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러브 끼어야 복싱 규칙 만든 노란 백작 휴 세실 로더 [사람들] 형의 죽음이 가져다준 거대한 유산
휴 세실 로더(Hugh Cecil Lowther, 1857–1944)는 영국 귀족가문의 둘째 아들이었다. 12살 무렵 이튼학교를 떠난 그는 공부보다 말과 사냥, 여행과 모험을 좋아했다. 한때 미국과 북극권을 누비기도 했다. 귀족사회의 얌전한 신사보다는 떠돌이 모험가에 가까운 사내였다.
그런데 1882년, 형이 세상을 떠나면서 운명이 뒤집혔다. 스물다섯 살에 제5대 론즈데일 백작이 된 것이다. 땅과 저택, 탄광을 비롯한 막대한 재산이 그의 몫이 됐다. 로또에 당첨된 셈이지만, 당첨번호는 자기 손으로 고른 것이 아니었다. 형의 죽음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갑자기 손에 들어온 부를 어떻게 쓸 것인가. 로더의 대답은 거침없었다. 될 수 있는 한 화려하게, 남들의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쓰는 것이었다.
휴 세실 로더 초상화(위키피디아)
노란색이면 무엇이든 좋았다
그에게는 ‘노란 백작 (The Yellow Earl)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마차와 자동차는 물론 하인들의 제복까지 노란색으로 맞췄다. 단춧구멍에는 온실에서 기른 노란 치자꽃을 꽂았다. 검은 비단 모자가 지붕에 닿지 않도록 차체를 높인 노란 롤스로이스까지 주문했다. 사람이 차를 타는 것인지, 모자를 모시고 다니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의 호사는 단순한 옷차림에 그치지 않았다. 거대한 론즈데일 성에는 수많은 하인과 음악가들이 있었고, 유럽의 왕족들도 손님으로 찾아왔다. 독일황제 빌헬름 2세(Wilhelm II, 1859~1941)도 그중 하나였다. 로더는 1895년 황제를 성으로 초대해 사냥을 했고, 두 사람은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했다.
1902년의 빌헬름 2세(위키피디아)
복싱판에 남긴 금빛 유산
그렇다고 로더의 인생을 허영과 낭비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는 스포츠를 사랑했고, 특히 복싱에 관심이 많았다. 1891년 창립된 내셔널 스포팅 클럽의 초대 회장을 맡아 복싱이 일정한 규칙 아래 치러지는 경기로 자리 잡는 데 힘을 보탰다. 맨손으로 시합하던 선수 셋이 연달아 링에서 목숨을 잃자 세계 최초로 글러브 착용을 의무화한 공식 복싱 규정을 도입해 현대 복싱의 기원을 알렸다.
1909년에는 복서에게 수여할 론즈데일 허리띠(Lonsdale Belt)를 내놓았다. 금빛 장식이 들어간 이 허리띠는 영국 복싱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당시에는 챔피언이 세 차례 타이틀전을 이기면 허리띠를 영구 소유할 수 있었다. 지금도 론즈데일이라는 이름은 복싱 역사에 남아 있다.
그는 1905년 창립된 영국 자동차협회의 초대 회장도 맡았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론즈데일 대대(Lonsdale Battalion)의 병력 모집에도 힘을 보탰다. 전쟁에 나설 사람과 말을 모으는 데 관여한 것이다.
훗날 1960년 런던에서 시작한 론즈데일 스포츠용품 상표도 그의 이름에서 나왔다. 전직 프로 미들급 복서 버나드 하트가 7대 론즈데일 백작으로부터 이름 사용 허락을 받아 런던 소호 빅 스트리트 21번지에 창업해 복싱 글러브·부츠·의류로 곧바로 성공했다. 다만 일부 유럽국가에서 이 상표가 극우 청년들과 연결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상표의 이름과 그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성향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1902년 독일 제국군 기동훈련 당시, 웨스트모얼랜드 앤 컴벌랜드 의용기병대(Westmorland and Cumberland Yeomanry)의 약식 군복을 착용한 론즈데일(위키피디아)
땅 밑의 검은 석탄, 땅 위의 노란 마차
그렇다면 이 모든 사치에 들어간 돈은 어디서 나왔을까. 영국 컴벌랜드 지방의 토지와 탄광이었다. 땅 밑에서 캐낸 석탄이 땅 위의 저택과 자동차, 사냥과 연회의 비용을 댔다.
1910년 5월 11일, 화이트헤이븐의 웰링턴 탄광에서 폭발과 화재가 발생했다. 공식 조사보고서에는 최소 광부 136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수많은 노동자가 지하에서 숨진 이 참사는 당시 탄광노동의 위험을 보여 주는 비극이었다.
물론 이 사고만으로 로더 개인의 책임을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누린 막대한 부와 그 부를 만들어 낸 산업현장의 위험을 함께 돌아볼 필요는 있다. 귀족의 화려한 잔치와 광부들의 목숨은 서로 다른 세계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경제구조 안에 있었다.
로더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뒤에도 독일황제와의 친분을 쉽게 끊지 않았다. 성 현관의 황제 흉상도 치우지 않았다. 개인적 우정과 공적 현실 사이에서 그는 끝내 개인적 우정을 놓지 못한 셈이다. 의리가 깊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시대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읽지 못한 고집으로 볼 수도 있다.
제5대 론즈데일 백작 휴 로더의 가터 훈장 기사단 휘장으로 둘러싸인 문장 방패(위키피디아)
성을 떠난 백작, 살림을 경매에 내놓은 동생
돈은 무한하지 않았다. 아무리 큰 재산도 계속 퍼 쓰면 바닥이 드러난다. 로더는 1921년 화이트헤이븐 성을 팔았고, 1926년에는 또 다른 저택을 처분했다. 마침내 1935년에는 260개가 넘는 방을 갖춘 론즈데일 성을 떠나 더 작은 거처로 옮겼다.
그는 자식 없이 1944년 4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87세였다. 작위와 재산은 동생 랜슬롯 로더(Lancelot Lowther, 1867–1953)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형이 남긴 빚과 재산관리의 부담은 가볍지 않았다. 1947년에는 성의 가구와 미술품 등 살림살이가 대규모 경매에 나왔다.
형은 평생 쓰고, 동생은 남은 것을 정리했다. 성은 결국 지붕마저 벗겨졌지만, 복싱 허리띠는 사라지지 않았다. 화려한 생활의 무대는 무너져도 제도와 전통은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랜슬롯 로더(Lancelot, 6th Earl of Lonsdale | Lonsdale Estates)
한국에서 읽는 노란 백작
첫째, 부의 출처를 물어야 한다. 상속받은 재산이라고 해서 그 형성과정까지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상속과 기업승계, 노동자의 안전, 공정한 세금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문제다. 부자가 얼마나 많은 돈을 가졌는지 만 볼 것이 아니라, 그 돈이 어디서 나왔고 그 과정에서 누가 위험과 비용을 떠안았는지 물어야 한다.
둘째, 사람보다 제도를 보아야 한다. 로더는 화려한 귀족으로 기억되지만, 그의 이름을 오래 남긴 것은 복싱 허리띠와 경기규칙이었다. 개인의 인기와 위엄은 사라져도 누구나 따를 수 있는 규칙은 다음세대로 이어진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 이후 우리가 되새겨야 할 것은 특정인물에 대한 호불호를 넘어 헌법과 민주적 절차를 지키는 일이다.
셋째, 친분이 판단을 대신하게 해서는 안 된다. 로더와 빌헬름 2세의 우정은 개인에게는 소중했을지 몰라도 전쟁이라는 현실 앞에서 새로운 판단을 요구했다. 외교와 인사에서도 ‘친하니까 괜찮다’는 논리는 위험하다. 의리는 책임과 분별을 대신할 수 없다.
넷째, 사치의 대가를 누가 치르는지 살펴야 한다. 로더는 자기 재산을 과시적으로 소비했고 결국 몰락했다. 그렇다고 그의 사치가 노동자들의 희생과 무관했던 것은 아니다. 더욱이 공공의 돈을 사적으로 쓰거나 세금으로 벌인 잔치의 책임을 국민에게 떠넘기는 행태는 개인의 파산보다 훨씬 심각하다. 공금은 권력자의 유산이 아니라 시민의 몫이기 때문이다.
1922년 E & W 안스티 주식회사의 론즈데일 레이싱 컬러 담배 카드(위키피디아)
성은 사라지고 규칙은 남았다
노란 백작은 위대한 정치가도, 검소한 모범시민도 아니었다. 그는 돈과 권력을 손에 쥔 채 자신의 취향과 욕망을 마음껏 펼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삶에는 한 가지 분명한 교훈이 있다. 재산은 영원하지 않고, 과시는 기억될 수 있어도 존경을 보장하지 않으며, 제도는 개인보다 오래 살아남는다는 사실이다.
노란 마차는 사라졌다. 거대한 성도 한때의 영광을 잃었다. 하지만 복싱 허리띠는 여전히 선수들의 땀과 도전을 상징한다.
역사가 우리에게 묻는 것은 단순하다. 무엇을 얼마나 가졌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얻었고 무엇을 남겼느냐는 것이다. 노란 백작의 성은 비워졌지만, 그가 남긴 허리띠는 아직도 그 질문을 우리 앞에 내려놓고 있다.
휴 세실 로더(NPG x85187; Hugh Cecil Lowther, 5th Earl of Lonsdale - Portrait - National Portrait Gallery)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