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아침, 이슬아침 [사회혁신] 반갑습니다. 우리말의 결을 살려 마음을 보듬는 ‘토박이말 결지기’입니다.
앞서 ‘이슬받이’를 소개해 드렸더니 글을 읽고 저를 떠올렸다는 분이 계셨습니다. 마음이 따뜻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쓸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서른 해 가까이 이 일을 해 오면서 제가 겪었던 일들이 ‘이슬받이’와 다름없었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슬에 옷이 젖는 일은 어려움일 수도 있고 아픔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이슬을 맞았기에 누릴 수 있었던 기쁨도 있었습니다. 함께 손을 잡아 준 많은 분들을 만났고, 날이 갈수록 달라지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기뻐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더욱 고마운 것은 이제 저 혼자 이슬을 맞으며 길을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슬도 함께 맞고, 비도 함께 맞고, 바람도 함께 맞으며 기쁨과 즐거움도 함께 나누는 모람(회원)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든든하고 고맙습니다.
저희와 함께 토박이말의 맛과 멋을 누리실 분들이 앞으로 더 많아지기를 바라면서, 오늘은 ‘이슬받이’에 이어 ‘이슬아침’을 만나 보려고 합니다.
[오늘의 토박이말] 이슬아침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않은 이른 아침
‘이슬아침’은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이른 아침’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말로 ‘꼭두새벽’도 함께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 말을 가만히 소리 내어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그냥 ‘이른 아침’이라고 하지 않고 ‘이슬아침’이라고 했습니다. 아침의 시각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풍경까지 말 속에 담아 놓은 셈입니다.
아직 해가 높이 오르지 않은 들길에 나서면 풀잎마다 이슬이 맺혀 있고, 발끝을 스치기만 해도 바짓가랑이가 촉촉해집니다.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은 길이라면 더욱 그렇겠지요. ‘이슬아침’이라는 말은 바로 그런 아침을 떠올리게 합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문순태의 소설 『타오르는 강』에서 쓰인 보기글도 나옵니다.
선창에는 소금 배며 고깃배, 미곡선이 여러 척 정박해 있었으며, 이슬아침부터 곡식을 실은 마바리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 보기글을 읽고 있으면 ‘이슬아침’이 단순히 시간을 알려 주는 말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슬이 채 마르지도 않은 때부터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시간에 풍경을 더해 주는 말
우리는 흔히 ‘아침 일찍’, ‘이른 아침’, ‘새벽부터’라고 말합니다. 모두 뜻이 잘 통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슬아침’이라고 하면 말 속에 한 장면이 함께 따라옵니다.
아직 이슬이 남아 있는 들판, 서늘한 공기, 풀잎에 맺힌 물방울, 남들이 깨어나기 전에 먼저 움직이는 사람들. ‘이슬아침’에는 이런 모습이 자연스럽게 겹쳐집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이 시간을 나타내면서도 그 시간의 모습을 함께 보여 주는 말처럼 느껴집니다. ‘몇 시부터 시작했느냐’를 말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게, ‘어떤 아침에 하루를 열었느냐’를 보여 주는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이슬받이’와 ‘이슬아침’은 서로 이어지는 느낌도 있습니다. ‘이슬받이’가 이슬을 먼저 맞으며 길을 가는 사람이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면, ‘이슬아침’은 그 사람이 길을 나섰던 때의 풍경을 보여 줍니다.
이슬아침에는 먼저 열린 하루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슬아침은 조금 부지런한 사람들의 시간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는 하루 일을 시작하는 시간이었을 것이고, 어부에게는 배를 띄우고 고기를 다루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곡식을 싣고 장으로 가는 사람에게도, 먼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도 이슬아침은 남들보다 먼저 하루를 여는 시간이었겠지요.
그래서 ‘이슬아침’이라는 말을 보고 있으면 ‘부지런하다’라는 말도 함께 떠오릅니다. 그렇다고 이 말을 사람을 재촉하는 말로만 볼 필요는 없겠습니다. 누군가는 남들이 깨어나기 전에 자기 몫의 일을 시작하고, 누군가는 다른 사람들이 하루를 시작할 수 있도록 먼저 길을 나섭니다. 그렇게 누군가 먼저 열어 놓은 아침 덕분에 뒤따르는 사람들은 조금 더 편안하게 하루를 맞이하기도 합니다.
앞서 ‘이슬받이’를 이야기하며 제가 걸어온 시간을 떠올렸던 것처럼, ‘이슬아침’에서도 먼저 길을 나선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아침이슬’과 ‘이슬아침’은 다릅니다
‘아침이슬’이라는 말은 많은 분이 익숙하게 알고 계실 것입니다. ‘아침이슬’이라는 노래를 떠올리는 분도 많으시겠지요. 그런데 ‘아침이슬’과 ‘이슬아침’은 말의 자리가 다릅니다. ‘아침이슬’은 아침에 맺힌 이슬을 말하고, ‘이슬아침’은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이른 아침을 가리킵니다.
말의 순서를 조금 바꾸었을 뿐인데 바라보는 곳이 달라집니다. ‘아침이슬’은 이슬을 바라보고, ‘이슬아침’은 그 이슬이 남아 있는 아침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놓고 보니 두 말이 서로 다른 쓰임을 가지면서도 참 잘 어울립니다. 하나는 아침에 만나는 이슬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이슬이 남아 있는 아침을 말합니다.
익숙한 ‘아침이슬’을 알고 있는 우리가 그 곁에 있는 ‘이슬아침’까지 알게 된다면, 아침 풍경을 표현할 수 있는 우리말 하나가 더 생기는 셈입니다.
이슬이 남아 있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요즘은 예전보다 이슬을 가까이에서 만날 기회가 줄어든 듯합니다. 아침 일찍 들이나 풀밭에 들어갈 일이 많지 않은 데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자리도 많이 달라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도 가만히 살펴보면 이슬은 지금도 우리 곁에 있습니다. 아침 풀잎 끝에 맺힌 작은 물방울,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거미줄, 풀밭을 걸을 때 바짓가랑이를 살짝 적시는 물기를 만나면 ‘이슬아침’이라는 말을 떠올려 볼 수 있겠습니다.
말은 이렇게 우리가 지나치던 모습을 다시 보게 하기도 합니다. ‘이슬이 맺혔네’라고만 생각했던 아침에 ‘오늘은 이슬아침이구나’라고 한마디 보태면, 평범했던 시간이 조금 다른 이름을 얻습니다. 어쩌면 토박이말을 알아가는 즐거움도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없던 풍경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늘 곁에 있던 풍경에 이름을 하나 더 찾아 주는 일 말입니다.
먼저 맞은 이슬이 지나고 나면
저에게 ‘이슬받이’는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먼저 이슬을 맞았던 날도 있었고, 그 길이 쉽지만은 않았던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아이들의 변화는 이슬에 젖은 옷을 잊게 할 만큼 큰 기쁨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혼자가 아닙니다. 함께 이슬을 맞고, 비와 바람도 함께 맞으며, 기쁨과 즐거움까지 함께 나누는 모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앞서 걸어온 시간보다 앞으로 함께 걸어갈 시간이 더 든든하게 느껴집니다.
‘이슬아침’이라는 말을 만나니 또 하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누군가 먼저 길을 나선 이른 아침에는 이슬이 남아 있지만, 그 뒤를 따라 나서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나면 길은 조금씩 달라집니다. 함께 걷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 길도 더 또렷해질 것입니다.
토박이말의 길도 그와 같지 않을까요? 먼저 찾아보고, 먼저 말하고, 먼저 알려 온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함께 알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그 길은 더 이상 몇 사람만 걷는 길이 아니게 됩니다.
이슬아침에 함께 길을 나서면 어떨까요?
‘이슬아침’이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꼭 새벽같이 일어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어느 날 이른 아침 풀잎에 맺힌 이슬을 보게 된다면, 그때 이 말을 한번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오늘은 이슬아침이구나.”
그 한마디만으로도 아침의 모습이 조금 더 선명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침에 먼저 일어나 하루를 열고 있는 사람들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이슬받이’가 먼저 이슬을 맞는 사람을 생각하게 했다면, ‘이슬아침’은 그 사람이 걸어 나간 시간과 풍경을 보여 주는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이슬아침’이라는 말을 아는 분들이 하나둘 늘어나면 좋겠습니다. ‘아침이슬’만큼이나 익숙한 말이 되어,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아침을 만날 때 자연스럽게 입에 올릴 수 있는 말이 되면 더욱 좋겠습니다.
[마음 나누기]
여러분은 이슬이 맺힌 이른 아침에 어떤 모습을 만나 보셨나요? 이슬아침에 했던 일은 무엇이 있었나요? 여러분의 경험들을 떠올려 나누어 보시면 어떨까요?
[한 줄 생각]
이슬이 남아 있는 아침에도 먼저 길을 나서는 사람들이 있어 하루가 열립니다.
[오늘의 토박이말]
▶ 이슬아침
뜻: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이른 아침.
보기: 이슬아침부터 길을 나선 사람들의 발걸음이 부지런했습니다.
오늘 한마디: 오늘 아침은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이슬아침에 시작했습니다.
[토박이말 길잡이] 결지기 이창수
이창수 시민기자 maljig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