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왜 학교의 지배권을 지키려 했는가 [칼럼] 2006년 12월, 개신교 목회자들이 삭발하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개정 사립학교법을 다시 고치라는 요구였습니다. 개방이사가 들어오면 기독교 학교를 빼앗기고 종교교육의 자유마저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학교 폐쇄와 순교까지 거론했습니다.
그러나 2005년 개정 사립학교법은 예배나 종교교육을 금지하는 법이 아니었습니다. 학교법인의 이사회와 회계를 공개하고 학교 구성원이 추천한 개방이사를 참여시키자는 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일부 기독교 사학과 교계 지도자들은 이를 ‘교회 말살법’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이 지키려 한 것은 종교교육의 자유였을까요. 아니면 이사회와 인사, 회계와 재산을 지배해온 재단의 권한이었을까요.
이 글에서 말하는 교회는 한국 개신교 전체가 아닙니다. 사학법 개정 반대투쟁을 주도하며 재단의 운영권을 종교의 자유와 동일시한 일부 교계 지도자와 기독교 사학세력을 뜻합니다.
개항 이후 개신교는 학교와 병원, 출판과 한글 보급을 통해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습니다. 1919년 3·1민족혁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명이 개신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 말기 주요 교단과 다수의 목회자는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황국신민화와 침략전쟁에 협력했습니다. 그 책임은 해방 이후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교회의 길은 갈렸습니다. 월남한 목회자와 신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반공세력의 일부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정부와 결합했습니다. 반대편에서는 민중신학과 도시산업선교, 인권운동에 참여한 목회자와 신자들이 독재에 맞섰습니다. 한국 개신교에는 권력에 협력한 역사와 권력에 저항한 역사가 함께 존재했습니다.
1960∼80년대 산업화와 도시화는 대형교회 성장의 토대가 됐습니다.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은 교회에서 공동체를 찾았습니다. 반공주의와 성장주의도 교회의 확장을 뒷받침했습니다. 신도 수와 헌금, 교회 건물의 크기가 신앙적 성공의 증거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1990년대 들어 고속성장은 멈추기 시작했습니다.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개신교 인구는 1985년 약 648만 명에서 1995년 약 876만 명으로 늘었지만, 2005년에는 약 862만 명으로 줄었습니다. 교세는 정체했지만 교회와 목회자는 계속 늘었습니다. 성장의 시대가 끝난 자리에 교회와 신도, 헌금과 교육공간을 둘러싼 경쟁이 들어섰습니다(통계청, 1985·1995·2005 인구주택총조사; CBS노컷뉴스, 2014.10.31).
반복된 교단 분열과 강한 개교회주의는 극단적인 설교와 정치동원을 제어하기 어려운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교회에 대한 사회적 비판은 기독교 탄압으로, 공교육의 변화는 ‘좌파의 학교 장악’으로 해석됐습니다. 전교조와 진화론, 성교육과 페미니즘, 성소수자의 권리와 차별금지법이 교회와 가정을 무너뜨린다는 주장도 퍼졌습니다. 사회의 변화는 교회가 맞서 싸워야 할 ‘영적 전쟁’으로 바뀌었습니다.
무인가 신학교와 목회자 과잉이 교회의 극우화를 직접 낳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다만 목회자의 자질을 검증하고 극단적인 설교를 제어할 교단의 권위가 약한 상황에서, 성장 경쟁과 정치적 위기의식이 결합할 여지는 커졌습니다. 2000년대 들어 교세의 위기는 일부 교계에서 교육과 문화의 주도권을 잃고 있다는 두려움으로 번졌습니다.
이 위기의식은 뉴라이트운동과 결합해 정치세력으로 조직됐습니다. 2005년 11월 김진홍 목사가 이끄는 뉴라이트전국연합이 출범했습니다. 한 달 뒤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뉴라이트전국연합은 보수 개신교와 함께 반대투쟁의 전면에 나섰습니다. 교육과 사회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정치전선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사학법을 둘러싼 싸움의 핵심은 학교를 누가 지배하고 다음 세대가 세상을 바라보는 틀을 누가 결정할 것인가에 있었습니다. 그 답은 사학법의 역사와 2005년 개정안의 내용, 그리고 개혁을 다시 후퇴시킨 세력의 움직임 속에 들어 있습니다.
2006년 12월 20일 서울 종로구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에서 이광선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장을 비롯한 개신교 목회자들이 사립학교법 재개정을 요구하며 집단삭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날 목회자 약 30명은 개방이사제가 기독교 사학의 건학이념과 종교교육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주장하며 ‘순교를 각오한 투쟁’을 선언했다. 그러나 2005년 개정 사립학교법은 종교교육을 금지한 법이 아니었다. 학교운영위원회와 대학평의원회가 추천한 개방이사를 이사회에 참여시키고, 이사회와 회계를 공개해 사학의 공공성을 높이려는 개혁이었다. 이 집단삭발은 종교의 자유라는 명분 아래 사학재단의 이사회와 인사권을 지키려 했던 당시 보수 개신교의 정치적 동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연합뉴스
■ 사학법 투쟁, 교회는 무엇을 지키려 했는가
● 삭발하고 거리로 나온 목사들
2006년 12월 12일,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장 이광선 목사가 머리를 깎았습니다. 이어 12월 20일과 21일 수도권 노회장과 목회자들이 집단삭발에 나섰습니다. 영락교회 담임목사이자 영락학원 이사장이었던 이철신 목사도 참여했습니다.
이철신은 교회가 파송한 이사들이 줄어들면 정부가 원하는 사람들이 들어와 학교를 빼앗아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삭발한 목사들은 이를 죽음을 각오한” 신앙투쟁으로 규정했습니다. 법이 다시 개정되지 않으면 개방이사 선임과 임시이사 파견을 거부하고, 기독교계 학교의 폐쇄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경향신문, 2006.12.20; 뉴스앤조이, 2006.12.22; 크리스천투데이, 2006.12.26).
개정 사립학교법이 국회를 통과한 것은 2005년 12월 9일이었고 시행일은 2006년 7월 1일이었습니다. 법이 시행되자 학교법인들은 정관을 바꾸고 개방이사를 선임해야 했습니다. 법이 이사회 구성과 인사권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나라당이 사학법 재개정을 다른 법안의 처리와 연계하자 교계는 삭발과 금식, 비상기도회로 압박의 수위를 높였습니다. 법 통과 직후 시작된 반대운동이 1년 뒤 집단삭발로 격화된 이유였습니다.
● 독재정부의 통제 아래 성장한 사학
사립학교법 개정은 2005년에 처음 시작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1963년 제정된 사립학교법은 이후 수십 차례 개정됐습니다. 사학의 설립과 운영, 재산과 회계, 교원 임면과 국가감독을 둘러싼 갈등이 반세기 가까이 이어진 것입니다(정병준, 「사립학교법은 시대의 요청이다」, 2006).
박정희 독재정부는 사립학교법을 제정해 사학을 국가의 교육체계 안에 편입하고 감독을 강화했습니다. 전두환 독재정부도 학교와 교원을 국가가 정한 이념과 교육의 틀 안에 묶었습니다. 기독교 사학 역시 국민교육헌장과 반공교육을 중심으로 한 국가교육체계에 편입됐습니다. 사학재단은 정권에 순응하는 대신 국가의 승인과 지원 아래 학교를 확대하고 운영권을 지켰습니다. 통제와 지원, 순응과 성장의 교환관계였습니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는 국가통제의 완화와 함께 ‘사학의 자율성’이 강조됐습니다. 1990년 노태우 정부의 법 개정은 재단의 인사권과 운영권을 다시 넓혔지만 학교 구성원과 시민사회의 감시장치는 그만큼 강화되지 않았습니다. 학교법인이 설립했더라도 학교는 공적 교육을 수행합니다. 특히 사립 중·고등학교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지원으로 운영됩니다. 그럼에도 설립자와 가족이 이사회와 학교 운영을 장기간 지배할 수 있는 구조가 굳어졌습니다.
재단은 설립과 건학이념을 이유로 자율성을 주장했지만, 학생과 학부모는 학교 운영과 이사 선임에 실질적으로 참여하기 어려웠습니다. 국가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재단 내부의 결정은 외부에서 들여다보기 힘들었습니다. 민주화 이후 국가의 권위주의적 통제는 줄었지만 학교 안의 민주적 통제는 그만큼 자라지 못했습니다.
기독교계는 그 구조에서 가장 큰 종교사학 세력이었습니다. 전체 사학의 과반수는 아니었지만 당시 교계에서는 기독교계 학교가 전체 사립학교의 20%를 넘는 것으로 추산했습니다(뉴스앤조이, 2004.10.22). 2006년 종교계 사립 중·고등학교 423개교 가운데 개신교계 학교는 285개교로 67.4%를 차지했습니다. 종교계 사학만 놓고 보면 약 3분의 2였습니다(박상진, 「한국 기독교학교의 현황과 과제」, 2012).
● 종교의 자유인가, 재단의 지배권인가
일부 사학은 학교를 공적 교육기관보다 설립자 일가의 재산처럼 운영했습니다. 이사장과 학교장 자리를 가족이 이어받고 친인척과 측근이 이사회와 교직원 인사를 장악했습니다. 교비를 재단의 채무 변제나 개인적 용도로 사용하고, 교원채용과 학생 편입학을 대가로 돈을 받은 사례도 반복됐습니다.
2006년 감사원은 비리 의혹이 제기된 사립대학 24개교와 사립 중·고등학교 100개교 등 124개교를 특별감사했습니다. 90여 곳에서 교비·재산·학사 운영상의 문제가 확인됐고, 범죄 혐의가 드러난 22개교의 재단 이사장과 임원 등 48명은 횡령·배임 등의 혐의로 검찰에 수사 요청됐습니다. 교비 횡령과 재단자금 유용, 교원채용과 편입학을 둘러싼 금품수수도 적발됐습니다(한국교원신문, 2006.6.22; SBS, 2006.6.22).
비리 의혹이 제기된 학교를 선별해 조사한 결과이므로 이를 전체 사학의 비리율로 볼 수는 없습니다. 모든 기독교 사학을 비리집단으로 규정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감사 결과는 폐쇄적인 재단 운영과 족벌경영이 실제 비리로 이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줬습니다.
교육·시민단체들은 2000년 ‘사립학교법 개정과 부패사학 척결을 위한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했습니다. 학교 구성원의 참여를 보장하고 폐쇄적인 이사회와 재단 운영을 공개하라는 요구였습니다.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이를 대표적인 개혁과제로 받아들였습니다.
2005년 개정법의 중심에는 개방이사제가 있었습니다. 이사 정수의 4분의 1 이상을 개방이사로 두고, 학교운영위원회나 대학평의원회가 정원의 두 배에 해당하는 후보자를 추천하면 기존 이사회가 그 가운데 선임하도록 했습니다. 이사회 회의록을 공개하고 감사 가운데 한 명도 학교운영위원회나 대학평의원회가 추천하도록 했습니다. 설립자와 이사장 친인척의 학교장 취임도 제한했습니다(사립학교법, 법률 제7802호, 2005.12.29).
개방이사제는 정부가 이사를 직접 파견하는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종교교육이나 예배를 금지하는 법도 아니었습니다. 사학의 자율성을 인정하되 학생과 학부모의 권리, 공적 재정에 대한 책임을 함께 묻는 개혁이었습니다. 건학이념을 교육할 권리와 재단이 학교를 사적으로 지배할 권리는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평준화 배정 등으로 학교를 자유롭게 선택하기 어려운 학생에게 특정 종교의 예배와 교육을 사실상 강제한다면 재단의 종교교육 자유는 학생의 종교·양심의 자유와 충돌합니다. 사학의 자율성은 학생의 기본권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종교계가 우려한 문제에도 정당한 부분은 있었습니다. 국가나 외부 세력이 건학이념 자체를 부정하거나 종교교육의 내용을 일방적으로 결정한다면 사학의 자유가 침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2005년 개정법은 종교교육의 내용을 국가가 정하거나 교회가 파송한 이사를 모두 배제하는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기존 이사회가 최종 선임권을 유지한 채 학교 구성원이 추천한 일부 이사를 참여시키는 장치였습니다.
그럼에도 일부 기독교 사학과 교계 지도자들은 개정안을 ‘교회 말살법’, ‘사학 강탈법’으로 규정했습니다. 외부에서 추천된 이사가 들어오면 건학이념과 종교교육이 흔들리고 결국 학교를 빼앗길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사학법에 반대한 모든 교회와 목회자가 비리 재단을 옹호한 것은 아닙니다. 외부 인사가 기독교 학교의 정체성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종교교육의 자율성을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교교육의 자유가 재단의 무제한적인 인사권과 재산권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의 지원을 받는 교육기관에는 투명성과 공공성에 대한 책임이 따릅니다.
학교법인은 설립자 개인이나 교회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러나 재단이 이사 선임권을 장악하면 학교장과 교직원 인사, 예산과 계약, 시설과 자산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개방이사제는 이사 몇 명을 바꾸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외부의 감시를 받지 않고 유지해온 재단의 지배권을 흔드는 장치였습니다.
■ 학교를 지배하는 것이 곧 세계관을 지배하는 것
● 학교 지배권은 세계관 형성권이다
학교의 지배권은 재산과 경영의 문제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사회를 장악하면 학교장과 교원을 선임하고 교육과정과 종교행사, 학생생활과 학교문화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어떤 역사를 가르치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학생에게 복종을 요구할 것인가, 질문하는 시민의 태도를 가르칠 것인가. 이 문제는 학교 운영권과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일부 보수 개신교가 지키려 한 것은 학교 건물만이 아니었습니다. 다음 세대가 세상을 바라보는 틀을 결정할 권한이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사학법 문제는 청년 극우화의 역사와 만납니다. 교회와 사학이 결합한 교육공간에서 반공주의와 기독교 국가주의, 뉴라이트 역사관이 반복된다면 학교는 특정한 정치적 세계관을 재생산하는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재단의 지배권은 교육내용의 지배권이 되고, 다시 다음 세대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권력이 됩니다.
역사교육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진화론과 성교육, 성평등과 소수자의 권리를 어떤 언어로 가르칠 것인지도 학교의 세계관과 연결됩니다. 학생이 서로 다른 관점을 배우고 질문할 수 있는가, 재단과 교회의 해석을 신앙의 이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따라 교육의 성격은 달라집니다.
서울 세종문화회관 내 세종홀에서 열린 뉴라이트전국연합 4주년 기념식에서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 두영택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대표, 이영우 뉴라이트 전국연합 고문, 조갑제 ‘조갑제 닷컴 대표 (왼쪽에서 네 번째에서 일곱 번째까지)등이 축하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2009.11.24. 연합뉴스
● 사학법 반대투쟁과 뉴라이트의 결합
김진홍 목사는 사학법이 통과되기 전인 2005년 10월부터 공개서신을 통해 개정 반대운동에 나섰습니다. 개방이사제가 도입되면 전교조와 좌파세력이 사학의 이사회를 장악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뉴스파워, 2005.10.22).
보름여 뒤인 11월 7일, 김진홍은 뉴라이트전국연합을 창립하고 초대 상임의장을 맡았습니다. 창립대회에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이명박 서울시장, 손학규 경기지사 등 한나라당의 주요 정치인들이 참석했습니다(한국기독공보, 2005.11.8; 뉴스앤조이, 2005.11.9).
뉴라이트전국연합은 사학법 통과 직후 이를 헌법적 가치를 흔드는 악법”으로 규정했습니다. 김진홍은 뉴라이트운동을 목회의 연장”이라고 부르고 기독교가 우리나라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고 주장했습니다. 2007년 대통령선거에서의 정권교체도 공개적으로 내세웠습니다(뉴스앤조이, 2005.12.13; 기독일보, 2005.12.10).
사학법을 둘러싼 갈등은 학교 운영제도에 관한 논쟁을 넘어섰습니다. 일부 대형교회에서는 반대 서명과 특별기도회가 열렸고, 한나라당은 국회 등원을 거부하고 장외투쟁에 나섰습니다. ‘전교조와 좌파가 기독교 학교를 빼앗는다’는 주장은 강력한 동원구호가 됐습니다.
법률의 핵심은 이사회 구성과 회계 공개였지만 집회와 설교의 언어에서는 대한민국과 기독교의 운명을 건 싸움으로 바뀌었습니다. 학교 폐쇄와 순교라는 표현은 타협의 여지를 좁혔고, 사학법에 찬성하는 정당과 교원단체를 신앙의 적대세력으로 밀어냈습니다.
사학재단은 종교의 자유를 내세웠습니다. 뉴라이트는 이를 자유민주주의 수호로 번역했습니다. 보수언론은 좌우대결로 확대했고 한나라당은 국회 안에서 입법투쟁으로 옮겼습니다. 사학법 반대투쟁은 교회·사학·뉴라이트·보수언론·보수정당을 하나의 정치전선으로 묶은 사건이었습니다.
■ 개혁은 왜 후퇴했는가
● 개혁의 후퇴 과정
개정 사립학교법이 시행됐지만 보수 개신교와 사학재단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대형교회는 예배와 기도회, 서명운동으로 신도들을 동원했습니다. 사학재단은 정관 변경과 개방이사 선임을 거부하고 학교 폐쇄까지 거론했습니다. 한나라당은 사학법을 다시 고치지 않으면 다른 법안의 처리에도 협조하지 않겠다며 국회 등원을 거부했습니다. 국민연금법과 법학전문대학원법, 부동산 후속법안까지 사학법에 묶였습니다(경향신문, 2006.4.30; 연합뉴스, 2007.7.3).
24일 오후 강원도 춘천시청앞에서 열린 사학법 무효 한나라당 강원대회에 참가한 박근혜대표와 당원들이 원천무효를 주장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06.1.24. 연합뉴스
반면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의 힘은 빠르게 약해졌습니다. 열린우리당은 2006년 5·31지방선거에서 참패했고, 2007년에는 집단탈당과 분당으로 사실상 해체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4월 29일 열린우리당에 사학법 문제에서 양보하라고 주문했습니다. 한나라당의 국회 보이콧을 풀고 부동산 후속법안과 사법개혁안 등 다른 법안을 처리하려는 판단이었습니다(MBC, 2006.4.29).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처음에는 이를 거부했지만 당의 분열과 국정동력 상실 속에서 끝까지 버티지 못했습니다.
당내에서는 사학법의 근간을 지켜야 한다는 개혁파와 다른 법안의 처리를 위해 타협해야 한다는 실용파가 맞섰습니다. 개혁법 하나를 지키기 위해 국회 전체의 장기 파행을 감수할 것인가라는 선택이었습니다. 정치적 고립이 깊어진 정부와 여당은 결국 다른 개혁과제를 처리하기 위해 사학법의 일부를 양보했습니다. 2007년 청와대가 국민연금법과 법학전문대학원법 등의 처리를 위해 다시 타협을 요구하면서, 그해 7월 사립학교법은 재개정됐습니다(한겨레, 2007.4.25).
출처: 사립학교법 법률 제7802호(2005.12.29), 법률 제8545호(2007.7.27); KBS, 2007.7.4.
2007년 재개정으로 개방이사제 자체가 폐지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사 정수의 4분의 1 이상을 개방이사로 두는 원칙과 이사회 회의록 공개도 남았습니다. 그러나 후보 추천은 학교운영위원회나 대학평의원회에서 별도의 개방이사추천위원회로 넘어갔고, 재단이 추천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여지는 커졌습니다.
종교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대학과 대학원에는 종단이 추천위원의 절반을 추천하는 특례가 생겼습니다. 일반적인 기독교 사학 전체가 아니라 해당 대학과 대학원에 한정된 규정이었습니다. 이사 정수 3분의 2 이상의 찬성과 관할청의 승인을 받으면 이사장 친인척도 학교장이 될 수 있었고, 학교장의 중임도 다시 허용됐습니다. 개방이사제라는 형식은 남았지만 외부 감시와 족벌경영 견제라는 2005년 개정의 힘은 약해졌습니다.
● 개혁의 후퇴로 그들이 지켜낸 것
2007년 재개정으로 보수 개신교와 사학재단은 신도를 동원하고 국회를 압박하면 이미 통과된 개혁법도 되돌릴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대형교회는 조직과 공간, 신도 동원력을 제공했습니다. 한나라당은 국회에서 입법을 막았고, 보수언론은 투명성과 공공성의 문제를 종교와 이념의 위기로 바꿨습니다. 뉴라이트는 이들을 하나의 정치적 언어로 연결했습니다.
이 경험은 보수 개신교가 종교집단을 넘어 직접적인 정치세력으로 나서는 계기가 됐습니다. 교회·사학·뉴라이트·보수언론·보수정당의 공동행동도 일회적인 연대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이후 선거와 역사교과서, 성평등과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갈등에서 비슷한 결합을 되풀이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이 마련됐습니다.
2005년 사학법 개정에는 사학의 투명성을 높이고 학교 구성원의 참여를 확대한다는 충분한 명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수연합은 강하게 결집했고,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끝까지 버티지 못했습니다. 개혁은 법률을 만드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법을 지켜낼 정치적 의지와 이를 뒷받침할 사회적 힘이 필요합니다. 그 힘의 차이가 재단의 지배권을 상당 부분 보존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학의 투명성과 구성원 참여라는 제도적 쟁점은 ‘기독교를 지키는 영적 전쟁’으로 바뀌었습니다. 사학법에 찬성하는 정당과 시민단체, 교원단체는 기독교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규정됐습니다. 복잡한 제도개혁은 선과 악의 싸움으로 단순화됐고, 목회자의 정치적 주장은 신앙의 명령이 됐습니다.
일부 보수 개신교가 지켜낸 것은 제도권 사학의 운영권만이 아니었습니다. 학교장과 교사를 선임하고 교육내용과 학교문화를 결정하며 다음 세대의 세계관을 형성할 권력이었습니다.
그러나 교육권력은 제도권 사학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학교 밖에서는 국가의 관리와 감시를 벗어난 대안학교와 미등록 교육시설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종교교육과 정치교육의 경계가 더욱 희미했습니다.
이 시리즈를 시작하며 아이들의 문제는 결국 어른들의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일부 극우 개신교 세력이 대안학교와 미등록 교육시설에서 어떤 역사와 세계관을 가르치고, 청소년을 정치집회로 이끌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이병권 인문연구가 lbkwon2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