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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상록수의 탄생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상록수의 탄생
[사람들]
김민기는 1977년 5월 제대했다. 손꼽아 기다리던 복귀였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붓과 캔버스는 버린 지 오래였고, 노래는 지어봤자 발표할 수도 없었다. 노래에서 손 떼기로 하고, 기타도 누군가에게 줘 버렸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기엔 너무 ‘늙었다’. 돌아가 봤자 다시 시작할 것도 없었다. 그곳에는 함께 도모할 사람도, 함께 할 일도 없었다. 게다가 ‘김민기’는 입대 전보다 군에 있는 동안 더 유명해졌다. 방송이나 공연 등 공식적인 공간에서 그의 노래는 아예 사라졌다. 그러나 어디에나 그의 노래는 있었다. 1970년대 후반 더 잦아지고 격렬해진 유신 철폐 시위나 노동쟁의 현장에서 그의 노래를 부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뒷골목 선술집이나 차가운 자취방 혹은 MT(앰티) 현장에서 그의 노래는 빠질 수 없는 레퍼토리였다. 심지어 일제하 항일 독립군이나 해방 후 빨치산이 불렀던 작자 미상의 구전 가요마저도 ‘김민기의 노래’로 둔갑해 있었다. 김민기 이름 석 자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은 당연히 그러려니 하고 그런 노래를 불렀다. 훗날 그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갔을 때 수사관이 그에게 던진 혐의 자료에는 이런 소문이 ‘사실’로 적시돼 담겨 있었다. 그렇게 유명해졌으니, 딱히 할 일도 없고 하는 일도 없었지만, 함부로 얼굴을 내밀고 다니기 힘들었다. 한동안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가장 마음 편하고 안정됐을 법한데, 김민기에게는 꽤나 불편했던가 보다. 김민기 보기에 어머니는 자신 때문에 너무 많이 시달렸다. 한밤중에 방문을 걷어차고 들이닥친 기관원들 때문에 기겁해 심장병을 얻었고, 그때쯤엔 고질병이 되어 있었다. 그 시절에 관한 김민기의 기억은 이 한마디에 다 담겼다. 어머니의 책망도 늘었다.” 군대까지 갔다 왔는데도 마음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막내가 보시기에 딱해, 한 어머니의 지청구가 늘었을 것이다. 수소문 끝에 선배의 도움으로 부평의 삼진통상 부평공장에 취직했다. 당장의 노학연대 나아가 미래의 대한민국 변혁을 위해 대학생들이 신분을 속이고 공장에 들어가던 그런 종류의 ‘위장 취업’은 아니었다. 대학 중퇴의 신분까지 다 밝히고 입사한 공식 취업이었다.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기름밥을 먹는 블루칼라도 아니었다. 비록 재고를 담당하는 업무이긴 했지만 엄연한 관리직이었다. 1979년 발매된 양희은 음반 거칠은 들판에 푸르른 솔잎퍼럼  앞면과 뒷면. 노래 ,거칠은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은 훗날 상록수로 곡명이 바뀌었다. 이 음반에 작사 작곡자는 김민기가 아닌 친구 김아영으로 되어 있다.    김민기는 제대 후 삼진통상 부평공장에 취직했다. 이 곳에서 공장 노동자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가난한  노동자들의 합동 결혼식을 축하기 위해  상록수를 만들었다. 사진은 공장 노동자들이 합동결혼식을 하는 장면. 사진출처: SBS 뒷것 김민기 2부 동영상 갈무리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군대 가기 전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어떤 공식 활동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 힘으로 먹고살아야 했다. 현장 노동자가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먹고 살 생각으로 취직했다.” 창고에서 일하는 시간이 많다 보니 어린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들은 제품에 붙어 있는 라벨의 알파벳조차 몰라, 원단 앞에서 허둥대곤 했다. 나이 어린 소년공에게 영어나 미술을 가르치던 ‘신정 학원’ 시절이 떠올랐다. 노동자들에게 알파벳이나 가르치자는 생각으로 ‘새벽 학교’를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야근이나 철야가 많아 시간을 내기 힘들었다. 한두 시간 일찍 회사에 나와 공부하는 게 편했다. ‘야학’이 아니라 ‘조학’이라고 했다. 업무에 도움이 되니, 회사로서는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점심시간이면 공장 앞뜰에서 쉬는 노동자를 위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몇몇 서정적인 노래들을 가르치고 함께 부르기도 했다. 그의 이런 모습은 소설가 조세희가 1979년 발표한 에 잠깐 등장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영희는 행복동 철거 투쟁에서 난장이 아빠와 큰오빠를 잃었다. 학교를 포기하고 취업한 공장에는 점심시간이면 공장 마당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가르치던 ‘위장 취업자’ 아무개 씨가 있었다. 영희는 집으로 돌아오면 그에게 배운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그 ‘아무개’의 모델이 바로 김민기였다고 한다. 김민기와 함께 근무했던 소년 노동자 곽기종씨는 ‘김민기 선생님’을 이렇게 기억했다. 선생님은 때때로 ‘계산적으로 살지 말고 느끼는 삶을 살아라’, ‘꿈은 얻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시며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SBS의 다큐멘터리 에서) 공장 생활 중 김민기를 마음 아프게 했던 것 가운데 하나는, 동거하는 남녀 노동자 특히 여성 노동자들이 받는 따가운 눈총이었다. 사용자나 화이트칼라들은 이들을 향해 ‘성적으로 문란하다’느니, ‘공돌이 공순이라 어쩔 수 없다’느니, 손가락질했다. 공장 밖 이웃 어른들도 쑥덕거리긴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들은 예식을 치를 돈이 없어서 결혼식을 하지 못한 것뿐이었다. 함께라면 생활비도 줄일 수 있고, 고통도 덜 수 있고, 내일에 대한 희망도 키울 수 있었으니, 사랑하는 사람에게 ‘동거’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김민기는 그런  뭣도 모르는 오만한 자들이 이가 갈리도록 싫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싸울 수는 없었다. 생각다 못해 그가 생각한 게 합동 결혼식이었다. 그는 뒤늦게 식을 올리는 늙은 노동자 부부를 위해 축가를 지었고, 결혼식장에서 기타를 들고 직접 노래하기도 했다. 그건 당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20여 년이 지나 IMF 구제금융 사태 때 대한민국 국민을 위로하고, 응원했던 그 노래 ‘상록수’는 그렇게 탄생했다. 1974년 소리굿 공연 이후 누가 아무리 재촉해도 그는 앞에 나서서 노래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롱당하고, 눈총받는 가난한 노동자들 앞에서만은 노래를 불렀다. 노래 ‘상록수’는 양희은의 음반 에 ‘무사히’ 타이틀 곡으로 실렸다. 김민기 자신의 이름 대신 친구 김아영을 작사·작곡자로 올린 덕분에 검열기관이나 정보기관의 손도 타지 않았다.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2002년 12월 방영된 대선 홍보 방송에서 상록수를 부르고 있다. 상록수는 가난한 이의 노래에서 국민의 노래가 되었다. 사진출처: 노무현재단 동영상 갈무리 ‘상록수’는 김대중 정부 초기 IMF 환란 속에서,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국가 부도 사태를 함께 헤쳐 나가자는 취지의 정부 공익광고 캠페인의 주제가로 매일 방송을 탔다. 덕분에 ‘상록수’는 가난한 이들의 노래를 넘어서, 국난을 깨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국민의 노래가 되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 때는 노무현 후보가 기타를 치며 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대선 홍보 영상으로 제작돼 선거 방송에 나오기도 했다. 삼진통상은 동물 가죽을 가공해 옷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생가죽 가공 공정에서 노동자들은 근무시간 내내 1급 발암물질에 손을 담그거나, 유증기를 마셔야 했다. 어떤 이들은 채 몇 달도 근무하지 않아 손톱이 빠졌다. 몇 년 못 버티고 병이 들어 퇴사해야 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어렵사리 이루어진 결혼식인데도 사진 속에서 활짝 웃는 신랑이나 신부는 한 명도 없다. 김민기가 재직했던 시절 함께 근무했던 노동자 가운데 쉰 살 넘게 산 이는 손에 꼽을 정도밖에 안 됐다고 김민기는 전하곤 했다. 노동하며 얻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다. 회사 쪽은 아침 공부나 합동 결혼식 주선 등 김민기의 활동을 묵인했다. 문제는 기관원들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상사를 볶았다. 그런 사정을 전해 듣고는, 김민기는 두말하지 않고 퇴사했다. 그러나 막상 공장에서 나오고 보니, 안정된 일자리가 없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공사판 막노동밖에 없었다. 그는 당시 우후죽순 생기던 연립주택 공사장의 일용직으로 뛰어들었다. 어려운 용어는 죽으라고 쓰지 않던 그가 가끔 입에 담곤 했던, 이른바 ‘노동의 소외’라는 말은 그 시절 온몸으로 겪은 막노동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노동자는 피똥을 싸며 집을 짓지만 정작 자신은 그곳에 살 수는 없다, 그곳에 살기 위해선, 그가 받는 임금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비싼 월세를 내거나, 10여 년 먹지도 않고 저축해야 모을 수 있는 목돈이 필요했다. 내가 만든 것을, 나는 누릴 수 없고, 오히려 거기에 노예처럼 묶여 살아야 하니, 이것이 노동의 소외가 아니고 무엇인가? 청년 마르크스가 학술 개념으로 처음 쓰기 시작한 ‘노동의 소외’를 김민기는 뼈저리게 느꼈고, 소외된 노동의 삶을 온몸으로 살았다. 그가 훗날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대표’ 혹은 ‘사용자’가 되었을 때, 사업장이던 학전을 ‘소외되지 않는 노동’의 현장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 자청했던 것은 그때 그 경험 때문이었다. 소극장과 극단 ‘학전’을 운영하면서 그는 반드시 공정 임금을 보장하고, 고용 규칙을 지키고, 경영 성과를 매달 투명하게 공개했고, 추가 이윤은 함께 나눴다. 무엇보다 밥은 어떻게 해서든 ‘배불리’ ‘잘’ 먹을 수 있게 했다. 적자가 아무리 쌓여도 이 원칙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배우건, 스텝이건 사용주 혹은 대표의 돈벌이에 고용된 사람이 아니라, 모두가 자기 세계를 창조하고 그 성과와 보람을 함께 누리는 사업장이 되도록 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이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모습. 김민기는 1978년 민청학력 배후 인물로 구속된 김효순(전 한겨레신문 편집국장) 의 형과 남이섬에 놀러 갔다 재소자들의 아린 사연을 듣고 밤뱃놀이를 지었다.  사진출처: 오마이 뉴스 김민기는 1974년 입대할 때 마음속에 큼직한 돌덩어리를 안고 있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잡혀간 학생들 특히 주동자들은 거의 모두 그와 가까운 친구이거나 선후배였다. 다행히 이듬해 2월부터 이들은 대부분 석방됐다. 그러나 그가 제대했을 때까지도 수감 생활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현배, 이강철, 유인태, 나병식, 김효순 등이었다. 그들은 재학생이 아니라 졸업생이어서 특사의 혜택에서 제외됐다. 학교를 졸업하고도, ‘나이 어린’ 후배들을 조종해 국가 변란을 획책한 ‘죄질’ 때문에 ‘은전’의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강철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1978년 8월 15일에야 특사(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징역 20년을 선고받은 김효순도 이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김효순의 형은 동생의 석방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 과정에서 재소자 가족 모임에 참석한 김민기와도 알게 됐다. 1978년 어느 날 두 사람은 바람도 쐴 겸 가평 남이섬에 갔다. 그곳에서 놀잇배를 타면서 김민기는 여전히 수감된 이들의 사연을 자세히 듣게 됐다. 돌아와 그가 지은 노래가 ‘밤뱃놀이’였다. 검은 산만 떠가네/ 검은 물에 떠가네/ 하늘도 바람도 아득한데/ 오는지 가는지/ 우리 밸세”(1절)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무려 10절까지 이어지는데, 아들이나 딸, 형제나 친구를 감옥에 보낸 이들의 한을 녹여냈다. ‘밤뱃놀이’는, ‘진도 아리랑’이나 ‘정선 아리랑’처럼 두 장단을 메기고(선창) 두 장단을 받는(합창) 구조와는 달랐지만, 부르는 이들이 각자 제 사연을 직접 네 장단으로 풀어낼 수 있게 한 점에서는 구조가 같았다. 대금, 태평소, 북, 장고, 징, 꽹과리 등 순전히 국악기로만 반주한다. 이런 식이다. 형님 아우님 어디 갔소/ 고운 님도 어디 갔소/ 만나보면 간데 없고/ 헤어지면 만나는가.”(2절) 누군가 이렇게 사연을 풀어내면 다른 사람이 네 마디로 받는다. 뱃머리에 부서지네/ 뱃미에 매달리네/ 우리네 사랑/ 뱃놀이에 노젓기만 같으네.” 1979년 양희은의 앨범 에 수록됐다. 노래 후반부에선 판소리 명창 김소희의 수양딸 김소연이 전통 창법으로 양희은과 함께 부른다. 판소리 혹은 민요 창이 서양 창법이 어울리는 흔치 않은 시도이자,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노래다. 그는 각오하고 다지고 의지를 불태우지 않았다. 마음이 생기면 몸이 갔다. 그뿐이었다.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죽었다 깨도 몸이 가지 않았다. 그가 한 일치고 ‘유위(有爲) 혹은 인위(人爲)’에 의한 것은 없었다. 살다 보면 그렇게 되고(무위, 無爲), 스스로 그렇게 되어졌다(自然). 물이 그러듯이, ‘마음이 가는 대로’ 가다 보니 낮은 곳이었고, 그곳에서 생명을 살렸을 뿐이다. 애써 하려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住 而生其心)’는 말씀은 이를 두고 하는 것이었다.곽병찬 언론인 chankb195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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