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의 세상 인식법 눈 둘 데가 없네 [칼럼] 오동진 영화평론가
홍상수는 정량적인 감독이 아니라 정성적인 예술감독이다. 흥행이나 관객 수는 중요하지 않다. 홍상수는 비평 쪽에서 늘 관심과 찬사를 받는다. 영화가 무엇을, 어떻게 해 나아가느냐에 대해 늘 사유하게 한다. 그것만큼은 절대적으로 분명하다. 이번 35번째 영화 도 마찬가지이다. 대중들은 모호하다고 느낄 것이다. 이런 얘기도 영화가 되나, 하고 의아해하기까지 할 것이다.
미세하게 그려내는 비일상적인 며칠 동안의 낯선 감정들
특히 홍상수의 의도적인 동어 반복 성향은 새로 나온 작품을 보기 위해서는 그 이전의 작품, 또 그 전작 등 최근작 두세 편은 같이 봐야 따라가기 쉽게 만든다. 이번 는 전의 전작인 33번째 영화 의 설정과 대동소이한 측면이 있다. 이번 는 10년 만에 재혼한 엄마를 찾아 그녀의 제주도 집을 동생과 함께 찾아가 2박 3일을 머무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는 3년 사귄 애인의 집에서 우연히 하룻밤을 묵으며 그녀의 부모에게서, 심지어 애인에게서조차 이질적인 감정을 느끼게 되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홍상수는 요즘 일상에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낯선 감정에 대해 골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근데 이건 사실 큰 감정 충돌이 일어날 법한 관계들에 관한 얘기이기도 하다. 여자의 부모를 갑자기 만나게 된다든지 재혼한 엄마를 10년 만에 찾아가는 일이 일상처럼 벌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홍상수의 영화는 그것을 마치 평범한 하루나 이삼일로 나눠 그리되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균열을 미세하게 포착하고 분석하려 한다. 사람의 마음속은 천 가지, 만 가지 감정적 교차지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걸 다 알 수는 없다. 평범한 사람들은 대개 그 감정을 뭉뚱그려서 표현한다. 그런데 홍상수는 미세하게 그 가닥 하나하나를 뜯어낸다. 마치 사람들이 자기 마음속 감정을 굵은 케이블처럼 생각한다면 홍상수는 그 안의 가느다란 전기선들을 한 가닥씩 보며 색깔을 구별하고 따져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섬세하지만 불안하고 위험하다. 언제든지 전기선 한두 개가 툭 끊어질 수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10년 만에 만난 낯선 새 가족 구성원 간 대화
10년 만에 재혼한 엄마 순영(최명길)을 만나러 온 상희(김민희)는 선뜻 새아빠라고 부르지는 못하는 새아빠 종원(권해효)에게도 주원이라는 이름의 딸(박미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주원은 상희에게 매료된다. 상희가 만드는 장편(掌篇: 극히 짧은 분량) 영화가 좋다고 한다. 그런데 주원은 매료되는 척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녀는 언니의 영화들이 너무 좋다고 말하지만, 새아빠가 나중에 언급하는 분위기를 보면 그다지 칭찬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혹은 주원으로서는 아빠에게 얘기해봐야 잘 못 알아들을 터여서 아예 얘기를 안 한 것일 수도 있다. 그 감정의 가닥은 전달될 수 없거나, 전달되더라도 왜곡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 가지고 있는 감정의 실체를 인식할 수 없다. 인식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살 뿐이며 그 착각 자체를 편한 것이라 간주한다. 더 나아가 그게 그거라고 생각한다. 감정의 실체를 모두 파악하는 건 오히려 불편한 일일 수 있다.
주원은 상희에게 다소 뜬금없이 ‘영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영원한 것은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말주변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은 상희는 그런 주원에게 이렇게 말한다. 영원에서 영원이란 단어를 지워 버려요. 영원이란 단어를 미끄러뜨려 버려요! 그러고 나서 딱 눈앞에 보이는 것, 그게 영원이에요. 말을 버려요. 그러면 그 말 뒤에 있는 것이 진짜예요.” 이 대목에서 상희는 약간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번 영화에서 등장인물이 유일하게 격앙돼 있는 씬이다. 상희는 결코 알 수 없는 실재의 무엇을 주원이 관념적으로 해석하고 싶어하는 것에 대해 짜증을 부리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상희의 이 말은 결국 인식과 실재에 관한 이야기이다. 언어로 이름 붙여진 수많은 객체와 대상이 그 언어에 부합하는 실체를 지니고 있느냐는 말이다. 눈앞에 놓인 맥주잔의 실체는 우리가 생각하는 맥주잔이라고 하는 것과 백 퍼센트 일치하는 것이냐, 라는 식이다. 인식과 실재하는 것 사이에는, 그것이 물건이든 감정이든, 엄청난 괴리가 존재한다.
아무리 설명해도 설명되지 않는 실재와 실체
인식과 실재의 차이에 대한 상희의 천착은 엄마의 남자 종원이 만드는 다큐멘터리를 놓고 서로 나누는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상희는 이때 다큐멘터리라 하지 않고 끝끝내 ‘도큐멘터리’라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명칭을 바꿔 부른다. 그녀는 남자에게, 내가 뭐라고 불러야 하죠? 이름을 부를 수도 없고 아저씨도 아니잖아요, 라고 말한다. 엄마는 아이 뭐 그냥 새아빠라고 부르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지만 상희는 남자에게 ‘라벨’을 붙이고 싶지 않거나 그를 ‘인식’하기 전까지 그의 ‘실재’에 이름을 붙이기를 주저한다. 상희는 조금 더 생각해 보겠다고 말한다. 상희에게 남자는 새아빠이기 이전에 그냥 종원일 것이다. 새아빠를 붙이는 순간 새아빠가 되는 것을 상희는 거부하고 보류한다.
상희는 ‘초분’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10년간 제작 중이라는 종원에게 집요하게 뭘 찍고 있느냐고 묻는다. 초분은 ‘草墳’이다. 직역하면 풀로 시체를 덮는다는 뜻이다. 사람이 죽으면 바로 묻지 않고 돌 위에 관을 놓고 관을 풀로 덮어 놓은 채 2, 3년 보내는 전통 장례 풍습이다. 일종의 임시무덤인데 자연스럽게 살이 썩어 없어진 후에야 정갈해진 뼈를 추려 정식으로 유골을 땅에 묻는 식이다. 죽은 부모를 몇 년이라도 이승에서 함께하겠다는 우리식 전통 효 사상이 배어 있는 장례 형식으로 전남 완도나 신안에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원이 찍고 있는 ‘초분’은 그 과정을 담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종원이 초분이란 말의 뜻을 설명해도 상희는 그래서 뭘 찍는 거냐고 묻고 그래서 종원이 또, 초분에 임하는 사람들을 찍고 있다고 해도 그 사람들의 무엇을 찍는 거냐고 또 묻는다. 그녀에게는 초분이란 행위보다는 초분이 가지고 있는 실재와 실체가 더 중요하다. 초분을 알기 위해서는 초분이란 단어를 ‘미끄러뜨려 버려야’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장면은 상희가 주원에게 ‘영원’이란 단어로 짜증을 부리기 이전에 나온다. 그러나 두 장면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기묘하게 얽혀 있다.
그래서, 언어를 미끄러뜨리면 그 안의 실체가 보일까?
상희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에 대해서도 종원과 순영 그리고 동생인 주원에게 자기 생각을 말한다. 그녀는 다큐멘터리가 다 사기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에서 만드는 다큐와 팔레스타인에서 만드는 다큐는 다른 얘기를 하면서도 각자가 다 자기네 것이 진짜와 사실을 얘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상희는 반면에 극영화는 아예 가짜를 얘기한다고 하면서 그게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이라고 강변한다. 사실과 허구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는 인식, 착시와 오해를 말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홍상수의 영화는 온통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그 어떠한 허구의 스토리도 인간 내면의 진실을 포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목 ‘눈 둘 데가 없네’라는 말은 극 후반부 상희가 자신의 실험영화에서 스스로 하는 독백 속에 나온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사람들이 단어 하나로 규정한 눈앞의 ‘실재’가 너무 많아서 ‘눈 둘 데가 없었음’을 고백한다. 홍상수는 극 중의 상희를 통해 자신 역시 그랬음을 고백한다. 자신의 영화 역시 영화 너머에 뭐가 더 있음을 얘기한다. 영화라는 단어를 싹 ‘미끄러뜨린 후’ 눈앞에 떠오르는 무엇이야말로 자신이 만드는 영화의 실체이자 실재라는 얘기를 던진다.
알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홍상수의 영화는 수사(修辭)로 정리하기 힘들다. 그럴 필요가 없는 영화이기도 하다. 언어가 규정하는 것을 미끄러뜨리고 그 안의 실재를 보는 게 중요하다. 그건 영화나 세상이나 마찬가지이다.
실제 2박 3일 만에 찍은 홍상수 영화의 미학
홍상수의 영화가 늘 그렇듯이, 그래서 그의 영화가 늘 유럽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이유 중의 하나겠지만, 이번 영화 역시 일상 대화처럼 진행되는 노변 철학의 의미를 담아낸다. 물론 유럽 영화계는 홍상수 영화의 구조적 파격성과 미학, 극도로 절감시킨 초저예산의 제작기법에도 높은 관심을 보인다. 그럼에도 그의 영화에는 매번 뜻밖에 만나는 철학, 음미할 만한 사유의 지점이 있고 유럽은 그것에 주목하는 경향성을 보인다. 그리고 그 점 또한 사람들(마니아층 관객들)이 그의 영화를 결코 소홀히 대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는 영화 속 상희의 체류 기간처럼 2박 3일 만에 찍은 영화이다. 홍상수가 각본, 연출, 촬영, 편집, 음악 등등 모든 것을 담당한 ‘원 맨 시네마’이다. 지난 10월 21일 개봉했다. 지난 8월에는 스위스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홍상수의 파트너로서 동거 중인 배우 김민희가 홍상수를 넘어 또 다른 명불허전의 인물이 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오동진 ohdjin1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