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는 어떻게 아이들의 놀이가 되었는가 [칼럼] 인문연구가 이병권은 앞선 민주공화주의 6부작에서 대한민국의 오늘을 판단하고 미래를 설계할 기준으로 민주공화주의를 제시했다. 그 문제의식을 청년 극우화로 확장하는 새 연재물을 싣는다.
모든 아이의 문제는 결국 어른들의 문제다.”
이 연재는 청년을 탓하지 않는다. 대신 국가와 학교가 어떤 인간을 길러왔는지 묻는다. 반공의 전사와 산업역군에서 자기계발하는 경쟁자에 이르기까지, 한국 교육을 지배해온 인간형의 변화를 현대사 속에서 추적한다. 대학공동체와 공론장의 붕괴, 뉴라이트의 역사전쟁과 댓글공작, 극우 개신교와 온라인 플랫폼이 결합해 청년을 극우생태계로 끌어들이는 과정도 밝힌다.
따라서 이 글은 청년 극우화에 관한 현상 분석에 머물지 않는다. 한국 교육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인재상에 대한 종합적 비판이자, 극우생태계를 해체하고 청년을 민주공화국의 주권자이자 시민으로 다시 세우기 위한 구체적인 제도적 대안서다. 청년극우화를 우려하는 많은 목소리에 답하는 길라잡이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편집자 주)
2026년 6월 29일, 서울 목동야구장에서 제81회 청룡기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배재고등학교와 광주제일고등학교의 경기가 열렸습니다. 배재고가 6대 2로 앞서던 8회초, 배재고 더그아웃에서 광주일고 선수들을 향해 구호가 터져 나왔습니다. 스타벅스 가야지.” 탱크데이.”
한 학생이 선창하자 여러 학생이 따라 외쳤습니다. ‘스타벅스’와 ‘탱크데이’는 그해 5월 18일 스타벅스코리아가 군용 전차를 연상시키는 텀블러 사진과 함께 TANK DAY”라는 문구를 게시한 뒤, 일부 극우 성향의 온라인 공간에서 5·18민주항쟁을 조롱하는 밈(meme)으로 사용되던 말이었습니다. 한 달여 뒤, 그 말은 서울의 고등학생들이 광주의 고등학생들을 조롱하는 응원 구호로 다시 등장했습니다(연합뉴스, 2026.6.29.; 한국일보, 2026.6.29.).
배재고 선수단과 학부모, 교직원은 이후 광주일고를 찾아 사과하고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했습니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는 배재고 야구부에 6개월의 전국대회 출전정지 처분을 내렸고, 대한체육회는 재심에서 이를 1개월로 감경했습니다(중앙일보, 2026.7.20.). 잘못에 책임을 묻고 역사교육을 실시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학생들을 징계하고 사과를 받는다고 해서 그들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게 된 원인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건의 심각성은 몇몇 학생이 부적절한 말을 했다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한 시민들을 짓밟았던 계엄군의 탱크가 2026년 고등학생들의 놀이와 응원의 언어로 돌아왔다는 데 있습니다. 국가폭력의 기억은 지워졌고, 그 자리에는 상대를 자극하고 또래끼리 웃기 위한 짧은 구호만 남았습니다.
6일 오후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배재고등학교 야구부 학생들이 참배하고 있다.2026.7.6 연합뉴스
이 장면은 한국 현대사의 낯선 역전을 보여줍니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에서 학생들은 식민지배에 맞섰습니다. 1960년 4·19혁명에서는 중·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앞장섰습니다. 부마민주항쟁과 5·18민주항쟁, 1987년 6월항쟁에서도 학생과 청년은 시민들과 함께 독재에 저항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했습니다.
물론 과거의 모든 학생이 민주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독재정권이 만든 관제 학생단체에 참여하거나 권위주의와 반공주의에 동조한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학생운동 내부에도 교조주의와 정파주의, 경직되고 폭력적인 조직문화가 존재했습니다. 그럼에도 4·19혁명부터 6월항쟁까지 정치적으로 각성한 학생운동의 중심적인 흐름이 독재에 대한 저항과 민주주의의 회복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부 청소년은 5·18민주항쟁을 조롱하고 계엄과 탱크를 농담으로 소비합니다. 부정선거 음모론과 여성·중국인·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도 밈과 ‘드립’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들이 극우의 정치사상을 먼저 공부한 뒤 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짧은 영상과 온라인 게시물, 게임과 인터넷 방송, 친구들이 주고받는 유행어를 통해 극우의 언어부터 놀이로 익힙니다.
이념보다 놀이가 먼저 들어오고, 세계관은 그 뒤를 따라옵니다.
배재고 사건은 한 학교 야구부에서 갑자기 벌어진 우발적 일탈이 아닙니다. 극우는 지금 새롭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곁에 있었습니다. 다만 시대에 따라 모습과 언어, 지배의 방법을 바꾸며 마침내 청소년의 일상과 또래문화에까지 들어왔습니다.
■ 극우 확산의 현주소―극우는 이미 와 있었다
스스로 자신을 극우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극우적 정치인도 자신을 보수주의자라고 부르고, 극우단체도 자유민주주의와 애국을 지키는 시민단체라고 소개합니다. ‘극우’라는 이름에 담긴 반민주성과 폭력성, 배타성과 극단성을 굳이 드러낼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가 보수이고 누가 극우인지는 스스로 붙인 이름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선거에서 패배했을 때 그 결과를 인정하는지, 정치적 반대자를 경쟁자로 대하는지 아니면 제거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권력분립과 법치주의를 존중하는지,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의 동등한 시민권을 인정하는지, 독재와 국가폭력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도 중요한 기준입니다. 그들이 내세운 명칭이 아니라 실제 말과 행동을 봐야 합니다.
보수주의·극우·파시즘의 이념형적 차이
위의 표는 현실의 정치세력을 기계적으로 세 부류로 나누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와 정치적 반대자, 소수자의 권리와 국가폭력을 대하는 태도를 비교하기 위한 이념형적 기준입니다. 실제 정치세력은 이 세 유형의 경계에 놓이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특징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보수와 극우를 구분하는 기본적인 경계는 분명합니다. 보수가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진보와 경쟁한다면, 극우는 민주주의의 제도를 이용하면서도 다원주의와 동등한 시민권을 내부에서 침식합니다. 파시즘은 여기서 더 나아가 민주주의 자체를 폐기합니다.
배재고 학생들이 극우조직에 가입했거나 완성된 극우사상을 갖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한 말은 5·18민주항쟁을 폭동으로 왜곡하고, 광주시민을 진압한 계엄군과 탱크를 희화화하며, 국가폭력의 피해자와 특정 지역을 조롱해온 한국 극우의 언어였습니다. 학생들은 그 이념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극우의 세계관이 만들어낸 혐오와 배제, 국가폭력에 대한 선망은 그 말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배재고 사건은 극우가 새로 등장했음을 알린 사건이 아닙니다. 이미 청소년의 일상과 놀이에까지 들어와 있던 극우의 현주소를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 총과 칼을 내려놓은 극우는 문화전쟁을 선택했다
한국의 극우는 1987년 이후 갑자기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1987년 이전 한국 현대사의 대부분은 권위주의적 독재와 파시즘적 국가동원이 지배한 시기였습니다. 이승만 독재정권은 반공주의와 경찰권력을 이용해 정치적 반대자를 탄압했습니다. 박정희 독재정권은 군사독재와 개발주의, 국가주의적 대중동원을 결합했습니다. 전두환 독재정권은 군사반란과 광주학살로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이들에게 반공주의는 국가안보를 위한 이념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친일부역의 과거를 지우고 기득권을 유지하며, 정치적 경쟁자를 공산주의자와 반국가세력으로 몰아 탄압하는 강력한 통치수단이었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 친일부역세력은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습니다. 일제에 협력했던 상당수 관료와 경찰, 군인과 법조인은 해방된 국가의 핵심 기구에 다시 편입됐습니다. 식민지 권력이 사용했던 사찰과 고문, 검열과 사상통제의 방식도 반공국가의 통치기술로 재편돼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1987년 6월항쟁은 이러한 직접 지배방식에 결정적인 균열을 냈습니다. 그해 10월 제9차 헌법개정으로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가 도입되면서 선거와 평화적 정권교체를 중심으로 한 형식적 민주주의의 기반이 마련됐습니다. 독재체제를 지탱했던 정치·경제·언론·법조·교육의 기득권 구조까지 해체된 것은 아니었지만, 국민을 군대와 계엄, 고문과 투옥만으로 지배하던 시대는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웠습니다.
국제질서도 급변했습니다. 1989년 동유럽 사회주의 정권이 연이어 무너지고 베를린장벽이 붕괴했습니다. 1991년에는 소련이 해체됐습니다. 분단과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지배질서를 떠받쳐온 세계적 냉전체제가 무너진 것입니다.
국내에서는 민주화가 진전됐고, 국제적으로는 냉전이 해체됐습니다. 기존 기득권세력은 선거에서 국민의 표를 얻어야 했습니다. 냉전체제의 붕괴로 반공주의 하나만 내세워 자신들의 권력과 특권을 정당화하기도 어려워졌습니다.
물론 반공주의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북한과의 군사적 대치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반공주의는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지녔습니다. 다만 민주화된 시민과 새로운 세대를 설득하기에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기존 질서를 옹호하고 기득권의 지배를 합리화할 수 있는 더 세련되고 포괄적인 언어가 필요했습니다.
1998년 김대중 정부의 출범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선거를 통해 여야 간에 이루어진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였습니다. 이어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자 기존 기득권세력은 일시적인 정권 상실을 넘어 자신들의 역사적 정당성과 사회적 지위까지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됐습니다. 친일청산과 과거사 규명, 남북화해와 사학개혁, 언론개혁과 재벌개혁이 현실의 의제로 등장했습니다. 독재체제를 지탱했던 정치·경제·언론·법조·교육·종교의 기득권에는 자신들의 과거와 현재를 정당화할 새로운 역사와 국가의 이야기가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2000년대 초반 일부 전향 지식인과 시장주의 경제학자, 보수 시민단체와 종교계 인사의 조직화로 이어졌습니다. 이들의 출발점과 이해관계가 모두 같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세력을 하나의 역사관과 국가관 아래 묶어준 공통의 언어가 있었습니다. 뉴라이트(New Right)였습니다.
뉴라이트는 하나의 지휘부가 설계한 단일한 조직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반공주의와 시장만능주의, 식민지근대화론과 1948년 건국론은 여러 기득권세력이 공유할 수 있는 이념적 접점을 만들었습니다. 반공주의는 북한과 진보세력을 ‘내부의 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경쟁과 승자독식을 발전과 공정의 원리로 포장했습니다. 식민지근대화론은 일제의 식민지배를 근대화의 계기로 바꾸었습니다. 1948년 건국론은 3·1민족혁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약화시켰습니다. 이승만의 독재는 ‘건국’으로, 박정희의 군사독재는 ‘산업화’로 다시 포장됐습니다. 독립운동과 친일청산,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은 국가의 건설과 발전을 방해한 세력으로 낮춰졌습니다.
그 역사관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일관된 논리가 놓여 있었습니다. 약한 나라는 강한 나라의 지배를 받는 것이 불가피하다. 역사의 정당성은 자유와 존엄이 아니라 승리와 성공으로 판단해야 한다. 한국의 극우는 1987년 이후 새로 탄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독재체제를 지탱해온 지배세력이 형식적 민주주의와 냉전 해체라는 새로운 조건에 맞춰 자신의 언어와 조직, 지배방식을 바꾼 것입니다. 군대와 계엄으로 시민의 행동을 억눌렀던 극우는 이제 역사와 교육, 언론과 종교를 통해 시민의 생각을 지배하려 했습니다.
총과 칼을 내려놓은 극우는 문화전쟁을 선택했습니다.
■ 극우는 광장을 조직했고, 대학의 공론장은 무너졌다
뉴라이트는 일부 지식인의 연구모임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과거 기득권의 직접 당사자이거나 그 질서에 부응하고 이념적으로 동조할 수 있었던 세력이 뉴라이트의 역사관과 국가관 아래 결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치인과 경제계, 보수언론과 법조계, 사학재단과 일부 대형 보수 개신교회가 느슨하지만 강력한 연결망을 만들었습니다.
과거 급진적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가 극우로 전향한 일부 인사도 여기에 합류했습니다. 이들은 과거 운동권에서 익힌 조직과 선전, 대중동원의 기술을 새로운 극우운동에 활용했습니다. 이러한 결집은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확대됐고, 2016년 박근혜 탄핵 국면에서 대규모 태극기집회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극우는 국민 전체와 시민저항의 역사가 공유해온 두 개의 상징을 자신의 전유물처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는 국가와 국민의 상징인 태극기였고, 다른 하나는 시민저항의 공간인 광장이었습니다.
태극기는 3·1민족혁명과 독립운동, 4·19혁명과 6월항쟁에서 시민주권의 상징이었습니다. 광장은 독재권력에 맞선 학생과 시민이 모여 민주주의를 외쳤던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태극기 옆에 성조기가 등장했습니다. 한미동맹은 국가안보정책을 넘어 특정 정치세력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상징으로 변해갔습니다. 독재에 항거한 시민이 모이던 광장에는 탄핵반대와 부정선거 음모론을 외치는 군중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극우가 광장을 완전히 빼앗은 것은 아닙니다. 촛불을 든 시민도 계속 광장에 모였습니다. 다만 극우가 광장의 한 축을 조직하는 데 성공한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 조직적 기반 가운데 하나가 일부 대형 보수 개신교회였습니다. 교회는 전국적인 인적 연결망과 집회공간, 목회자의 권위와 대중동원 능력을 제공했습니다. 예배와 기도회는 정치집회의 형식과 결합했고, 반공주의는 종교적 구원론의 언어를 빌려 절대적인 선악의 문제로 바뀌었습니다.
노무현 정부의 사립학교법 개정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보수 개신교계와 한나라당, 뉴라이트의 결합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사학의 공공성을 강화하려는 개혁은 종교의 자유와 기독교 교육을 파괴하려는 좌파의 공격으로 규정됐습니다. 차별금지법과 성소수자 인권, 대북 화해정책도 반기독교·친공산주의 정책으로 공격받았습니다.
극우가 교회와 광장을 새로운 조직 기반으로 확보하던 바로 그 시기, 민주주의의 인적 토대를 길러내던 대학의 공론장은 빠르게 약화되고 있었습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대학은 독재권력이 완전히 장악하기 어려운 비판적 공간이었습니다. 학생들은 교실 밖에서 헌법과 민주주의를 배웠고, 시대의 문제를 함께 토론하며 거리와 광장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들어 전국 단위의 학생운동 조직은 사실상 해체됐습니다. 민주화로 독재타도라는 공동의 목표는 사라졌지만, 진보진영은 민주화 이후의 새로운 비전과 의제를 학생들의 생활세계 안에 충분히 뿌리내리지 못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와 뒤이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은 대학생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었습니다. 과거 고도성장기에는 대학을 졸업하면 취업하고 계층상승을 이룰 수 있다는 기대가 지금보다 강했습니다. 그 기대는 학생들이 당장의 취업준비를 넘어 사회와 시대의 문제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했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취업과 고용불안이 대학생의 가장 절박한 문제가 됐습니다. 등록금과 생활비를 감당하면서 어학연수와 자격증, 인턴 경험까지 준비해야 했습니다. 학생은 시민이기 전에 취업준비생이 됐고, 동료는 공동체의 구성원이기 전에 경쟁자가 됐습니다. 대동제도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축제에서 유명 가수와 아이돌의 공연을 소비하는 행사로 변해갔습니다.
과거의 대학문화가 언제나 민주적이고 바람직했던 것은 아닙니다. 학생운동 내부에도 교조주의와 정파주의, 폭력적인 조직문화가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이 사회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함께 해결하려 했던 공동체적 정치문화가 쇠퇴한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학생들의 사회의식이 갑자기 부족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취업과 생존을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환경이 시대와 공동체의 문제를 함께 고민할 시간과 공간을 빼앗았습니다. 공동체적 시민교육이 약해진 자리를 경쟁과 소비가 채웠습니다.
대학공동체의 쇠퇴만으로 극우의 성장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학생과 시민이 사회문제를 함께 토론하던 공론장의 축소는 뉴라이트의 역사관과 극우의 정치언어가 큰 저항 없이 퍼질 수 있는 조건 가운데 하나가 됐습니다. 극우는 조직되고 있었지만, 그 언어에 맞서 민주주의를 배우고 토론할 공동체는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 문화전쟁은 국가권력과 플랫폼을 만났다
뉴라이트를 중심으로 재편된 기득권연합은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역사와 교육, 언론과 온라인 공론장을 장기적인 지배 기반으로 재구성하려 했습니다. 교과서가 먼저 전장이 됐습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서 찾는 한, 친일협력과 독재를 국가발전의 공로로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미래세대가 3·1민족혁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 4·19혁명과 5·18민주항쟁을 자신의 역사로 기억한다면 이승만과 박정희를 절대적인 ‘건국’과 ‘산업화’의 영웅으로 만들 수도 없습니다.
2008년 교과서포럼은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를 출간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기존 한국근현대사 교과서가 좌편향됐다며 수정을 압박했습니다. 박근혜 정부 시기인 2013년에는 친일과 독재를 미화했다는 비판을 받은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2015년에는 국가가 하나의 역사해석을 정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추진됐습니다. 역사학계와 교사, 시민사회의 거센 반대로 국정화는 실패했지만, 문화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윤석열 정부에서는 역사·역사교육 관련 8개 기관과 위원회의 주요 보직 최소 25곳에 뉴라이트 또는 극우 성향으로 평가받는 인사들이 배치됐습니다. 그중 6곳은 기관장까지 같은 성향으로 평가받는 인사가 맡았습니다. 독립기념관과 동북아역사재단, 한국학중앙연구원과 국사편찬위원회가 대표적이었습니다(경향신문, 2024.8.13.; MBC, 2024.8.13.).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교과서의 내용을 바꾸려 했다면, 윤석열 정부는 역사와 교육정책을 생산하는 기관의 인적 구성까지 바꾸었습니다. 역사전쟁의 무대가 교과서에서 국가기관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온라인 공론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는 정부에 인터넷과 온라인 공론장의 위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국가정보원 심리전단과 국군사이버사령부는 댓글과 게시물, 합성사진과 온라인 유머를 이용해 정부 비판세력과 야당 정치인을 공격했습니다. 색깔론과 지역감정, 조롱과 비방이 국가기관의 조직적인 정치공작에 동원됐습니다. 대법원은 국가정보원 심리전단의 온라인 정치·선거 개입과 원세훈 당시 국가정보원장의 공모를 유죄로 확정했습니다. 국방부 조사에서도 국군사이버사령부 요원들의 광범위한 정치관여 행위가 확인됐습니다(대법원, 2018.4.19., 2017도14322; 국방부 조사본부, 2014.8.19.).
댓글공작과 사이버 여론조작, 교과서 수정과 국정화는 겉으로는 서로 다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국민이 역사와 현실을 바라보는 기준을 바꾸고 장기적인 지배 기반을 만들려 했다는 점에서는 하나의 흐름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일베를 비롯한 극우 성향의 온라인 커뮤니티가 성장했습니다. 국가기관이 일베를 직접 만들었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온라인 정치공작과 극우 커뮤니티는 같은 시대의 정치적 언어를 공유했습니다. 정치적 반대자를 ‘내부의 적’으로 규정하고, 색깔론과 지역감정을 동원하며, 조롱과 합성사진으로 상대의 인격을 파괴하는 언어였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조롱의 소재가 됐고, 5·18민주항쟁은 ‘폭동’과 지역혐오의 언어로 왜곡됐습니다.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 여성과 장애인, 성소수자와 이주민에 대한 혐오는 ‘드립’과 밈으로 포장됐습니다. 정치적 주장에는 최소한의 논리와 책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장난과 밈으로 포장된 혐오는 책임을 피해갑니다. 사실을 지적하면 농담도 이해하지 못하느냐”고 반박하고, 피해자가 항의하면 예민하다”며 다시 조롱합니다. 혐오의 언어에서 역사와 피해자의 고통은 지워지고 웃음과 자극만 남습니다.
유튜브와 온라인 플랫폼은 그 조롱을 조회수와 광고수익으로 바꾸었습니다. 분노와 혐오를 자극할수록 더 많은 관심을 얻었고, 추천 알고리즘은 이용자가 반응한 것과 비슷한 콘텐츠를 연이어 노출했습니다. 극우의 언어는 특정 조직이 일일이 지시하지 않아도 이용자의 반응과 플랫폼의 수익구조를 따라 반복되고 확산되는 상품이 됐습니다.
뉴라이트는 반공주의와 신자유주의, 식민지근대화론을 하나의 역사서사로 엮었습니다. 보수정권은 그것을 교육정책과 국가권력에 실었고, 일부 대형 보수 개신교회는 대중을 조직했습니다. 국가기관은 조롱과 비방을 온라인 정치공작의 기술로 사용했으며, 커뮤니티와 플랫폼은 이를 놀이와 상품으로 바꾸었습니다.
그 결과 극우는 더 이상 반공집회와 정치연설을 통해서만 다음 세대로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짧은 영상과 댓글, 밈과 유행어를 통해 청소년의 일상으로 들어갔습니다. 2026년 6월 29일, 배재고 학생들이 광주일고를 향해 외친 탱크데이”는 바로 그 긴 이동의 마지막 장면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아이들이 그 말을 처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어른들이 만들어 퍼뜨린 역사와 정치의 언어를 아이들이 놀이처럼 되풀이한 것입니다.
■ 사건은 끝나가지만 문제는 남아 있다
광주일고는 배재고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에 선처를 요청했습니다. 책임을 묻되 학생들의 미래에 영원한 낙인을 찍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출전정지 처분은 6개월에서 1개월로 줄었고, 배재고 선수들은 8월 봉황대기에 출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특히 3학년 선수들에게는 대학 진학과 프로야구단 입단을 위해 자신을 보여줄 마지막 전국대회였습니다. 피해를 본 광주일고가 다시 출발할 길을 열어준 선택은 존중받아야 합니다(한겨레, 2026.7.7.; 중앙일보, 2026.7.20.).
그러나 학생들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것과 사건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서울시교육청은 7월 9일부터 15일까지 배재고 전교생을 대상으로 민주화운동과 역사, 인권, 차별·혐오표현 예방교육을 실시했습니다. 학급별로 두 시간씩 교육하고 민주화운동 관련 특강도 진행했습니다. 필요한 조치였습니다. 그렇다고 두 시간의 특별교육만으로 오랫동안 형성된 역사인식과 또래문화가 달라질 수는 없습니다(MBC, 2026.7.7.; 뉴스1, 2026.7.13.).
중요한 것은 특별교육을 실시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이후 학교의 일상적인 교육이 어떻게 달라졌느냐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사용한 ‘탱크데이’라는 말이 어디에서 만들어져 어떤 경로로 퍼졌는지 직접 조사했습니까. 5·18민주항쟁 당시 계엄군의 국가폭력과 광주시민의 희생을 구체적으로 배웠습니까. 극우 커뮤니티에서 유통되는 역사왜곡과 혐오표현을 어떻게 판별해야 하는지 함께 토론했습니까. 학교의 교재와 도서관 자료, 교내 상징물이 학생들의 역사인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점검했습니까.
서울 강동구 배재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이승만 동상. 배재학당 출신인 이승만을 기리기 위해 1984년 건립됐으며, 국가보훈부는 이를 독립운동 현충시설로 분류하고 배재고가 관리하도록 하고 있다. 동상이 학생들의 ‘탱크데이’ 구호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학교가 누구를 위대한 인물로 기리고 그의 역사적 과오를 어떻게 가르치는지는 학생들의 역사인식과 무관하지 않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 재임 중인 1925년 탄핵됐고, 해방 후에는 반민특위를 무력화했으며, 국가폭력과 헌법 유린, 3·15 부정선거 끝에 4·19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났다.
이 질문 앞에서 배재고 교정에 세워진 이승만 동상을 가볍게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배재학당 출신입니다. 배재고 교정에는 1984년 2월에 건립된 높이 2.97m의 이승만 동상이 지금도 서 있습니다. 국가보훈부는 이를 독립운동 현충시설로 분류하고 배재고가 관리하도록 하고 있습니다(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 뉴시스, 2026.7.8.).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은 미국 정부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도, 국제연맹을 통한 독립도 이끌어내지 못했습니다. 그는 1919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에게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두어달라고 청원했습니다.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지만 정부 소재지인 상하이에 머문 기간은 약 6개월에 불과했습니다. 임시의정원의 결의를 부정하고 대통령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925년 탄핵됐으며, 위임통치 청원도 탄핵에 이르게 된 중요한 배경이었습니다(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이승만」·「임시의정원」).
해방 이후에는 친일부역세력을 청산하려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조직적으로 무력화했습니다. 1949년 6월 경찰이 반민특위 본부를 습격한 직후 이승만은 경찰의 습격이 자신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습니다(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제주4·3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학살에 대해서도 국가 최고통치권자로서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합니다(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2003).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으로 헌법을 유린했고,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처형했습니다. 대법원은 사형 집행 52년 뒤인 2011년 재심에서 조봉암의 국가변란 목적 진보당 결성과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습니다(대법원, 2011.1.20., 2008재도11). 이승만은 끝내 3·15 부정선거를 자행하다 중·고등학생과 대학생, 시민이 일으킨 4·19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났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탄핵되고, 친일청산을 무너뜨렸으며, 국가폭력과 헌법 유린, 부정선거 끝에 4·19혁명으로 축출된 독재자를 배재고는 왜 비판적 설명도 없이 ‘건국 대통령’과 위대한 선배로 기리고 있습니까. 물론 교정의 이승만 동상이 학생들의 구호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학교가 누구를 위대한 인물로 기리고 어떤 역사적 과오를 설명하지 않는지는 학생들의 역사인식과 무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동상은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동상을 세우고 관리하는 학교는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넵니다. 누구를 위대한 인물로 기억해야 하는지, 어떤 역사를 자랑스러운 역사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충분한 설명 없이 세워진 기념물은 때로 한 인물의 과오와 피해자의 고통을 학교의 기억에서 밀어냅니다.
학생들의 역사인식을 문제 삼으려면 학교도 자신이 어떤 역사를 가르치고 무엇을 침묵해왔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배재고 사건은 2026년 목동야구장에서 갑자기 탄생한 것이 아닙니다. 친일청산의 실패와 반공독재, 뉴라이트의 문화전쟁, 일부 보수 개신교회의 조직화, 국가기관의 온라인 정치공작, 커뮤니티와 플랫폼의 혐오산업을 거쳐 만들어진 언어가 고등학생들의 입을 통해 되풀이됐습니다.
배재고 사건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습니다. 아이들의 잘못에는 아이들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아이가 집단적으로 같은 언어를 배우고, 그 말에 담긴 국가폭력과 희생자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 채 반복하게 된 문제는 아이들만의 책임일 수 없습니다. 모든 아이의 문제는 결국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계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그 오랜 시간 동안 학교는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켜온 학생의 자리에는 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개인만 남게 됐습니까.
다음 글에서는 대한민국의 교육이 역사적으로 어떤 인간을 길러왔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왜 2026년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을 지켜낼 시민을 학교에서 충분히 길러내지 못하고 있을까요. 이 질문을 피해 간다면 우리는 청소년을 꾸짖을 수는 있어도 청소년 극우화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병권 인문연구가 lbkwon2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