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하층민의 빈곤과 허망한 재기의 꿈 [사람들] 오래전 한 편의 영화를 보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제목은 잊었지만 장면들은 기억에서 쉬 사라지지 않았다. 정유공장 아래 가난한 동네, 무표정한 노동자들, 알몸으로 거리를 달리던 한 남자. 돌이켜볼수록 미국의 빈곤을 이만큼 정직하게 그려 낸 작품도 드물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보고 싶었지만 제목이 떠오르지 않아 한참을 헤맸다. 결국 인공지능(AI)의 도움을 받아서야 제목을 알아냈고, 이번에 다시 보았다.
션 베이커 감독의 《레드 로켓》(2021)이다. 202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소개된 작품이다. 한때 포르노 배우로 이름을 날렸다는 마이키가 빈털터리가 되어 고향 텍사스시티로 돌아온다. 별거 중인 아내 렉시와 장모 릴의 집에 억지로 몸을 들인 그는 도넛 가게에서 일하는 십 대 소녀 스트로베리를 만나고, 그녀를 데리고 LA로 가 업계에 복귀하겠다는 꿈을 꾼다. 밑바닥 인생의 재기담처럼 보이는 이 이야기는, 그 재기가 누구의 희생 위에서 가능한지를 끝내 묻는다.
정유공장 그늘 아래의 한 끼
거대한 정유공장이 하늘을 가로막고, 그 아래로 낡은 집들이 늘어서 있다. 공장은 멀쩡히 돌아가며 막대한 부를 쏟아 내지만, 그 부는 공장 담장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는다.
정유공장이 바라보이는 나무그늘 아래 낡은 자전거를 세워두고 잠시 눈을 붙인 마이키
그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스트로베리가 아르바이트하는 도넛 가게다. 교대를 마친 노동자들이 밀려들어 설탕 범벅의 도넛과 커피 한 잔으로 끼니를 때운다. 안전모를 쓴 채 줄을 선 얼굴들에는 웃음기가 없다. 스트로베리는 마이키에게 저 사람들한테 마리화나를 팔아 보라고 권한다. 교대가 끝날 때 보면 다들 죽을 상”이라는 것이다. 지친 노동자들을 고객으로 지목한 것이 다름 아닌 열일곱 살 소녀다.
마이키가 스트로베리를 처음 본 것도 이 가게다. 집세를 한 번에 내겠다고 큰소리친 그는 렉시와 릴을 데리고 도넛은 내가 쏜다”며 가게로 향한다. 오늘은 원하는 걸 다 가질 수 있는 날이라고, 돈이란 이럴 때 쓰는 것이라고 떠벌린다. 도넛과 커피를 가득 받아 든 값은 6달러 32센트. 큰돈을 쓴다는 과시가 고작 그 정도였다. 그리고 고개를 든 순간, 그는 카운터의 빨간 머리 소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마리화나와 몸으로 버티는 삶
마이키의 첫 계획은 취직이었다. 그러나 면접에서 돌아오는 말은 매번 같다. 지원서에 적힌 마지막 정규직이 17년 전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무슨 일을 했느냐는 물음에 그는 ’엔터테인먼트’라고 둘러대지만, 패스트푸드점도 할인 잡화점도 그를 부르지 않는다. 포르노 배우로 알려진 이름은 그에게 이력의 흠일 뿐이다.
이 영화를 한물간 포르노 배우의 개인사로만 읽으면 절반을 놓친다. 화면이 잡고 있는 것은 한 남자의 몰락이 아니라 그가 속한 계급의 조건이다. 이 마을에서 노동으로 먹고사는 길은 좁고, 남은 것은 몸을 담보로 하루를 사는 일이다. 렉시는 몸을 팔아 생계를 잇고, 이웃의 레온드리아는 마리화나를 팔아 집안을 꾸린다. 마이키 역시 그녀에게서 마리화나를 받아 노동자들에게 되팔며 버틴다. 합법적인 일자리가 들어설 자리를 비공식 경제가 채우고 있다.
장모 릴의 셈은 더 노골적이다. 마이키가 집세를 대기 시작하자 릴은 고맙다고 말한다. 이제 렉시가 그 ’채팅 앱’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딸이 몸을 파는 대신 사위가 집세를 내는 것, 그것이 이 집에서 ’나아진 형편’의 전부다.
그래도 이 사람들은 가난 속에서 서로 기대어 산다. 렉시와 릴은 마이키를 내치지 못하고, 이웃들은 그를 받아 준다. 마이키는 그 도움으로 먹고 자면서도 오직 제 성공만을 셈한다. 그는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이면서, 동시에 자기보다 약한 이를 이용하는 사람이다.
헛된 탈출의 꿈
이 동네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로 벗어나기를 꿈꾼다. 마이키의 꿈은 스트로베리다. 그녀를 꼬드겨 LA에서 포르노 배우로 데뷔시키고, 그 곁에서 자신도 재기하겠다는 것이다. 허풍은 끝이 없고 거짓말은 뻔뻔한데, 궁지에 몰릴 때마다 말 한마디로 빠져나가는 솜씨에 관객은 웃음을 참기 어렵다. 주연 사이먼 렉스는 그 능청을 더할 나위 없이 살려 낸다. 그러나 그 말솜씨가 결국 어린 소녀를 유인하는 데 쓰인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관객은 방금 자신이 누구를 응원하고 있었는지 되묻게 된다.
그렇다고 스트로베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아니다. 마이키가 나타나기 전에 그녀는 이미 자기 몸에 값을 매겨 본 적이 있다. 장난삼아 온라인에 올린 사진을 보고 낯선 남자가 누드 사진을 사겠다고 했고, 그녀는 60달러를 받고 팔았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타락’이라는 말은 어긋난다. 착취는 분명하지만, 그 앞에 이미 거래가 있었다.
그녀는 마이키에게 날카로운 질문도 던진다. 그가 받았다는 ‘최우수 오럴상’ 영상을 찾아본 그녀는, 몸을 쓴 것은 여자 배우인데 왜 상은 아저씨가 받느냐고 묻는다. 그는 같이 받는 상이라고 답한다. 몸을 쓴 사람과 그 몸을 ’이끌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같은 상을 나눠 갖는 것, 이 산업의 배분이 그 한마디에 드러난다.
스트로베리는 이 도시를 떠나고 싶다. 부둣가를 걸으며 그녀는 말한다. 고등학생으로서 마지막 1년이 참 어정쩡할 것 같아요. 앞으로의 인생까지 어정쩡하게 살진 않을래요.” 이 말은 거절이 아니라 조건이다. 그가 포르노 배우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그녀의 반응은 냉소에 가까웠다. 내가 그런 걸 신경 썼다면 여기 왔겠어요? 아저씨가 재미있어요”라고 했다. 돈도 연줄도 없는 그녀에게 마이키는 이 도시를 벗어날 값싼 티켓이었다. 문제는 업계를 아는 중년 남자와 이제 막 세상을 배우는 소녀 사이의 격차가 엄연하다는 것이고, 그 계산이 틀렸을 때 가장 큰 값을 치를 사람은 그녀라는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를 각별하게 만드는 장면이 있다. 스트로베리는 방의 값싼 전자 피아노 앞에 앉아 NSYNC의 「Bye Bye Bye」를 느리게 부른다. 2000년의 댄스 팝을 발라드처럼 낮춰 부르는 이별의 노래다. 자신을 이 도시 밖으로 데려갈 남자 앞에서 소녀가 고른 노래가 작별의 노래라는 것, 그 어긋남은 관객만 알아챈다.
마이키가 스트로베리를 꼬득이는 장면
쫓겨나는 자, 레드 로켓
마이키가 떠나겠다고 하자 렉시와 릴은 레온드리아에게 알린다. 한밤중에 레온드리아의 자녀들이 들이닥쳐 그가 마리화나를 팔아 모은 3천 달러를 빼앗는다. 알몸이 된 마이키는 창문으로 도망쳐 성기를 드러낸 채 동네를 가로질러 레온드리아의 집까지 달린다. 우스꽝스럽고도 처참한 이 장면이 바로 ’레드 로켓’이다. 제목은 개의 발기한 성기를 가리키는 영어 속어로, 욕망과 과시밖에 남지 않은 마이키의 맨몸을 그대로 가리킨다. 레온드리아는 애원하는 그에게 200달러를 쥐여 준다. 더 달라고 매달리자 딸에게 100달러를 더 받아 얹는다. 모두 300달러, 주 경계선 너머로 갈 버스 표 값이다. 그리고 텍사스 어디에서도 그에게 마리화나를 대 줄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정오까지 떠나라고 못 박는다. 동네에 기대어 살던 사람이 동네를 버리려 하자, 동네가 먼저 그를 버린 것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스트로베리의 집이다. 밤새 걸어 아침에야 닿은 그는, 문이 열리며 빨간 수영복 차림의 그녀가 몸을 흔드는 모습을 본다. 그 순간 그녀가 들려주었던 노래가 거꾸로 흐른다. 나는 그것을 마이키가 끝내 놓지 못하는 구원의 환상으로 읽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한 사람의 삶이 아니라 그녀를 통해 얻을 자신의 재기를 바라본다. 그녀는 이미 피아노 앞에서 안녕을 예고하고 있었는데도.
트럼프와 힐러리, 그리고 마이키
영화의 시간은 2016년 대선 무렵이다. 텔레비전에서는 트럼프의 연설이 흘러나오고, 힐러리 클린턴의 이름도 오르내린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진지하게 화제로 삼지 않는다. 정치는 삶을 에워싸고 있으면서도 배경음처럼 흘러갈 뿐이다. 방향을 잡지 못한 채 표류하던 당시 미국 정치의 혼란이다.
그 배경음 가운데 마이키의 삶과 맞물리는 것은 트럼프의 목소리다. 과거의 성공을 부풀리고, 불리한 사실은 감추고, 앞날을 장담하는 화법이 닮았다. 마이키는 잃어버린 전성기를,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외친다. 둘 다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는 묻지 않은 채 지나간 영광의 복원만을 약속한다. 마이키는 트럼프를 본떠 만든 인물이 아니고 정치에도 관심이 없지만, 감독 역시 관객이 그에게서 트럼프를 보는 것은 타당하다고 했다. 정유공장 노동자들의 지친 얼굴과 알몸으로 쫓겨나는 마이키가 나란히 놓일 때, 트럼프식 미국 재건이라는 약속은 더욱 허망하게 읽힌다.
값은 누가 치르는가
그래서 이 영화가 남기는 질문은 개인의 도덕에 그치지 않는다. 마이키에게는 일자리가 없고, 렉시에게는 회복할 몸이 없고, 릴에게는 팔 것이 남아 있지 않다. 공장은 멀쩡히 돌아가는데 그 부는 담장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고, 사회보장의 그물은 이 마을에 닿지 않는다. 스스로 일어서라는 미국식 개인주의 앞에서 이들에게 남는 것은 무기력과 체념뿐이다. 마이키는 그 무기력을 견디지 못해 허풍으로 자신을 부풀리고, 렉시와 릴은 체념한 채 그 허풍에 집세를 얹는다. 개인이 알아서 일어나라는 사회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서로의 몸과 돈을 조금씩 떼어 쓰는 것뿐이다.
영화는 마이키를 불쌍한 패배자로 감싸지도, 스트로베리를 순수한 희생자로 정리하지도 않는다. 허풍뿐인 남자와 자기 몫을 셈하는 소녀, 그리고 마이키가 떠난 자리에 남겨진 가족. 영화는 이들을 심판하지도 위로하지도 않고, 다만 끝까지 바라본다. 그 시선은 위안이 아니라 오래 가시지 않는 씁쓸함으로 남는다. 누구의 잘못인지 물을 수 없다면, 물어야 할 것은 사회의 구조다. 다시 성공하고 다시 위대해지겠다는 약속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그 대가는 누가 치르는가.정광민 시민기자 vietho@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