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과 혐오의 생태계 넘어 민주공화국의 길로 [뉴스] 앞선 글에서는 극우생태계를 움직이는 돈과 플랫폼, 종교조직의 정치 동원을 어떻게 차단할 것인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동력을 끊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극우 세계관의 다음 세대 전승을 막고, 그 공동체를 떠난 청년이 돌아올 민주공화주의의 기반을 어떻게 세울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생태계의 동력을 끊어도 그 자리를 비워두면 다른 이름의 조직과 채널이 같은 기능을 대신합니다. 극우생태계를 해체하는 일은 사람을 제거하는 일이 아니라, 거짓과 혐오가 자라온 사회적 조건을 민주주의의 기반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 교육을 통한 극우의 전승을 끊어야 한다
극우생태계는 다음 세대를 확보할 때 살아남습니다. 일부 극우 개신교 세력은 사학과 학교 밖 교육시설을 통해 자신들의 세계관을 청소년에게 전하려 합니다. 국가 역사기관의 인사와 운영에 개입해 특정한 역사관에 공적 권위를 부여하고, 정상적인 역사·민주주의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를 위축시키기도 합니다.
극우의 전승을 막으려면 종교교육과 정치적 강요를 구분하고 학교 밖 교육시설의 사각지대를 해소해야 합니다. 역사기관의 독립성을 지키고, 교사가 사실을 가르치며 학생이 질문할 수 있는 공교육도 회복해야 합니다. 국가가 특정한 역사관이나 종교적 교리를 심사하고 허용 여부를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감독의 대상은 교리와 사상이 아니라 허위정보의 조직적 주입, 질문과 토론의 봉쇄, 종교적 권위를 이용한 강요, 미성년자의 정치 동원과 기본권 침해입니다.
● 종교교육과 정치적 강요는 다르다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드리며 신앙에 기초한 생활교육을 하는 것은 종교계 학교가 가질 수 있는 특성입니다. 보수적인 신학이나 가족관, 성윤리를 가르친다는 이유만으로 국가가 개입해서도 안 됩니다.
26일 오후 서울 올림픽공원 개표소 봉쇄 시위현장에 하남의 한 교회에서 보냈다는 순대차량이 와 있다. 2026.07.27. 김시몬 기자
그러나 목회자와 학교 운영자의 정치적 판단을 종교적 진리로 절대화하면 교육의 성격은 달라집니다. 특정한 역사적 인물은 신앙의 영웅이 되고, 정치적 반대자는 대한민국과 교회를 위협하는 적이 됩니다. 성과 가족에 관한 종교적 견해도 여성과 성소수자, 다른 견해를 가진 시민에 대한 적대와 혐오로 바뀔 수 있습니다. 역사에 관한 질문과 정치적 토론은 신앙과 불신앙의 문제로 닫힙니다.
학생에게 허위정보를 반복적으로 주입하고 특정 집단과 정치적 반대자를 신앙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며 집회와 선거운동에 동원한다면 이는 종교교육이 아닙니다. 종교적 권위를 이용한 정치적 강요입니다. 국가는 하나의 성윤리나 역사관을 정답으로 지정할 것이 아니라, 학생이 서로 다른 자료에 접근하고 질문하며 정치적 강요를 거부할 권리를 지켜야 합니다. 신앙의 자유가 학생의 양심과 정치적 자기결정권을 지우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 학교 밖 교육시설의 사각지대를 없애야 한다
일부 극우 개신교 세력은 사학재단과 종교계 학교, 대안교육기관과 교회형 홈스쿨 공동체를 통해 자신들의 세계관을 다음 세대에 전하려 합니다. 이승만 건국신화와 반공주의, 부정선거 음모론과 기독교 국가론이 하나의 세계관으로 결합하고, 학생은 댓글 활동과 집회, 선거운동에 동원될 수 있습니다.
모든 기독교 사학과 대안교육기관을 같은 범주로 묶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와 성경교육, 보수적인 신학을 가르친다는 이유만으로 국가가 개입해서도 안 됩니다. 판단의 기준은 교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정규 사립학교에서는 학교법인과 교회 사이의 자금·인사 관계를 공개해야 합니다. 교비와 국가보조금이 교회나 정치활동에 사용되지 않는지 점검하고, 특정 후보와 정당에 대한 지지나 정치집회 참여를 학생에게 강요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성적과 생활기록, 기숙사 생활과 진학에서 불이익을 주어서도 안 됩니다.
정규 학교가 아니더라도 사실상 전일제 집단교육을 제공하는 시설에는 현행 대안교육기관 등록 의무가 실제로 적용돼야 합니다. 교회나 선교원, 홈스쿨 공동체라는 명칭을 사용하더라도 일정한 장소에서 다수의 학생에게 상시적인 교육과 숙식을 제공한다면 이름만 바꾸어 공적 감독을 피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국가는 운영자와 교육담당자의 신원·경력, 아동학대와 성범죄 전력, 회계와 공적 지원금, 학생의 안전과 정보접근권을 점검해야 합니다. 학생을 정치집회와 선거운동, 조직적인 온라인 활동에 동원하거나 폭력·강제노동·부당한 격리 등 중대한 인권침해를 가한 시설에는 시정명령과 운영정지, 등록취소로 이어지는 단계적 제재를 적용해야 합니다.
중대한 인권침해와 미성년자 정치 동원이 반복되고 시정명령까지 거부한 시설에는 법률에 따라 등록취소와 폐쇄조치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헌법정신 위배’와 같은 추상적인 문구만으로 시설을 제재해서는 안 됩니다. 정치적 강요와 미성년자 동원, 폭력과 감금, 회계 부정과 아동학대처럼 법률에 명시된 행위를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당사자에게는 통지와 소명, 행정심판과 사법심사의 기회를 보장해야 합니다.
시설을 폐쇄하는 것으로 학생 보호가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교육청은 학생의 공교육 복귀와 전학, 상담과 학습 지원까지 책임져야 합니다. 학생과 교사, 종교단체 내부자가 불법행위를 신고할 수 있도록 신분을 보호하고 법률 지원도 제공해야 합니다.
극우의 전승을 끊는다는 것은 학생을 처벌하는 일이 아닙니다. 학생이 어떤 시설에 있더라도 다른 정보에 접근하고 정치적 강요를 거부하며 안전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지키는 일입니다.
● 역사기관과 공교육을 정상화해야 한다
극우 세계관은 학교 밖 교육시설에서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국가 역사기관이 정치권력이 선호하는 역사관에 공적 권위를 부여하고, 그 내용이 연구와 교재, 강연을 거쳐 학교로 들어오면 국가제도도 극우 세계관의 전승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역사기관은 국가가 기억을 보관하는 장소입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억의 주인을 바꾸고 불편한 사실을 지운다면, 국가는 과거를 배우는 대신 과거를 다시 이용하게 됩니다.
보수적인 역사해석이나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 평가 자체가 국가의 제재 대상은 아닙니다. 역사학은 서로 다른 해석과 논쟁을 통해 발전합니다. 문제는 정권이 역사기관의 인사와 예산을 장악하고, 학술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주장을 국가의 공식 역사로 만들어 교과서와 기념사업에 주입하는 행위입니다.
어느 정권도 역사기관을 자신의 역사관을 확산하는 도구로 만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역사기관장의 임기와 정권의 임기를 분리하고, 임원 추천과 후보자 검증을 독립적으로 운영해야 합니다. 연구자료와 출처, 심사과정과 예산 사용, 집필진과 심사위원의 이해충돌도 공개해야 합니다. 학술적 동료평가와 반론, 이의제기의 절차도 보장해야 합니다.
마포서대문은평촛불행동, 서대문주민대회 조직위원회,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등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 앞에서 열린 서대문구의 뉴라이트 강좌개설 및 역사왜곡 규탄 기자회견에서 관련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2024.9.23. 연합뉴스
국가가 하나의 역사해석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헌법이 계승한다고 밝힌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4·19민주이념을 부정하고, 식민지배와 국가폭력을 정당화하는 사업에 국가예산과 공적 기관의 권위를 동원해서도 안 됩니다. 역사적 해석의 다양성은 보장하되 국가의 예산과 권위가 정치적 선전과 역사 왜곡에 이용되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교과서 집필과 검정 과정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합니다. 정권이 국정교과서나 행정적 압력을 통해 하나의 역사관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지는 역사교사와 학교의 교육적 판단에 맡겨야 합니다. 정치권력과 사학재단, 외부 정치·종교단체가 교과서 채택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공교육에서는 교사가 검증된 역사적 사실을 가르치고 학생의 질문과 토론을 이끌 수 있어야 합니다. 교육과정에 따른 수업과 악성 민원 대응은 교사 개인이 아니라 학교와 교육청이 함께 책임져야 합니다. 사실을 가르치고 질문할 수 있는 교실을 지키는 일은 극우 세계관의 전승을 막는 가장 기본적인 민주주의 정책입니다.
가족과 종교공동체, 온라인 플랫폼이 하나의 닫힌 세계를 만들더라도 교실에는 바깥을 볼 수 있는 창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 창을 여는 사람은 교사입니다. 교사가 민원과 고소를 두려워해 창을 닫는 순간, 학생에게 남는 화면은 알고리즘이 골라준 작은 세계뿐입니다.
그러나 전승의 통로를 차단하고 공교육을 정상화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미 극우공동체에 들어간 청년이 그곳을 떠난 뒤에도 고립되지 않고 돌아올 곳을 함께 만들어야 합니다.
어둡고 폐쇄된 극우생태계에서 벗어난 한 청년이 햇빛이 비치는 공동체의 공론장으로 걸어가고 있다. 왼쪽의 스마트폰 화면과 붉은 연결망, 획일적으로 줄지어 앉은 사람들은 알고리즘과 혐오·음모론, 조직적 동원에 갇힌 세계를 상징한다. 오른쪽의 나무와 열린 광장, 원형으로 마주 앉아 대화하는 시민들은 토론과 관계, 돌봄을 통해 회복되는 민주공화적 공동체를 나타낸다. 두 세계 사이에 놓인 빈 의자는 극우의 ‘전사’로 호명되었던 청년이 다시 시민의 자리를 찾아가는 전환을 상징한다. (출처 : 필자 제공· AI 생성 이미지)
■ 극우공동체를 떠난 청년이 돌아올 곳을 만들어야 한다
출구만 있다고 사람이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문밖에 다시 설 곳이 없다면 그는 익숙한 방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극우공동체를 떠난 청년에게는 문을 열어주는 일만큼 문밖의 세계를 만드는 일이 필요합니다.
극우공동체는 정보만 제공하지 않습니다. 소속감과 관계, 자신의 좌절과 분노를 설명하는 언어도 제공합니다. 복잡한 불평등을 단순하게 설명하고 분노해야 할 적을 가리키며, 자신이 정의로운 싸움에 참여하고 있다는 확신을 줍니다.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는 것만으로 그 공동체에서 나오게 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기존의 관계를 떠나도 고립되지 않을 새로운 관계와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 청년을 하나의 집단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적극적으로 극우조직에 참여하는 청년과 일시적으로 자극적인 콘텐츠를 소비한 청년은 다릅니다. 대학 진학과 취업 여부, 거주 지역과 노동조건, 성별과 종교공동체 경험에 따라 청년이 겪는 불안과 이를 해석하는 방식도 다릅니다.
따라서 대응도 달라야 합니다. 단순히 허위정보를 접한 사람에게는 사실확인과 미디어교육이 필요하고, 극우공동체를 떠나려는 청년에게는 상담과 새로운 관계가 필요합니다. 폭력과 협박의 피해자는 보호하되 조직적 정치공작과 폭력에 가담한 사람에게는 그 행위에 따른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청년세대 전체를 극우화된 집단으로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뿐 아니라 또 다른 낙인을 만듭니다. 극우생태계의 작동 방식을 분석하는 것과 청년세대 전체를 의심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지역별 회복 지원망을 마련해야 합니다. 학교와 도서관, 청년센터와 시민단체, 대학과 상담기관을 연결해 청년의 학업과 취업, 가족관계와 사회적 관계의 회복을 지원해야 합니다. 극우공동체를 떠나는 과정에서 폭력과 협박을 당한 사람에게는 법률 지원과 신변보호를 제공해야 합니다. 회복 과정에 참여한 청년을 다시 낙인찍거나 감시 대상으로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이러한 지원은 정치적 성향을 교정하는 국가 프로그램이 아니라 당사자가 자발적으로 이용하는 상담·교육·법률·생활 지원이어야 합니다. 상담과 학업, 일자리와 주거는 사회로 돌아오는 과정을 지탱하는 현실의 기반입니다. 믿을 만한 정보와 새로운 관계, 자신의 말이 공동의 결정을 바꾸는 경험은 그 복귀를 민주주의의 참여로 이어줍니다.
민주주의는 교과서의 지식만으로 배울 수 없습니다. 함께 말하고 결정하며, 잘못된 판단을 고치고 다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험 속에서 배웁니다. 극우세력이 청년에게 소속감과 확신을 제공했다면 민주공화국은 더 넓은 관계와 질문할 자유, 다시 판단하고 돌아올 기회를 제공해야 합니다.
■ 조사와 대응을 하나의 제도체계로 연결해야 한다
앞선 글에서 제안한 가칭 ‘민주헌정질서보호위원회’가 극우생태계의 전체 구조를 조사한다면, 국회와 정부·독립기관은 그 결과를 입법과 예산, 행정조치로 연결해야 합니다. 학계와 언론, 시민사회와 교원단체, 청년 당사자도 정책의 설계와 평가에 참여해야 합니다. 조사 결과가 보고서에 머물지 않고 실제 제도개혁으로 이어지는 상설체계가 필요합니다.
극우생태계는 하나의 명령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역사와 교육, 플랫폼과 돈, 종교와 정치가 서로의 빈틈을 채우며 자랐습니다. 해체 역시 한 기관의 단속으로 끝날 수 없습니다. 생태계의 각 고리를 끊는 동시에 그 자리에 민주주의의 제도와 공동체를 세워야 합니다. 이번 연재에서 제안한 핵심 과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표는 대한민국의 모든 민주주의 개혁과제를 망라한 것이 아니라, 이번 연재에서 다룬 청년극우화와 그 배후 생태계에 대한 시급한 대책을 정리한 것입니다.
목적은 극우적 생각을 가진 청년을 골라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앙과 교육, 돈과 조직을 이용해 청년을 댓글과 집회, 선거운동에 동원하는 구조를 끊고, 그들이 다른 정보와 관계를 선택해 공동체로 돌아올 기반을 세우는 데 있습니다.
■ 민주개혁진영도 역사적 경계를 지켜야 한다
이러한 원칙은 극우세력에만 적용되는 기준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세력도 역사적 사실과 헌법적 경계를 자신에게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극우에 대응하는 기준은 이미 헌법에 있습니다. 국민주권과 인간의 존엄, 자유와 평등, 권력분립과 법치주의의 원칙은 민주개혁진영에도 똑같이 적용돼야 합니다. 역사의 경계선은 상대를 심판할 때만 꺼내 드는 자가 아닙니다. 자신이 그 선을 넘지 않도록 먼저 붙잡는 원칙이어야 합니다.
김민석 전 국무총리는 2026년 7월 산업화 초기에는 독재적 방식이 불가피했다”고 말하고, 박정희가 지닌 스마트함 때문에 산업화를 해냈다”고 평가했습니다(오마이뉴스, 2026.7.13).
그러나 민주개혁진영이 독재의 책임을 경제적 성과와 교환하는 순간 민주주의와 독재 사이에 그어놓은 역사적 경계도 흐려집니다. 산업화의 성과가 국가폭력과 국민의 기본권을 짓밟은 독재를 불가피한 과정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중도확장은 역사의 경계를 지우는 일이 아닙니다. 더 많은 시민이 왜 그 선을 함께 지켜야 하는지 설득하는 일입니다. 지켜야 할 원칙을 버려서는 설득도 확장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 맺음말 ― 경제적 안전망과 함께 민주주의의 안전망을 세워야 한다
이 연재는 서울의 한 야구장에서 시작했습니다. 타석과 더그아웃 사이로 스타벅스 가야지”와 탱크데이”라는 말이 날아다녔습니다. 몇 초면 사라질 야유처럼 들렸지만, 그 말의 뿌리를 따라가자 한국 현대사의 오래된 그늘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6일 오후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배재고등학교 야구부 학생들이 참배하고 있다.2026.7.6 연합뉴스
그 뿌리는 교정의 이승만 동상 아래에 있었고, 경쟁만 남은 학교와 무너진 대학의 공론장에 뻗어 있었습니다. 뉴라이트의 역사전쟁과 국가기관의 댓글공작을 지나 극우 유튜브와 일부 종교·교육시설로 이어졌습니다. 거짓은 알고리즘을 타고 퍼졌고, 분노는 조회수가 되었으며, 조회수는 다시 돈과 조직, 집회와 정치적 힘으로 바뀌었습니다.
아이들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이었지만, 그 말을 만들고 가르치고 퍼뜨린 것은 어른들의 세계였습니다. 이번 연재는 대한민국의 교육문제 전반을 다룬 글이 아닙니다. 입시경쟁과 학벌, 교육격차와 지역격차, 대학의 위기와 교권 문제를 모두 설명하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국의 교육과 사회가 만들어온 인간형 가운데 청년극우화와 연결된 역사적 경로와 제도적 공백을 추적한 글입니다. 청년의 말과 행동만 탓하지 않으려면 학교와 교육이 이 문제에 어떻게 연루됐고 무엇을 하지 못했는지 물어야 했습니다.
오늘의 청년극우화에는 오랜 역사적 축적이 있습니다. 해방 이후 국가는 반공의 전사와 산업의 역군을 요구했고, 민주화 이후에는 경쟁에서 살아남는 개인을 앞세웠습니다. 그러나 시민과 청년은 국가가 요구한 인간으로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독재에 맞서 자유와 권리를 넓혔고, 권력이 허락한 한계를 넘어 민주주의를 전진시켰습니다. 한국 민주주의는 국가권력이 베푼 시혜가 아니라 시민이 스스로 쟁취한 역사였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경쟁은 더욱 거세졌지만, 청년이 그 압력을 견디며 서로의 경험을 나눌 공동체는 빠르게 무너졌습니다. 민주개혁세력도 청년이 자신의 현실을 이해하고 공동의 문제를 해결할 공론장을 충분히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 빈자리를 극우매체와 유튜브, 댓글조직과 일부 종교권력이 파고들었습니다. 이들은 청년의 불안을 거짓과 혐오로 돌리고, 그것을 수익과 정치 동원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청년의 불평등과 불안이 자동으로 극우화를 낳은 것은 아닙니다. 같은 조건에서도 어떤 청년은 노동조합과 시민운동에 참여하고, 어떤 청년은 정치에서 멀어지며, 어떤 청년은 극우의 설명에 끌립니다. 결정적인 것은 불만의 존재만이 아니라 그 불만을 누가 어떤 언어로 해석하고 조직하느냐입니다.
청년극우화는 청년만의 실패가 아닙니다. 기성세대와 정치, 교육과 언론, 종교와 국가가 함께 만들어낸 사회적 실패입니다. 기성세대가 만든 경쟁의 시장에 청년을 내몰아놓고 이제 와서 일부 청년이 드러낸 분노와 일탈만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회초리를 들기 전에 우리가 만든 사회부터 돌아봐야 합니다.
극우생태계를 해체하는 것만으로 청년의 삶이 회복되지는 않습니다. 청년에게는 두 개의 안전망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주거와 일자리, 금융과 복지로 삶의 추락을 막는 경제적 안전망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실과 토론, 관계와 참여로 판단의 고립을 막는 민주주의의 안전망입니다.
경제적 안전망이 청년의 삶을 추락에서 지킨다면, 민주주의의 안전망은 청년의 판단과 관계를 극우세력의 포획에서 지킵니다. 안정된 집과 일자리가 있어도 다른 세계를 만나고 민주주의를 경험할 공간이 없다면 거짓과 혐오에 포획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토론과 참여를 말하면서 삶의 불안과 추락을 방치한다면 민주주의는 공허한 훈계로 들릴 뿐입니다. 두 안전망은 함께 세워져야 합니다.
극우생태계를 해체한다는 것은 극우적 생각을 가진 사람을 사회에서 제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거짓과 혐오를 조직하고 이를 돈과 표, 집회와 권력으로 바꾸며 종교와 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에 전하는 행위구조를 끊는 일입니다.
생각을 처벌해서는 안 됩니다. 정부를 비판하고 정권교체를 요구하는 일도 감시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거짓과 강요, 돈과 조직으로 시민의 판단을 왜곡하고 선거와 민주헌정질서를 공격하는 행위에는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극우세력이 청년에게 제공한 소속감에는 민주적인 공동체로 답해야 합니다. 단순한 적의 언어에는 질문과 토론으로 맞서야 합니다. 허위정보는 검증된 사실로 바로잡고, 정치적 무력감은 자신의 참여가 실제 변화를 만든다는 경험으로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극우화된 청년만 남겨두고 어른들이 다시 사라져서는 안 됩니다.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막고, 이미 그 길에 들어선 청년에게는 돌아올 길을 열어야 합니다. 정치가 그 길을 만들고 국가와 시민사회가 지켜야 합니다.
아이들을 극우의 전사로 길러내는 사회를 그대로 둔 채 아이들만 꾸짖을 수는 없습니다. 모든 아이의 문제는 결국 어른의 문제입니다. 어른들이 만든 극우생태계는 어른들이 해체해야 합니다.
민주공화국이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나 민주공화국의 책임은 제도와 안전망을 세우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극우의 전사가 아니라 타인과 함께 판단하고 공동의 규칙을 만드는 시민을 길러내야 합니다. 마지막 글에서는 우리가 어떤 시민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민주공화국은 어떤 인간을 길러내야 하는지 묻겠습니다.
이병권 인문연구가 lbkwon2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