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로그인   회원가입   초대장  
모니터링&뉴스레터   페투미X사회혁신
페투미X사회혁신   서비스 소개   아카이브   이야기   이용 안내
페이지투미는 사회혁신분야의 새로운 정보를 일주일에 3번, 메일로 발송해드립니다.

link 세부 정보

정보 바로가기 : 소리굿 아구…문화운동패와 함께 제작한 마당극 효시

소리굿 아구…문화운동패와 함께 제작한 마당극 효시
[행사]
1973년이면 서울의 대학가에 ‘가면극(탈춤)’ 운동이 뿌리내리기 시작할 때였다. 채희완(전 부산대 교수)이 1970년 시도하다 못한 민속가면극연구회가 1971년 정식으로 출범했고, 이화여대 연극반이 1972년 채희완의 도움으로 ‘봉산탈춤’을 처음 공연했으며, 1973년 이화여대, 연세대, 서강대에 민속극연구회가 탄생했다. 앞서 부산대 전통예술연구회가 출범했지만, 전승과 재현의 성격이 강했다. 서울대 음대 작곡과 학생 이종구가 그해 10월 말 열린 서울음악제 관현악 부문 공모에서 창작 관현악곡 ‘마지굿’으로 입상했다. 한반도 고대 제천의식 가운데 하나인 ‘영고’의 굿 음악을 재해석해 국악기와 서양 관현악기로 창작한 퓨전 음악이었다. 이종구는 우리 음악적 전통과 현대 서양음악과 결합해 우리의 역사와 정서를 표현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마지굿’ 이후에도 최초의 국악 오페라로 꼽히는 ‘한울춤’의 음악을 비롯해 가극 ‘환향녀’, ‘독도’, ‘동학혁명’ 등을 작곡했다. 그런 이종구의 졸업 작품 발표회가 12월에 있었다.  김민기가 대본을 쓴 소리굿 아구는 남사당 덧뵈기 넷째마당 먹중 과장을 뼈대로 일본인의 기생관광을 풍자한 마당극이다.  2017년 5월 경남 진주창작탈춤한마당에서 공연한 소리굿 아구2 공연 장면. 소리굿 아구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양한 변주로 공연되고 있다. 사진출처: 유튜브 강원영상콘텐츠 갈무리 아는 사람만 가는 게 졸업 발표회였지만 이종구의 발표회에는 채희완, 김민기, 임진택, 김석만 등 연극, 탈춤 등 서울대 문화 운동 패들이 몰려갔다. ‘마지굿’의 성가도 있었지만, 그날 발표한 이종구의 작품이 칸타타 이었다는 점이 이들을 자극했다. 동학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은 신동엽 시인의 서사시 발표 이후 민족 문학 혹은 문화 운동 패들이 주목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버터기름 반질반질한’ 음대생이 ‘동학’을 주제로 칸타타를 작곡한다는 것은 당시로선 하나의 ‘사건’이었다. 이 작품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이가 다름 아닌 임진택이었다. 앞서 임진택은 1973년 여름부터 김지하가 지은 의 연출을 맡고 출연했으니, 칸타타 에서 상황을 설명하고 대사를 전달하는 레치타티보를 맡는 데 그만한 적임자도 없었다. 발표회가 끝나고 평가회를 겸한 뒤풀이 자리에서였다. 왁자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고 한쪽 구석에서 맥주만 홀짝거리던 김민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김민기는 음대 서클 ‘20세기 음악연구회’에서 이종구와 만나 협업을 하곤 하던 사이였다. 김지하나 신경림 등의 시에 이종구가 곡을 붙인 작품이 국악과 기타 반주로 무대에 올려질 때면, 기타 부분의 편곡과 연주 그리고 노래를 맡곤 했다. 우리 힘으로 음악극 하나 만들어봅시다” 소리굿 아구의 모티브가 된 남사당 덧뵈기 공연장면 중 취발이(오른쪽). 취발이는 노장의 여자인 소무를 빼앗아 잉태시키는 인물이다. 사진출처: 프레시안(임진택 제공)  남사당 덧뵈기  노장과 피조리의  공연장면. 사진출처: 프레시안(임진택 제공) ‘탈춤과 국악을 엮어서 새로운 ‘소리굿’을 시도해 보자는 것이었다. 창작욕이 넘치던 이종구는 즉각 찬성했다. 일만 터지기를 기다리던 젊은 문화패들의 의견도 불문가지였다. 10·2 유신 철폐 시위로 그나마 남아 있던 학생운동권의 후방 지원부대마저 끌려간 이후 학원가는 조용했다. 남아 있는 건 문화패뿐이었다. 참석자들의 논의는 실행계획으로 직행했다. 당시는 시국 문제와 관련하여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예윤)의 규제가 심하던 때였다. 이런저런 다양한 의견이 오간 끝에, 예윤의 사전 심사를 거치지 않고 공연을 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개인 발표회 형식으로 하는 게 좋겠다는 것으로 논의가 모였다. 공연 명분은 ‘이종구 작곡 발표회’로 삼고, 1부에서는 이종구 작곡의 가곡(歌曲)들을 연주하고, 2부에는 ‘소리굿’ 한판을 새로 짜기로 했다.”(임진택) 그로부터 4개월 뒤인 1974년 3월 30일 장충동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이종구 작곡 발표회’가 라는 표제로 열렸다. 그 자리에서 김민기는 공연의 인트로를 맡아 외국 젊은이의 노래가 우리의 젊은이에게 공감될 수는 없다”라는 요지로 이날 공연의 취지를 소개했다. 도 흥미가 있었던지 ‘기성 음악에 도전하는 젊은 이단아들’이라는 제목 아래 그들은 서양 노래의 흉내를 거부한다. 국악을 흉내 내는 것에도 만족하지 못한다”라고 소개했다. 공연은 1, 2부로 이루어졌다. 1부에서는 이종구가 김지하의 시에 멜로디를 입힌 ‘빈 산’과 ‘서울 길’을 비롯해 ‘백제관음’ ‘하나이었다더라’ 등을 선보였다. 이어지는 2부가 였다. 대본을 쓴 김민기는 애초 제목을 이라고 했다. 노래로 된 굿이라는 뜻이었다. 공연이 가까워지면서, 공연의 내용과 성격을 드러낼 제목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됐고, 작중 주인공의 이름을 포함한 로 제목이 바뀌었다. 는 남사당 덧뵈기(탈춤놀이) 중 넷째 마당인 먹중 과장을 뼈대로 마당에서 펼치는 굿 혹은 극이었다. 내용은 한국인의 자존심을 짓이기고 있던 일본인의 기생관광을 소재로, 이를 공공연히 권장하는 박정희 정권의 기막힌 행태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덧뵈기에서 문란한 성생활에 탐닉하는 ‘먹중’을 일본인 ‘마라데쓰 사장’으로, 성적 노리개로 등장하는 ‘피조리’는 ‘여공’과 ‘여대생’으로, 양반과 맞서고 또 욕보이는 ‘취발이’는 ‘아구’로 바꿨다. 열린 결말로 이루어져 상황에 따라 아구가 마라데쓰를 제압하기도 하고, 아구가 마라데쓰에게 제압당하도록 구성할 수 있게 했다. 앞서 박정희 정권은 1965년 7차에 걸친 한일회담 끝에 한일 기본 조약을 조인했다. 국교가 정상화되자 일본의 졸부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력으로 집어삼켰던 병탄 시절을 그리워하던 그들은 이번엔 돈을 앞세워 한국인의 자존심을 유린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행태를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 ‘기생관광’, 즉 섹스 관광이었다. 국교 정상화 이후 완만하게 늘던 일본인 관광객들은, 일본 정부가 중국과 국교를 맺고 대만과는 국교를 단절하면서 대만으로 향했던 발길을 대거 한국으로 돌렸다. 1971년 10만 명에 불과하던 일본인 관광객 숫자는 1973년 50만 명으로 폭증했다. 85%가 남성이었고, 대부분 중년으로 부인을 동행하지 않았다. 떼 지어 몰려온 일본인 관광객들은 마치 ‘식민지 조선’을 시찰이라도 하듯 거들먹거리며 돌아다녔고, 전리품이라도 챙기듯 매춘에 혈안이었다. 술 취해 한국 여성을 옆에 끼고 군국주의 시절 일본 군가를 목청껏 부르는 자도 있었다. 한국에 상주하는 일본인 1000명 중 500명이 현지처와 산다는 게 당시 경찰의 추산이었다. 일본인들에게 한국은 성적 식민지였고, 한국 여성은 성적 노리개였다. 일본인 섹스관광, 이른바  기생관광의 현주소와 문제점을 지적한 동아일보 1973.7.10 기사. 사진출처: 동아일보 1972년 일본교통공사에서 발행한 관광 안내서는 ‘한국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욕망을 충족시키는 나라’라고 홍보했다. 일본 관광 여행사들은 한국에선 하루 30달러만 쓰면 최고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라고 소개했다. 태평양 건너 미국의 시사주간지 까지 특집 기사를 보도하며 ‘한국이 일본 호색한들의 도락장이 되었다 라고 개탄할 정도였다. 박정희 정권은 일본인을 상대로 한 ‘기생관광’을 총력 지원했고, ‘기생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온갖 편의와 혜택을 제공했다. 삼청각, 대원각 등 정부가 지정한 기생관광 요정에 대해서는 지방세 감면 등 세제 혜택을 줬고, 이들 업소에 출입하는 여성과 종사자에게는 야간 통행금지도 면제했다. 당시 자정이 넘어서도 활보할 수 있는 자는 정보기관원이 거의 유일했으니, ‘기생’은 기관원급이었다. 국무총리란 자(김종필)는 당시 이화여대생들을 만나 ‘외화를 벌어들이면 누구나 애국자’라고 떠들어댔다. 언론이나 문화예술계, 학계는 뒤에서 쑥덕공론만 할 뿐 유신 정권의 서슬에 눌려 찍소리도 못했다. 그런 참담한 현실 속에서 언론, 학계, 정치권, 문화계 심지어 학생운동권을 통틀어 처음으로 기생관광을 정면에서 풍자하고 비판한 공연이 바로 였다. 대본은 ‘소리굿’의 제안자였던 김민기가, 작곡은 이종구가 맡았다. 우리춤 운동의 선구자 이애주를 비롯해 채희완, 임진택, 김석만 등 서울대의 문화 운동 패들이 연기자로 참여했다. 당시 김지하가 제시한 민중 주체의 새로운 민족문화 형식의 창조를 위해, 탈춤과 민요와 춤 등 우리의 전통 예술을 지금 여기의 문제를 담는 그릇이자 표현 수단으로 삼으려 고민하던 이들이었다. 벗으라면 벗겠어요/ 당신이 벗으라시면/ 창피해도 벗겠어요/ 쪽팔려도 벗겠어요/ 먼훗날 당신이 나를 버리고/ 도의적 법적 책임 없다 하여도/ 짜릿하던 그 순간/ 수지맞던 그 시절/ 꿈이었다 생각해도/ 벗으라면 벗겠어요/ 주체적으로 벗겠어요.” 관객들은 경악했다. ‘소리굿’이라고 하여 뭔가 남다른 것을 기대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파격적일 줄은 몰랐다. 시작하자마자 채희완은 여대생 탈을 뒤집어쓰고, 관능적인 춤과 노래로 관중들을 폭소와 환호 속으로 몰아넣었다. 채희완은 그런 관중을 보며 생각했다. ‘오라, 탈춤이 오늘의 문제를 이렇게도 질러댈 수 있구나!’ 임진택은 그날 공연을 이렇게 회고했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탈춤에 바탕을 둔, ’소리굿‘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표방하고 내놓은, 당시엔 너무나 파격적이고 신선한 시도였다. 이애주의 여공 춤, 채희완의 여대생 춤, 임진택의 마라데스 춤, 김석만의 아구 춤…, 여기에 이종구의 작곡과 김영동의 연주, 거기에 또 이 작품을 기획하고 극본을 쓰고 뒷일까지 맡은 김민기의 노래…. 후에 민중문화 운동의 문화패 후배들이 소리굿 의 공연에 참가한 선배들을 ‘문화운동 1세대’라 칭하게 된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 ‘이종구 작곡발표회’는 김민기를 뒤에서 후원했던 또 다른 대중음악평론가 최동욱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공연을 하자면 필요한 게 돈. 학생들이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김민기로부터 공연 계획을 듣고 최동욱은 음반 발매 계약과 함께 계약금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했다. 당시로서는 최강의 조합이었던 지구레코드사와 미국의 RCA가 함께 라이선스 음반을 제작하도록 계약을 주선한 것이다. 계약금은 공연의 종잣돈이 되었다. 최동욱은 또 방송사와 협의해 이 공연을 티브이에서 녹화 방송하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최동욱은 국내 최초의 ‘디스크자키(디제이) 1호’로 꼽히는, 당시 대중음악계의 큰손이었다. 1960년대를 풍미했던 방송 프로그램 ‘가요 톱 텐’과 ‘팝 탑 텐’을 개발했고, 동아일보에 팝 칼럼을 쓰기도 했다. 70년대 초 3년 동안 청취율 1위를 기록한 동아방송의 ‘세 시의 다이얼’도 그의 작품이었다. 1963년 최경식, 이백천, 정홍택 등과 함께 한국 경음악 평론가협회를 창립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종구 작곡발표회’는 티브이로 송출되지 못했다. 음반 발매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2부 로 넘어가면서 녹화가 돌연 중단됐다. 그럴 만도 한 것이 1부 이종구의 신곡에는 담시 과 필화사건의 주인공 김지하의 시를 노랫말로 한 곡들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공연장에서 배포된 팸플릿을 통해 드러난 2부 소리굿의 주제는 기생관광이었다. 방송사나 레코드사나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 있었다. 방송은 물론 ‘예윤’의 검열을 통과할 가능성도 전혀 없었다. 그러나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막 개관한 국립극장 중극장(500석)은 두 차례 공연 모두 만석이었다. 알음알음 입소문으로 퍼진 공연 내용을 어떻게 알고 청중들이 얼마나 몰려왔는지, 입장료가 200원인데 암표 값이 무려 3천 원에 이르기도 했다고 한다. 1973년 8월 완공된 장충동 국립극장 개관 당시 모습. 이 곳에서 소리굿 아구 공연이 성공리에 열렸다. 사진출처: 국립극장 60년사 의 탄생에는 ‘폰트라’의 영향이 컸다. 당시 김윤수, 김지하 등 폰트라 회원들이 고민하던 게 민중 주체의 민족문화 형식의 창출이었다. 분단 모순에 더해 대일 굴욕외교로 더 깊어진 민족문제,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 이후 깨어나고 있는 민중 의식을 어떤 그릇에 담아 어떻게 표현하느냐의 문제를 푸는 것이었다. 민족 모순도 결국 민중의 삶에 반영돼 그들의 고통과 절망으로 드러나는 것. 우리나라에서 그런 민중 삶의 총체성을 표현한 형식이 탈춤, 굿, 판소리, 민요 등 전통 예술이었다. 따라서 우리의 예술적 전통에 서양의 음악이나 춤, 연극적 요소를 결합해 ‘지금 여기’의 민중적 삶의 전형을 창조하는 게 이 문화 운동 1세대의 과제였다. 이 문제에 천착했던 채희완에 따르면, 당시 이들의 골수에 박힌 것은 ‘민중이란 무엇인가?’ ‘나는 민중인가?’라는 물음이었다. 그런 점에서 는 김윤수의 민중 미학, 판소리와 서사시를 융합한 김지하의 담시, 오윤수의 민중미술, 채희완의 가면극과 이애주의 우리춤, 임진택의 소리와 김석만의 연극, 그리고 이종구의 음악, 김민기의 노래와 대본 등 당시 문화 운동 패의 역량이 결집한 결과물이었다. 가 지금도 그 맥이 꼿꼿하게 살아있는 마당극의 효시로 인정받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김민기는 노래를 시작하면서부터 자신의 노래가 통기타나 포크에 갇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렇다고 전통의 율격을 그대로 따르는 것도 원치 않았다. 노래가 민요가 되고 판소리가 되며, 판소리나 민요가 오늘의 노래가 되고, 또 노래가 서사가 되어 극이 되는 것을 추구했다. 실제로 는 우리의 예술적 전통이 당대의 문제를 드러내고 극적으로 표현하며 전달하는 데, 민중의 삶과 정서를 표현하는 데 얼마나 유용한지 유감없이 보여줬다. 김민기가 뿌린 마당극은 1970년대와 1980년대  문화운동과 민주화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다. 사진은 2019년 연세대 탈춤반 40돌을 기념해 노천극장에서 열린 탈춤 공연 모습.  사진출처: 한겨레신문 이후 ‘마당’에 판을 깔고 관객과 배우가 한데 어울리는 공연이 대학가를 휩쓸었다. 축제나 행사 때 농악이나 풍물의 길닦이에 이은 마당놀이는 필수가 되었고, 마당놀이의 주인공은 단연 마당극이었다. 각 대학에는 탈춤반, 가면극 연구회, 판소리회 등이 우후죽순 생겼다. 마당놀이, 마당극이 70년대 중반 이후 긴급조치 9호 시절 문화 운동은 물론 ‘유신철폐’ 전투에서 저항의 분위기를 예열하고, 물꼬를 트는 선봉 노릇을 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역대 최강의 긴급조치라는 9호가 선포되자마자. 이것을 정면에서 비웃어 버린 서울대의 ‘오둘둘 시위’(1975년 5월 22일)는 서울대 가면극연구회와 연극반이 기획하고 진행하고 이끌었다. 그해 4월 11일 할복한 김상진 열사 장례식으로 이루어진 이날 시위는 가면극연구회 회원들이 울려대던 격렬하고도 처절한 북, 꽹과리, 장구, 징 소리와 함께 시작했다. 선두를 이끌던 이는 훗날 영화감독 장선우로 이름을 알린 장만철 가면극연구회 2대 회장이었다.곽병찬 언론인 chankb1957@naver.com


최근 3주간 링크를 확인한 사용자 수

검색 키워드


주소 : (12096) 경기도 남양주시 순화궁로 418 현대그리너리캠퍼스 B-02-19호
전화: +82-70-8692-0392
Email: help@treeple.net

© 2016~2026. TreepleN Co.,Ltd. All Right Reserved. / System Updated

회사소개 / 서비스소개 / 문의하기 /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