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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미군정 법정에서도 당당했던 백범

미군정 법정에서도 당당했던 백범
[사람들]
1947년 12월 2일 저녁, 서울 제기동에서 총성이 울렸습니다. 한국민주당 정치부장 장덕수가 자신의 집에서 총격을 받고 숨졌습니다. 해방 정국에서 송진우, 여운형에 이은 세 번째 암살사건입니다. 장덕수는 젊은 시절 상하이 신한청년당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동아일보』 초대 주간을 지낸 언론인입니다. 해방 후에는 한민당의 핵심이 되어 미소공위 참가를 선언하며 우익진영의 참가를 종용하는 등 미군정의 주목을 받는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 말기에는 일제의 침략전쟁과 식민 통치에 협력해 훗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목되는 역사도 기록했습니다. 범인은 오래지 않아 붙잡혔습니다. 박광옥과 배희범입니다. 수사는 총격의 배후를 향했고, 국민의회와 대한혁명단 관계자들이 잇달아 체포됐습니다. 그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김구의 이름까지 나왔습니다. 1948년 3월 2일 과도정부 제1회의실에서 미군 군사위원회가 장덕수 암살사건의 공개재판을 시작했습니다. 피고인은 김석황·조상항·신일준·손정수·김중목·최중하·박광옥·배희범·조엽·박정덕 등 10명이었습니다. 미군 검찰이 그린 사건의 개요는 이렇습니다. 1947년 여름 김석황·조상항·신일준·손정수 등 일부 인사들 사이에서 미소공동위원회에 협력한다는 이유로 장덕수·안재홍·배은희 등을 ‘민족반역자’로 지목해 제거하려는 논의가 있었다. 이후 대한혁명단에서도 이들을 암살 대상으로 삼았고, 단원들은 혈서를 쓰고 수류탄과 권총을 든 채 태극기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이것은 재판에서 제시된 검찰의 주장과 피고인들의 진술에 따른 것입니다. 일부 피고인의 진술에서는 김구가 장덕수의 제거를 원했다는 취지의 말이 나오면서 김구의 관련 여부가 중요한 쟁점으로 떠올랐습니다. 김구가 이 암살계획을 지시하거나 승인했는지가 미군정이 밝히려 한 핵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김구가 장덕수를 죽이라고 직접 명령했다는 물증은 없었습니다. 검찰이 가진 것은 김구와 피고인들의 관계, 그리고 이들의 진술이었습니다. 김석황은 김구가 장덕수의 ‘처치’를 원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고, 조상항·신일준·손정수는 김구를 직접 찾아갔을 때 그가 장덕수 등을 ‘죽일 놈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진술했습니다. 1. 미국 대통령의 이름으로 온 소환장 김구에게 소환장이 왔습니다. 피고인이 아니라 증인이었습니다. 출두일은 3월 12일, 장소는 중앙청 제1회의실에 설치된 미군 군사위원회 법정. 중국에서 오랜 세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주석 김구를 미군정에서 증인으로 부른 것입니다. 세상의 눈은 ‘김구가 과연 소환에 응할 것인가’에 쏠렸습니다. 김구는 권력 앞에서 몸을 낮추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3월 11일, 김구는 법정에 나가겠다고 밝혔습니다. 그가 내놓은 이유는 거창한 정치적 명분이 아니었습니다. 국제예양(國際禮讓)을 존중하고자 함이다.” 자신을 미국 대통령 트루먼의 명의로 불렀기 때문에 국제예의를 존중하여 출두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대통령의 이름은 존중한다’ ‘그러나 내가 사건에 관련됐다는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김구는 처음부터 이렇게 두 가지를 분리했습니다. 3월 12일 아침, 서울에는 봄을 재촉하는 가랑비가 내렸습니다. 9시 45분, MP의 호위를 받으며 김구가 들어왔습니다. 검정색 중절모를 쓰고 검은 두루마기 차림이었습니다. 검은 뿔테안경에 팔에는 자주색 토시를 끼고, 검은색 구두를 신고 있었습니다. 일흔셋의 김구는 법정 한복판에 한 단 높게 설치된 증인석에 앉았습니다. 변호인의 질문부터 시작됐습니다. 국민의회와 민족대표자대회를 아는가, 어떤 직책을 맡고 있는가, 김석황을 아는가, 신일준·조상항·손정수를 아는가, 장덕수를 아는가 등의 질문이 나왔습니다. 김구는 장덕수를 일곱 살 때부터 알았다고 답했습니다. 김석황이나 다른 사람에게 장덕수 사건과 관련해 어떤 명령을 내린 일이 있는지요?” 전혀 없소.” 대한혁명단을 압니까?” 단체가 하도 많으니까 어떤 것인지 모르오.” 그들이 장덕수를 암살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까?” 전혀 모르오.” 오전 심문이 끝나고 오후 1시 30분 다시 법정이 열렸습니다. 육군 대위인 라만(Milton L. Roman) 검사가 검사석 앞을 오가며 질문을 시작했습니다. 1947년 8월이나 혹은 9월중에 장덕수 씨가 선생을 찾아간 일이 있나요?” 종종 찾아 왔소.” 무슨 목적으로 찾아 왔지요?” 사제간이니까 혹 병문안으로 온 적도 있겠고, 그러나 그 목적이란 것을 명백히 지적할 기억은 없소.” 장씨가 찾아간 목적은 선생이 임시정부로 하여금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하도록 해달라고 부탁하러온 것이 아닌가요?” 온 답답하군요. 임정은 기능이 없는데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있겠소?” 필요하면 커피나 음료를 제공해 드리겠습니다만…” 고맙소. 그러나 필요하지 않소.” 김구는 장덕수와 정치적 의견이 달랐던 것은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장덕수에 대한 불만을 다른 사람에게 말했느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는 불만이면 불만이라고 직접 그 본인에게 말할지언정 내 체모 상 타인에게 말하지는 않소.” 1947년 8월이나 9월, 김석황·조상항·손정수·신일준 등이 찾아왔을 때 장덕수를 없애버리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없소.” 검사는 틈을 파고들었습니다. 다른 일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이것만은 어떻게 그렇게 확실하게 기억하시오?” 사람을 죽이라고 했다면 그것은 중대한 문제인 만큼 확실치 않을 수 없소.” 죽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더라도 ‘제거하라’는 말을 한 적은 없나요?” 없소이다.” 2. 여섯 장의 사진 검사는 피고인 네 사람의 진술서를 꺼냈습니다. 김석황·조상항·신일준·손정수의 진술이었습니다. 그들의 진술에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김구가 장덕수를 처치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김석황이 했다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김구를 찾아갔을 때 장덕수 등을 두고 ‘죽일 놈들’이라는 취지의 말을 직접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선생이 음모와 관련돼 있다는 것을 어찌 모를까요?” 그런 모임 자체가 없었소.” 김석황에게 명령을 내린 적은 없는가요?” 허허허, 내게 무슨 권리가 있길래 그런 명령을 하겠소.” 검사는 받아쳤습니다. 권리가 있느냐 없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지시했느냐는 것이오.” 없소.” 검사는 사진 여섯 장을 갖고 김구 앞에 다가가 보여주었습니다. 사진은 각각 청년 한 사람씩 태극기 앞에서 수류탄을 양손에 들고 서 있고, 혈서도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까?”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없소. 혈서 같은 것은 워낙 많이 들어오니까 말이오.” 윤봉길과 이봉창의 사진은 기억하면서 왜 이 사진은 기억하지 못하는가요?” 김구는 사진을 한 장씩 들여다보고 답했습니다. 모두 젊은 사람들인데 기억이 없소.” 검사는 질문하는 의도의 일단을 밝혔습니다. 지금 장시간 질문하는 것은 선생의 본심을 아랫사람들이 오해해 이런 사건을 일으킨 것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요.” 나는 동족과 조국과를 사랑합니다. 아무 자리에서나 사람을 두고 죽일 놈이라고 말할 리가 없소.” 그렇다면 왜 여러 피고인의 진술이 한결같이 선생과 관련된 내용으로 일치할까요?” 알 수 없소. 그러니까 모략이라 생각되오.” 3. 위신에 관계되니 답변 못하오” 모략이라고요? 누구의 모략이지요?” 그것을 다 말하려면 어떤 단체나 개인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나는 일본인 이외의 사람을 죽일 이유가 없소.” 검사는 김석황이 거짓말을 했다는 말이냐고 물었다. 그렇소.” 그가 왜 거짓말을 했을까요?”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고문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그러자 검사는 확증이 있으면 제시하고, 없으면 취소하라고 몰아붙였습니다. 김구는 직접 확인한 증거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1948년 3월 15일 중앙청에 마련된 미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열린 장덕수 암살사건 군사재판 법정에 두 번째로 출석한 김구가 증인석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김구는 그래도 나를 죄인이라 보면 기소를 하여 체포장을 띄워 잡아놓고 하시오. 나는 증인으로서 더 말할 것이 없으니 이만 가겠소”라고 말한 후 더 이상 재판에 협조하지 않았다.   오후 4시30분, 첫날 신문이 끝났습니다. 사흘 뒤 검찰은 김구를 다시 불렀습니다. 3월 15일 오전 9시, 김구가 다시 증인석에 앉았습니다. 라만 검사는 첫날 김구가 사용했던 ‘모략’이라는 말부터 물었습니다. 답하지 않겠소.” 왜 답할 수 없나요? 피고인들에게 영향을 줄까 봐 그러는 것인가요?” 내가 할 말은 이미 다 했소.” 그리고 김구는 출두 첫날 했던 말을 다시 꺼냈습니다. 나는 국제예양을 존중하여 증인으로 나오라고 해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오. 그런데 법정에서 나를 죄인처럼 취급하고 있으니 매우 불만이오.” 그다음 말은 더 강했습니다. 이 사건에 관해서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소. 그래도 나를 죄인이라 보면 기소를 하여 체포장을 띄워 잡아놓고 하시오. 나는 증인으로서 더 말할 것이 없으니 이만 가겠소.” 김구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변호인들이 만류했습니다. 재판장이 끼어들었습니다. 검사 질문에 답하지 않는 것이 혹시 답변하면 자신에게 죄가 될 것 같아서 그러는가요?” 이 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무슨 죄 여부를 논하는 것이오?” 재판장이 같은 질문을 거듭했습니다. 김구의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장덕수가 죽은 것을 내가 더 분하게 생각하는데, 검사는 나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하고 있소.” 김구와 장덕수는 정치적으로는 갈라졌지만, 두 사람은 오래전에 사제지간이었습니다. 김구가 황해도 보강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할 당시, 장덕수의 친형인 장덕준이 교사로 있었습니다. 어린 장덕수는 학교에서 숙식하며 형과 함께 지냈고, 김구 선생의 촉망을 받는 제자였습니다. 장덕수는 성적표에 모두 넉가래(甲)만 있지, 오리(乙)는 한 마리도 없는 학생이었습니다. 법정은 5분간 휴정한 후 재판이 다시 열렸습니다. 라만 검사가 또 물었습니다. 모략이란 무엇이오?” 김구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검사의 추궁이 김구의 침묵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때 피고인석에서 박광옥이 갑자기 일어났습니다. 그는 장덕수를 직접 쏜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럼 내가 말하지요. 그것은 완전히 모략이오. 저분은 모르오.” MP들이 달려들었습니다. 박광옥은 저항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박광옥은 끌려가면서 울부짖었습니다. 나는 사형을 받더라도 김구 선생은 죄가 없는데 왜 붙잡아다 놓고 야단들이오?” 방청석이 크게 술렁였습니다. 한참 후 재판이 속개됐습니다. 라만 검사는 박광옥의 품에서 나왔다는 면도칼처럼 생긴 양철 조각을 들어 보인 뒤 다시 김구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모략이란 무엇이오?” 이번에는 변호인들이 막았습니다. 그것은 김구의 위신과 관계된 질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재판장이 정리했습니다. 증인은 답변이 자신의 위신과 관계되거나 자신에게 죄가 될 우려가 있을 때 답변을 거부할 권리가 있소.” 검사가 같은 질문을 다시 던졌습니다. 김구가 답했습니다. 위신에 관계되니 답변 못하오.” 검사 신문은 거기서 끝났습니다. 재판장의 질문에 김구가 답했습니다. 나는 일본인을 대상으로 의거를 지시할 때에는 실행자와 자신이 직접 명령을 주고받지 중간 사람을 통하지 않았소.” 장덕수를 애국자로 생각했느냐는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나는 환국 후 나와 함께 일한 사람들을 애국자로 보았으니, 장덕수도 그렇게 보았소.” 재판장이 말했습니다. 돌아가시오.” 두 차례에 걸친 김구의 증인신문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다음 날부터 재판은 계속됐습니다. 3월 17일 최중하(훗날 ‘최서면’으로 개명)는 대한혁명단이 처음에는 장덕수뿐 아니라 안재홍·배은희 등도 암살 대상으로 삼았다고 증언했습니다. 자신이 장덕수를 맡았지만 계획이 진행되지 못했고, 이후 정세가 달라지면서 장덕수 한 사람만 죽이기로 했다고 말했습니다. 검사는 최중하에게 혁명단원들이 쓴 혈서를 왜 김구에게 가져다주었는지를 물었습니다. 최중하는 조선 학생들이 아직 독립운동 정신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을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인 김구에게 알려 기쁘게 해드리려 했다고 답했습니다. 검찰은 김구와 대한혁명단 사이에 어떤 접점이 있었는지를 계속 조사했습니다. 검찰은 김구 문제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검찰이 의존하던 진술서의 문제가 거듭 드러났습니다. 신일준은 고문이 심해 실신한 상태에서 만들어진 진술서는 전혀 사실을 담지 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손정수, 조상항도 조사관에게 고문을 당했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4. ‘국제예양’과 개인의 자존   1946년 3월 20일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미소공위 1차 회의. 왼쪽부터 이승만, 김구, 테렌티 스티코프(소련측 수석대표·중장), 안재홍 4월 1일 제21회 공판에서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김석황·조상항·신일준·손정수·김중목·최중하·박광옥·배희범 등 8명에게 교수형이 선고됐고, 조엽과 박정덕에게는 각각 징역 10년이 선고됐습니다. 변호인들은 물적 증거가 부족하고 진술서가 자발적으로 작성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정황증거만으로 중형을 내리는 것은 위험하다고 호소했지만 군사위원회의 판단은 무거웠습니다.(그러나 4월 22일 하지 미군정 사령관의 특별조치로 박광옥·배희범은 사형 집행이 보류됐고, 나머지도 각각 종신형·10년형·5년형으로 감형됐습니다.) 김구가 법정을 떠난 뒤에도 검찰은 혈서와 사진, 김구에게 보내려던 편지, 김구와 피고인들의 관계를 계속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김구를 피고인으로 바꾸지 못했습니다. 박태균 서울대교수는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인해 가장 큰 이익을 받는 지도자는 이승만이었으며,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지도자는 김구였다. 장덕수 암살의 배후는 김구가 아니라 이승만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장덕수가 단순한 한민당 간부가 아니라 해방정국 우익 내부의 유력한 정치적 경쟁자였기 때문입니다. 장덕수는 미군정이 높이 평가하던 한민당의 핵심 브레인이었고, 미국 유학파로서 미군정과도 소통이 잘됐습니다. 특히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정국에서 이승만은 참가에 부정적이었던 반면 장덕수는 한민당의 참여를 추진했습니다. 박 교수가 공개한 미군정 정치고문 버치(Leonard Bertsch) 문서를 보면 당시 미국 측에서도 장덕수의 죽음으로 이승만의 정치적 경쟁자가 하나 더 사라졌다는 시각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김구에게는 모든 것이 손해였습니다. 암살 배후라는 의혹이 씌워지면서 한민당·미군정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이승만과의 연대마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박 교수는 장덕수 암살사건 공판은 송진우 여운형 암살사건과는 달리 미군정의 주도하에 특별재판소에서 미국인 판사, 검사, 변호사에 의해 진행되었다. 미군정은 재판에서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단이 마련되어 있었다”고 판단합니다. 미군정이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추진하는 김구를 정치적으로 암장(暗葬)하고자 군사재판에 회부했다는 주장입니다. 김구는 애당초 소환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대통령의 이름으로 자신을 불렀으므로 ‘국제예양’을 지키겠다고 했습니다. 법정에서는 여유를 보였습니다. 허허, 내게 무슨 권리가 있길래 그런 명령을 하겠소?” 그러나 증인을 죄인처럼 다룬다고 판단했을 때는 물러서지 않고 검사를 호통쳤습니다. 죄인이라면 기소하고 체포장을 발부하시오. 나는 증인이오.” 김구는 국제예양을 갖춘다고 했지만, 지켜야 할 자존은 지켰습니다. 상대를 존중한다고 해서 자신을 낮춰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자신의 자존을 지킨다고 해서 상대를 적으로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까다로운 국제관계에 관한 중요성을 날로 더해지고 있습니다. ‘힘의 차이가 큰 나라와 어떻게 좋은 관계를 맺을 것인가’ ‘상대를 존중하면서도 어떻게 우리의 판단과 이익을 지킬 것인가’ ‘상대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을 때 관계를 깨뜨리지 않으면서 어떻게 ‘아니오’라고 말할 것인가‘ 특히 압박이 심해지는 오늘의 한미관계는 끊임없이 이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상대를 중시하고 예의를 지키되 자신의 존엄을 내주지는 않는 것. 1948년 3월 미군정 법정의 증인석에 앉았던 김구가 보여준 태도는 오늘에도 되새겨볼 만합니다.    1947년 11월 30일 오전 서울 이화장에서의 이승만(왼쪽)과 김구. 서로 다른 복장과 신발, 그리고 다른 포즈가 두 사람의 성격과 특징을 잘 보여준다. 미국의 사진작가 호레이스 브리스톨(Horace Bristol)이 촬영한 유명한 사진이다. 두 사람은 상해 임시정부 시절부터 오랫동안 협력해 왔으나 남한 단독선거를 계기로 갈라섰다. * 김구 법정 증언은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대한민국사』 제6권의 제8회·제9회 군률재판 기록(1948년 3월 12일·15일)을 토대로 인용·재구성했고, 박태균 저 『현대사를 베고 쓰러진 거인들』(지성사)를 참고했다.   임순만 언론인 ysm@mind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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