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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명성황후 시해에 보복 치하포 사건 사망자 정체는

명성황후 시해에 보복 치하포 사건 사망자 정체는
[뉴스]
1938년 5월 중국 호남성 장사의 조선혁명당 본부인 남목청에서 발생한 김구 암살 미수 및 독립운동가 피격 사건에서 살아난 김구(오른쪽).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3당 통합 논의 중 반대파의 사주를 받은 이운한이 권총을 난사하여 현익철이 사망하고 김구, 유동열, 지청천이 중경상을 입었다. 김구는 심장에 총을 맞았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이 사건은 일제와 밀정이 연루된 조직적인 암살 공작이었음이 최근 밝혀졌다. 백범 김구의 일생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주제는 치하포 사건과 문화강국론이 담긴 글 「나의 소원」을 누가 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1896년 3월 9일의 치하포사건은 백범이 21세 때 감행한 일이고, 1947년 12월 15일 발표된 「나의 소원」은 백범이 서거하기 1년 반 전에 발표돼 지금까지도 계속 언급되는 화제의 글입니다. 이 두 가지 사안에는 약 50년이 넘는 긴 세월이 들어있고, 과격한 돌발성과 문화의 유연함이라는 거리만큼 별개의 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두 사안에는 독립운동가로서 백범의 시작과 끝을 알려주는 초지일관의 신념이 들어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두 사안이 백범의 일생을 통하여 체계적으로 발전한 이슈라는 점에서 연관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두 이슈는 백범 비판자들이 가장 많이 공략하는 소재라는 점에서도 기이한 관련성이 있습니다. 비판자들은 치하포 사건에서 숨진 일본인 쓰치다가 민간인이라고 주장하며 김구를 ‘살인강도’ 혹은 ‘오인살해범’이라고 비판합니다. 비판자들은 또 『백범일지』의 뒤에 실린 유명한 글 「나의 소원」의 필자가 백범이 아니라 이광수일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은 국사학자 3명, 국문학자 3명, 타계한 3선 국회의원 출신 1명, 뉴라이트 계열 필자 4명 등 11명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먼저 치하포 사건을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1895년 4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독점하려 하자 러시아가 이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을 압박합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친러파 내각을 수립합니다. 조선에서의 영향력 상실을 우려한 일본은 그해 10월 8일 극단적인 음모를 꾸며 명성황후를 시해합니다. 미우라 고로 일본 공사 주도하에 일본 낭인과 군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조선의 국모인 왕비를 잔인하게 시해한 것입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직후 일본은 고종을 협박하여 김홍집 중심의 친일 내각을 다시 구성하고, 단발령 등을 강제하는 을미개혁을 추진합니다. 일본에 의해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극심한 불안감에 시달리던 고종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모의하여 1896년 2월 11일 새벽에 궁녀의 가마를 타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처소를 옮기는 아관망명을 단행합니다. 당시 평안도 안주의 한 게시판에서 일제의 단발령에 반대하는 고종의 ‘두발편의령’ 반포문을 읽은 21세 청년 김구는 서울의 정치혁명 소식을 전해 듣게 됩니다. 그리고 26일 뒤인 1896년 3월 9일 항해도 나루터 마을 치하포의 여각(여관)에서 조선옷으로 변복하고 서울 말씨를 쓰며 장연(長淵)사람 행세를 하는 일본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 일본인은 조선 두루마기 속에 일본도를 차고 있었으며, 조선 젊은이가 시중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는 진남포로 간다고 했습니다. 김구는 그의 행색을 살피며 생각했습니다. ‘이곳은 하루에도 수명의 왜인들이 본거지로 삼은 진남포로 통행하는 곳이다. 경성분란으로 한창 시끄러운 지금 진남포로 가는 저 왜인은 민 황후를 살해한 후 도피하는 미우라 고로이거나 그 무리임에 틀림없다. 칼을 숨기고 밀행하는 자는 우리 국가민족에 독균(毒菌)일 것이 명백하다.’ 혈기에 넘치는 김구는 부모나 국왕·국모를 시해한 불구대천의 원수를 갚지 아니하고는 하늘을 볼 수 없다는 춘추대의에 불타올라 국모보수(國母報讎)를 다짐하며 그 일본인을 쳐죽입니다. 곧바로 김구는 뱃사람들을 불러 그의 짐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소지품을 조사한 결과 그의 이름은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이고, 일본군 육군 중위라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김구는 그가 소지하고 있던 돈 800냥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여각 주인에게 맡기고, 쓰치다를 자신이 타살했다는 포고문과 함께 거주지와 성명을 써 놓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김구는 3개월 후인 6월 21일 체포되었고, 인천감리서에서 세 차례에 걸쳐 일본인이 배석한 합동 신문을 받게 됩니다. 김구는 거사의 동기는 국모의 원수에 대한 복수를 하고 나라의 수치를 조금이나마 씻고자 하는 것”이었다며 그를 발로 차 마당에 쓰러뜨리니 그가 칼을 뽑기에 돌로 쳐 넘어뜨리고 칼을 빼앗아 죽였다”고 자백했습니다. 일본 영사대리 하기와라 슈이치(萩原守一)는 김구를 참형(斬刑)으로 처단할 것을 주장했고, 법부는 김구에 대한 교형(絞刑)을 국왕에게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고종은 이를 재가하지 않아 김구는 사형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수감 생활을 이어가던 김구는 1898년 3월 19일 탈옥에 성공합니다. 이같은 치하포사건에 대해 김구 비판자들은 ▲쓰치다는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 약장사이고 ▲계림장업단 소속의 상인이며 ▲일본의 어떤 자료에도 쓰치다가 군인이라는 기록이 없다, 등의 주장을 합니다. 김구가 일본 민간인을 살해한 ‘살인강도’ 혹은 ‘테러리스트’라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한동안 학계의 중론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습니다. 뿐만아니라 비판자들은 1947년 12월 국사원에서 출판된 『백범일지』의 끝에 실려 있는 글 「나의 소원」이 백범의 글이 아니라 이광수의 글일 것이라는 주장도 굽히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조명이 새롭게 이루어지고, 뉴라이트 계열의 움직임이 시작된 1990년 이후에 본격적으로 제기됐다는 특징을 보입니다. 그러나 2022년 전기통신기술사를 연구하는 이봉재 씨가 2022년 『백범 김구와 치하포 사건』(선인)이라는 책을 출간해 김구 비판자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고 체계적으로 논박하면서 새로운 흐름을 잡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올해 3월 20일 황태연 동국대 명예교수가 광복회 세미나에서 『김구의 치하포 의거와 문화강국 비전』을 발제한 후 같은 제목의 단행본을 출판(솔과학)함으로써 본격적으로 김구 비판자들에 대한 강도 높은 학술적 공격을 펼치고 있습니다. 김구 비판자들과 옹호자들의 주장을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 쓰치다는 순수한 일본 상인인가 김구 비판자들은 쓰치다가 일본 육군 중위가 아니라 민간 매약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 근거로 1896년 4월 6일 하기와라 슈이치 인천영사관 영사대리가 하라 다카시 외무차관에게 보낸 공문의 쓰치다는 쓰시마 항구의 무역상 오쿠보 키이치에게 고용된 사람으로 상업 목적의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기록을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구 옹호자들은 일제 문서의 쓰치다 신분 조작을 강하게 의심합니다. 쓰치다가 현역 육군 장교였는지 예비역 장교로 해제됐다가 재소집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고위 첩보 장교라는 것은 확실하다고 봅니다. 일제는 강화수호조약 이후 군인을 잡화행상이나 매약상 등으로 위장시켜 조선 각지에 침투시킨 뒤 첩보활동을 하도록 했습니다. 동학교도들의 교조신원운동을 정탐하고 청국군의 거동을 파악하면서 조선의 모든 상황을 정탐했습니다. 파견되는 졸병급 첩보요원들에게는 100냥(현재가치 한화 500~1000만 원)을 지급한 반면, 장교들에게는 1000냥(5000만~1억 원)을 지급해 얻기 어려운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민 황후가 시해당한 후 분노한 조선인들에 의해 6개월간 전국에서 62명의 일본인 피해자가 나오는데, 이중 상당수가 매약상 첩보원들이었습니다. 김구 옹호자들은 쓰치다가 ‘임학길’이라는 20세 한국 청년을 수행원으로 데리고 다녔다는 사실로도 그가 일반 장사꾼만으로 볼 수 없다고 분석합니다. 김구 비판자 중에는 쓰치다가 ‘계림장업단’ 소속의 상인으로, 1895년 진남포에 도착한 뒤 11월 4일 황해도로 가서 상업활동을 하고, 1896년 3월 7일 진남포로 귀환하던 길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김구 옹호자들은 계림장업단이라는 단체는 쓰치다 사망 후인 1896년 5월 17일 설립되었다고 밝혔습니다. ◆ 사라진 쓰치다의 800냥은 어디로 갔나 김구 옹호자들은 또 쓰치다가 현역장교든 재소집된 장교든 ‘현역’이 분명해 보이는 정황으로 사라진 800냥의 행방을 주목합니다. 김구가 여각 주인에게 맡긴 800냥은 일본 당국이 찾아갔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거금을 쓰치다 유족에게나 오쿠보에게 돌려주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대신 일제는 한국정부로부터 받아낸 피해배상금 3,778원 59전을 쓰치다의 유가족에게 지급했습니다. 이는 민 황후 피해사건 이후 발생한 다른 일본인 피해자들에도 똑같이 지급한 금액입니다. 여기에 쓰치다가 갖고 있던 800냥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배상금은 조선 정부가 1905년 3월에 지급한 것으로, 고종의 내탕금에서 나갔습니다. 따라서 김구 옹호자들은 쓰치다가 갖고 있던 800냥은 그의 자금이 아니라 일본군이 지급한 첩보활동 공작금 1,000냥의 일부라고 봅니다. 그래서 이 돈은 그의 유족에게 가지 않고 일본군 금고로 귀속됐다는 것입니다. 쓰치다 유족이 받은 배상금이 다른 유족들에게 지급한 액수와 같다는 사실은 그의 자본금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가 진짜 상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만 30세 청년 김구(뒷줄 오른쪽 주황색 원)가 고향인 황해도 광진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교육계몽 운동의 현장을 보여준다. 현재까지 발굴돼 전해지는 백범 생애 최초의 사진이다. 1896년 치하포 의거로 감옥에 갇혔던 김구는 옥중에서 신학문을 접한 후, 일제에 맞서기 위해서는 무력 이전에 백성을 가르치고 인재를 기르는 것이 시급하다”는 깨달음을 얻어 출옥 후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과 황해도 전역에 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했으며, 1906년 장련에 광진학교를 세우고 직접 학생들을 가르쳤다. ◆환도(環刀)는 누가 차는가 김구 비판자들은 김구가 쓰치다를 칼로 죽였다는 자살(刺殺)을 중시하는 데 비해 그차 차고 있던 환도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구 옹호자들은 그가 환도를 차고 있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일본군 장교라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봅니다. 환도는 해군의 사브르 의장용 검과는 다른 일본 육군의 살상용 군도입니다. 장교 군복에 갖춰 차는 90~100센티의 환도는 장교용 무기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무기보다 철저하게 관리됩니다. 일제시대에 민간인이 불법으로 이런 환도를 구해 차고 다닐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합니다. 쓰치다가 조선 두루마기 속에 환도를 차고 있었다는 사실은 『백범일지』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라 김구에 대한 일반심문조서와 고종 임금에게 올린 사형선고 재가요청서인 ‘상주안건’ 등 여러 군데 나오는 사실입니다. 김구 옹호자들은 김구가 동학의병 활동을 하며 일본군과 접전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쓰치다가 차고 있던 환도가 군용이라는 것과 그가 일본군 장교라는 것을 금방 파악했다고 분석합니다. ◆ 일본측 문서는 상인이라는 한 종류뿐인가? 하기와라 일본 인천영사관 영사대리가 본국 외무차관에서 보낸 공문서에 쓰치다가 상인이었다는 공문을 보낸 기록이 있다는 것을 위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쓰치다의 신분에 대한 일본 측 기록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치하포 사건이 일어나고 24년이 지난 1920년 3월 15일 상해총영사 야마자키 게이치는 본국 외무대신 우치다 고사이에게 ‘불령선인’에 대한 보고서를 보냅니다.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여운형, 김규식 등 주요 한인 정보를 담은 문서에서 야마자키는 김구에 대해 민비 사건에 분개하여 소위 국모복구(國母復仇)의 소요가 일어났을 때 일본 장교를 살해한 관계자로 형법을 받은 일이 있다”고 보고 했습니다. 상해총영사가 본국 외무대신에게 보낸 이 극비기록은 조선 주둔 일본군 첩보기관과 조선총독부로 신원조회를 해 얻은 대외비 정보를 바탕으로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일제 최고위급 관리에게 보고되는 정보가 근거 미약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쓰치다가 육군 중위라고 기록한 『백범일지』의 기록의 신뢰성은 유지됩니다. 『백범일지』는 김구가 어린 두 아들에게 유서를 대신해서 쓴 글입니다. 망명지에서 쫓기며 독립운동을 하는 아버지가 어린 아들들에게 거짓으로 유서를 쓴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왜 김구 비판자들은 두 가지의 일본 기록 중 쓰치다가 일본 상인이라는 기록만 중시해서 김구를 ‘살인강도’나 적어도 ‘오인살인범’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결코 자료의 부족이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백범일지』 상권의 「국모보수(國母보수)」에 기록된 쓰치다의 변복·패검(佩劍) 사실, 사건 심문조서, 조선 정부 문서, 백범 부모의 청원서, 소장(訴狀), 상해총영사의 보고문 등 여러 문서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건 직후 일본 측이 피해자는 민간 상인이라고 만든 문서만을 신봉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쓰치다가 일본군 정탐 장교였다면, 당시 일제는 그 사실만은 감춰야만 할 상황이 아니었던가요? 그가 민간인이라고 해야 배상금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황태연 교수는 책의 결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백범의 덕을 만끽하는 자들이 한국의 피어린 근대사를 뒤틀고 심지어 거꾸로 뒤집어놓는 배은망덕에 대한 비판은 무관용 원칙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다음 회에는 「나의 소원」이 누가 쓴 글인지를 알아보겠습니다. 임순만 언론인 ysm@mind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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