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정국에서 백범의 한계와 좌절 [사람들] 1945년 11월 23일, 김구는 오랜 망명 끝에 마침내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해방 후 들어선 미군정은 김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들에게는 독립을 위해 싸워온 역사적 권위가 있었지만, 나라의 행정과 치안을 이끌 권한은 없었습니다. 되찾은 조국에서 그들은 정부를 세울 길을 새롭게 모색해야 했습니다.
김구의 해방 이후 행보는 이처럼 역사적 권위와 현실의 권력 사이에 놓인 간극에서 출발했습니다. 그가 이 간극을 좁히기 위해 택한 길을 살펴보면, 두 가지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1) 독립운동으로 쌓아온 권위는 왜 해방된 조국의 권력으로 이어지지 못했는가. (2) 그리고 그 간극을 끝내 메우지 못한 김구에게는 어떤 한계가 있었는가.
김구는 1946년 9월 22일 청년 탈옥수 김창수를 도와준 전남 보성 김광언 댁을 방문했다. 그는 병풍을 두른 마루에 앉아 48년 전 음식을 대접하던 사람들을 만나 회포를 풀었다.
그 답을 강대국의 분할점령과 냉전에서만 찾을 수는 없습니다. 김구가 누구와 손을 잡았고, 어떤 세력과 거리를 두었으며, 뜻을 실현하기 위해 어떠한 정치적 기반을 마련했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그가 처한 조건과 그 안에서 내린 선택을 함께 보아야 해방공간에서의 그를 종합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방정국의 좌절을 김구 한 사람의 행보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김구가 처한 조건과 그가 내린 선택을 살피는 것과 함께, 맥아더 사령부에서 밀었고 마침내 권력을 얻은 이승만이 그 권력을 어떻게 행사했는지도 물어야 합니다.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위치와 선택을 함께 살펴야 해방이 열어준 과제가 어떻게 추진되거나 가로막혔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해방은 식민지 시기의 잘못을 바로잡고 새로운 사회의 정의를 세울 기회였습니다.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는 친일 행위의 책임을 묻기 위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그 활동을 방해했습니다. 김구가 무엇을 이루려 했으나 이루지 못했는지와, 이승만이 잡은 권력으로 무엇을 했는지를 구별해서 살펴야, 해방정국의 한계와 민족의 좌절을 분명하게 짚을 수 있습니다.
## 1. 돌아온 임정, 인정받지 못한 정부
김구에게 해방은 기쁨과 두려움이 함께 밀려온 사건이었습니다. 『백범일지』에서 그는 일본의 항복 소식을 접했을 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했다고 회고했습니다. 광복군과 미국 전략정보국인 OSS가 준비하던 국내 진입 작전을 실행하기 직전에 일본이 항복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전쟁에 참여하고 조국 해방에 기여한 사실을 바탕으로 전후 한국 문제의 당사자가 되려던 계획이 차질을 빚은 것입니다.
당시 임정은 연합국의 정부 승인을 얻지 못했습니다. 중국 국민정부와의 오랜 협력도, 광복군과 미군의 공동작전 준비도 임정의 정부 자격을 보장하지 않았습니다. 군사적 협력과 외교적 승인은 다른 문제였습니다. 김구와 동료들이 귀국하려면 ‘개인 자격’이라는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귀국을 늦추며 국외에 계속 머물 수도 없었습니다. 해방된 지 석 달이 지나 국내에는 새로운 정치조직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남과 북에서는 점령군의 통치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1948년 4월 서울 경교장 앞에서 프랑스 신·구 외교관과 미국인 선교사 조지 애쉬모어 피치 부부 등 방문객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김구. 피치 부부는 1932년 윤봉길 의거 직후 일제의 추적을 받던 김구를 상하이 자택에 20여 일간 숨겨주고 탈출을 도왔다. 앞줄 가운데 한복 차림이 김구, 오른쪽에서 두 번째 백발의 남성이 피치 목사, 맨 오른쪽 검은색 옷을 입은 여성이 그의 아내 제럴딘.
여기서 ‘개인 자격’이라는 말을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환영식의 격식이나 호칭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가 공무원을 임명하고, 경찰에 명령하며, 세금을 거두고, 법령을 집행할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김구가 임정 주석으로 존경받는 것과 미군정이 그에게 행정권을 넘기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습니다.
해방된 남한에서 통치권을 행사한 쪽은 미군정이었습니다. 북쪽에서는 소련군이 점령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정작 한국인에게는 자신의 정부를 스스로 결정할 권한이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1941년 미국과 영국이 발표한 대서양헌장은 각 민족이 정부 형태를 선택할 권리를 존중하고, 강제로 빼앗긴 주권과 자치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웠습니다. 그 이후 2차 대전 중 모든 국제 헌장과 협약의 기본질서는 ‘민족의 자결과 주권 회복’이었습니다. 그러나 해방된 한국에서는 그 원칙이 깡그리 무시되고 점령국의 판단과 이해관계가 앞섰습니다.
임정에는 해방 이후 분명한 구상이 있었습니다. 1945년 9월 3일 김구 명의로 발표한 ‘당면정책’ 14개 조항이 그것입니다. 제6항은 각 계층과 정당, 종교집단, 지방을 대표하는 지도자들의 회의를 소집하여 과도정권을 수립하겠다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제7항은 과도정권이 성립하면 임정의 임무가 끝나고 권한과 소유물을 넘기겠다고 했습니다. 정식정부는 전국적인 보통선거를 거쳐 세운다는 구상이었습니다. 한편 제9항에는 과도정권이 성립하기 전까지 국내 질서와 대외관계를 임정이 책임진다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이 정책에는 해방 직후 임정의 고민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임정이 먼저 정부의 책임을 맡아 새 질서를 이끌 것인가. 아니면 각계의 합의로 과도정권을 만드는 일을 우선할 것인가. 두 방향은 연결되어 있었지만, 무엇을 먼저 실행하느냐에 따라 다른 정치노선이 될 수 있었습니다.
김구와 한국독립당 계열은 임정의 기존 지위와 책임을 중시했습니다. 반면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과 홍진·최동오·김붕준 등이 참여한 신한민주당은 국내외 각 정치세력과 지도자들이 참여하는 대표회의를 열어 과도정권을 구성하는 일을 앞세웠습니다. 쟁점은 새로운 정부를 세우는 것에 우선해 그 과정에서 기존 임정의 지위를 어떻게 설정하고 각 정치세력의 합의를 어떤 절차로 모을 것인가 하는 논쟁이었습니다.
김구 앞에는 두 과제가 놓여있었습니다. 바깥으로는 점령 당국의 불승인을 넘어야 했고, 안으로는 국내 정치세력의 동의를 모아야 했습니다. 독립운동에 바친 헌신은 그 출발점이 될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두 과제가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임정의 역사적 정당성을 인정하는 일과 임정에 당장의 통치권을 맡기는 일은, 국내의 다른 정치세력에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 2. 반탁의 열기, 미군정의 벽
1945년 말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전해지면서 국내 정국은 격랑에 휩싸였습니다. 한국에 임시민주정부를 세우고, 이를 돕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며, 신탁통치 방안을 협의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국내의 논쟁은 신탁통치 문제에 집중되었습니다. 오랜 항일투쟁 끝에 돌아온 김구와 임정 요인들에게 신탁통치는 되찾은 나라의 독립을 다시 미루는 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1945년 12월 31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신탁통치 반대 전국집회.
임정은 반탁운동을 통치권 확보로 연결하려 했습니다. 1945년 12월 31일 내무부장 신익희 명의로 발표한 ‘국자 제1호’와 ‘국자 제2호’는 국내 행정과 경찰 조직을 임정의 지휘 아래 두려는 포고였습니다. 군정청의 한국인 직원들도 총사직을 결의하며 호응했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를 자신의 통치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946년 새해 첫날, 김구는 주한미군사령관 하지와 마주 앉았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미군 측 기록을 인용한 서술에 따르면, 하지는 김구에게 나를 속이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습니다.(『신편 한국사』52, 47쪽) 독립운동의 지도자와 점령군 사령관 사이의 권력관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하지와의 면담 직후, 임정 선전부장 엄항섭이 방송에 나섰습니다. 국민들에게 파업을 중지하고 일터로 돌아가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반탁운동이 미군정에 반대하는 행동은 아니라는 뜻도 밝혔습니다. 전날까지 관리와 경찰에게 임정의 지휘를 받으라고 선언했던 쪽이, 하루 만에 업무 복귀를 호소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 반전은 임정이 처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임정은 조국의 운명을 한국인의 손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뜻을 실행할 행정조직과 강제력, 미군정으로부터 권한을 넘겨받을 합의는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김구의 한계는 점령군에 맞설 군사력이 없었다는 사실 자체보다, 국민적 호응을 통치권 이양으로 연결할 조건이 얼마나 갖추어졌는지를 충분히 가늠하지 못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통치권 장악 시도의 좌절을 겪은 임정은 각계 대표들이 참여하는 회의를 여는 방향으로 무게를 옮겼습니다. 1946년 1월 4일 김구 명의의 성명은 비상정치회의를 즉시 소집한다는 방침을 밝혔습니다. 임정의 기존 지위를 내세우는 것만으로는 정부를 세울 수 없었고, 국내 정치세력의 참여와 동의를 확보해야 했던 것입니다. 임정 중심의 건국 구상을 유지하면서도 그 실현 방법을 조정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참여 세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오히려 임정이 주도권을 잃게 되었습니다. 좌우 정당 간 교섭이 결렬되고 비상정치회의가 우익 중심으로 추진되는 가운데, 임정이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결합하여 비상국민회의를 구성하는 방향으로 조직이 재편된 것입니다. 김원봉·성주식·김성숙은 회의의 우익 편향과 이승만 측이 회의를 이끌어가는 방식에 반발하여 1월 23일 탈퇴했습니다. 국내 세력과의 연합을 넓히려는 과정에서, 임정 내부의 연대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2월 초 출범한 비상국민회의는 과도정부 수립을 추진할 최고정무위원회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2월 14일 미군정의 자문기관인 민주의원으로 전환되고 말았습니다. 임정 요인들의 역사적 권위가 미군정 자문기구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활용된 것입니다. 이승만은 의장을, 김구와 김규식은 부의장을 맡았습니다. 지도자들의 이름은 한자리에 모였지만, 정부를 세우려던 기구의 지도부가 실제로 맡은 역할은 점령당국에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임정의 독자적인 정부 수립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미군정의 정책과, 우익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이승만의 술책이 함께 작용한 결과입니다. 임정의 권위는 이승만의 지도력과 미군정 자문기구의 위상을 뒷받침하는 데 쓰였고, 임정은 통치권을 얻지 못한 채 내부의 연대마저 약해졌습니다. 조직의 규모를 키우는 일이 자신의 노선을 실현할 힘을 키우는 일과 일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 3. 이승만과 잡은 손, 좁아지는 김구의 입지
김구가 이승만과 손을 잡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신탁통치에 반대했고, 이승만의 대외 활동 경력과 국내 영향력은 임정의 부족한 힘을 보충할 자산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제휴의 목적은 달랐습니다. 김구는 임정의 역사적 정당성을 바탕으로 자주 독립국가를 세우려 했고, 이승만은 자신의 지도력 아래 정치세력을 모아 정부 수립의 경로를 찾았습니다. 반탁이라는 구호는 공유했지만, 새 정부의 중심과 구성 방식까지 합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김구가 반탁만을 내세우며 협상을 외면한 것은 아닙니다.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의 ‘공동성명 제5호’를 둘러싸고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김규식의 설득과 하지의 설명을 거쳐 협의 참여를 위한 서명을 수용했습니다. 좌우합작운동에도 지지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지속적인 연대로 이어지지 못했고, 1947년 초에는 반탁독립투쟁위원장을 맡아 다시 우익 결집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여기에는 임정을 지키려는 책임과 여러 세력을 참여시켜야 한다는 과제 사이의 긴장이 있었습니다. 임정을 중심에 세우려는 방식은 그 우선적 지위를 받아들이지 않는 세력과 거리를 만들었습니다. 김구는 독립운동의 권위를 폭넓은 정치연합의 기반으로 바꾸는 데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승만이 1946년 정읍 발언에서 남한만의 정부 수립 가능성을 제기한 뒤에도 김구는 반탁을 중심으로 그와 협력했습니다. 그러나 이 협력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동의를 뜻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김구는 1947년 말 북한도 뒤에 참여할 수 있다는 조건 아래 유엔을 통한 정부 수립을 지지했으나, 남한만의 선거로 굳어질 가능성이 커지자 단독정부 반대와 남북총선거를 분명히 내세웠습니다. 통일 정부를 세우려는 지향과 이승만과의 제휴 사이에 있던 긴장이 더는 해소되기 어려워진 것입니다.
김구의 한계는 이러한 차이를 일찍 정리하고, 자신의 원칙을 뒷받침할 정치적 기반을 넓히지 못한 데 있습니다. 이승만과 다른 길을 선택했을 때는 이미 남북에 별개의 국가 체계가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이를 되돌리려는 김구의 명분에 비해, 함께 움직일 세력과 실행 수단은 부족했습니다.
## 4. 분단을 거부한 결단, 뒤따르지 못한 정치력
1948년 2월, 김구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발표했습니다. 남한만의 정부 수립이 구체화하던 때였습니다. 그는 그 글에서 자신이 바라던 해방과 눈앞의 현실이 얼마나 멀어졌는지 토로했습니다. 일본의 패망 뒤 자유로운 나라를 기대했으나 국토가 갈라졌고, 그 선이 서로 다른 국가의 경계로 굳어질 위험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김구는 자신의 남은 생애를 그 위험을 막는 데 걸겠다고 밝혔습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이라는 문장은 그 절박함을 담고 있습니다.
1948년 4월 평양 을밀대 방문. 왼쪽부터 선우진 김규식 김구 원세훈.
그해 4월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평양으로 향했습니다. 이는 그가 반탁과 우익의 결집만으로는 분단을 막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정치적 대립을 넘어 협상의 길을 찾으려 한 선택이었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지키는 것보다 남과 북이 별개의 국가로 굳어지는 일을 막는 데 무게를 둔 것입니다. 앞선 선택의 한계를 돌아본다면, 그리고 분단의 틀을 허물기 어려운 한반도의 사정을 생각한다면, 이 의미는 역사적으로 평가해야 마땅합니다.
남북협상은 괄목할 만한 합의를 이뤘습니다. 4월 30일 발표된 공동성명에는 외국군의 철수, 북한이 남침하지 않는다는 약속, 전조선 총선거를 통한 통일정부 수립, 남한 단독선거 반대 등의 원칙이 담겼습니다. 분단을 피해야 한다는 뜻을 남북의 정치지도자들이 함께 밝힌 것입니다. 그러나 후속 협상이 이어지지 못함으로써 이들 합의를 실행할 공동기구나 선거를 보장할 구체적인 절차, 남북의 권력기구를 통합할 방안까지는 도출해내지 못했습니다.
남과 북에서는 이미 서로 다른 권력체제가 형성되고 있었고, 미국과 소련의 대립도 깊어져 있었습니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 지역 활동은 소련의 반대로 가로막혔습니다. 남북의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고, 지도자들은 공동성명을 통해 통일정부 수립의 원칙에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실행할 공동 기구와 실효성 있는 절차를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남북협상은 합의를 구속력 있는 정치적 과정으로 발전시키지 못했지만, 분단을 막기 위해 남북의 정치세력이 직접 만나 해결을 모색한 역사적 선례로 남았습니다.
김구는 남한의 5·10선거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분단을 굳히는 절차에 협력하지 않겠다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비용이 엄청났습니다. 국회가 만들어지고 헌법이 제정되며 대통령과 정부가 구성되는 과정에서, 김구는 자신의 노선을 직접 관철할 의회 안의 기반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선거에 참여했더라면 이후의 남북전쟁을 막거나 새 정부의 성격을 바꿀 수 있었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선거 참여는 자신이 반대하던 국가 수립 절차를 받아들이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었고, 참여하더라도 뜻을 관철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불참을 선택한 뒤에는 의회 밖에서 여론을 조직하고 정부의 인사와 정책을 견제할 지속적인 연대가 필요했습니다.
불참 이후의 정치적 대응도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의회 밖에서의 연대와 통일에 대한 공감을 조직적 힘으로 묶는 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의 좌절은 뜻을 지키는 일과 그 뜻을 실현할 힘을 만드는 일이 별개의 과제임을 보여줍니다.
임정 출신들의 선택도 갈라졌습니다. 이시영은 부통령, 이범석은 초대 국무총리가 되었고, 신익희는 제헌국회에서 주요 역할을 했습니다. 함께 품었던 독립운동과 건국의 이상을 서로 다른 자리에서 각각의 방식으로 실현하려 한 것입니다. 이들의 선택 역시 독립운동의 가치가 국가의 법과 정책에 얼마나 구현되었는지를 기준으로 살펴야 합니다.
## 5. 이승만이 가로막은 반민특위
김구가 권력을 얻지 못한 것과 함께 해방정국의 가장 무거운 질문 하나가 평행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권력을 얻은 사람들은 그 힘으로 무엇을 했는가’입니다.
정부가 수립되자 미군정 시기에 일제의 행정과 경찰에 몸담았던 인사들이 다시 국가 기구에 들어왔습니다. 친일 경력자들의 영향력은 특히 경찰에서 그대로 승계되었습니다. 권력자 이승만은 과거의 책임보다 현재 정권의 유용성을 중요시했습니다.
제헌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만들었고 반민특위를 구성했습니다. 독립운동의 정신을 새 국가의 법과 제도로 구현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위원장은 임정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상덕이었습니다. 반민족적 행위를 한 사람들을 조사하고 기소하며 재판하는 국가의 절차로까지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절차가 실제로 작동되기 시작하자 이승만 대통령이 강하게 제동을 걸었습니다. 노덕술이 1949년 1월 25일 반민특위에 체포되자, 이승만은 사흘 뒤 국무회의에서 그의 치안 능력을 이유로 보석을 추진하도록 했습니다. 노덕술은 일제강점기부터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며 식민통치에 앞장섰던 인물입니다. 해방 뒤에도 장덕수 피살사건과 관련해 붙잡힌 박상근에게 자백을 강요하다 숨지게 했고, 시신을 한강에 버린 혐의로 수사를 받았습니다. 이듬해 반민특위에 체포될 때까지 경찰관 네 명의 호위를 받고 경찰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갈등은 대통령의 담화와 압박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1949년 6월 6일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했습니다. 이승만은 그 이전부터 특경대의 폐지와 반민특위의 체포·구금 활동 제한을 주장했습니다. 한 달에 열 번 이상 반민특위에 반대하는 기자회견과 대국민담화를 발표하는 식이었습니다. 대통령과 정부의 견제 속에서 경찰의 물리력까지 동원되었고, 뒤이은 법 개정과 활동 축소로 청산의 기회는 사라졌습니다.
반민특위의 좌절은 해방 이후 민족사의 가장 뼈아픈 손실입니다. 처벌받아야 할 사람들이 처벌을 피했다는 데만 그 손실이 있지 않습니다. 새 국가가 조국의 어떤 가치를 존중하고, 조국을 배신한 행위에 어떻게 책임을 물을 것인지, 그 기준을 세울 결정적인 기회를 없애버린 것입니다.
나라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들보다 그것을 중시하지 않는 권력에 빌붙는 사람들이 보호받을 때, 사회가 배울 수 있는 것은 기회주의밖에 없습니다. 국가와 민족에게 잘못을 저질렀어도, 다음 권력에 잘 보이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하게 됩니다. 이러한 인식은 국가의 공정성에 대한 믿음을 갉아먹고, 원칙을 지킨 사람들의 희생을 허망하게 만듭니다. 후대에도 진상 규명과 역사적 평가는 필요하지만, 당대 이루어졌어야 할 청산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때의 좌절은 오늘의 역사 인식에 남아 있으며, 기회주의는 미래에도 계속 뿌리를 내리고 있을 것입니다.
김구에게는 독립운동의 권위를 정치적 힘으로 옮기지 못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획득한 권력으로 친일 청산을 가로막은 역사적 과오가 있습니다. 이루지 못한 사람의 한계와 가로막은 사람의 책임은 같지 않습니다. 백범의 좌절을 엄정하게 돌아보는 일이 두 사안의 차이를 흐리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임순만 언론인 ysm@mindl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