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되려는 자 대신 무엇을 하려는 자 여야 [칼럼] 나중에 뭐가 되고 싶니? 어릴 적부터 끊임없이 들었던 말이다. 하지만 필자를 포함해 많은 이들은 청년이 되어서도 이 질문에 스스로 솔직한 대답을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세상이 말하는 근사하고 안정된 기득권의 반열에 오르는 무언가가 되고자 했고, 그것이 정답이자 옳은 길이라 믿었을 테다. 세상은 늘 무엇이 될 것인가 만 강요하며 직함과 타이틀을 물었지, 정작 어떻게 살고 무엇을 할 것인가 는 묻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내 삶의 진짜 주인으로 살기보다 세상이 정해놓은 자리 와 타이틀만 좇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순종을 강요하는 주입식 교육에 잘 맞춰진 많은 이들은, 커다란 용기를 내지도 질문을 던지지도 못한 채 산업자본주의가 가르친 성공을 성취하거나 생존에 유리한 대학과 학과를 나와 기득권의 끝자락이라도 잡으려 달려왔을 것이다. 일부는 걸음을 멈추고 깊은 성찰을 통해 우회했겠지만, 많은 이들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더 큰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그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 여길 것이다. 지위만큼 그들의 욕망 또한 더 높은 곳을 향해 갈증을 느끼고 있을 테다.
오늘날의 정치판은 정작 주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보지 않은 채 오직 자리를 지키려는 되려는 자 들의 계산기 소리만 가득하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오늘날의 정치판 또한 그들의 한 무대라 여겨진다. 주인인 국민과 시민을 위한다고 하지만, 정작 주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보지 않은 채 오직 자리를 지키려는 되려는 자 들의 계산기 소리만 가득하다. 현 정권의 떨어지는 지지율과 촛불과 빛의 시민들의 식어가는 열망 앞에서 정치권은 여전히 그들만의 리그에 빠져 있다. 조희대 대법원장 탄핵 문제와 같은 엄중한 사법·정치적 현안 앞에서도 후폭풍과 역풍이 두려워 멈칫거리며 손익계산기만 두드린다. 책임 있게 대안을 내놓고 행동하는 하려는 자 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상대의 모순을 짚거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대안의 언어는 사라진 채, 후폭풍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기야말로 가장 위험하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이러한 되려는 자 들의 위선은 미래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적나라하다. 프랑스 고등학생들이 교육 예산 삭감에 맞서 거리에 나선 상황을 보고도 우리 정치는 미래 세대를 위한 투자에 무감각하다. 당장의 표심과 정치적 이슈에만 매몰되어 말로만 청년을 외칠 뿐, 예산과 정책 앞에서는 기득권의 이해타산만 따진다. 그렇게 자신들이 차지한 자리를 지키려는 보신주의만 남았다.
나의 주변을 돌아본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수도 있지만,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돌아온 우리의 일상조차 같은 부조리로 물들어 있는 듯하다. 아이가 다니는 교실에서는 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해명이나 소통 없이 담임이 바뀌고, 아동참여위원회에서는 초등학생이 이해할 수 없는 외래어 전문 용어가 남발된다. 지역 시민사회 역시 작은 성과에 안주하며 타성에 갇히고 도덕적 우월감에만 도취된 채, 겉으로는 숭고하고 순수한 목적을 말하지만 실제 내부에서는 인지도, 권력, 주도권, 지원금 등을 둘러싼 인간적인 욕망과 정치가 치열하게 작동한다. 정치가든, 교실이든, 지역사회든 진짜 주인과 현장의 삶은 사라지고 오직 자리에만 취한 되려는 자 들만 넘쳐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결국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실망을 넘어 깊은 무관심으로 치달아, 사람들은 정치 혐오를 품은 채 각자의 일상으로 발길을 돌린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볼 때 호모 사피엔스는 무리에서 이탈하면 생존을 위협받아 왔다. 집단의 눈밖에 나지 않으려 소신을 접는 것은 오랜 생존 유전자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정치의 영역에서는 시대적 위기 속에서 인간의 본능을 초월해,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보다 더 큰 가치와 공동체를 위해 소신 있게 말하고 행동하는 변이 가 많이 발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리당략과 집단의 관성을 깨고 진리와 가치, 시민의 열망을 위해 당당히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인류의 진보는 늘 무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을 던졌던 이들의 작은 행동에서 시작되었다.
남을 향했던 비판을 거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무관심과 부조리의 고리를 어떻게 돌파해야 할까? 나는 진정 해결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고난을 감수하려는 하려는 자 인가, 아니면 안위를 위해 자리를 탐하는 되려는 자 인가? 가만히 내 삶을 가다듬으며 마지막 질문에 도달한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작은 물방울이 모여 바다가 된다고들 한다. 모두가 자신을 태워 거대한 바다가 될 필요는 없다. 물방울이 이룬 바다를 감사히 누리는 삶도 충분히 가치 있다. 다만 그 물을 오염시키거나 증발시키지 않도록 지키는 마음은 필요하다. 어릴 적 무엇이 되려느냐 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던 내가 바랐던 것은 결국 내 삶의 진실한 행복 이었다. 작은 물방울로 살아가는 삶은 나와 가장 가까운 곳을 소중히 돌보는 일에서 시작한다. 나 자신을 솔직하게 바로 세우고, 우리 가족과 이웃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내는 것. 그러나 그 소박한 일상에만 머물러 안주할 수는 없다. 내 가족과 이웃의 삶을 위협하는 온갖 문제들은 결국 사회 전체, 그리고 국가라는 커다란 울타리의 부조리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나 하나의 작은 일상이 단단해지고 그 소중함을 깨달을수록, 나의 일상은 이웃의 일상으로, 나아가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삶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되어야 한다.
스스로에게 내릴 수 있는 대안은 결국 나의 일상 에서 출발한다고 믿는다.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내 눈앞의 작은 부조리마저 당연하게 방치해서는 안 된다. 내 일상의 평화를 진정으로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주변의 열망들과 손을 잡고 연대해야 한다. 사소한 일상의 부조리에 목소리를 내는 일에서 시작해, 마침내 국가적이고 사회적인 부조리 앞에서도 외면하지 않고 당당히 목소리를 모으는 것. 거창한 명분에 자신을 잃지 않되, 내 삶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함께 걸어가는 이 소박하지만 단단한 연대의 발걸음이야말로 세상을 조금씩 바꾸어가는 진짜 시작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많은 이들의 열망을 담고 그들을 대리하는 것이 직업이자 일상인 이들에게 묻는다. 공동체가 그토록 크고 많은 권한을 부여했는데 스스로의 일상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무언가를 하기 위해 자리에 올랐던 예전의 나였지만, 혹시 지금은 그 자리를 지키거나 더 큰 무엇이 되기 위해서만 일하고 있지는 않은가?고영진 시민기자 sunofdarknes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