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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상처투성이 백범의 육신으로 읽는 독립운동사

상처투성이 백범의 육신으로 읽는 독립운동사
[뉴스]
1939년 김구의 모친 곽낙원 묘비 앞에서. 앞줄 왼쪽부터 윤기섭 김구 김홍서 유자명. 뒷줄 왼쪽 김신, 오른쪽은 미확인. 백범 김구를 떠올리면 먼저 동그란 안경과 두루마기가 떠오릅니다. 단정히 여민 옷깃, 굳게 다문 입, 두툼한 안경알 너머의 눈빛도 따라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백범의 모습은 대체로 그렇습니다. 어린 시절 천연두가 지나간 흔적 때문에 얼굴이 얽었지만, 사진 속 백범의 인상은 대체로 인자하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두루마기 속의 백범의 육신은 그렇게 평온하지 않습니다. 왼쪽 정강이에는 스무 살 무렵 고문으로 생긴 큰 흉터가 남았습니다. 귀는 고문으로 손상됐고, 어깨와 등과 가슴과 몸통에는 심한 고문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손목과 손가락도 온전할 수 없었습니다. 1938년에는 가슴에 총탄을 맞았고, 1949년에는 다시 네 발의 총탄이 그의 생명을 빼앗았습니다. 백범의 육신은 끈질긴 투쟁과 고문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조선 말기에서 대한제국,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과 분단에 이르는 역사가 그의 육신에 상처의 지도를 그렸습니다. 살갗이 터지고 피가 흐르고 뼈가 드러났습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백범은 몸에 보이는 상처만 갖고 있었던 게 아닙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한미한 신분, 얽은 얼굴, 근대적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성장기의 결핍도 있었습니다. 독립운동에 뛰어들어서는 아내와 어머니와 아들, 수많은 동지를 먼저 보내야 했던 상실도 있습니다. 평생 되찾으려 했던 나라가 해방되자마자 둘로 갈라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상처도 있습니다. 백범의 육신과 내면에 남은 상처를 이해하는 것은 그래서 또 하나의 『백범일지』를 읽는 일이 됩니다. ## 1. 1879년경 ― 천연두가 지나간 얼굴 김구는 서너 살 무렵 심한 천연두를 앓았습니다. 당시 천연두는 어린아이의 목숨을 앗아가는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살아남더라도 얼굴에 깊은 흔적을 남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김구의 얼굴에도 마마 자국이 남았습니다. 이 얼굴은 훗날 청년 김구의 내면과도 연결됩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서대문감옥에서 구타로 귀 연골이 파괴돼 한쪽이 봉충이가 되었다고 썼다. 사진은 양쪽 귀가 다르게 보이지만, 이 사진만으로 손상의 정도를 판단하기 어렵다. 과거시험에서 뜻을 이루지 못한 뒤 그는 한동안 관상 공부에 빠졌습니다. 관상책을 구해 읽으며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부귀한 관상도, 어디 한군데 좋은 관상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얼굴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것이고, 천연두가 남긴 흔적 역시 자신의 힘으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다 그는 관상책에서 얼굴보다 몸이 낫고, 몸보다 마음이 중요하다는 구절을 발견합니다. 잡을 것이 없었던 김구는 그 말을 잡고 일어섭니다. 이 대목은 김구의 생애에서 중요합니다. 관상책에 있는 한 줄의 문장이 훗날 그의 길을 비추는 등불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조건 자체를 바꾸지 못하면 그 조건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얼굴을 바꿀 수 없다면 마음을 바꾸고, 출신을 바꿀 수 없다면 그 한계를 넘어가는 것입니다. 1896년 김구는 스무 살이었습니다.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분노가 온 나라를 뒤덮고 있던 때였습니다. 김구는 국모 시해에 보복하기 위해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를 처단했습니다. 한 나라의 왕비가 일본 공사를 중심으로 한 일본인들과 군인들이 개입한 폭력에 의해 무참히 살해됐는데도 그 나라의 백성이 이를 두고 보기만 한다는 것은, 당시 유학의 의리와 명분을 떠받치던 춘추대의(春秋大義)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살해된 쓰치다가 일본군 장교로 국내 사정을 정탐하는 스파이였는가, 민간인 약재상이었는가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논란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2022년 전기통신기술사를 연구하는 이봉재 씨가 연구서 『백범 김구와 치하포 사건』을 펴낸 데 이어 2026년 황태연 교수(동국대)가 『김구의 치하포 의거와 문화강국 비전』을 펴내며 그가 국내 사정을 정탐한 일본군 장교였음을 체계적으로 밝히면서 ‘민간인 약재상’이었다는 주장은 힘을 잃고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김구는 해주로 압송돼 심문을 받았습니다. 두 다리를 묶고 그 사이에 나무를 끼워 비트는 주리를 당했습니다. 정강이의 살이 터지고 흰 뼈가 보일 정도였습니다. 이 고문으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왼쪽 정강이에는 흉터가 남았습니다. 1901년, 스물다섯의 김구에게 또 하나의 상처가 생겼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김순영이 중병에 걸리자 김구는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었습니다. 부모가 위독할 때 자식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약으로 드리는 ‘할고(割股)’가 지극한 효행으로 이야기되던 시대였습니다. ## 2. 1911년 서울 ― 극한의 고문, 전신의 상처 1910년 말 안악사건으로 체포된 서른다섯의 김구는 서울로 압송됐습니다. 일제는 안명근의 군자금 모집 사건을 빌미로 황해도 민족운동 세력을 대대적으로 검거한 것입니다. 다음 해 일제는 안명근의 독립자금 모금 활동을 당시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을 암살하려는 음모로 날조해 신민회 조직에 대한 탄압으로 수사를 확대했습니다. 김구는 안악사건 관계로 15년형을, 신민회 주요 간부라는 이유로 다시 2년 형을 받아 모두 17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김구는 서울 경무총감부에서 거듭 혹독한 심문과 고문을 당했습니다. 해주에서 당했던 고문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를 왔는지 알겠느냐?” 잡아 오니 끌려올 뿐 이유는 모른다.” 신문과 고문이 반복됐습니다. 하룻밤에도 여러 차례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는 일이 이어졌습니다. 눈 내리는 밤 달빛 적막한 신문실 한 모퉁이에 가로누워있는 자신을 깨닫고는 정신을 차립니다. 얼굴과 전신에 냉수를 끼얹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 수도 없었습니다. 안명근과는 어떤 관계이고, 무엇을 논의했는가?” 안명근은 서로 아는 친구일 뿐이고, 같이 일한 사실은 없다.” 놈들은 노발대발하며 다시 김구를 난타합니다. 목과 어깨, 등과 가슴과 몸통을 채찍으로 가격합니다. 맞아 진물이 흐르는 등짝을 다시 때립니다. 부어오른 곳을 다시 채찍질하면 조직이 다시 터집니다. 김구는 지지 않고 고함을 치면서 버팁니다. 구타가 끝나면 몸을 묶어 공중에 매답니다. 사람을 두 팔이 뒤로 묶인 채 공중에 매달면 몸무게 자체가 고문 도구가 됩니다. 두 팔과 어깨에는 자신의 체중이 고스란히 걸리고, 어깨 관절은 견디기 어려운 방향으로 잡아 당겨집니다. 가슴과 몸통도 뒤틀린 자세로 버텨야 합니다. 김구는 이런 고문 속에서 의식을 잃었다가 다시 깨어나곤 합니다. 8차 심문에서는 모멸을 견디다 못해 김구 자신이 머리를 벽에 받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그는 고통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마지막 저항의 수단으로 던졌습니다. 경무총감부에서의 취조가 끝났다고 육체의 고통이 끝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감옥에서는 간수가 수갑을 심하게 조여 수갑이 손목뼈를 파고 들어가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하루는 동지 최창식이 궁금해서 가는 철사로 손가락을 콕콕 찔러 진물이 나게 해서 옴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둘이 한 방에 갇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자 간수가 와서 감방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곤봉으로 머리와 귀를 난타했습니다. 그때 왼쪽 귀의 연골이 파괴돼 귀가 봉충이(짝짝이)가 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김구에게는 고문 못지않게 오래된 상처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에서 비롯된 결핍입니다. 김구의 집안은 양반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신분의 벽을 보았습니다. 근대적인 고등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지도 못했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안중근 집안이 그 대표적인 경우였습니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황해도에서 상당한 기반과 명망을 가진 인물이었고, 김구는 동학운동 이후 안태훈의 배려로 청계동 그의 집에서 피신하며 그 집안과 깊은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여러 명의 인물을 배출했습니다. 형제와 친족 여러 사람이 독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김구와 안중근 가문의 관계는 이때부터 임시정부 시기, 그리고 자녀 세대의 혼인까지 이어졌습니다. 중근은 당년 열여섯에 (이미 결혼해) 상투를 틀었고 자색 명주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서 돔방총을 메고 날마다 사냥을 다녔습니다. 신분상으로는 상당한 차이였습니다. 이승만은 또 다른 의미에서 김구와 대조되는 인물이었습니다. 이승만은 가문의 배경에 대한 강한 프라이드가 있었고, 배재학당에서 근대교육을 받았으며,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과 대학원을 거쳐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영어와 미국 사회에 대한 경험, 국제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김구는 감옥에서 이승만 박사가 설치한 도서실에서 이 박사의 손때가 묻은 책으로 공부하며 그를 동경했습니다. 그러나 백범은 이 결핍 때문에 시름과 한탄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 점에서 ‘백범(白凡)’이라는 호는 의미심장합니다. 그는 자신의 낮은 출신을 가리기 위해 그럴듯해 보이는 호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낮은 계층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과 평범한 사람을 뜻하는 범부의 ‘범’을 취했습니다. 평범한 백성들까지 자신만큼의 애국심을 갖기를 바란다는 뜻을 그 이름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독립정부의 마당을 쓸고 유리창을 닦기를 소원했습니다. 행동주의자 김구는 자신의 결핍을 이런 깨달음과 일어섬으로 바꿔나갔습니다. ## 3. 1938년 중국 장사 ― 가슴에 밀정의 총을 맞다 1911년에서 27년이 흘렀습니다. 예순둘이 된 김구의 삶은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는 중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진영을 이끄는 지도자였습니다. 한인애국단을 조직했고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지휘했습니다. 일제는 단순히 계산하자면 중국노동자 1,500년 어치가 넘는 현상금 60만 원을 걸고, 김구 암살작전을 전개했습니다. 1938년 5월 7일 중국 호남성 장사 남목청 건물, 독립운동 진영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총성이 울렸습니다.   1938년 중국 장사에서 이운환의 총격으로 가슴에 총을 맞고 살아난 김구 총을 쏜 사람은 한국인 이운환이었습니다. 김구는 가슴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이 사건은 오랫동안 독립운동 진영 내부의 갈등에서 일어난 총격으로 설명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측 정보자료를 이용한 최근 연구는 남목청 사건이 일제의 김구 암살공작과 연결된 사건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범인 이운환은 일제 측 공작선에 포섭된 박창세가 이용한 암살공작원입니다. 총격은 이전의 고문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생명을 좌우하는 심장과 폐, 큰 혈관들이 모여 있는 가슴에 총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김구는 끝내 살아났습니다. 이 사건을 말해주는 특별한 사진 한 장이 있습니다. 수술을 받은 뒤 상의를 벗은 김구가 서양인 의사와 함께 찍은 것입니다. 둥글고 우람하게 발달한 가슴 중앙에 총상이 뚜렷한 상처를 보여주는 김구는 순박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김구의 몸은 옷을 벗으면 나타나는 투쟁의 역사입니다. 남목청 총격이 특별한 까닭은 김구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는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퇴원 후 동포들에게 띄우는 ‘여러분 선생께’라는 글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개인 하에는 애국운동을 시작하던 그날부터 구구한 일신의 생명은 심중에 두지 아니하였던 것이니 어느 날에든지 이러한 죽음이 있을 것을 미리부터 각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분한 것도 없고 낙심되는 것도 없습니다. 저는 오직 최후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앞으로 더욱 분투 노력하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이 결심은 이번에 처음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십년 전에 인천감옥을 탈주한 사형수 김창수 시절부터 벌써 한 것입니다.” 이것이 김구의 특징입니다. 그는 죽을 뻔했지만, 살아났으면 다시 투쟁합니다. 자주 독립을 하고 분단을 극복하는 날까지 물러서지 않는 투쟁이 김구라는 사람의 육체적 생애를 설명합니다. ## 4. 1949년 경교장 ― 육신의 상처가 만든 투쟁의 지도 김구는 자신의 거처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가 쏜 총탄을 맞았습니다. 네 발. 김구의 육신에 가해진 마지막 폭력입니다. 1879년경 어린 창암의 얼굴에 마마 자국이 생긴 뒤 70년이 흘렀습니다.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남과 북이 갈라지는 분기점을 맞았고, 그것을 막으려 죽음을 무릅쓰고 평양까지 갔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과로 서울 경교장에서 총을 맞았습니다. 김구는 1896년에 살아남았고, 1911년에도 살아남았습니다. 1938년에도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1949년에는 생명이 끝났습니다. 상처와 회복, 그리고 투쟁으로 이어지고 이어지던 끈질긴 육신의 박동이 여기에서 멈췄습니다.   1949년 6월 26일 서거 직후 경교장 침대에 눕혀진 백범. 그의 육신에 남은 상처를 따라가다 보면 김구의 몸은 하나의 지도처럼 보입니다. 시간의 지도입니다. 1879년, 1896년, 1901년, 1911년, 1938년, 1949년이라는 연도가 몸의 각 부위에 적혀 있습니다. 1896년 왼쪽 정강이의 흉터는 치하포 사건 이후 일제의 폭력을 말합니다. 1901년 허벅지의 상처는 전통사회의 효 윤리와 김구의 가족관계를 말합니다. 1911년 온몸의 상처는 식민통치 초기 일제의 수사와 고문의 실상을 알려줍니다. 1938년 가슴의 총상은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독립운동과 암살공작의 세계를 증언합니다. 1949년 네 발의 총상은 해방된 조국에서도 끝나지 않은 폭력의 역사를 말합니다. 김구의 몸을 들여다보는 것은 그의 상처를 세어보는 것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나라가 기울던 조선에서 청춘을 바치고, 중국 대륙 망명지에서 중장년기의 투쟁을 거쳐 해방과 분단기에 노년을 다 바친 한 인간의 몸에 한국 근현대사가 어떤 자국을 남겼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백범의 육신은 또 하나의 『백범일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가 글자로 남긴 일지라면 또 하나는 피와 흉터로 쓰인 일지입니다. 우리는 흔히 역사적 인물을 동상으로 기억합니다. 동상의 몸에는 흉터가 없습니다. 남산에 세워진 김구의 동상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실제 김구의 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얼굴은 얽었고 왼쪽 정강이에는 큰 흉터가 있었습니다. 자기 손으로 벤 허벅지가 있었고, 고문당한 귀와 어깨와 등과 손목이 있었습니다. 가슴에는 총상이 남았습니다. 마지막에는 얼굴과 목과 가슴과 복부에 총탄을 맞았습니다. 두루마기를 입은 김구만으로는 그를 온전히 기억할 수 없습니다. 그 두루마기 안의 상처까지 볼 때, ‘백범 김구’라는 이름 뒤에 있던 한 인간의 의지와 투쟁의 삶이 비로소 드러납니다. 김구가 빛나는 것은 상처가 많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상처 입은 몸으로 다시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임순만 언론인 ysm@mind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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