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차례 사형 선고 받고도 국부 대우 주세페 마치니 [뉴스] 혁명은 매번 실패, 그런데 국부로 추앙받는 이상한 이력
주세페 마치니(Giuseppe Mazzini, 1805~1872)라는 사람의 이력서를 한번 들여다보자. 봉기 시도는 여러 번, 결과는 모두 실패. 일생의 대부분을 조국 밖에서 떠돌았고, 이탈리아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감옥살이도 했고, 국경을 넘나들며 이름을 바꿔가며 숨어 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남자, 지금 이탈리아에서는 가리발디, 카부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나란히 조국의 아버지 넷 중 한 명으로 떠받들리고 있다. 실적표는 실패 투성이인데 훈장은 국가 최고등급.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대체 이 사람 뭘 한 거지?
1860년의 주세페 마치니(위키피디아)
청년이란 이름의 반란
마치니는 1805년 프랑스 제1제국 제노바에서 의사이자 대학교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하고 책만 파고드는 조숙한 아이였다고 한다. 제노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변호사가 됐지만, 정작 이 사람이 실제로 몰두한 일은 지하조직 가담이었다. 1827년경 비밀결사 카르보나리에 들어갔다가 붙잡혀 옥살이를 했고, 그다음엔 아예 판을 새로 짰다. 1831년 마르세유 망명지에서 청년이탈리아 조직을 만든 것이다. 목표는 소박하게도 이탈리아 반도 전체의 통일과 공화국 수립. 문제는 당시 이탈리아가 통일은커녕 오스트리아, 교황령, 여러 왕국으로 조각조각 나뉜 상태였다는 것. 오스트리아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Klemens von Metternich, 1773~1859)는 이탈리아는 지리적 명칭에 불과하다 고 대놓고 비웃었다. 나라도 없는데 나라를 통일하겠다니, 지도에 없는 섬을 찾아 떠나는 항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이 청년 브랜딩이 묘하게 히트를 쳤다. 마치니는 곧 청년유럽이라는 국제판까지 만들었고, 청년폴란드, 청년독일 같은 유사단체들이 유럽 곳곳에서 우후죽순 생겨났다. 낭만주의 시대의 민족주의는 이렇게 청년 이라는 단어에 실려 국경을 넘나들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이때만큼은 청년 이 곧 이념이었고, 낡은 왕조와 교회권력에 맞서는 저항의 상징이었다.
제노바에 있는 마치니의 생가(현재 리소르지멘토 박물관 및 마치니 연구소 소재지)(위키피디아)
로마공화국의 짧은 봄과 런던의 긴 겨울
마치니의 절정은 1849년이었다. 유럽전역을 휩쓴 1848년 혁명의 여파 속에 로마에서는 교황을 몰아내고 공화국이 선포됐고, 마치니는 아우렐리오 사피, 카를로 아르멜리니와 함께 세 명의 집정관 중 한 사람으로 로마를 통치했다. 그러나 이 공화국은 딱 반 년을 버텼다. 프랑스군이 개입해 교황을 복위시키자 마치니는 다시 도망자 신세가 됐다. 이후 그는 런던에 정착해 이탈리아 소년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민중의 사도 라는 신문을 만들며 펜으로 싸움을 이어갔다. 검이 아니라 잉크로 혁명을 지속한 셈이다. 영국 지식인 사회는 이 이상주의자 망명객을 신기하게, 또 존경의 눈길로 바라봤다.
런던 노스 가우어 스트리트 183번지의 마치니 기념 푸른 명판(위키피디아)
사상가는 이겼는데 정치가는 졌다
하지만 정작 통일 이탈리아를 실제로 완성한 건 마치니가 아니었다. 군사적 실행력은 주세폐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 1807~1882)가, 냉철한 외교와 협상은 사르데냐 왕국 총리 카밀로 벤소 디 카부르(Camillo Benso di Cavour, 1810~1861)가 맡았다. 흥미로운 건 이 두 사람 모두 청년이탈리아 출신, 즉 마치니의 제자 뻘이라는 점이다. 씨를 뿌린 건 마치니였는데 밭을 갈고 추수한 건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것도 마치니가 그토록 경멸했던 현실정치, 즉 왕실과의 타협을 통해서였다.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이 선포됐을 때 그것은 그가 꿈꾸던 공화국이 아니라 입헌군주국이었다.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고도 왕에게 충성서약을 하는 게 싫어서 마치니는 등원조차 거부했다. 세상을 바꾸겠다고 평생을 바쳤는데, 정작 바뀐 세상에는 자기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상은 옳았지만 정치는 끝내 그의 것이 되지 못했다. 역사는 가끔 이렇게 잔인하다.
마치니의 저술을 읽었다는 이유로 총살당한 이탈리아 시민들 그림(위키피디아)
한국에 던지는 질문, 도덕은 누가 짊어지고, 힘은 누가 쥐는가?
이 구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도산 안창호(1878~1938)는 1907년 비밀결사 신민회를, 1909년에는 청년학우회를 만들었다. 이름부터 청년 , 표방한 목표도 인격수양과 실력 양성. 마치니식 도덕계몽 노선과 놀랍도록 닮았다. 그러나 실제로 해방을 끌어낸 힘은 무장투쟁과 외교전, 그리고 국제정세라는 훨씬 거칠고 현실적인 영역에서 나왔다. 도덕적 순수함을 지킨 쪽과 실질적 성과를 낸 쪽이 늘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마치니와 안창호는 100년의 시차를 두고 똑같은 딜레마를 짊어졌던 셈이다.
지금 한국 진보 정치판을 봐도 이 긴장은 여전히 살아 있다. 원칙과 순수성을 지키자는 목소리와, 어떻게든 현실권력을 쥐고 실제로 뭔가를 바꾸자는 목소리가 자주 충돌한다.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사태 이후 한국사회가 겪은 혼란도 결국 이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옳은 말을 하는 사람과 실용적으로 일을 되게 만드는 사람이 서로 다른 진영에 서 있을 때, 그 둘을 적으로 만들 것인가 한 팀으로 묶을 것인가. 마치니는 끝내 이 답을 찾지 못하고 자신이 세운 나라의 국회 문턱조차 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그렇다고 그의 사상마저 실패한 것은 아니다. 통일 이탈리아라는 결과물 자체가 그의 씨앗에서 자란 나무였으니까.
마치니가 세상을 떠난 지 150년이 지났지만 이상과 현실을 어떻게 한 몸에 담을 것인가 하는 숙제는 여전히 미완이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이상을 버리지 않은 사람도, 그 이상을 배신한 사람도, 언젠가는 그 법정에 다시 서게 되어 있다.
스위스 솔로투른 주 그렌첸에 있는 주세페 마치니 기념비(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