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적 다수를 위한 대통령의 ‘술빚기’ 용인술 [사회혁신]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용인술의 달인이었다. 동지라고 아무에게나 요직을 내주지 않았다. 대신 능력 있는 전문가를 대거 발탁했다. 이념과 진영도 가리지 않았다. 그래서 예술의 정치를 한다는 평가까지 받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다. 비서실장의 권한은 막강하다. 청와대 참모진은 물론 정부와 공공기관 요직을 추천하는 인사위원장이다. DJ는 이 막중한 자리에 노태우 정부 정무수석 출신인 김중권을 임명했다. 통합의 메시지였다. 가신그룹의 인사 청탁도 통할 리 없었다. 비주류였으니 대권을 꿈꾸지도 않았다. 곳곳에 자기 가까운 이들을 챙기며 조직을 장악할 가능성이 사라졌다. 그러니 개혁적 역량을 가진 전문가들이 정부 곳곳에 배치됐다.
김대중 대통령이 장·차관급과 시·도지사를 부부동반으로 청와대에 불러 송년만찬을 함께 하기에 앞서 김중권 비서실장과 악수하고 있다. 1998.12.30. 연합뉴스 자료사진
유능한 인물이라면 진영 가리지 않고 발탁했던 DJ
무엇보다 빛을 발휘한 인선은 이종찬과 이헌재였다. 두 사람은 공통점이 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사리사욕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우선시했다. DJ는 이종찬을 초대 안기부장으로 중용했다. 육사 출신으로 중앙정보부 기획조정실장을 역임한 이종찬은 민정당의 유력 대권후보이기도 했다. 그는 안기부 내부의 반발을 제압하고 조직을 장악했다. 그리고 정치공작과 인권침해로 악명을 떨쳤던 안기부를 국가정보원으로 개혁하는 대대적인 수술을 단행했다. 경제부총리로 발탁한 이헌재 역시 보수 성향의 정통 관료였다. 그는 대한민국 경제와 금융 체질을 뿌리부터 뜯어고쳤다. `저승사자`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였다. DJ가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것은 이러한 용인술 덕분이었다.
DJ식 용인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막걸리 발효식 인사’다. 맛있는 술을 빚으려면 곰팡이의 역할과 기여가 필수적이다. 공기 속에는 좋은 곰팡이와 나쁜 곰팡이가 동거한다. 마치 인간 세상에 좋은 놈과 나쁜 놈이 어울려 살아가는 것과 같다. 유익균이 10%라면 악질균이 10% 정도. 나머지 대다수 80%는 해바라기균이다. 맛있는 술을 빚기 위해서는 유익균이 발효를 주도하도록 해야 한다. 악질균이 많아지면 술이 썩기 때문이다. 그래서 술 빚는 장인들은 유익균이 힘을 쓸 수 있도록 온도와 습도를 조절한다. DJ는 진영을 가리지 않고 유익균을 발탁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믿고 일을 맡겼다. 권한을 줬다. 나라를 개혁하는 주도 세력이 되도록 했다. 해바라기균들이 유익균에 들러붙어 유익균으로 변신했다. 술독 안에는 유익균이 구조적 다수가 됐다. 악질균 10%는 힘을 잃고 시체놀이를 했다. 자기들 세상이 올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해바라기균이 절대 다수가 된 비결-위장과 변절
DJ는 해바라기들의 속성을 간파했던 것이다. 해바라기균은 본질적으로 발효를 주도할 수 없다. 그냥 눈치만 본다. 끊임없이 변절하며 꽃길만을 걷고자 한다. 유익균이 번성하면 유익균으로 위장하고 악질균이 주도권을 잡으면 악질균 편을 든다. 해바라기균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게 된 비법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친일파, 미군정 치하에선 친미파, 군부독재 치하에선 독재 부역세력으로 변했다. 해바라기들을 일일이 포섭할 필요가 없었다. DJ는 악질균을 잡겠다고 술독 안에 소독약을 뿌리지도 않았다. 유익균까지 균이란 균은 다 죽고 발효를 망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적 보복을 하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지도자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 양질균이 주도세력이 될 수 있도록 온도를 조절하며 조건을 조성하는 일이다. 그게 바로 인사다. 인사가 만사가 되기도 하고 망사가 되기도 하는 이유다.
이재명 대통령도 DJ와 목표가 같을 것이다. 구조적 다수를 만들어 이를 동력으로 개혁을 추진하자는 것 아닌가. 그러나 방식은 다른 것 같다. DJ는 우리 공동체에서 10% 정도인 유익균만 골라 발탁했다. 유익균 영입을 위해 삼고초려까지 했다. 반면 이재명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은 좀 다른 듯하다. 해바라기균들에게 직접 손을 내밀었다. 통합과 실용이라는 메시지를 담았지만 시민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양질균 친화형 해바라기균을 발탁할 때까지만 해도 뭔가 계산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내란세력에 동조한 악질균 친화형 해바라기균까지 포섭하자 고개를 저었다. 민주시민들의 집단지성은 곰팡이들의 과거 행적과 속성을 이미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 허덕이는 것은 해바라기균부터 발탁한 탓
인사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통합과 실용의 실체를 가장 먼저 간파한 것은 해바라기들이었다. 여기저기서 해바라기들이 요직에 등용되고 있었다. 해바라기들은 자기들의 세상이 열린 것으로 받아들였다. 바닥에 엎드려 눈치만 보던 해바라기균들이 들러붙을 것을 찾아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심지어 악질균들까지 준동하기 시작했다. 해바라기들은 자기 출세에만 관심이 있다. 공동체를 위한 발효에는 몸을 던지지 않는다. 항아리 안에 막걸리 썩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이재명 정부 장관 후보자가 벌써 5명이나 낙마했다고 난리다. 청와대 인사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 문제는 시스템이 아니라 시스템을 운영하는 인사 라인 책임자들이라고 본다. 이들이 성급하게 해바라기균들을 먼저 발탁한 탓 아닌가. 해바라기균들을 발탁한 결과는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졌다. 해바라기균들은 양질균과는 달리 스스로 발효할 능력도 열정도 없다. 대통령이 아무리 힘을 실어줘도 잘 익은 막걸리가 나올 리 없다. 유익균이 주류가 되지 못하고 힘을 쓰지 못하기 때문에 해바라기균이 들러붙지 않는 것이다.
내란 직후 여의도광장과 광화문을 메웠던 시민들의 요구는 단순했다. 내란을 청산하고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을 하라는 것이다. 내란 발발 2년을 앞두고 묻고 싶다. 과연 내란은 제대로 청산되고 있는가? 해바라기 논란이 뜨거운 후보가 초대 중수청장 적임자인가? 왜 KBS와 연합뉴스 같은 공영언론을 아직도 내란 간여 의혹이 있는 인물들이 이끌고 있나? 왜 우리는 계엄을 옹호했던 패널들이 여전히 텔레비전에 나와 떠들어대는 역겨운 장면을 매일 봐야 하나?
악질균은 물론 해바라기균도 발탁해서는 인된다
21일 유엔총회 참석 차 출국하는 이재명 대통령을 배웅하는 강훈식 비서실장과 홍익표 정무수석. 2026.9.21. 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의 유엔총회 참석차 출국을 앞두고 강훈식 청와대 비서실장이 사의를 표명했다. 나쁘지 않다고 본다. 사의를 표명하게 된 배경을 따지기 전에 전화위복의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비서실장이란 자리는 대통령의 의중을 반영해 국정을 이끌고 조율하는 콘트롤 타워의 역할을 한다. 정무 인사 홍보 총무 공직기강 등 비서실 전반 및 정무 업무를 총괄하고 고위직 인사를 추천하고 검증하는 인사위원장이기도 하다. 대통령의 그림자라고도 하지 않는가.
권영석 전 연합뉴스 통일언론연구소장
이재명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인사는 하면 할수록 어렵다”고 털어놓았다. 그 많은 해바라기균 가운데 옥석을 가려내자니 어려울 수밖에 없다. 양질균은 그렇게 많지 않다.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런 인물을 찾아서 삼고초려를 해서라도 영입해야 한다. 보수진영에도 비서실장감으로 적합한 양질균이 있을 수 있다. 양질균이라면 이념도 진영도 상관없다. 하지만 왕을 꿈꾸는 왕자는 바람직하지 않다. 자기 사람 심기에 바쁠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해바라기균을 발탁하는 인사가 최악이다.
권영석 전 연합뉴스 통일언론연구소장 nomadismkwon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