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로그인   회원가입   초대장  
모니터링&뉴스레터   페투미X사회혁신
페투미X사회혁신   서비스 소개   아카이브   이야기   이용 안내
페이지투미는 사회혁신분야의 새로운 정보를 일주일에 3번, 메일로 발송해드립니다.

link 세부 정보

정보 바로가기 : 사회환원 위해 설립한 오류애육원, 누가 가로챘나

사회환원 위해 설립한 오류애육원, 누가 가로챘나
[사회혁신]
오류애육원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이름 하나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송석도. 오류애육원을 오랫동안 운영했던 인물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오류애육원을 이야기할 때면 송석도를 설립자로 기억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실제 재단 홈페이지도 그렇게 설명한다. 그러나 송석도의 조카인 송통영 씨의 기억은 다르다. 통영 씨가 기억하는 오류애육원의 시작에는 그의 아버지 송석홍이 있었다. 오류애육원은 큰아버지 송석도가 처음 만든 게 아닙니다. 제 아버지가 시작했습니다. 오류애육원의 시작은 1951년 4월, 한국전쟁 한복판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아버지는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 몇 명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장소가 경기도 부천군 오류면(현재 서울 구로구 오류동)이었습니다. 전쟁은 수많은 사람을 고향에서 밀어냈죠. 집을 잃은 사람들은 떠돌았고, 아이들은 부모를 잃었을 때였습니다. 국가의 구호체계가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웠던 시절입니다. 그때 아버지 송석홍에게 미군 측의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난민들을 수용할 장소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송석홍이 돌보고 있던 전쟁고아들과 난민들을 받아들이는 시설을 만들고, 미군은 그곳에 필요한 구호물자를 지원하겠다는 취지였습니다.” 그것이 통영 씨가 기억하는 오류애육원의 출발이다. 오류애육원이 들어선 토지의 출발점도 남다르다. 통영 씨에 따르면 그의 할아버지 송후용과 아버지 송석홍은 이승만 정부 당시 농지개혁 과정에서 각각 약 3천 평의 농지를 불하받았다. 가족은 그 땅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어엿한 고아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농장을 운영하던 가족들이 전쟁으로 갈 곳을 잃은 아이들 몇 명을 거두어 먹이고 재우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 소식을 듣고 미군이 난민수용소를 제안한 것이다. 전쟁이 끝나자 성인 난민들은 각자의 삶을 찾아 떠났다. 하지만 아이들은 갈 곳이 없었다. 그때 남겨진 전쟁고아들을 계속 돌보기 시작한 곳. 통영 씨는 그곳이 바로 오류애육원의 실질적인 출발점이었다고 말했다. 전쟁이 끝났다고 아이들까지 갈 데가 생긴 것은 아니잖아요. 어른들은 돌아갔지만 아이들은 남았습니다. 그 아이들을 계속 돌본 겁니다.” 미군이 지어준 막사에서 아이들을 돌보면서 오류애육원은 고아원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오류애육원의 최초 설립자가 송석홍이라는 당시의 법인 등기부 등본(송통영씨 제공) 통영 씨가 말하는 오류애육원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그의 가족사를 함께 들여다봐야 한다. 그의 할아버지 송후용은 일제에 저항했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통영 씨는 할아버지를 머리가 비상하고 영리했던 사람”으로 기억했다. 당시 최고 학부를 졸업한 지식인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런 집안의 아들이었던 송석홍 역시 사회와 정치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송석홍은 해방 이후 정치에 뛰어들었고, 경기도 부천군 오류면을 지역구로 하는 경기도 의원을 지냈다. 당시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 독재정권과 맞섰다는 것이 통영 씨의 설명이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송석홍과 달리 큰아버지인 송석도는 그다지 영특하지 않았고 배움도 길지 않았다. 또한 아버지 송석홍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의 측근으로 활동했다고 기억한다. 정권과 야당의 충돌이 격화되던 시기였다. 야당 인사에 대한 탄압과 불법적인 연행과 감금 등이 이어졌고, 송석홍 역시 정치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런 상황이라 아버지는 오류애육원의 운영을 자신이 직접 맡는 것이 시설에도 좋지 않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사장은 고모부인 정현철에게 맡겼고, 원장은친형인 송석도가 맡았다. 통영 씨는 이것이 오류애육원을 특정 개인의 사유재산으로 만들기 위한 조치가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설립 초기부터 사회에 돌려준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오류애육원의 토지부터 그랬습니다. 시설이 들어선 땅은 원래부터 가족이 소유한 고아원 부지가 아니었습니다. 농지개혁을 통해 불하받은 농지에서 출발했고, 시설 운영 역시 미군의 구호와 지원에 크게 의존했던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가족들이 처음부터 그것을 자신들의 재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시설을 만들고 가족들이 이사로 참여한 것도 같은 이유였습니다. 한 가족이 운영했지만 한 가족의 사적이익을 위한 시설은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설립 당시 가족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은 그랬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었고, 전쟁이라는 국가적 재난 속에서 생겨난 사회적 시설이었던 셈이죠.”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오류애육원의 운영을 둘러싼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한국전쟁 이후 고아원에는 국내외에서 다양한 구호물자가 들어왔다. 통영 씨는 당시 한국에 4H운동을 보급하는 데 관여했던 찰스 앤더슨을 중요한 인물로 기억했다. 미군 측에서 유통기한이 지나 폐기 대상으로 분류한 통조림과 가공식품 등이 고아원으로 들어오기도 했으며, 각종 의류와 신발도 함께 들어왔다. 통영 씨는 당시 원장이었던 송석도가 일부 구호물자를 암시장에 내다팔았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 때문에 설립자인 송석홍이 형인 송석도를 여러 차례 지적하고 제재하기도 했다. 한 고아원의 역사를 복원하는 일에서 중요한 것은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인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당시 어떤 물자가 들어왔고, 누구에게 배분됐으며, 그것이 실제 아이들에게 얼마나 전달됐는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송통영 씨가 이 인터뷰에서 가장 강조한 대목은 이것이다. 오류애육원을 오랫동안 운영한 사람과 오류애육원을 처음 만든 사람이 반드시 같은 사람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송석도는 오류애육원의 이사장과 원장을 맡아 오랫동안 시설 운영에 관여했다. 그의 이름이 시설의 역사와 함께 기억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송석도는 설립자가 아니라 이후 원장으로 시설 운영을 맡았다는 것이다. 이 차이는 단순한 호칭의 문제가 아니다. 누가 시설을 만들었는가. 누구의 땅에서 시작했는가. 어떤 돈과 물자로 운영됐는가. 그리고 그 시설을 처음부터 누구의 소유라고 생각했는가.   오류애육원(현재 오류마을) 송석도 원장의 개인 농장에 강제노역으로 동원된 원생들. 송통영 씨의 기억 속에서 송석도의 삶은 오류애육원에만 머물지 않는다. 해방 직후 송석도는 부천군 고척면 일대에서 목장을 운영했다. 당시 그곳에서 일했던 큰아버지 송석도는 일제 패망으로 일본인이 남기고 간 목장을 거의 무상에 가깝게 넘겨받아 운영했다는 것이 통영 씨의 설명이다. 그러나 인근 안양천의 오염으로 목장 운영이 어려워졌고, 결국 정부의 도움을 받아 용인에 있는 농장으로 옮겨갔다. 이후 이 농장은 오류애육원 아이들의 배움의 길을 가로막으며 주말과 방학이면 그곳에 노동체험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끌고 갔다. 원생들을 강제노역으로 몰아넣은 삼애농장의 출발점이었다. 한 사람의 삶에는 이렇게 여러 공간이 겹쳐 있다. 그리고 독재정권과 야당 정치의 충돌. 오류애육원의 역사를 제대로 복원하려면 이 모든 장면을 따로 떼어놓아서는 안 된다. 고아원의 역사는 흔히 원장의 이름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아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중요한 질문은 조금 다르다. 누가 처음 아이들을 데려왔는가. 누가 밥을 먹였는가. 어디에서 나온 돈과 물자로 시설을 운영했는가. 누가 그 돈과 물자를 관리했는가. 그리고 아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물자가 실제로 아이들에게 돌아갔는가. 오류애육원 역시 마찬가지다. 송통영 씨의 증언은 지금까지 알려진 오류애육원의 설립자와 운영자에 관한 기억에 질문을 던진다. 오류애육원의 역사는 한 사람의 이름으로 끝낼 수 있는 역사가 아니다. 한국전쟁이 남긴 아이들이 있었고, 그 아이들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다. 미군의 구호물자가 있었고, 정부의 농지개혁이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한 가족이 아이들을 돌보는 시설을 만들었다. 그 시작점에 누구의 이름을 써야 하는가. 송통영 씨는 그 답을 아버지 송석홍의 이름에서 찾고 있었다. 오류애육원의 시작이 미군이 지어준 막사였다면, 그곳에 처음 제대로 된 건물이 들어서는 과정에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송통영 씨는 일신제강과 한일시멘트 등의 지원이 결정적이었다고 말했다. 사재를 출연하여 건물을 지은 것으로 설명하지만, 실제로는 송석도가 자기 돈을 내서 지은 건물이 아닙니다. 기업들의 도움으로 건물이 들어선 겁니다. 당시 오류애육원은 전쟁 직후의 임시적인 난민수용 공간이었지만, 이후 아이들을 수용할 제대로 된 건물이 필요했고, 기업들이 건축에 필요한 자재와 비용을 지원하면서 시설은 조금씩 모습을 갖춰갔습니다. 시설의 토지는 농지개혁을 통해 마련됐고, 초기 운영에는 미군의 구호와 국가의 지원금이 있었으며, 정식 건물의 건축에는 기업들의 도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오류애육원은 특정 개인의 노력과 재산으로 만들어진 시설처럼 이야기되기 시작했습니다.” 송통영씨는 당시 공식적인 직책을 맡지는 않았지만 오류애육원의 운영을 직간접적으로 돕고 있었다. 그러나 점점 시설 운영을 둘러싼 오해와 갈등이 커지자 그는 한발 물러섰다. 괜히 가족이라는 이유로 여러 가지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가 오류애육원 운영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이유였다. 하지만 이것은 오류애육원이 마치 송석도의 자선사업으로 포장된 시초가 되었다. 더욱이 1975년 설립자인 아버지 송석홍이 오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죽음이 오류애육원의 역사에서도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와 사후의 시설 운영이 크게 달라졌다고 기억한다. 특히 송석도가 재단의 재산을 처분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커졌다고 주장했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는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재단 재산을 자기 재산처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설립 당시 돈 한푼 출연하지 않았던 큰아버지 사적편취의 출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송통영 씨가 말하는 핵심은 ‘소유’였다. 오류애육원은 처음부터 가족의 사유재산으로 만든 시설이 아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법인 소유의 토지와 재산이 마치 특정인의 개인재산처럼 취급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재산을 처분하고 개인적인 부를 축적했다는 것이 통영 씨의 주장이다. 오류애육원에서 생활하던 아이들은 용인의 농장으로 보내지기도 했다. 송통영 씨는 당시 아이들이 농장에 끌려가 사실상 강제노역에 가까운 일을 했다고 증언했다. 아이들은 농장 일을 해야 했다. 그리고 퇴소할 때가 되면 소 한 마리를 주겠다는 약속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소 대신 아이들에게 돌아가야 했던 정착금까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들에게 지급돼야 할 돈이 시설 운영자의 사적인 이익으로 전용됐다는 것이 그의 증언이다. 그는 이를 단순한 운영 상의 실수로 보지 않았다. 시설에서 보호받아야 할 아이들의 노동력과 권리가 운영자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이용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삼애농장에서 원장 송석도에 의해 오류애육원 아이들이 옥수수로 소 사료를 만드는 일에 동원된 모습. 송통영 씨는 오류애육원과 용인 농장 사이의 돈의 흐름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농장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오류애육원에 지급되는 돈으로 충당하는 일이 반복됐다는 것이다. 그가 특히 기억하는 것은 사료용 우유였다. 농장에서 동물에게 먹이는 분홍색 우유가 있었는데, 이것을 오류애육원에 판매해 아이들에게 먹였다는 것이 송통영 씨의 주장이다. 아이들이 먹어야 할 우유가 동물용 사료로 대체되었고, 그 판매대금은 송석도 개인에게 돌아갔다. 왜 복지시설에 들어온 자원이 시설 밖 개인사업의 비용으로 전용됐는지, 아이들에게 제공되어야 할 물품이 다른 목적으로 사용됐는지를 따져야 하는 문제다. 아이들은 농장으로 보내졌고 노동을 해야 했다. 구타와 폭력은 상습적이었다. 그 결과 아이들이 시설에서 반복적으로 탈출했다고 그는 기억한다. 아이들이 왜 도망갔겠습니까.” 통영 씨에게 아이들의 탈출은 단순한 일탈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오류애육원은 보호받아야 할 집이 아니라 벗어나고 싶은 공간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곳을 떠난 아이들이 범죄자가 되는 일도 반복되었다. 아이들을 농장에 투입하는 문제를 두고 통영 씨는 큰아버지 송석도에게 여러 차례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그의 지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운영에 참여했지만, 결국 가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더 깊이 개입하기 어려운 상황도 있었다고 회고한다. 오류애육원 출신 원생들의 모임인 ‘잔디회’ 역시 시설 운영에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송통영 씨에 따르면 잔디회는 아이들의 노동력을 이용해 축적한 재산이라는 취지로 재단 측에 10억 원을 요구했다. 그리고 재단 측은 그 가운데 5억 원을 지급했다. 통영 씨에게 이 사건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시설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자신들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시설 운영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에 대해 책임을 요구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고아원 출신 원생들이 자신들의 노동과 삶이 어떻게 다뤄졌는지를 묻기 시작한 것이다. 2001년 송석도가 사망한 이후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운영진과 이사진을 둘러싼 각종 비리 의혹과 분쟁이 이어진 것이죠. 그 과정에서 관선이사가 선임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관선이사로 들어온 인사들이 이후 정식 이사로 자리를 잡는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해당 법인이 주인이 모호한 재단이면서 많은 재산이 있다는 것을 간파한 자들이 눌러 앉으며, 재단을 정상화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들이 오히려 재단 운영에 계속 관여하며 사적으로 이익을 취하게 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물론 어머니마저 이사진에서 배제됐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가족 간의 갈등이 아닙니다. 아버지 송석홍이 사회에 돌려주기 위해 만든 복지법인이 누구에 의해 농락되었느냐는 문제입니다.” 송통영 씨가 기억하는 재단의 문제는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2011년에도 재단 운영을 둘러싼 비리 문제가 불거졌고, 오류애육원 출신 원생들의 모임인 잔디회가 재단을 고발하는 일이 있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서 운영진들이 처벌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2017년에는 재단 소유 토지를 매각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통영 씨에 따르면 당시 재단 토지 매각대금 가운데 약 32억 원이 발생했고, 그중 3억 원의 행방이 문제가 됐다. 그러나 송통영 씨가 강조하는 것은 액수 자체가 아니다. 수십 년 전 전쟁고아들을 위해 만들어진 시설의 재산이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관리되고 처분됐는가 하는 문제다. 오류애육원은 이후 이름을 바꾸게 된다. 오류마을. 그리고 새로운 복지사업이 시작됐다. 삼농복지재단이 만들어지고 삼농실버마을이라는 노인복지시설이 운영되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면 시대 변화에 맞춰 복지사업의 영역이 확장된 것처럼 보인다. 고아원을 운영하던 법인이 노인복지사업으로 영역을 넓힌 것이다. 재단 홈페이지에도 정부의 지원금을 통해 새로운 시설을 건축했다는 취지의 설명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송통영 씨의 기억은 다르다. 정부 지원을 받는 복지시설이라면 그만큼 행정기관의 관리와 감독이 뒤따르는데, 그런 감독을 피하기 위해 법인의 재산을 개인재산처럼 취급하면서 시설 신축이 진행됐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운영진들이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송통영 씨의 아버지 송석홍에 의해 설립된 법인은 수십 년 뒤 그 시설의 재산을 둘러싸고 각종 비위문제, 노동력착취와 정착금 사적 차용, 토지 처분과 회계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됐다. 처음에는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었던 곳이 시간이 지나면서 어른들의 재산과 권력을 둘러싼 공간으로 변질된 것이다.   현재의 삼농복지재단 모습 송통영 씨가 지금 와서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오랫동안 침묵했다고 했다. 가족 문제였기 때문이다. 큰아버지 송석도가 운영했던 시설이었다. 자신 역시 한때 그 시설의 운영을 직간접적으로 도왔다. 그래서 더 말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 이유를 송통영 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아버지가 사회에 환원한 복지법인이 운영진들의 사적인 이익과 각종 의혹의 공간으로 변해가는 현실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오류애육원은 누구의 것이었을까. 송통영 씨의 답은 분명하다. 아버지 송석홍의 것도, 큰아버지 송석도의 것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곳의 주인은 아이들이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 가난 때문에 시설로 보내진 아이들. 어른들의 결정에 따라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없었던 아이들. 그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그렇다면 마지막까지 남아야 할 것도 재단의 재산이 아니라 아이들의 권리여야 한다. 오류애육원의 역사를 다시 쓴다는 것은 결국 건물의 역사를 쓰는 일이 아니다. 누가 땅을 가졌는지, 누가 이사장이었는지, 누가 원장이었는지만 기록하는 것도 아니다. 그곳에서 살았던 아이들이 무엇을 먹었고, 무엇을 빼앗겼으며, 얼마나 일했고, 왜 도망쳤고, 퇴소한 뒤 무엇을 받았는지를 기록하는 일이다. 그리고 누군가 그 아이들의 몫을 가져갔다면, 그것이 누구였는지를 기록하는 일이다. 송통영 씨는 이제 그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아버지가 시작했던 복지의 역사가 어디에서부터 다른 길로 들어섰는지를 밝히기 위해서다.이득신 시민기자 dsshine23@naver.com


최근 3주간 링크를 확인한 사용자 수

검색 키워드


주소 : (12096) 경기도 남양주시 순화궁로 418 현대그리너리캠퍼스 B-02-19호
전화: +82-70-8692-0392
Email: help@treeple.net

© 2016~2026. TreepleN Co.,Ltd. All Right Reserved. / System Updated

회사소개 / 서비스소개 / 문의하기 /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