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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교육은 시대 권력이 원하는 인간을 길러낸 수단

교육은 시대 권력이 원하는 인간을 길러낸 수단
[교육]
12일 오전 부산시교육청 중앙현관 앞에서 부산교육희망네트워크가 기자회견을 열고 부산지역 학교 내 일제 잔재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2019.8.12 연합뉴스 어렸을 때부터 ‘뼈대 있는 집안’, ‘대단한 집안’, ‘명문가’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그 기준은 대개 비슷했습니다. 조상 가운데 정승과 판서가 몇 명이나 있었는지, 높은 벼슬에 오른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가 그 집안의 위상을 결정했습니다. 그들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는 그다음 문제였습니다. 탐관오리였는지 청백리였는지, 권력자의 잘못을 바로잡았는지 그 곁에서 권세를 누렸는지보다 어느 자리까지 올랐는지가 더 중요했습니다. 오늘날 그 기준은 달라졌지만, 높은 지위와 사회적 성공을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는 관념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정승과 판서의 자리는 명문대 졸업생과 판사·검사, 고위관료와 의사, 대기업 임원으로 바뀌었습니다.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을 많이 배출한 집안은 지금도 명문가로 불립니다. 그러나 독립운동에 나서 전 재산을 잃고 투옥과 고문을 견딘 사람,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다 학교와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을 많이 배출한 집안을 명문가라고 부르는 경우는 드뭅니다. 친일부역으로 지위와 재산을 지킨 가문은 해방 이후에도 번성했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나선 가문은 가난과 망각 속에 남았습니다. 독재정권에 협력한 사람은 출세했고, 그 권력에 저항한 사람은 감옥에 갔습니다. 한 사회가 누구를 성공한 사람으로 대우하는가는 그 사회가 무엇을 가르쳐왔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권력을 무엇을 위해 사용했는가보다 얼마나 높은 권력을 얻었는지를 중시했습니다. 공공의 가치를 위해 무엇을 희생했는가보다 얼마나 많은 지위와 재산을 남겼는지를 먼저 물었습니다. 학교도 정의로운 시민보다 경쟁에서 승리하는 인재를 길러내는 데 더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이것을 한국인의 본성이나 변하지 않는 민족성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출세주의는 타고난 성품이 아니라 오랜 시간 축적된 사회적 보상의 결과입니다. 권력에 가까이 간 사람에게 지위와 부를 주고, 불의에 저항한 사람에게 투옥과 해직, 가난을 안겨준 사회가 출세를 삶의 목표로 만들었습니다. 조선의 과거제와 오늘의 입시제도는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시험을 통과해 높은 자리에 오르고 그것을 개인과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관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교육은 각 시대의 권력이 원하는 인간을 길러내는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일제는 천황에게 충성하는 황국신민을 원했습니다. 이승만 독재정권은 반공국가에 복종하는 국민을, 박정희 독재정권은 국가발전에 헌신하는 산업역군을 요구했습니다. 전두환 독재정권은 국가폭력 앞에서 침묵하는 학생을 길러내려 했습니다. 민주화 이후에는 경쟁에서 승리하는 개인이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그러나 학교는 권력의 뜻대로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같은 교실에서 복종과 질문이 함께 자랐습니다. 학생들은 국가가 가르친 역사를 의심했고, 학교에서 익힌 지식과 조직의 경험을 권력에 저항하는 힘으로 바꾸었습니다. 황국신민이 되기를 거부한 학생들은 독립운동에 나섰고, 독재정권에 복종하지 않은 학생들은 거리와 광장으로 향했습니다. 학교는 지배의 장치였지만, 그 지배에 저항하는 시민이 태어난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국가가 시민에게 가르쳐준 결과라기보다 시민이 권력에 맞서 스스로 배우고 싸워서 쟁취한 역사에 가깝습니다. 시민은 그 성취를 마침내 헌법에 새겨 넣었습니다. 문제는 민주화 이후에도 이 역사를 학교의 일상적인 교육 원리로 만들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시민으로 성장하는 일은 여전히 일부 학생과 교사의 각성, 개인의 용기와 희생에 맡겨졌습니다. 청소년의 극우화는 일부 학생의 일탈이나 유튜브 중독만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보다 먼저 우리 사회와 학교가 오랫동안 누구를 성공한 인간으로 가르쳐왔는지 물어야 합니다. 권력에 질문하고 타인의 존엄을 지키며 공동체의 문제에 참여하는 시민을 충분히 길러내지 못한 자리에 출세와 경쟁, 혐오와 적대의 언어가 들어왔습니다. 오늘의 청소년 극우화는 그 시민교육의 오랜 공백 위에서 자라난 현상입니다. 이제 국가와 지배세력이 각 시대의 교육을 통해 어떤 인간을 길러내려 했는지, 학생과 시민은 그 요구에 어떻게 순응하고 저항하며 민주공화국의 주권자로 성장했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 조선이라는 국가는 어떤 관료를 길러내려 했는가 조선 전기의 성리학은 새 왕조의 국가질서를 설계하고 이를 운영할 관료를 길러내는 학문이었습니다. 교육의 이상은 수기치인(修己治人), 곧 학문으로 자신을 닦고 그 힘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1394)』을 통해 성리학을 국가의 법과 제도, 관료조직과 통치질서로 구체화했습니다. 조선은 성균관과 향교를 두어 국가가 필요로 하는 관료를 교육했고, 과거제(科擧制)를 통해 이들을 선발했습니다. 서원과 서당은 국가의 직접적인 통제 밖에서도 유학 교육을 확산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교육은 근대 국민교육처럼 모든 사람에게 공통의 지식과 시민적 권리를 가르치는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서당을 통해 평민에게도 학습 기회가 일부 열려 있었지만, 관직 진출을 위한 공식 교육과 과거제의 중심에는 양반 남성이 있었습니다. 여성과 다수의 평민·천민은 국가의 관료 선발과 공적 교육에서 사실상 배제됐습니다.   단원 김홍도의 공원춘효도(貢院春曉圖) . ‘봄날 새벽의 과거시험장’을 그린 작품으로, 김홍도가 과거시험장을 묘사한 유일한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응시자들은 관직으로 들어가는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 조선의 과거제는 국가를 운영할 관료를 선발하는 제도였지만, 급제는 개인과 가문의 지위를 높이는 입신양명의 통로이기도 했다. 오늘날 시험과 학력, 높은 지위를 개인과 가문의 성공으로 여기는 문화에도 그 오래된 흔적이 남아 있다. 조선이 길러내려 한 핵심 인간형은 백성 전체가 아니라 왕조를 운영할 소수의 남성 관료였습니다. 이들에게 요구된 것은 경전을 읽고 도덕적 수양을 쌓으며, 왕을 보좌해 백성을 다스리는 능력이었습니다. 과거제는 그렇게 세워진 국가에 들어가 권력을 행사할 사람을 선발하는 통로였습니다. 이 시대의 성리학이 하나의 고정된 해석에만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과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는 같은 성리학의 전통 안에서도 인간과 세계, 도덕적 본성과 현실의 관계를 다르게 해석하며 독자적인 학문체계를 세웠습니다. 이황과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 1527∼1572)은 사단과 칠정을 둘러싸고 8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두 사람은 끝내 견해를 하나로 합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상대를 이단으로 몰아세우지도 않았습니다. 서로 다른 생각은 상대를 제거할 이유가 아니라 학문을 더 깊이 파고들 이유였습니다. 조선 전기에도 사화와 학문적 탄압은 존재했지만,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 1559∼1566)은 논쟁이 학문을 발전시키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한편 과거 급제는 국가를 위해 일할 자격인 동시에 개인과 가문의 성공을 나타내는 표지가 됐습니다. 높은 관직에 오르면 부모와 조상의 이름이 함께 높아졌고, 가문 전체의 사회적 지위도 달라졌습니다. 교육은 국가를 운영할 관료를 기르는 일과 시험에 합격해 가문을 빛내는 입신양명을 함께 좇았습니다. 어떤 관료가 되어 무슨 일을 했는가보다 어느 시험에 합격해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랐는지가 성공의 기준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 이후 조선은 무너진 국가질서를 다시 세워야 했습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서인 세력은 성리학적 명분론을 자신들의 정치적 정통성을 입증하는 근거로 삼았습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1637)과 두 차례의 예송논쟁(禮訟論爭, 1659·1674), 환국정치를 거치면서 학문적 견해는 붕당의 정치적 이해와 더욱 긴밀하게 결합했습니다. 1680년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뉜 뒤에는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노론 계열이 장기적인 정치적 우위를 확보했습니다. 조선 전기에도 이견을 억압하고 사람을 제거한 사화가 있었습니다. 반대로 조선 후기에도 양명학과 실학, 북학을 비롯한 새로운 사유와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조선 전기와 후기를 개방과 폐쇄의 시대로 단순하게 나눌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학문적 정통과 붕당의 정치적 이해가 강하게 결합하면서, 이견이 논쟁의 대상을 넘어 정치적 배제의 근거로 사용되는 일은 더욱 빈번해졌습니다.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 1607∼1689)은 주희의 경전 해석에 도전한 백호 윤휴(白湖 尹鑴, 1617∼1680)를 ‘사문난적(斯文亂賊)’, 곧 유학의 올바른 전통을 어지럽히는 도적으로 규정했습니다. 학문적 배척은 정치적 적대와 결합했고, 윤휴는 경신환국(庚申換局, 1680) 때 역모 혐의로 처형됐습니다(국사편찬위원회, 「윤휴」; 한국학중앙연구원, 「송시열」). 그러나 권력이 학문 전체를 지배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 1649∼1736)의 양명학은 지식과 실천을 다시 결합하려 했고, 실학과 북학의 지식인들은 학문의 시선을 토지와 행정, 상공업과 과학기술, 백성의 삶으로 돌렸습니다. 영조(英祖, 1694∼1776)와 정조(正祖, 1752∼1800)는 탕평정치(蕩平政治)를 통해 붕당의 대립을 완화하고 새로운 정책과 학문적 견해를 수용할 공간을 넓히려 했습니다. 특히 정조는 규장각을 중심으로 개혁적 지식인들을 등용했습니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 개혁의 동력은 급속히 약해졌습니다. 19세기에는 소수 외척가문이 권력을 차지하는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이어졌습니다. 18세기 이후 정치적 우위를 확보한 노론 계열과 19세기 세도정치를 주도한 외척가문은 학문적 정통과 인적 관계망을 관직 진출의 중요한 기준으로 만들었습니다. 새로운 질문보다 정통으로 인정된 학문을 따르는 일이 중시됐고, 관직 진출과 정치적 생존은 개인의 능력뿐 아니라 어느 학맥과 권력관계에 속했는지에 따라 크게 좌우됐습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자 경전을 해석하는 능력만으로는 나라를 지킬 수 없게 됐습니다.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략에 맞서려면 근대적 외교와 군사, 산업과 과학기술, 행정과 교육을 이해하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국가는 성리학적 질서를 유지할 관료만이 아니라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익혀 자주적인 근대국가를 건설할 구성원을 길러내야 했습니다. 갑오개혁(甲午改革, 1894)으로 과거제가 폐지되고, 고종(高宗, 1852∼1919)이 교육입국조서(敎育立國詔書, 1895)를 발표한 것도 이러한 변화 속에서였습니다. 교육의 목표는 왕조의 관료를 선발하는 데서 근대국가의 구성원을 기르는 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자주적인 국민교육이 뿌리내리기 전에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일제는 강제병합 이후 제1차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 1911)을 제정해 식민지 교육체제를 법제화하고, 조선인을 제국의 지배에 순응하는 신민으로 길러내려 했습니다. 1930년대 후반 전쟁이 확대되자 복종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조선인은 천황과 일본제국을 위해 싸우고 죽을 수 있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이 돼야 했습니다. 왕조시대의 교육은 주로 국가를 운영할 소수의 관료를 선발했습니다. 근대국가는 학교를 통해 국민 전체에게 공통의 언어와 역사, 규율과 국가의식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제국은 그 힘을 식민지배에 이용했습니다. 과거제가 권력에 들어갈 사람을 선발했다면, 식민지 학교는 권력에 복종할 인간을 집단적으로 만들어내려 했습니다. ■ 일본제국주의는 어떤 인간을 원했는가 제국주의 국가는 식민지를 지배하고 그곳의 자원과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철도와 항만, 공장과 행정시설을 건설했습니다. 자원을 실어 나를 교통망과 상품을 생산할 공장, 제국의 명령을 이해하고 수행할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식민지에서 이루어진 개발은 주민의 자유와 복지를 우선한 것이 아니라 제국의 지배와 수탈을 효율화하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생의 황국신민서사 연습 공책 ⓒ 인천관동갤러리 역사학자 박태균(朴泰均, 1966∼) 교수는 ‘익스플로이테이션(exploitation)’이라는 말에 개발과 수탈의 뜻이 함께 담겨 있다는 점을 들어 식민지 개발의 성격을 설명합니다. 식민지는 개발됐기 때문에 수탈된 것이 아니라, 더 효율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개발됐습니다(박태균, 『박태균의 이슈 한국사』, 창비, 2015, 104쪽). 조선은 일본과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둔 인접 지역이었습니다. 철도와 항만을 이용하면 조선의 쌀과 광물, 노동력을 일본으로 신속하게 옮길 수 있었습니다. 만주와 중국 대륙으로 진출할 군대와 물자도 조선을 거쳐 갔습니다. 조선에 건설된 철도와 항만, 공장은 식민지 수탈과 대륙 침략을 효율화하는 제국의 기반시설이었습니다. 한국의 극우세력인 뉴라이트는 식민지근대화론을 내세워 일제 식민통치가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주장합니다. 조선총독부가 남긴 철도와 공장, 학교와 학생 수의 증가를 중요한 근거로 제시합니다. 그 숫자가 모두 틀린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것은 숫자에 붙인 해석입니다. 철도와 공장, 학교는 늘었습니다. 그러나 그 개발의 목적과 성과가 누구에게 돌아갔는지를 함께 살펴봐야 합니다. 철도가 놓였다는 사실만으로 그 철도가 누구의 자원과 병력을 어디로 운반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공장이 늘었다는 숫자만으로 그 공장의 소유자가 누구였고, 생산된 이익이 어디로 흘러갔는지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학교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일제가 학교를 늘리고 학생 수를 확대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학교 수의 증가가 곧 조선인의 보편적 교육권과 동등한 교육 기회를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입학의 문턱과 교육 여건, 상급학교 진학 기회와 교육 내용까지 함께 봐야 합니다.   ※ 학교·학생 수: 김태완, 교육 시설과 학생 수 , 국사편찬위원회 편,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2005. 조선인·일본인 취학률: 국사편찬위원회, 일제식민통치와 교육의 근대화 문제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 제5권, 1988. 문맹률: 노영택, 일제시기의 문맹률 추이 , 국사관논총 제51집, 1994.※ 1941년 이후 보통학교는 국민학교로 명칭과 학제가 바뀌었으므로, 1912년과 1943년의 학교 수는 동일한 명칭의 학교를 단순 비교한 것이 아니라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초등교육기관의 변화를 비교한 것입니다. 1930년 문맹률은 조선국세조사에 따른 수치입니다. ‘문맹’은 조선어와 일본어 어느 쪽도 읽고 쓰지 못한다고 분류된 경우를 뜻하며, 아직 취학연령에 이르지 않은 아동도 전체 인구에 포함돼 있습니다. 1919년 조선인 보통학교 취학률 3.7%와 조선 거주 일본인 소학교 취학률 91.5%의 격차는 식민지 학교가 누구에게 더 넓게 열려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1936년에도 조선인 학령아동 가운데 학교에 다니는 비율은 약 25%에 불과했습니다. 1930년 조선국세조사에서는 아직 취학연령에 이르지 않은 아동을 포함한 조선인 전체 인구 가운데 77.73%가 조선어와 일본어 어느 쪽도 읽고 쓰지 못하는 문맹으로 분류됐습니다. 여성의 문맹률은 92.04%에 이르렀습니다. 전체 인구를 대상으로 한 통계이므로 이를 성인 문맹률과 동일하게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학교의 양적 증가만으로 식민지 교육이 조선인에게 보편적인 교육 기회를 제공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차별은 교육 단계가 높아질수록 더욱 커졌습니다. 1942년 인구 1만 명당 재학생 수를 비교하면 초등교육에서는 조선인 697명, 일본인 1,379명으로 약 두 배의 격차가 났습니다. 중등교육에서는 조선인 33.7명, 일본인 520명으로 약 15배, 고등교육에서는 조선인 1.8명, 일본인 46명으로 약 26배의 격차가 벌어졌습니다(김태완, 「식민지 교육의 민족 차별」, 국사편찬위원회 편,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2005). 교육의 질과 조건도 달랐습니다. 1941년 공립 초등학교의 교사 1인당 학생 수는 조선인 학교가 73.1명, 일본인 학교가 34.9명이었습니다. 학생 1인당 학교 경비는 조선인 학교가 30.8원, 일본인 학교가 82.1원이었습니다. 같은 식민지 안에서도 누구를 교육하느냐에 따라 교사와 시설, 예산이 다르게 배분됐습니다(국사편찬위원회, 「식민지 교육의 민족 차별」, 『우리역사넷』). 총독부가 조선인에게 주로 허용한 것은 제한된 보통교육과 말단 기능교육이었습니다.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국가를 운영할 지도자, 고급 지식인과 기술자를 기르는 교육은 좁게 통제했습니다. 일제가 필요로 한 것은 일본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 국민이 아니라 일본어로 명령을 알아듣고 정해진 일을 수행할 식민지 인력이었습니다. 일제가 무(無)에서 학교를 세운 것도 아닙니다. 국권을 빼앗기기 직전인 1910년 5월 조선에는 민간이 설립한 사립 초·중등학교가 이미 2,250개 이상 존재했습니다. 학교의 범위와 집계 기준이 달라 이 수치를 총독부 학교 통계와 단순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총독부 자료에서도 사립학교는 1912년 1,317개에서 1919년 690개로 줄었습니다. 총독부는 사립학교규칙(私立學校規則, 1911)과 서당규칙(書堂規則, 1918)을 통해 조선인이 세운 학교와 전통적인 학습공간을 통제했습니다. 교육 내용과 교원의 자격, 학교 설립과 운영을 총독부의 허가 아래 두었습니다. 총독부가 늘린 학교만 계산하고 통제하거나 문을 닫게 한 조선인의 학교를 지운다면, 교육 탄압은 근대화로 둔갑하게 됩니다(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 제5권, 1988). 민족차별은 교육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식민지 조선에는 일본 본국과 구분된 화폐와 법이 적용됐습니다. 일본 자본의 조선 진출은 쉽게 만들면서 조선은행권의 일본 본토 유입은 통제했고, 일본에는 없는 조선태형령(朝鮮笞刑令, 1912)을 만들어 조선인에게만 태형을 가했습니다. 화폐와 법, 교육과 참정권 어디에서도 조선인은 일본인과 동등한 국민이 아니었습니다. ‘내선일체’는 권리 없는 복종을 요구하기 위한 구호였습니다(국사편찬위원회, 「조선은행」·「일제의 무단통치」, 『우리역사넷』; 차현진, 「식민지 조선의 통화제도」, 한국은행, 2015). 중일전쟁(中日戰爭, 1937)이 시작되자 식민지 교육은 전쟁에 복무하는 황국신민 교육으로 급격히 재편됐습니다. 총독부는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1937)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외우게 했습니다. 제3차 조선교육령(第三次朝鮮敎育令, 1938)은 조선어를 필수과목에서 선택과목으로 밀어냈고, 국민학교규정(國民學校規程, 1941)은 초등학교 교육과정에서 조선어를 폐지했습니다. 제4차 조선교육령(第四次朝鮮敎育令, 1943)은 중등학교와 사범학교에서도 조선어를 없앴습니다(김태완 외,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2005). 창씨개명(創氏改名, 1939∼1940), 신사참배(神社參拜), 궁성요배(宮城遙拜), 기미가요 제창과 일본어 상용도 학교와 일상에 강요됐습니다. 언어를 빼앗고 역사를 지우며 이름을 바꾸고 천황에게 절하게 한 것은 서로 떨어진 정책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인의 기억과 판단 기준을 일본제국에 맞추는 하나의 교육과정이었습니다. 총독부가 원한 인간은 자유로운 근대 시민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역사에 뿌리를 두고 스스로 판단하는 사람보다 일본어로 명령을 알아듣고 천황에게 복종하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충량한 황국신민’은 그 인간형의 공식 명칭이었습니다. 황국신민 교육의 종착지는 전쟁 동원이었습니다. 일본은 국가총동원법(國家總動員法, 1938)을 조선에 적용하고 모집·관 알선·징용을 통해 조선인의 노동력과 생명을 전쟁에 투입했습니다. 학교에서 매일 외운 충성의 맹세는 곧 탄광과 군수공장, 군부대와 전쟁터에서 따라야 할 명령으로 바뀌었습니다.   ※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위원회 활동 결과보고서 , 2016, 135쪽. 전체 동원 규모에는 군인·군무원·노무자가 포함되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노무자와 전체 동원 수치는 한반도 안팎의 동원과 한 사람이 여러 차례 동원된 사례가 포함된 연인원입니다. 따라서 이를 실제 동원된 개인의 수나 당시 조선 인구의 일정 비율로 환산해서는 안 됩니다. 일본군에 동원된 조선인은 일본 후생성 자료에 근거한 집계로 20만 9,279명입니다. 군무원 6만 668명을 합하면 군인과 군무원으로 동원된 조선인은 26만 9,947명에 이릅니다. 그러나 패전 직후 일본군이 관련 자료를 폐기했고 병적 관리도 부실했기 때문에, 남아 있는 명부만으로 전체 규모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노무동원은 집계 방법이 더 복잡합니다. 한국 정부 위원회가 집계한 노무동원 규모는 연인원 753만 4,429명입니다. 이 가운데 국외 노무동원 추산치는 104만 5,962명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한반도 안에서 이루어진 동원입니다. 국내 동원에는 한 사람이 풀려났다가 다시 동원되거나 여러 현장에 반복해서 배치된 사례가 다수 포함돼 있습니다. 따라서 연인원 753만 명을 실제 피해자 753만 명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국사편찬위원회, 「강제징용」·「전시체제기 조선인의 노무동원 규모」, 『우리역사넷』; 국가기록원, 「재일동포 기록물 검색가이드」). 통계가 서로 다른 것은 단순한 계산 착오 때문이 아닙니다. 패전 직후 이루어진 자료 폐기, 불완전한 명부, 모집·관 알선·징용 사이의 전환배치, 서로 다른 동원 지역과 집계 기간이 겹친 결과입니다. 현재 기록으로 확인되는 인원과 누락 가능성을 반영한 추정치 사이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기록의 불완전성이 강제동원 자체를 부정할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피해의 전체 규모를 밝히기 어렵게 만든 식민지 지배와 전쟁 수행의 책임을 보여줍니다. 일본 본토 주민도 군국주의 체제 아래 군인과 노동자로 대규모 동원됐습니다. 그러나 조선인은 일본인과 동등한 교육권·참정권·승진 기회를 보장받지 못한 식민지 주민이면서 제국의 전쟁 의무까지 떠맡았습니다. 식민지 동원의 본질은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더 많이 끌려갔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민족차별 위에 권리 없는 복종과 희생까지 강요했다는 데 있습니다. 학교에서 외운 충성의 맹세는 탄광과 군수공장, 군부대와 전쟁터의 명령으로 이어졌습니다. 일본어로 명령을 알아듣고 공장과 군대의 규율에 복종하도록 만든 식민지 교육은 바로 이 순간을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 참석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중국 총통 장제스,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 세 정상은 회담 뒤 발표한 카이로선언에서 한국인의 처지를 ‘노예 상태’로 규정하고, 한국이 적절한 시기에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적절한 시기에’라는 표현에는 즉각적인 독립을 유보한 강대국의 시선이 담겨 있었지만,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약속한 최초의 공동선언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항일투쟁과 외교활동도 한국 독립조항이 포함되는 중요한 역사적 기반이 됐다. 일제 식민통치의 실체는 카이로선언(Cairo Declaration, 1943)의 한 문장에 담겨 있습니다. 미국·영국·중국의 정상들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습니다. 세 주요 연합국은 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념하며, 한국이 적절한 시기에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로 되어야 함을 결의한다.” (미국·영국·중국, 「카이로선언」, 1943.12.1.) 당시 아시아에는 인도와 인도차이나,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수많은 식민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카이로선언이 이름을 들어 전후 독립을 약속한 아시아의 피식민 국가는 한국뿐이었습니다. 만주와 타이완은 중국에 반환할 영토로 규정됐지만, 한국은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가 되어야 할 정치적 주체로 명시됐습니다. 물론 선언의 ‘적절한 시기에(in due course)’라는 표현은 즉각적인 독립을 뜻하지 않았습니다. 이 문구에는 한국인의 자치 능력을 의심하고 일정 기간 국제적 관리나 신탁통치를 거치게 하려는 강대국의 시선도 담겨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연합국이 전후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약속했다는 사실은 분명했습니다. 이것을 연합국이 일방적으로 베푼 시혜로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3·1민족혁명(三一民族革命, 1919) 이후 이어진 항일투쟁과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외교활동,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의 대일항전은 한국 독립을 연합국의 전후 원칙에 포함시키는 데 중요한 역사적·외교적 기반이 됐습니다. 1943년 7월 26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金九, 1876∼1949)와 외무부장 조소앙(趙素昻, 1887∼1958), 선전부장 김규식(金奎植, 1881∼1950), 한국광복군 총사령 이청천(李靑天, 1888∼1957), 부사령 김원봉(金元鳳, 1898∼1958)은 장제스(蔣介石, 1887∼1975)를 만나 한국 독립을 연합국의 전후 원칙에 포함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장제스는 그해 11월 카이로회담에서 한국 독립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했습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은 식민지 독립의 선례가 될 것을 경계하며 한국의 즉각적인 독립에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미국 역시 전후 한반도에 일정 기간 국제적 관리가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여러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했지만, 한국을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로 만든다는 조항은 최종 선언문에 포함됐습니다(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제16권, 2011; 정병준, 「카이로회담의 한국 문제 논의와 카이로선언 한국조항의 작성 과정」, 『역사비평』 제107호, 2014). 카이로선언이 한국인의 처지를 ‘노예 상태’로 규정한 것은 일제 식민통치의 실체에 대한 국제사회의 판단이었습니다. 한국의 독립을 명시한 조항에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전후 구상뿐 아니라 식민지배에 굴복하지 않고 싸운 한국인들의 항일투쟁과 외교적 노력도 반영돼 있었습니다. 뉴라이트는 총독부가 남긴 개발의 숫자를 근대화의 증거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철도와 공장, 학교가 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근대화의 주인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일제가 만든 것은 조선인이 주인이 되는 근대국가가 아니었습니다. 조선인을 일본제국의 수탈과 전쟁에 복종시키는 식민지 체제였습니다. 그 체제가 길러내려 한 인간의 이름이 황국신민이었습니다. 해방은 이 인간형을 청산하는 데서 시작해야 했습니다. 천황에게 복종하던 황국신민을 민주공화국의 주권자로 바꾸는 일, 그것이 해방 이후 세워질 국가와 교육이 감당해야 할 첫 번째 과제였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의 국가는 과연 그 과제를 완수했을까요. 다음 글에서는 해방 이후 국가건설과 분단, 반공독재와 산업화 속에서 국가와 교육이 어떤 인간을 원했으며, 그 선택이 오늘의 청소년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병권 인문연구가 lbkwon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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