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란희의 TalkTalk】지식의 문이 닫히면 [사람들] 사실 이번 칼럼에는 원래 쓰려고 했던 다른 주제가 있었습니다. 마음을 바꿨습니다. 오늘은 조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왜 마흔다섯 살에 창업했을까요. 잠깐 다른 일을 한 적은 있지만, 20년 동안 기자로 충분히 살아봤습니다. 인터넷신문 창업은 제 삶의 계획에 전혀 없었습니다.
창업을 할지 말지, 조언을 구하기 위해 한 선배를 만났습니다. 그 선배는 오히려 자신이 근무하는 인터넷신문 정치부 데스크 자리로 오라고 했습니다. 과거 20억원을 투자받아 인터넷신문을 창업했지만, 4년 만에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지 못하고 사업을 접은 경험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선배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란희야. 절대 창업하면 안 돼.”
제 창업 이야기에는 드라마 한 편 분량의 사연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만 말하면 좋은 미디어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블룸버그에 블룸버그NEF가 결합된 것처럼, 국내에서도 뉴스와 데이터, 리서치가 결합된 퀄리티 페이퍼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ESG 공시가 의무화되면, 기업과 투자자에게 전문적인 데이터와 분석이 더욱 필요해질 것이라고 봤습니다. ‘지식상품이 제 값을 받는 시대’를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할까요. CEO 치고는 상당히 이상주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지식상품이 제 값 받는 시대
가끔 보면 임팩트온에서 제가 가장 과격합니다. 저는 회사의 모든 기사를 블룸버그처럼 유료화하자고 주장합니다. 기자들은 모두 반대합니다. 한국에서 전면 유료화는 위험이 너무 크다고 말합니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넷플릭스와 멜론, 챗GPT 같은 서비스에 돈을 내는 문화가 만들어진 만큼, 좋은 기사에도 돈을 내는 시대가 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유료와 무료를 함께 운영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유료기사를 늘리면 무료 독자가 줄어들고, 무료기사를 많이 제공하면 구독할 이유가 약해집니다. 그럼에도 6년 차 미디어 스타트업인 임팩트온이 선배의 회사처럼 문을 닫지 않은 것은 유료 구독이라는 비즈니스 모델을 개척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해외에는 가디언과 카본브리프(carbon Brief)처럼 후원금을 기반으로 기후와 에너지 전환 콘텐츠의 품질을 유지하는 매체가 있습니다. 이들에게 들어오는 필란트로피 자금의 규모도 상당합니다.
하지만 국내에는 언론과 지식서비스를 장기간 지원하는 필란트로피 자금이 아직 많지 않습니다. 결국 콘텐츠를 이용하는 고객이 비용을 부담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구독자 여러분께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임팩트온이 발행하는 유료 지식상품을 무단으로 복제하거나 전달하지 말아주십시오.
대한민국에서 지식서비스 사업을 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카카오톡과 이메일을 통해 지식상품이 너무 빠르고 쉽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지주회사와 계열사, 관계사 사이에서는 한 회사가 구매한 파일이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공유되기도 합니다.
지식은 독특한 상품입니다. 기사나 보고서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고 나면, 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느끼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취재하고 연구하고 정리한 지식을 통해 얻게 된 것입니다. 기사와 보고서를 읽으며 쌓은 지식은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고도화하고 전략적 판단을 가능하게 합니다. AI 시대에는 그 가치가 더 커집니다.
무엇을 질문해야 하는지 알아야 AI에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AI의 답변이 틀렸는지 판단할 지식이 있어야 수정하도록 명령할 수 있습니다. 결국 축적된 지식은 AI와 함께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기반이 됩니다.
지식콘텐츠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강력한 소프트웨어입니다. 세계 각국과 기업들이 뛰어난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하는 이유도 결국 사람에게 축적된 지식과 판단력 때문입니다.
공짜로 돌려보는 시장에 블룸버그는 없다
최근 임팩트온은 AI를 활용해 KSSB 기후공시 정합성 분석 보고서를 만들었습니다. 자산 10조원 이상 기업 전체의 분석을 완료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임팩트온 네트워크 엔터프라이즈 구독기업에 추가 비용 없이 제공하고, 비회원도 기업별로 3만원을 내면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유료로 판매한 보고서가 카카오톡을 통해 퍼진 뒤 다시 임팩트온 직원에게까지 전달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저와 동료들은 많이 허탈했습니다. 몇 달 동안 기준을 정리하고, 기업별 보고서를 분석하고, 결과를 검증한 상품이 파일 하나로 순식간에 복제됐습니다. 좋은 상품을 더 만들고 싶다는 의욕이 꺾이는 순간이었습니다.
결국 하반기에 출시할 서비스는 폐쇄형으로 운영하기로 했습니다.
임팩트온은 자산 10조원 이상 기업의 기후공시 정합성 분석을 모두 끝냈습니다. 기업별 공시 모범 사례를 세부적으로 분석한 보고서도 공개 판매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접었습니다. 앞으로는 유료 구독기업에만 제한적으로 제공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ESG 규제를 한곳에서 추적하는 규제 트래커, AI 에이전트를 활용한 그린워싱 위험 분석, 글로벌 기후테크 기업 1000곳에 대한 데이터도 준비 중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서비스를 누구에게나 공개하는 방식으로 제공하기는 어려워졌습니다. 지식상품을 개방할수록 유통은 늘어나지만, 정작 그것을 만든 회사에는 수익이 돌아오지 않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지식서비스 생태계는 한 단계 더 성장해야 합니다.
해외에서는 애널리스트 보고서도 돈을 내고 봅니다. 국내에서는 증권사들이 경쟁적으로 보고서를 무료로 배포합니다. 보고서 자체로 돈을 벌지 못하면 애널리스트는 다른 이해관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업의 눈치를 보느라 매도 의견을 내기 어렵고, 차별화된 분석보다 무난한 보고서가 늘어납니다.
지식서비스에 가격이 사라지면 독립성과 품질도 약해집니다.
임팩트온은 기사만 만드는 조직이 아닙니다. 지난 6년 동안 기업 보고서를 분석하고, 사내교육을 진행하고, 규제와 산업 변화를 추적해온 ESG 지식 인프라 기업입니다.
최근 회사 홈페이지를 새로 만들며 그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쌓은 기사와 데이터, 보고서와 교육 콘텐츠를 한곳에 모아보니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지식자산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구독하거나, 응원하거나
언론사는 장사와 공익의 중간에 서 있습니다. 무료 콘텐츠를 제공하면 회사가 어려워지고, 유료 서비스를 판매하면 장사한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후원을 받으면 독립성을 의심받고, 후원을 받지 않으면 좋은 콘텐츠와 행사를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저는 솔직할 것은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공익을 말하면서 뒤에서는 기사와 광고, 관계와 협찬을 거래하는 것보다, 좋은 상품을 만들고 가격을 공개해 판매하는 편이 훨씬 정직합니다.
임팩트온은 돈을 벌어야 합니다. 좋은 기자와 전문가를 고용하고, 데이터를 구축하고, 새로운 서비스를 개발하려면 수익이 필요합니다.
모든 기업이 임팩트온의 유료 구독회원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무료 콘텐츠만 이용해도 됩니다. 임팩트온은 매주 ESG 채용 정보와 국내외 ESG 클리핑, 행사 일정 등 시간을 절약해주는 무료 서비스도 계속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만 유료 상품을 구매하지 않는 것과, 다른 사람이 구매한 상품을 무단으로 전달받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공유지의 비극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나 마음대로 이용한 목초지는 결국 황폐해지고, 나중에는 아무도 풀을 뜯을 수 없게 됩니다. 지식서비스 시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회사가 살아남지 못하면, 결국 시장에는 좋은 지식상품이 남지 않습니다.
임팩트온이 스타트업을 벗어나 안정적인 회사가 되면 더 많은 무료 콘텐츠와 서비스를 늘릴 수 있을 것입니다.
구독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대신 응원해주십시오. 그리고 유료 지식상품의 무단 공유만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박란희 대표 & 편집장
박란희 대표는 조선일보 기자 및 공익섹션(더나은미래) 편집장을 거친 후 2020년부터 임팩트온을 창업해 지속가능성(ESG), 글로벌 에너지전환 등 다양한 이슈를 다루고 있다. 한양대 ESG MBA(겸임교수), 전 대통령직속 탄소중립위원회 산업전환분과 전문위원회 위원 등을 맡아왔다. 2012년 이후 국내 다수의 대기업 사회공헌(CSR) 컨설팅 및 실행, ESG 사내교육 및 내부 포럼을 진행해왔으며, SK 사회적가치연구원과 협업해 등을 발간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