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팔선 앞에 멈춰 선 독립운동가의 발길 [뉴스] 1949년 8월 경교장 뜰에 세워진 곽낙원 여사 동상 앞에서. 왼쪽부터 동상을 제작한 조각가 박승구(경기고 교사), 백범의 차남 김신, 며느리 임윤연, 한독당 후원자 김덕은. 백범은 생전에 어머니가 인천감리서에 갇힌 자신을 옥바라지하던 모습을 되살려 동상을 만들도록 했다. 허드렛일로 얻은 찬밥을 바가지에 담아 아들에게 가져가던 어머니의 소박한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백범은 동상의 얼굴과 체형, 옷차림과 짚신까지 직접 고증하며 완성을 기다렸으나,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서거해 완성된 동상을 보지 못했다. 동상은 그해 8월 완성되었다.
1945년 11월 23일, 백범은 26년 만에 중국에서 돌아와 조국의 땅을 밟았습니다. 그가 도착한 서울에서 자신이 태어난 황해도 해주까지는 멀지 않았습니다. 중국 대륙 수천 리를 떠돌았던 사람에게는 지척이나 다름없는 거리였습니다. 그러나 김구는 그 짧은 길을 죽는 날까지 가지 못했습니다. 나라를 빼앗겼을 때는 해방만 되면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던 고향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나라가 해방되자 고향으로 가는 길에는 그가 중국으로 떠날 때 존재하지 않았던 선 하나가 생겨 있었습니다. 삼팔선입니다.
평생 조국의 해방을 위해 싸운 독립운동가가 해방된 조국에서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것입니다. 백범은 그렇게 역설적으로 해방 조국의 망향객이 되었습니다.
1. 그대 고향에 가지 못하리
요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가 화제입니다. 쉽지 않은 영화이고, 상영시간이 3시간 가까이 되는 영화임에도 개봉 보름 만에 관객 560만 명을 동원하며 문화적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트로이 전쟁을 다룬 여러 편의 영화가 있었고, 전쟁 후 오디세이 장군의 귀향을 다룬 영화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번 영화 『오디세이』는 지금까지의 관련 영화를 집대성했으면서도, 원작을 보완하는 서사를 심층적으로 전개해 완성도를 높인 대작의 면모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인 호메르스의 『일리아스』와 전쟁에서 승리한 자의 귀향 이야기를 다룬 『오디세이』 두 작품의 주요 모티브와 서사를 하나의 영화 속에서 종합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고난과 여정을 뜻하는 ‘귀향’(Homecoming)은 문학사에서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서사 구조입니다. 고향은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을 넘어 안식, 정체성, 그리고 자아의 회복과 영원한 휴식(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필생의 과제를 끝낸 자의 마지막 관문인 귀향은 쉽지 않습니다.
귀향 이야기의 시초이자 정점인 『오디세이』를 비롯해 영생을 찾아 세상 끝까지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인간의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길가메시 서사시』가 대표적으로 그렇습니다. 1940년 미국 소설가 토머스 울프의 유작으로 발표된 자전적 소설 『그대 고향에 가지 못하리』(You Can’t Go Home Again)라는 제목은 오늘날 이 주제를 웅변하는 관용구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물리적인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뜻을 넘어섭니다. 시간이 흘러 변해버린 과거의 장소에 인간 본래의 순수했던 시절로는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인간의 근원적인 상실감과 향수를 상징합니다. 소설 제목으로 쓰인 이 문장이 문화사 전체를 관통하는 은유가 된 까닭은 미완의 귀향과 인간의 실존적 숙명을 아프게 환기해주기 때문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인간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했듯이 시간은 불가역(不可逆)적입니다.
또한 공간도 소멸했습니다. 인간들이 그리워하는 고향은 지도 위의 특정 위도와 경도가 아니라, ‘그 시절의 공기’ ‘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온기’가 결합한 시간의 기억입니다. 여기에 세월의 저주(변화)가 함께 합니다. 물리적 장소로 돌아갈 수는 있어도, 부모님의 품, 골목길을 뛰놀던 친구들, 그리고 무엇보다 순수했던 시절의 ‘나’는 이미 시간 속으로 사라지고 없습니다.
2. 해방, 우리 땅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었다
이처럼 시간의 법칙 앞에 좌절되는 인간의 귀향이라는 실존적 비극을 우리 현대사에서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생 조국의 해방을 위해 목숨 바쳐 싸웠으되, 열강들의 이권 다툼으로 해방과 동시에 조국이 분단돼 갈라진 선을 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반이었던 백범 김구입니다. 백범에게 독립운동이란 곧 조국의 해방이자, 동시에 평생을 떠돌았던 망명객의 신세를 끝내고 그토록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가는 필생의 오디세이였습니다.
그가 중국 상해 임정 청사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선(死線)을 예감하며 고향에 있는 어린 두 아들에게 유서로 썼던 『백범일지』에는 가난했지만 따뜻했던 고향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의 풍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책의 첫 장에 내가 태어난 곳은 서쪽으로 수양산이 솟아 있고, 앞으로는 맑은 시내가 흐르는 곳”이라며 해주의 산천을 뇌리에 각인하듯 적었습니다. 상민(常民)의 자식으로 태어나 차별과 서러움에 울었던 곳이었음에도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끓여주던 된장국과 집 마당의 흙내음을 선연하게 기록했습니다. 그에게 고향은 망명객의 영혼을 싣고가는 뗏목이었습니다.
백범의 생애에서 고향과 가장 가까워졌던 순간은 서거 전해인 1948년 4월이었습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막고 동족상잔의 분단을 저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평양행을 결심한 그는 삼팔선 경계선 앞에 멈춰 섰습니다. 차단봉 너머 수십 리만 더 가면 그토록 그리던 고향 해주 땅이 있습니다. 당시 그를 수행하던 이들의 기록을 보면 백범은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저 선만 넘으면 내 고향 해주가 지척인데, 독립된 내 나라에서 내 고향을 가기 위해 이국 군대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한단 말인가.”
광복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환국을 환영하기 위해 거리로 나온 시민들의 행렬. ‘WELCOME’과 ‘歡迎’이라는 글자가 크게 적힌 환영문 아래로 시민들이 줄지어 행진하고 있으며, 건물 앞과 거리에는 이를 지켜보는 수많은 인파가 모여 있다. 26년 동안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환을 맞이한 당시의 뜨거운 환영 분위기를 보여주는 사진이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빌딩을 올리고 우주를 논하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지도 위의 핏줄처럼 그어진 휴전선 앞에서 여전히 유랑을 거듭하는 존재들입니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북녘땅을 등지고 살아가는 실향민만이 아니라, 온전한 하나된 국토를 잃어버린 대한국민 우리는 모두 본질적으로 ‘정서적 미아’입니다.
영화 『오디세이』 속 주인공의 귀환에 세계의 관객들이 환호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고난을 극복하고 신뢰하는 인간들 간의 연대를 통해 귀향에 성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귀향은 아직도 더 먼 곳에 존재합니다. 수십 년이 지나도록 효창공원에 잠든 독립 열사들의 영혼이 온전한 귀향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의 후대들 역시 여전히 분단이라는 시공간의 감옥에 갇혀 고향을 빼앗긴 채 살아가고 있는 시대의 아픔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김구의 삶은 고향의 떠남과 돌아옴의 연속이었습니다. 감옥에 갇혔고 탈옥했고, 승려가 되어 산사를 떠돌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젊은 김구에게 고향은 언제든 다시 찾아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떠날 수는 있어도 돌아갈 수 없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훗날 나라가 해방되고 나서야 고향은 정말로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됩니다. 김구의 생애에서 이보다 기막힌 역설이 또 있을까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뒤 김구는 중국으로 망명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마흔넷이었습니다.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문지기’(경무국장)로 참여했습니다. 이봉창·윤봉길 의거 이후에는 일본 경찰과 밀정들의 추적을 피해 숨어 살아야 했습니다. 그의 삶은 중국대륙을 떠도는 생활이 되었습니다. 피신해 살면서 임정을 꾸려가야 했고, 중국 정부가 움직이면 우리도 따라가야 했습니다. 가족이 흩어지고 동지들이 죽었습니다.
3. 끝까지 책임을 진 독립운동가들
그 긴 이동에는 마지막 목적지가 하나 있었습니다.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 독립운동이란 결국 돌아가기 위한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나라만 되찾으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일본이 패망했습니다.
그러나 김구는 곧바로 귀국하지 못했습니다. 임시정부는 연합국으로부터 정부 자격을 인정받지 못했고, 임정 요인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이름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습니다. 70세가 된 김구는 1945년 11월 23일 김규식·이시영 등 임정 요인들과 함께 중국을 떠나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서울에는 수많은 사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2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국봉영회에는 약 15만 명이 모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돌아온 그들에게 귀향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서울에는 돌아왔지만, 고국산천의 절반은 막혀있기 때문입니다.
김구가 중국으로 떠날 때는 없던 선 하나가 생겨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영구적인 국경선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은 빠르게 분단으로 고착되었습니다.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들어왔습니다. 나라를 빼앗겼던 26년 동안에는 ‘독립이 되면 돌아간다’는 희망이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나라가 해방되어 조국 땅을 밟았는데, 고향으로 가는 길에는 전에 없던 월경 금지의 선이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환국한 다음 날 새벽 백범은 경교장에서 고향의 육촌 동생을 만났습니다. 사람들이 아직 경교장을 찾아오기 이른 시간에 육촌 동생은 백범을 찾아와 고향의 텃밭과 조상들이 잠든 뒷동산의 잣나무를 이야기했습니다. 한 해의 농사를 수확하고 나면 독립운동하러 떠나간 형님에게 따뜻한 고향의 쌀밥 한 그릇 드리지 못해 일가들이 모두 마음 아파했던 비애를 이야기했습니다.
이 일화가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고향 사람들은 감시하는 군인들 몰래 38선을 넘어 서울을 오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범은 그 사람들을 따라 고향을 다녀올 수 없었습니다.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끝까지 당당해야 했고, 분단을 극복해야 하는 어려운 책임을 짊어지고 나가야 했습니다.
백범 글 가운데 「마음속에 삼팔선이 무너지고야」라는 글이 있습니다. 백범은 이렇게 호소합니다. 한국이 있고야 한국 사람이 있고…” 그리고 마음속의 38선이 먼저 무너져야 땅 위의 38선도 없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국경선으로 인해 삼천만 동포의 마음속에 분단이 고착되고 있음을 지적한 말입니다.
좌익과 우익이 서로를 원수처럼 대했습니다. 남쪽에서는 북쪽을, 북쪽에서는 남쪽을 의심했습니다. 같은 민족이 이념에 따라 갈라지고 상대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땅 위에 선 하나가 생기는 것도 두려운 일이지만, 사람의 마음속에 선이 생기는 것은 더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백범은 땅의 통일 이전에 마음의 통일을 말했습니다.
4. 마음속의 삼팔선이 무너지고야
1948년 2월 10일 김구는 유명한 「삼천만동포에게 읍고함」을 발표했습니다.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이 현실로 다가오던 때였습니다. 이 글에서 김구는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밝혔습니다. 그 글에서는 정치적 선언보다 훨씬 인간적인 목소리가 들립니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서 인사말을 하는 김구
그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단독정부 수립에는 협력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 생전에 38 이북에 가고 싶다.”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그다음입니다. 북쪽 동포들이 제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궂은날이면 38선을 둘러싼 원귀들의 곡성이 들리는 듯하고, 고요한 밤 홀로 앉으면 남북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들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나는 듯하다.”
여기서 김구의 통일론이 분명해집니다. 통일은 거창한 정치구호이기 전에 사람이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분단된 사람들에게 향합니다. ‘나도 고향에 가고 싶다.’로 끝나지 않고 ‘저 사람들도 자기 집에 돌아가게 하고 싶다.’로 이어집니다. 개인의 망향이 민족의 문제로 확대된 것입니다.
이것은 김구의 통일운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지점입니다. 그의 통일론을 단순히 좌우합작이나 남북협상이라는 정치적 선택으로만 읽으면 이 인간적인 바탕을 놓치게 됩니다. 그래서 그의 귀향은 해주로 돌아가는 단순한 차원이 아닙니다. 독립운동가들에게 귀향은 우리 민족이 삼천리 금수강산에서 맘껏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독립이고, 독립운동가들의 귀향입니다.
「삼천만동포에게 읍고함」을 발표한 지 두 달 남짓 지난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마침내 북쪽으로 향했습니다. 주변의 만류가 심했습니다. 남북협상에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고, 북한 정권이 김구와 김규식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미군정 역시 북행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김구와 김규식은 평양행을 결정했습니다. 이것은 1910년 나라가 없어지자 생명을 홍모(鴻毛)에 부치고,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외국으로 떠났던 사람들의 옛 마음가짐 그대로의 심정입니다.
우리는 김구의 남북협상을 평가할 때 흔히 성공과 실패를 먼저 따집니다. 김일성과 북한 지도부가 김구의 명망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은 아닌가, 김구가 북한의 의도를 지나치게 낙관한 것은 아닌가, 이미 단독정부 수립이 돌이킬 수 없는 단계에 들어선 뒤의 정치적 행동은 아니었는가 하는 문제들이 지금도 회자됩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김구가 38선을 없애려고 했던 이유를 정치적 계산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그는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고 하면서 동시에 북쪽의 동포들도 제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 죽고 싶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고향’은 ‘우리 모두의 고향’입니다. 사람은 자기 집에 돌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만날 수 있어야 하고, 자식이 부모의 무덤을 찾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떠나온 사람이 고향 산천을 다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바다를 떠돌았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이타카가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김구 역시 오랜 세월을 떠돌았습니다. 상하이에서 가흥으로, 남경에서 장사로, 광주와 유주를 거쳐 중경까지 밀려갔습니다. 그렇게 스물여섯 해를 이국에서 보내면서도 마지막에는 조국으로 돌아가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조국은 해방됐습니다. 그들은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귀향은 거기에서 멈췄습니다. 나라를 잃었을 때는 독립만 하면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던 고향이었는데, 정작 나라가 해방된 뒤에는 더는 갈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분단입니다. 38선은 지도 위에 그어진 선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조상이 우리에게 물려준 땅을 막은 선입니다.
5. 제우스의 법도
영화 『오디세이』에서 ‘제우스의 법도’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제우스의 법도란 상대의 ‘환대’(Hospitality)를 저버리면 안 된다”는 것으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이 개념을 영화의 중심에 올려놓았습니다. 감독은 트로이의 목마와 오디세우스의 저주를 정교하게 연결합니다. 이것이 이 영화 성공의 중요한 축입니다.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 평화의 제물이자 선물로 바치는 ‘목마’는 상대방의 환대를 구하는 신성한 상징물이었습니다. 그래서 트로이인들은 그리스 연합군이 보낸 이 선물을 신성하게 여겨 성문 안으로 들여놓았습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그 목마의 내부에 군사를 숨겨 상대의 신뢰와 환대를 정복의 무기로 악용했습니다. 오디세우스의 승리는 단순한 지략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가장 성스러운 약속이자 평화의 안전장치였던 ‘제우스의 법도’를 파괴하고 사기극으로 전락시킨 신성모독의 범죄였습니다. 그래서 오디세우스는 쉽사리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수십 년간 바다를 표류하게 되는 같은 유형의 저주를 계속 받게 됩니다. 승리를 위해 소중한 가치를 짓밟은 자에게 내려진 형벌이 바로 ‘귀향의 박탈’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사 속의 독립운동가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조국 해방을 향한 약속과 신뢰를 단 한 번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한민족은 분단이라는 가혹한 압력에 막혀 80년째 고향을 되찾지 못합니다. 신화를 배반한 오디세우스는 저주를 뚫고 끝내 귀향에 성공하지만, 역사의 법도를 지키기 위해 온 삶을 던진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은 지척에 고향을 두고도 유랑자로 죽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이 역설이야말로 오늘날 분단국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백범의 못다 이룬 귀향 앞에서 가장 깊은 아픔과 부채감을 느끼는 이유일 것입니다.
임순만 언론인 ysm@mindl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