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탄희와 김해영 같은 청년 정치인 왜 다시 안 나오나 [사람들] 청년에게 자리를 주면 청년정치가 되는가.
청년 정치인은 많은데, 왜 청년정치는 보이지 않는가.
자리와 공천은 늘었지만 ‘자기 이름으로 서는 정치인’은 줄어들었다.
공천을 잃으면 사라지는 정치인, 그것을 청년정치라 부를 수 있는가.
민주당 청년정치가 넘어야 할 마지막 벽은 ‘자생력’이다.
정치에서 가장 위험한 청년은 말을 잘하는 청년이 아니다. 가장 위험한 청년은 자신을 키워준 사람에게도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청년이다. 그리고 민주주의에서 가장 필요한 청년 역시 그런 청년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민주당에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김해영과 이탄희 같은 청년 정치인은 왜 다시 나오지 않는가?
김해영 전 의원과 이탄희 전 의원
청년 정치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청년 정치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도 많고, 청년위원회도 있고, 청년특별위원회도 있고, 청년 공천도 있고, 청년 인재영입도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청년 정치인은 많은데 청년 정치가 보이지 않는다. 왜일까. 필자는 근본적인 문제가 정당의 정치적 생태계에 있다고 본다.
민주당은 오랫동안 청년에게 정치의 문을 열어주겠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실제로 청년에게 열린 문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그 문이 정말 정치의 문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정치적 질서에 들어가는 문인가. 청년에게 자리를 주는 것과 청년을 정치인으로 키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민주당이 청년 정치인을 키우는 방식 자체가 청년 정치인의 자생력을 약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더 불편한 질문도 던져야 한다. 민주당은 진정 청년을 대표할 수 있는 정치인을 키우고 있는가. 아니면 민주당에 충성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자리를 보전하려는 인사들을 키우고 있는가.
이 질문은 민주당이라는 정당이 어떤 인간형의 정치인을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다. 정당은 제대로 된 정치인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정당이 만든 정치인이 정당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순간 정당은 정치인을 육성하는 학교가 아니라 정치적 의존성을 생산하는 조직이 된다.
과거 전 대통령 윤석열은 인사와 권력의 작동방식에 대해 상당히 날카로운 통찰 을 내놓은 적이 있다. 능력이나 실력이 부족한 사람을 권력자가 요직에 앉혀주면 그 사람은 자신이 그 자리에 있는 이유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권력자의 선택 때문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권력자에게 더욱 충성할 수밖에 없다는 취지였다.
정치의 역설은 여기에 있다. 권력자가 사람을 키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람을 종속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통찰은 특정 정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민주당의 청년 정치에도 충분히 적용해볼 수 있다.
능력과 소신보다 기성 권력의 ‘간택’과 ‘자리 나눠주기’를 통해 성장한 청년은 과연 독립적인 정치인이 될 수 있을까. 자신의 실력으로 얻은 자리가 아니라 누군가가 만들어준 자리라면, 그 사람은 누구에게 정치적 책임을 느끼겠는가. 유권자인가. 아니면 자신을 그 자리에 올려준 사람인가. 바로 이 지점에서 충성과 종속의 경계가 무너진다.
정치에서 충성은 나쁜 것이 아니다. 정당정치에서 동료와 당에 대한 책임과 연대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 충성보다 상위에 있는 것이 있다. 양심과 헌법, 그리고 국민에 대한 책임이다. 정당의 당론에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당론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당대표를 지지할 수 있다. 그러나 당대표의 모든 판단이 옳은 것은 아니다. 자신을 정치적으로 발탁한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고마움이 정치적 침묵의 대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인이 누군가에게 빚을 졌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잘못까지 함께 감싸야 한다면, 그것은 충성이 아니라 종속이다. 그래서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 가운데 하나는 말 잘하는 능력이 아니라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런 점에서 김해영과 이탄희라는 이름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의 정치적 평가에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 공통점은 분명하다. 두 사람 모두 정치에 들어오기 전부터 자기 이름으로 설명할 수 있는 선택과 경력이 있었다.
김해영은 민주당 내부에서도 불편한 목소리를 냈다. 당의 주류와 다른 판단을 할 때 공개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것이 항상 옳았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정치적 판단을 자신의 이름으로 감당했다는 것이다.
이탄희 역시 마찬가지다. 판사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 문제를 제기했고, 자신에게 안정적인 직업적 경로가 있었음에도 사법개혁이라는 문제를 자신의 삶의 문제로 받아들였다. 그들의 주장에 모두 동의하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그러나 적어도 이들에게는 정치인이 되기 전에 이미 ‘내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자기 답변이 있었다. 정치가 그들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온 선택이 정치인이 된 그들을 설명했다. 이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
전용기 민주당 의원과 장경태 민주당 의원 연합뉴스 자료사진
반대로 오늘날 당내 청년 정치의 성장 경로는 지나치게 단선적이다. 대학생위원회에서 시작하고, 청년위원회에서 활동하고, 당직을 맡고, 누군가의 선거캠프에서 일하고, 당내 주요 인사들과 관계를 쌓고, 당 지도부의 메시지를 충실히 전달하고, 선거 때마다 조직에서 하부의 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국회의원이 되거나 지방의원이 된다.
이 경로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당에서 정치 경험을 쌓는 것은 자연스럽고 필요한 일이다. 문제는 그 경로가 정치인의 거의 전부가 되어버릴 때다. 당 밖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본 적이 있는가. 정치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전문 영역에서 성과를 만들어본 적이 있는가. 시민사회에서 독자적인 신뢰를 쌓았는가. 당의 도움 없이도 자신의 정책과 철학을 설명할 수 있는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을 키워준 정치 지도자의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했을 때 그 사람에게 아니오”라고 말해본 적이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정치인이라고 불러도 되는 것인지 고민해봐야 한다.
장경태와 전용기 같은 사례도 그래서 단순히 개인의 호불호로 평가할 문제가 아니다. 두 사람은 민주당의 대학생위원장 등 당내 청년조직을 거쳐 국회에 진입한 대표적인 당내 성장형 청년 정치인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민주당 내부에 청년이 성장할 통로가 존재한다는 긍정적인 신호다.
그러나 동시에 중요한 질문을 남긴다. 당내에서 성장했다는 것과 정치적으로 자생했다는 것은 같은 것인가. 당내에서 성장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당 안에서 얻은 경력이 당 밖에서 검증된 능력과 철학을 대체하는 순간이다.
청년위원장이라는 직함이 정치적 능력을 증명해주는가. 누군가의 보좌진이었다는 경력이 독자적인 정치철학을 증명해주는가. 누구의 캠프에서 일했다는 사실이 국민에게 어떤 정책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증명해주는가. 그렇지 않다. 그것들은 경력일 수 있지만 정치적 자생력의 증거는 아니다.
정치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무능한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다. 실력이 있어서 그 자리에 있는지, 국민이 선택해서 그 자리에 있는지, 아니면 누군가가 선택해서 그 자리에 있는지, 정치인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가 자신의 능력보다 누군가의 호의와 권력에 더 크게 의존한다고 느끼는 순간, 정치인은 그 권력에 반대하기 어려워진다. 그때부터 정치인은 국민을 향해 정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임명한 권력을 향해 정치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청년 정치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문제다.
철학적으로 보면 이것은 결국 정치적 주체성의 문제다. 한나 아렌트가 정치에서 중요하게 본 것은 인간이 공적 공간에서 자신의 말과 행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정치란 결국 ‘내가 누구인가’를 말과 행동으로 세상에 드러내는 행위다. 그렇다면 자신의 말이 언제나 누군가의 말의 반복이고, 자신의 정책이 언제나 당의 정책을 재포장한 것이며, 자신의 정치적 판단이 언제나 계파의 판단을 따라가는 것이라면, 그 사람은 정치적 주체인가. 아니면 정치적 객체인가. 이 질문은 상당히 불편하다.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에 도전하는 정민철 정책위원회 부의장이 14일 국회 소통관에서 이날 민주당 최고위원회가 선출직 최고위원 5명 중 1명을 청년 몫으로 분리해 별도로 선출하는 청년 최고위원 제도 도입의 건을 부결한 것을 규탄하고 있다. 왼쪽은 민주당 김문수 의원. 2026.7.14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러나 청년 정치가 진짜 정치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어야 한다. 정당은 정치인을 만드는 곳인가, 정치적 조직원을 만드는 곳인가. 공천은 정치적 기회를 주는 것인가, 정치적 충성을 구매하는 것인가. 청년에게 자리를 주는 것이 청년정치인가, 아니면 청년이 자기 힘으로 그 자리를 얻도록 경쟁시키는 것이 청년정치인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이 있다. 정치인은 누구에게 책임져야 하는가. 자신을 공천한 사람인가. 자신을 키워준 정치적 스승인가. 자신이 속한 계파인가. 아니면 자신에게 표를 준 국민인가. 민주주의의 답은 너무나 명확하다. 정치인은 결국 국민에게 책임져야 한다. 그런데 현실의 정치에서는 이 간단한 원칙이 자주 뒤집힌다.
공천권자는 다음 공천을 결정할 수 있고, 당내 권력자는 정치인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정치인은 유권자의 평가보다 조직의 평가를 더 두려워하게 된다.그리고 바로 그 순간 청년 정치의 독립성이 무너진다.
필자는 이것을 ‘온실형 청년 정치’라고 부르고 싶다. 정당이 청년을 보호한다. 당직을 준다. 조직을 만들어준다. 선거를 도와준다. 유명 정치인과 연결해준다. 공천의 기회를 준다. 단기적으로 보면 훌륭한 육성 시스템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치인이 온실 밖으로 나갔을 때도 살아남을 수 있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용혜인 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13일 국회 소통관에서 후보직 자진 사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6.9.13 연합뉴스
바람을 맞아보지 않은 나무는 바람의 방향에 따라 흔들린다. 정치인에게 필요한 것은 보호만이 아니다. 경쟁이 필요하고, 실패가 필요하고, 독립이 필요하고, 때로는 자신을 키워준 조직과 갈라서는 경험도 필요하다. 그래야 자기 뿌리가 생긴다.
그래서 청년 정치의 핵심을 ‘청년 할당제’나 ‘청년 공천’만으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 청년에게 공천을 몇 퍼센트 줄 것인가보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그 청년은 공천 없이도 정치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가. 청년위원장 자리를 몇 개 만들 것인가보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그 청년은 당직이 없어도 자신의 정책을 가지고 시민을 설득할 수 있는가. 청년 인재를 몇 명 영입할 것인가보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그 사람에게 정치 이전의 자기 인생과 자기 전문성이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키워준 정치적 후견인과 의견이 갈렸을 때도 자신의 판단을 지킬 수 있는가. 필자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청년을 진짜 청년 정치인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인에게 필요한 것은 자생력이다. 자생력은 누군가의 이름을 지우고도 자신의 이름으로 설명될 수 있는 능력이다. 누구의 측근이었는지가 아니라, 무슨 정책을 만들어왔는지. 누구의 캠프에서 일했는지가 아니라, 시민들에게 어떤 문제를 해결해왔는지. 누구의 추천을 받았는지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위해 무엇을 포기해봤는지. 그것이 정치인의 진짜 자산이다.
그렇다면 민주당은 청년 정치인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 청년에게 무조건 자리를 만들어주는 대신 더 치열하게 경쟁시켜야 한다. 당내 경선도 치르게 하고, 공개 토론도 시키고, 정책으로 경쟁하게 해야 한다. 당대표와 다른 의견을 내더라도 그 자체를 불이익의 이유로 삼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당의 잘못을 가장 먼저 지적할 수 있는 청년에게 더 큰 정치적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리고 당 밖에서 전문성을 쌓은 사람, 시민사회에서 활동한 사람, 기업이나 연구기관에서 자신의 분야를 개척한 사람, 지역사회에서 실제 문제를 해결한 사람에게도 정치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정치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과 실력이 정치인을 만들어내도록 해야 한다. 청년 정치인에게도 책임은 있다. 정당을 탓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스스로 물어야 한다. 당이 나를 버려도 나는 정치인인가?” 공천을 받지 못해도 계속 정치할 수 있는가. 당직을 잃어도 시민들과 만날 수 있는가. 당대표가 나를 불러주지 않아도 내 정책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내가 속한 계파가 내일 사라져도 내 정치가 살아남을 수 있는가. 선거에서 떨어진 뒤에도 자기 전문 분야로 돌아가 다시 사회적 신뢰를 쌓을 수 있는가. 그리고 몇 년 뒤 국민 앞에 다시 섰을 때, 누구의 사람”이라는 설명이 아니라 저 사람은 이것 하나만큼은 꾸준히 해온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가. 그것이 자생력이다.
정치에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가 함께 필요하다. 신념만으로 현실을 외면해서도 안 되고, 현실적인 이익 때문에 신념을 버려서도 안 된다. 그런데 오늘날 정당정치에서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 사이에 있어야 할 정치인의 판단이 사라지고 있다. 당에서 결정했다.” 지도부의 뜻이다.” 당론이 그렇다.” 이 세 문장이 자신의 판단을 대신한다.
하지만 국회의원은 당의 확성기가 아니다. 정당만의 대변인만도 아니다. 국민을 대신해 판단하고 그 판단에 책임지는 사람이다. 따라서 진짜 정치인에게는 때로 이런 말이 필요하다. 당이 그렇게 결정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한마디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한마디 때문에 공천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정치가 살아난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세대교체를 나이의 문제로 생각했다. 30대가 국회의원이 되면 청년 정치라고 생각하고, 40대가 지도부에 들어가면 세대교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세대교체가 아니다. 얼굴교체일 뿐이다. 30대가 국회의원, 장관이 됐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세대교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다. 권력에 대한 태도다. 생각하는 방식이다. 정당과 국민 사이에서 누구에게 더 큰 책임을 느끼는가의 문제다. 기성 정치인이 하던 방식 그대로 줄을 서고, 기성 정치인이 하던 방식 그대로 계파를 만들고, 기성 정치인이 하던 방식 그대로 공천을 기다리면서, 단지 나이만 젊다면 그것을 청년 정치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필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청년 정치란 젊은 사람이 하는 기성 정치가 아니라, 젊은 세대의 독립적인 문제의식과 철학을 가진 정치다.
결국 민주당이 다시 김해영과 이탄희 같은 정치인을 보고 싶다면, 김해영과 이탄희를 ‘복제’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다시 나올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당에 반대할 자유가 있고, 실패할 자유가 있고, 공천을 받지 못해도 살아남을 수 있고, 자신을 키워준 사람과 결별할 수도 있고, 당 밖에서 자기 실력을 증명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자신의 이름으로 국민에게 평가받을 수 있는 정치 생태계 말이다.
그런 생태계에서는 자연스럽게 새로운 정치인이 나온다. 반대로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누군가의 메시지를 반복하고, 누군가의 곁을 지키는 것이 정치적 성공의 가장 빠른 길이 된다면, 그 정당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것은 정치인이 아니라 정치적 추종자일 것이다.
그래서 민주당에 묻고 싶다. 당은 충성스러운 청년을 원하는가. 아니면 언젠가 당의 결정에도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진짜 정치인을 원하는가. 청년에게 자리를 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목소리를 가질 수 있는 공간을 주는 것이다. 청년에게 공천을 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공천 없이도 자신의 정치적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청년을 보호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청년이 정당의 보호 없이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자생력을 키워주는 것이다. 그리고 청년 정치인 역시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누구의 청년인가.” 누군가의 측근인가. 누군가의 후계자인가. 누군가의 조직원인가. 아니면 국민의 대표인가.
정치에서 가장 오래가는 자산은 공천이 아니다. 계파도 아니다. 신뢰다. 그리고 신뢰는 박수받을 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박수를 잃을 것을 알면서도 해야 할 말을 했을 때 만들어진다. 그래서 나는 김해영과 이탄희 같은 정치인이 다시 나와야 한다고 말하기보다, 그런 정치인이 나올 수밖에 없는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정당이 청년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청년이 정당 안에서도 자기 목소리를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당의 이력을 청년에게 덧씌우는 것이 아니라, 청년이 자신의 삶과 실력으로 자기 이력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정치가 그 사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삶과 철학이 그 사람의 정치를 증명하도록 해야 한다.
결국 질문은 하나로 돌아온다. 당이 당신의 이력에서 사라져도, 당신에게 남는 정치가 있는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청년이 많아질 때 비로소 청년 정치가 살아날 것이다. 그때의 청년 정치인은 누군가의 줄을 타고 올라온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두 발로 서서 자신의 이름으로 국민에게 선택받는 사람일 것이다.
세대교체는 나이가 바뀌는 것이 아니다. 권력에 대한 태도가 바뀌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가장 필요로 하는 청년은 말을 그럴듯하게 잘하는 청년이 아니라, 자신을 키워준 사람에게도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청년이다.
어쩌면 민주당에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청년이 아닐지도 모른다. 더 독립적인 청년이다. 더 많은 청년위원회가 아니라, 더 많은 자기 철학이다. 더 많은 청년 공천이 아니라, 더 많은 자생력이다. 그리고 더 많은 ‘청년 정치인’이 아니라, 진짜 정치인이다.
청년위원장이 됐는가. 당직을 맡았는가. 공천을 받았는가. 국회의원이 됐는가. 이런 것은 정치적 성과가 아니다. 정치적 과정일 뿐이다. 진짜 성과는 얼마나 많은 문제를 해결했는가. 얼마나 많은 시민을 설득했는가. 얼마나 좋은 정책을 만들었는가. 얼마나 자신의 정치철학을 지켰는가. 자신이 속한 정당의 잘못을 지적할 용기를 가졌는가. 그리고 선거에서 패배한 뒤에도 다시 시민사회 등 새로운 현장으로 돌아가 자신의 전문성과 신뢰를 축적했는가에 있다.
더불어민주당 김민석 대표가 11일 오전 충북도청 신관6층 문화홀에서 열린 충북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6.9.11 연합뉴스
마지막으로 민주당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유능한 정당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을 많이 만드는 정당이 아니다. 자신이 틀렸을 때 그것을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을 많이 가진 정당이다. 당의 모든 사람이 같은 말을 한다면 그것은 단결이 아니라 침묵일 수도 있다. 모두가 지도부의 판단을 옳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화합이 아니라 두려움일 수도 있다.
반대 의견이 사라진 정당은 강한 정당이 아니다. 반대 의견을 견딜 수 있는 정당이 강한 정당이다. 그러므로 민주당이 정말 김해영과 이탄희 같은 정치인을 다시 보고 싶다면 청년에게 먼저 충성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먼저 자유를 줘야 한다. 반대할 자유. 실패할 자유. 당 밖에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할 자유. 그리고 자신의 이름으로 다시 돌아올 자유. 그 자유가 있어야 소신이 생긴다. 소신이 있어야 정치적 주체가 생긴다. 정치적 주체가 있어야 자생력이 생긴다. 그리고 자생력을 가진 정치인이 많아질 때 비로소 정당은 건강해진다.
결국 청년 정치의 개혁은 청년을 위한 특혜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청년이 권력에 종속되지 않아도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김해영과 이탄희 같은 정치인이 다시 나올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청년에게 자리를 주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자리를 잃어도 자신의 이름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정치인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청년 정치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독립된 정치인을 만들게 될 것이다.
필자가 다시 한번 더 강조하건대, 능력과 소신이 아니라 기성 권력의 간택 과 자리 나누기 로 길러진 청년은 결코 독립적인 정치를 할 수 없다. 그들이 권력자의 눈치를 보며 맹목적인 하수인으로 전락하는 순간, 청년 정치는 실종되고 정당의 줄 서기 문화만 남게 된다.
자신을 키워준 정당에도 당당히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진짜 청년 정치를 보고 싶다면, 실제로 유능하고 자기만의 콘텐츠가 있는 자생력 있는 청년 정치인 이 자랄 수 있도록 정당의 생태계부터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 이수영 시민기자 tndudfl1566@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