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 투쟁·옥살이… 백범과 함께 싸운 여성 독립군들 [사람들] 1940년 9월 17일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에서 한국광복군을 대표해 선서하는 김정숙. 김정숙은 오광심·조순옥·지복영 등과 함께 광복군 창설에 참여한 여성 대원이었다.
국가가 위태로웠던 시절의 기록을 보면 놀라운 여자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독립운동 자금을 몸에 감추고 압록강을 건너고, 책 한 권 분량의 보고서를 통째로 외워 국경을 넘기도 합니다. 폭탄을 들고 떠나는 청년의 속옷에 수류탄 주머니를 달아주고, 어린아이를 데리고 중국 대륙을 떠돌다 장군이 되기도 합니다.
여자가 왜 투사가 되었느냐?” 일제 헌병이 고문하며 묻습니다.
조선에서 투사가 안 되면 어찌 살 수 있겠는가?”
고문 후유증으로 쓰러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지만, 속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은 유해와 함께 푸른 강물에 흘러갑니다.
백범의 독립 투쟁에 함께한 여성들도 참 많았습니다. 그가 이봉창과 윤봉길을 보내고, 임시정부를 이끌고 중국 대륙을 이동하고,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는 동안 많은 여자들이 함께 싸웠습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 이름과 신념을 갖고 나라를 되찾으려 싸웠고, 백범을 도왔습니다. 그 여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그리고 그들이 가까운 거리에서 본 백범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 1. 망명 정부의 살림꾼들
정정화는 1919년 스무 살의 새색시였습니다. 그해 10월 시아버지 동농 김가진과 남편 김의한이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습니다. 김가진은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를 지냈고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까지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작위와 재산을 버리고 상해로 탈출했습니다. 며느리 정정화도 이듬해 1월 팔촌 오빠 정필화의 안내를 받아 상해로 갔습니다.
남경에서 김의한 정정화 부부.
그곳에서 정정화가 만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궁핍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임정 요인의 아내들은 아침 부엌 아궁이에 불을 붙이고 나면 밥을 지을 쌀이 없었습니다. 보다 못한 정정화는 위험한 일을 자청했습니다. 국내에 들어가 독립운동 자금을 구해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의주에서 세창양복점을 운영하던 이세창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비밀연락소 역할을 하며 정정화가 서울까지 무사히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해 준 사람입니다. 훗날 정정화는 이 이름 없는 협력자를 특별하게 기억했습니다. 그는 별로 배운 것도 없고, 나라가 망하기 전에는 세도가나 집권자들의 압제를 받으며 억눌려 지내오기만 했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이렇다 할 혜택이나 은덕을 베풀어주지 못했던 조국이 이미 숨통이 끊긴 마당에도, 그 조국을 찾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일제에 항거하는 모습을 볼 때 진정한 애국자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자서전 『장강일기』)
정정화의 기억 속 백범은 사진에서 보는 근엄한 모습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사람을 만나러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습니다. 늘상 걸어 다니니 신고 다니던 헝겊신이 남아날 날이 없었습니다. 바닥은 다 닳아 너덜거렸고 신발의 목 부분만 성한 채 발에 매달려 있을 정도였습니다. 정정화는 이렇게 씁니다. 백범은 그만큼 억척스러운 분이기도 했다. 궁하기가 짝이 없어도 언제나 꿋꿋하고 굳센 분이었다. 속상한 일이 생기면 불평을 늘어놓는 대신 하루종일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앉아 궐련만 피웠다.”
‘여장부’로 꼽힌 김순애(김규식 부인)는 중국 각지에서 여성들을 조직했고 충칭에서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재건해 회장으로 활동했습니다. 정정화는 훈련부장을 맡았습니다. 연미당·김정숙·이국영·이순승을 비롯한 여성들은 교육·선전·재정·연락·구호와 임정의 여러 실무에 참여했습니다. 애국부인회는 아이들을 가르쳤고 독립운동가 가족을 돌보았으며, 필요한 곳에 돈과 물자를 연결했습니다. 김정숙처럼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 부처의 실무를 맡은 여성도 있었습니다.
## 2. 여자도 밀정의 목을 따다
1930년 스물다섯 살의 이화림은 고향 평양을 떠났습니다. 어머니는 중국 상해로 가는 딸을 배웅하면서 보통강 둑을 함께 걸었습니다. 그리고 정몽주의 「단심가」를 읊어 주었습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상하이에 도착한 이화림은 김두봉의 주선으로 김구를 만났습니다. 김구는 처음부터 반기지 않았습니다.
너의 조국은 어디인가?”
나의 조국은 조선이고 평양에서 자랐습니다.”
일종의 시험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 가운데는 ‘나의 조국은 소련이다’라고 답하는 사람이 있었고, 김구는 공산주의자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화림의 대답을 듣고도 김구는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험한 일을 해야 하니 여자는 안 된다.”
이화림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평양에서 자신이 해 온 활동을 설명하며 집요하게 매달렸고, 결국 김구의 비밀공작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동해’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김구는 적에게 붙잡히지 않고 도망치는 방법은 물론, 밀정의 목을 따는 방법도 가르쳤습니다. 친구에게는 정성을 다해야 하지만, 적들에게는 절대로 준엄해야 한다.”
이봉창이 일본으로 떠날 준비를 할 때는 폭탄을 어떻게 감출 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이봉창이 팬티 가랑이에 주머니를 만들어 폭탄을 넣고 꿰매자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김구가 이화림에게 말했습니다.
동해야, 부끄러워하지 마라. 혁명 활동을 하려면 이보다 더 부끄러운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이화림은 밤새 이봉창의 속옷에 수류탄을 넣을 주머니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석 달 뒤 윤봉길 의거를 준비할 때는 역할이 더 커졌습니다. 이화림은 윤봉길과 일본인 부부처럼 꾸미고 홍구공원에 들어가 현장을 답사했습니다. 의거 당일에도 공원 입구에서 윤봉길이 도시락과 물통으로 위장한 폭탄을 들고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김구가 움직인 또 한 명의 여자 단원은 김긍호였습니다. 1932년 3월 하순 김구는 김긍호를 연락정보원으로 삼아 배편으로 안동(현 단동)과 대련 일대에 보냈습니다. 남자단원 최흥식 등은 리튼(Victor A. G. B Lytton)조사단이 5월 26일 대련역에 도착할 때 관동군사령관 혼조 시게루, 남만주철도 총재 우치다 고사이 등 만주의 일본 수뇌부가 배웅을 나오면 그들을 폭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김긍호와 최흥식과 유상근이 체포됐습니다. 일제는 김긍호를 이용해 김구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김구와 편지를 주고받게 하는 공작을 시작했습니다.
김구는 김긍호가 체포된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일본 측이 확보한 편지를 보면 김구는 그녀의 어려운 형편을 걱정하며 생활비를 보내려고 했습니다. 자신의 이름 대신 ‘곽윤’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일본 경찰은 그 편지들을 들여다보며 김구의 위치를 추적했습니다. 나중에는 더 적극적인 방법을 썼습니다. 김긍호를 상해로 직접 보내 오리무중인 김구를 찾아내게 했습니다.
김긍호가 일본 경찰의 밀정으로 변절한 것일까요? 그 이후의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김구는 일본 경찰보다 한발 앞서서 움직이는 감이 발달한 사람이었습니다. 특무기관이 총동원된 암살작전의 그물망에서 번번이 빠져나갔습니다.
오광심은 남만주에서 조선혁명당에 가입해 활동하다 1931년 남경으로 이주해 만주 지역과의 연락을 담당했습니다. 양세봉 장군이 이끄는 조선혁명군은 일본군과 싸우고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도 돈도 무기도 부족해졌습니다. 만주의 독립군은 남경의 독립운동 진영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습니다.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오광심 부부
그 일을 맡은 사람이 김학규와 오광심입니다. 두 사람은 남경으로 가는 길에 부부가 됐습니다. 남경에 도착한 김학규는 만주의 사정을 알리고, 남경 독립운동 진영의 움직임을 만주 독립군 본부에 보고하기 위해 상세한 보고서를 만들었습니다. 분량이 책 한 권에 가까웠습니다.
이 문서를 어떻게 만주 깊숙한 곳까지 가져갈 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일본의 감시망을 뚫고 산해관을 넘어야 했습니다. 문서를 몸에 숨겼다가 발각되면 운반자의 목숨뿐 아니라 조직의 비밀 전체가 적에게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김학규가 오광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이걸 외워서 본부로 갈 수 있겠소?”
오광심은 기억력이 뛰어났습니다. 오광심은 닷새 동안 보고서를 한 장씩 암송한 끝에 책 한 권 분량의 내용을 머릿속에 넣었습니다. 남경을 떠나 산해관을 넘어 만주로 들어간 오광심은 본부에 도착한 뒤 기억하고 있던 내용을 다시 글로 옮겨 적어 제출했습니다. 머릿속에 책 한 권을 담아 운반한 것입니다.
## 3. 광복군이 된 피란민의 딸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 이후 상해는 임정 사람들이 머물 수 없는 곳이 됐습니다. 김구에게 거액의 현상금이 붙었고 임정 요인들과 가족들은 모두 흩어졌습니다. 가흥, 진강, 장사, 광주, 유주를 거쳐 중경에 이르는 긴 피난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그 행렬에서 여자들의 활동이 돋보였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움직이고, 짐을 챙기고 먹을 것을 구해야 했으며, 도착한 곳에서는 다시 살림을 이어 갔습니다.
1940년 6월 17일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 기념사진(중경). 앞줄 이헌경·정정화·이국영·김효숙·방순희·김정숙·김병인·유미영, 둘째 줄 손일민 부인·조용제·오영선·송정헌·정정산·오건해·최동화·김수현·노영재, 뒷줄 윤용자·이상만 며느리·이숙진·최선화·오광심·연미당·최형록·이순승(왼쪽부터).
어른들의 손을 잡고 피란하던 소녀들이 어느새 군복을 입을 나이가 됐습니다. 민영주는 1923년 상하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민필호는 임시정부 외교와 선전활동에 참여하고 훗날 임시정부 비서실장을 지냈습니다. 민영주는 태어나면서부터 임정 사람들 속에서 자랐습니다.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이 열렸을 때 민영주는 태극기를 바치는 헌기(獻旗) 담당을 했습니다. 이후 임시정부에서 일했고 중경방송국을 통한 대일 심리전에도 참여했습니다. 임시정부 주석판공실 서기로 근무했고, 1945년에는 광복군 제2지대에 편입됐습니다.
지복영은 망명생활 속에서 성장해 청년공작대의 선전활동을 거쳐 광복군에 들어갔습니다. 신순호도 청년공작대와 광복군에서 활동하며 임정의 실무와 심리전 업무를 맡았습니다. 김정숙도 여성단체와 임정의 행정업무를 담당하고 광복군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여성 광복군은 모병을 하고, 연락을 맡고, 정보를 수집하고, 번역하고, 방송했습니다.
그보다 한 세대 앞에는 권기옥이 있었습니다. 권기옥은 열여덟 살 무렵 평양에서 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공채를 판매했습니다. 이후 중국으로 탈출해 상해 임정으로 갔고, 중국 운남의 항공학교에서 비행술을 배워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성장했습니다. 훗날 중경에서는 김순애·방순희 등과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활동에도 참여했습니다.
1937년 중국 난경에서 촬영한 권기옥과 이상정, 이상화 형제. 가운데가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이자 독립운동가 권기옥, 오른쪽은 남편 이상정, 왼쪽은 이상정의 동생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인 이상화. 권기옥과 이상정은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함께한 부부였다.
## 김구를 떠난 여자들
김구의 곁에서 싸운 여성 가운데 안미생은 특별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안미생은 1919년 베이징에서 태어났습니다. 안중근의 동생이자 독립운동가인 안정근의 차녀였습니다. 홍콩에서 공부하고 곤명의 국립서남연합대학 영문과를 거쳤으며, 중경에서는 영국대사관에서 근무했습니다. 이후 한국독립당 당원과 대한민국임시정부 비서로 활동했습니다. 외국어에 능하고 국제정세에 밝은 젊은 여성이었습니다.
1940년 김구의 장남 김인과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김인이 심한 폐병으로 쓰러졌습니다. 당시 페니실린은 귀하고 값비싼 약이었습니다. 안미생은 남편을 살리기 위해 시아버지 김구에게 페니실린을 구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김구는 거절했습니다. 폐병으로 죽어가는 다른 독립운동가 동지들에게도 그 약을 마련해 주지 못하는 형편인데, 내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특별히 약을 쓸 수는 없다.”
김인은 결국 1945년 3월 29일 중경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스물여덟 살이었습니다. 이 일화에는 백범의 성격이 잔인할 만큼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장남의 목숨이 달려 있었고, 부탁한 사람은 며느리였습니다. 그러나 백범은 임시정부 주석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남들이 쓰지 못하는 귀한 약을 쓸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 안미생이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안미생은 남편이 죽은 뒤에도 임시정부에서 일했고 백범을 보좌했습니다. 1945년 11월 임정 요인들과 함께 환국했으며, 해방 뒤에도 김구 주변에서 비서 역할을 했습니다. 안미생의 활동은 크게 돋보였는데, 돌연 1947년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미국으로 간 이유는 아무도 모릅니다. 한국에서 살기가 너무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후 오랫동안 한국과 연락이 끊겼고, 미국에서는 수산나 안이라는 이름으로 살다가 2008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뒤늦게 백범의 후손이 확인되면서 그녀에게 건국포장이 추서됐고, 2024년 후손은 그 포장을 백범김구기념관에 기증했습니다. 페니실린에 대해서만큼은 두 사람 모두 어떤 말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비극적인 침묵입니다.
이화림도 김구를 떠난 경우입니다. 그녀가 바라보는 독립운동의 방향과 김구가 생각하는 길에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화림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는 쪽으로 가고 싶어 했습니다. 김구는 그곳으로 가면 공산주의에 물들 수 있다며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이화림은 떠났습니다.
이화림은 조선의용대 여자복무단에서 활동했고 이후 태항산과 연안으로 갔습니다. 중국의과대학에서 공부했고 의료인으로도 활동했습니다. 두 사람은 1939년 김구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다시 만났습니다. 김구가 물었습니다.
동해야, 너는 아직도 공산당원인가?”
네. 저는 공산주의를 믿어요. 저는 공산주의자예요.”
김구가 말했습니다.
그럼 앞으로 우리는 다시는 만나지 말자.”
두 사람은 그 뒤 다시 만나지 않았습니다.
이 일화에는 두 사람의 성격이 드러납니다. 두 사람은 뒤끝 없이 작별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헤어진 뒤에도 이화림이 김구를 존경했다는 점입니다. 이화림은 회고록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김구 선생은 혁명의 기개와 일을 함에 있어 패기 넘치는 영웅적인 모습, 그리고 남을 연루시키려 하지 않는 성품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김구 선생이 한국 민중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고, 임시정부에서도 그의 위신을 드높일 수 있었다.”
이화림의 기억 속에는 김구가 이렇게 남아 있는데, 정작 김구의 『백범일지』에는 이화림의 이야기가 한 줄도 없습니다. 다른 길을 간 사람에게는 맺고 끊음이 분명했던 김구의 성격을 읽을 수 있습니다.
## 5. 함께 싸운 여자들이 기억하는 백범
백범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여성들의 기억을 모아 보면 책에서 만나는 그와는 다른 모습이 나타납니다. 너덜너덜한 헝겊 신발을 신고 다니는 백범, 정치적 신념이 다르면 다시는 만나지 않는 완고한 백범, 아들이 죽어 가는데도 피와 눈물이 없는 백범, 그렇지만 백범은 동지들을 끝까지 보살폈습니다. 정정화는 회고록 『장강일기』에서 자신이 반평생 많은 영웅 열사들을 곁에서 지켜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저게 사람인 줄 알어? 하시던 백범 어머니의 말이 맞다. 백범은 너무 큰 사람이었다.”
물론 이들이 여성 독립운동가의 전부는 아닙니다. 다른 전선에서 싸운 여성들도 많았습니다. 김마리아가 있었고 남자현이 있었습니다. 박차정이 있었고 김명시가 있었습니다. 김명시는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벌였고 체포된 뒤 긴 옥살이를 했습니다. 오빠와 동생도 각각 독립운동으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훗날 김명시는 세 남매가 같은 시기에 각각 다른 지역에서 징역을 살았던 일을 이야기하며 말했습니다. 3남매가 같은 해에 북부, 중부, 남부로 나눠 각각 징역을 살았는데, 조선 팔도가 다 감옥인 식민지에서 그 정도야 각오한 바입니다.”
감옥에 가지 않는 것이 특별한 시대였습니다. 나라 전체가 감옥이니 그 정도는 각오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여자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이는 임시정부에서 일했고, 어떤 이는 만주 산야에서 총을 들었습니다. 어떤 이는 비밀문서를 운반했고, 어떤 이는 비행기를 몰았습니다. 어떤 이는 광복군이 됐고, 어떤 이는 조선의용대에 들어갔습니다. 이념도 달랐고 조직도 달랐으며 해방 뒤 걸어간 길도 달랐습니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그들이 활동한 것을 보면 우리나라 여자들이 참으로 장하다는 사실입니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협박을 일삼는 일제 형사들 앞에서도 마음에 있는 말을 다 하고, 어떤 고문 앞에서도 동지들을 배신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남자 독립운동가들도 대단했지만, 여자들은 훨씬 그 이상이었습니다. 임순만 언론인 ysm@mindl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