다. 외모도 출중했고 재능이 뛰어난 인물로서, 1827년 순조가 대리청정을 명했을 때 신하들이 환영하였을 정도로 매우 큰 기대를 받았지요.
그는 20살도 안 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단호한 일처리로 조정의 공직 기강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널리 등용했는데, 대표적 인물이 바로 박규수였어요. 그런데 1830년 불과 22세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2년 뒤인 1834년에 순조가 죽자,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이 조선 왕조 최연소인 8세에 왕위를 계승했어요.
효명세자는 안동 김씨 세도정권을 견제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자 안동 김씨는 그의 업적을 모두 부정하여 조선왕조의 새로운 활력은 꺼져 버렸어요. 아울러 그의 총애를 받았던 박규수는 그 충격으로 무려 18년간을 은둔하고 말았습니다. 효명세자와 개혁파 박규수가 함께 나라를 이끌어 나갔다면 조선의 운명이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8살 헌종 즉위와 안동 김씨 세도정권의 강화
2016년에 큰 인기를 끌었던 대체사극 에는, 박보검 배우가 연기한 세자 이영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거기에서도 대리청정을 하며 왕실을 압박하고 능멸하는 안동 김씨 세도정권과 맞서는 모습이 나오는데요. 물론 드라마에서는 실제 역사와 달리, 그가 결국 왕위에 등극하고, 세자빈 조씨가 궁궐을 나가는 것으로 처리되었습니다.
배우 박보검이 픽션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효명세자 이영을 연기했다.
하지만 순조의 손자인 헌종 즉위,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다시 안동 김씨 가문에서 왕비 선택으로 흘러가면서 세도정권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었지요. 이 시기에 척사윤음 (斥邪綸音)이 반포되었고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발생했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때는 프랑스인 신부들이, 1846년 병오박해 때는 김대건 신부가 처형을 당하기도 했어요.
또 근해에 서양 선박들인 이양선(異樣船)이 출몰하기 시작했습니다. 더욱 극심해진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민생은 파탄의 직전까지 내몰리고 있었지만, 이에 대한 대책은 세우지도 못했지요. 수렴청정이 15세 때에 끝나고 효현왕후도 죽으면서 헌종이 안동 김씨를 견제하려는 모습을 보였지만, 1849년 21세에 자식도 없이 요절하여 왕통이 끊겼습니다.
도저히 왕이 될 수 없었던 강화도령 이원범
따라서 직계 혈통이 완전히 끊어졌을 때는, 선조와 같은 ‘촌수가 가장 가깝고 항렬이 맞는 종친’을 고르는 친친(親親)이 적용될 수밖에 없었지요.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이원범을 순조의 양자로 입적시켜 덕원군에 봉하고 이어서 차기 국왕으로 지명했습니다. 이원범은 19살 성인이 다 된 나이였지만, 그럼에도 3년간의 수렴청정이 이루어졌습니다.
순조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위를 이어받은 철종은 원래 왕이 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지요. 그의 증조부 은언군은 사도세자가 영조의 궁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 상계군이 역모에 연루되어 처형되었고, 그는 유배생활을 전전했어요. 죽이라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정조가 비호해서 강화도에 유배되어 겨우 살아 남았습니다.
그런데 순조 즉위 후에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며 천주교 박해를 할 때 결국 죽음을 당했어요. 그는 아내와 며느리가 천주교 신자로 먼저 죽음을 당한 후에, 유배지를 탈출했다가 잡혀 1801년 결국 사사되었습니다. 서자 이쾌득은 살아남아 세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은 역모로 죽고 이욱과 이원범 이복형제가 강화도에서 살고 있었지요.
항렬마저 무시한 철종의 왕위계승
그런데 문제는 철종이 순조와 순원왕후의 양자로 입적하게 되면서, 선왕보다 항렬이 낮은 사람이 왕이 된다는 원칙이 무너졌습니다. 따라서 종묘 제례 때, 자신보다 조카 뻘이 되는 헌종에게 절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지요. 이로 인한 예송 논쟁에서 패배한 권돈인과 그의 친구였던 추사 김정희가 다시 유배를 간 것도 이 때문이었지요.
보물 1492호 철종 어진을 바탕으로 다시 그린 표준 영정.
철종의 왕비 철인왕후 역시, 안동 김씨 가문이었습니다. 수렴청정에 이어 외척까지 모두 세도가문으로 둘러싸인 채, 그의 왕권은 허수아비나 다름이 없었어요. 그러는 가운데 서구 열강들은 동아시아를 압박하여 개항을 강요하는데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삼정문란으로 인한 임술농민봉기가 일어났는데요.
친정에 들어간 후 농민 출신의 왕으로서 삼정이정청을 설립하고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노력도 보였지만, 결국 세도가문의 방해로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최악의 상황에 내몰린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하기에 이르렀지요. 그는 5남 6녀를 낳았지만, 모두 일찍 죽고 딸 하나만을 남긴 채 33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정왕후의 수렴청정을 위한 선택은 12살 고종
철종을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은 남연군의 4남인 흥선군의 둘째 아들 12살 이명복이었는데요. 할아버지 이채중은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6대손으로 이미 종친이 아니었는데, 1815년에 순조의 명으로 사도세자의 서자였던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하면서 남연군이 되었습니다. 은신군은 16살이던 1771년, 영조에 의해 제주도로 유배를 당했다가 사망했어요.
남연군에게는 흥녕군 이창응, 흥완군 이정응. 흥인군 이최응, 흥선군 이하응 네 아들이 있었지만 흥녕군과 흥완군은 1828년과 1848년에 이미 죽었습니다. 흥완군의 아들 이재원은 1831년 생으로 흥녕군의 양자로 들어가 있었고, 흥인군의 아들 이재긍은 당시 7살이었지요. 흥선군의 큰 아들 이재면은 이미 19살이라, 신정왕후의 수렴청정이 불가능했습니다.
1869년에 그린 흥선대원군 초상. (보물 제1499-2호)
흥선군이 아예 왕이 되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그는 철종과 같은 항렬이었기 때문에 결국 신정왕후와 흥선군의 밀약에 따라 이명복이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의 양자로 입적하면서 익성군에 봉해지고, 이어서 왕위에 오른 것이지요. 흥선군은 조선 역사에서 유례없이 살아있는 대원군이 되었습니다. 그 앞의 세 명은 모두 사후에 대원군으로 추증되었어요.
아무런 근거가 없었던 흥선대원군의 집권
그런데 신정왕후는 수렴청정을 하면서 대원군에게 정사를 위임했습니다. 흔히 말하는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는 ‘대원위분부’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졌지만, 공식적으로 신정왕후의 명령으로 집행되었어요. 아무런 이는 아무런 법적 제도적 근거가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대원군은 고종의 생부였을 뿐, 엄연히 고종은 법적으로 익종과 신정왕후의 아들이었어요.
‘대원위분부’로 행해진 흥선대원군의 공문서.
더구나 고종이 15세가 되어,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을 끝낸 시점부터는 마땅히 친정이 시작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원군은 상왕 노릇을 하면서 섭정을 계속 이어나갔어요. 결국 즉위 10년이 지난 1873년에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물러나게 됐습니다. 대원군에게는 합법적인 지위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 대응도 할 수 없는 권불십년이었지요.
하지만 그의 권력욕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아들과 손자들을 내세워 고종의 왕권을 빼앗으려고 했어요. 그러다 보니 고종은 외가이자 처가인 여흥 민씨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세도정치라고 할 수 있어 많은 폐단을 낳았지요. 권력은 나눌 수 없는 것인데, 한 나라에 두 개의 태양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1884년 퍼시벨 로웰이 찍은 최초의 고종 사진.
민주공화국의 권력은 국민이 선택하는 것
조선 왕조 후기가 되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종친들이 거의 사라져, 전혀 왕이 될 수 없었던 방계가 세자 수업도 거치지 않은 채 불려와 왕이 되었어요. 그 과정에서 어떻게든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할 수 있는 어린 인물을 왕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러니 그 국왕들이 급변하는 세계정세와 세도정치로 말미암은 민생의 고통을 제대로 해결할 수 없었지요.
왕실인 전주 이씨 중에서만 권력의 계승자를 선택해야 했던 조선 왕조와 달리, 지금 우리는 민주공화국에 살고 있습니다. 후계자를 선택하는 것은 국민이지요. 그런데 최근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쟁의 본질도, 결국 권력의 계승을 둘러싸고 나타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다 보니 권력 내부에서도 동지의 언어가 아니라 적으로 모는 언어가 난무하는데요.
심지어 시대의 어른이 되어야 할 지식인과 종교인들까지 가세하여, 지나친 용어로 생각이 다른 이들을 몰아붙이지만 결코 인위적인 방식으로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최고 권력자 밑에서 2인자 행세를 하던 이들은 거의 모두 권력계승에 실패했어요. 국민이 원하는 다음 지도자는 분열의 언어가 아니라 통합의 메시지를 내놓는 사람일 것입니다.주진오 한국현재사 formchu@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