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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 신분으로 교향곡의 아버지 된 요제프 하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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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이라고 하면 대부분 근엄한 가발을 쓴 옛날 사람, 학교 음악교과서에나 나오는 존재를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 알고 보면 상당한 익살꾼이었고, 나아가 부당한 권력에 웃음으로 맞선 원조 풍자꾼이었다.   1791년 하이든 초상화(위키피디아) 하인의 아들, 궁정의 하인이 되다 하이든은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로라우의 수레 만드는 사람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목소리가 좋아 빈의 장크트 슈테판 대성당 소년합창단에 들어갔는데, 변성기가 오자 가차 없이 쫓겨났다. 이후 십여 년간 밑바닥 음악가로 근근이 살다가 서른 무렵 헝가리 귀족가문 에스테르하지 공작가에 궁정악장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의 신분이다. 하이든은 예술가가 아니라 법적으로 하인이었다. 제복을 입어야 했고, 주인의 명령에 따라 매일 작곡해야 했으며, 주인이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해야 하는 처지였다. 이 대목에서 한국의 오늘날 노동현실, 특히 재벌총수와 임직원의 관계, 혹은 권력자와 그 밑에서 일하는 공직자들의 관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하이든은 이런 처지에서도 완전히 짓눌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안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저항하는 법을 익혔다.   오스트리아 로라우에 위치한, 요제프 하이든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의 모습. 이 집은 거듭된 복원 작업을 거쳐 현재는 하이든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위키피디아) 촛불을 하나씩 끄며 걸어 나간 악단원들 1772년, 에스테르하지 공작이 여름별궁에서의 체류를 예정보다 두 달이나 연장하겠다고 선언했다. 악단원들은 가족과 떨어져 지친 상태였고, 대놓고 항의했다가는 목이 날아갈 판이었다. 하이든은 정면충돌 대신 교향곡 45번, 이른바 고별교향곡 을 썼다. 마지막 악장에서 연주자들이 한 사람씩 자기 악보대의 촛불을 끄고 악기를 챙겨 조용히 무대를 떠난다. 끝까지 남는 건 바이올린 두 대뿐이다. 말 한마디 없이, 규정위반 하나 없이, 음악이라는 형식 안에서 자신의 요구를 전달한 것이다. 공작은 다음 날 바로 모두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파업도 아니고 성명서도 아니고 그냥 연주회 하나로 요구를 관철시킨 셈이다. 이 이야기가 지금 우리 사회에 던지는 시사점은 뚜렷하다. 정면 돌파만이 유일한 저항의 방식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위트와 창의성이 때로는 정치적 구호보다 강력한 무기가 된다는 것이다.   하이든의 아내. 루트비히 구텐브룬의 작품으로 추정되나 진위가 확인되지 않은 세밀화(위키피디아) 황제를 위한 노래가 훗날 어디로 갔나? 하이든은 1797년, 프랑스 혁명군에 위협받던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를 위해 황제 찬가 를 작곡했다. 훗날 이 선율에 완전히 다른 가사를 붙인 곡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현재 독일 국가 도이칠란트의 노래 (Deutschlandlied)다. 더 얄궂은 건, 나치 독재시절 이 곡의 1절과 2절이 독일 민족의 우월함을 선동하는 노래로 악용되었다는 사실이다. 한 사람이 황제를 찬양하려고 쓴 곡조가 백여 년 뒤에는 독재자들의 손에 들어가 전혀 다른 정치적 무기로 둔갑한 것이다. 현재 독일 국가는 ‘통합과 정의와 자유’로 시작하는 이 노래의 3절만을 쓰고 있다. 이 대목에서 씁쓸한 웃음이 나온다. 음악이든 태극기든 성조기든 애국가든, 상징이라는 것은 만든 사람의 의도와 무관하게 후대 권력자들에게 얼마든지 도용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한국에서도 순국선열의 정신이나 헌법정신을 정치적 목적에 맞게 왜곡해 갖다 쓰는 세력이 끊이지 않는다. 상징을 지키는 일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몫이 아니라 그것을 물려받은 후대의 몫이라는 걸, 하이든의 찬가는 역설적으로 증언한다.   크리스티안 루트비히 제하스가 그린 하이든의 초상화(1785년, 위키피디아) 하인에서 유럽 최고의 자유인으로 만년의 하이든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후원자였던 니콜라우스 공작이 죽고 나서 그는 처음으로 자유계약 음악가가 되어 런던을 두 차례 방문했고, 그곳에서 유럽최고의 인기인 대접을 받으며 부와 명성을 함께 거머쥐었다. 옥스퍼드 대학은 그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 흥미로운 건 그의 인간관계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이든을 진심으로 존경하여 현악사중주 여섯 곡을 헌정했고, 하이든 역시 모차르트의 아버지에게 당신 아들은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작곡가 라고 극찬한 편지를 남겼다. 만년에는 젊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을 제자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하인 출신이 결국 유럽 음악계 최고 어른으로 대접받으며 생을 마친 것이다.   1791년 영국에서 존 호프너가 그린 하이든 초상화(위키피디아) 한국에 남기는 질문 하이든의 생애를 관통하는 것은 결국 이것이다. 부당한 체제 안에 있더라도 인간의 존엄과 창의성은 완전히 짓밟히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 존엄을 지키는 방법이 반드시 격렬한 충돌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2024년 12월 3일 밤, 계엄이라는 시대착오적 카드를 꺼내든 윤석열을 겪은 한국사회에 이 오스트리아 하인 출신 작곡가의 이야기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부당한 명령 앞에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저항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지금 만들고 있는 상징과 언어들은 훗날 누구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인가.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촛불을 하나씩 끄고 무대를 떠났던 그 악단원들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걸어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하이든의 묘소가 있는 오스트리아 아이젠슈타트의 베르크키르헤(Bergkirche, 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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