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운악산 정상석은 왜 두 개일까 [사회혁신]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1982년 6월 2일, 지리산 최고봉 꼭대기에 ‘智異山(지리산) 天王峰(천왕봉) 1915m’라고 새긴 새로운 표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1960년대 나무 말뚝, 1970년대 이후 정방형 오석에 이어 장방형 오석이 있던 자리에 경상남도가 진주 남강의 화강암을 헬기로 운반해 세운 것이다.
제막식에는 권익현 민정당 사무총장과 이규효 경남지사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때마침 지리산 철쭉제와 시민등반대회가 열려 전국의 산꾼이 운집했다. 경남 산청 태생의 권익현은 전두환 대통령과 육사 동기(11기)로 5공화국 실세 중의 실세로 꼽혔다. 경남 고성이 고향인 이규효는 사법·행정고시에 모두 합격한 정통 관료 출신으로 1987년 말 13대 대선에서 전라도 사람들을 싹 쓸어버리겠디”고 발언해 물의를 빚을 만큼 평소 거침없이 지역감정을 드러내는 인물이었다.
1982년 건립 당시 찍은 천왕봉 정상석 뒷면 사진에는 ‘慶南人’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3개도가 관할하는 민족의 영산 정상석에 ‘경남인의 기상’
지리산은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 최고봉이자 숱한 역사의 흔적과 문화유산을 간직한 민족의 영산(靈山)이다. 경남 함양·산청·하동, 전남 구례, 전북 남원에 걸쳐 있으며 천왕봉 정상 지점은 산청에 속한다. 지리산은 1967년 제1호 국립공원으로 지정됐으나 국립공원공단이 출범한 것은 1987년이어서 당시에는 3개 도가 나눠 관리하고 있었다. 예전의 정상목에도 ‘경상남도’라고 써놓았고, 새 정상석 설치와 제막식도 경상남도가 주도했다.
문제가 된 것은 새 표지석 뒷면에 새긴 ‘慶南人(경남인)의 氣像(기상) 여기서 發源(발원)되다’라는 문구였다. 지리산을 공유하고 있는 전라남북도 주민은 물론 전문 산악인과 등산 애호가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신문에 지역감정 유발을 우려하는 독자 제언이 실리는가 하면 새 정상석을 훼손하려는 시도도 잇따랐다.
1987년 11월 11일 자 경향신문에는 ‘천왕봉 안내비문 경남인이 한국인 둔갑’이란 제목의 창원발 기사가 실렸다. ‘경남인’을 ‘한국인’으로 바꿔놓은 것을 경남도 관계자가 뒤늦게 발견하고 아연실색했다는 내용이었다. 얼마 뒤에는 누군가 정으로 쪼아 ‘한국인’ 가운데 앞의 두 글자를 훼손한 일도 있었다.
왼쪽은 1997년 8월 14일 자 한겨레에 실린 독자 사진. 천왕봉 정상석의 뒷면 글자가 훼손됐다. 오른쪽은 ‘지리산 천왕봉까지 뿌리내린 지역감정에 회의’란 제목의 독자 의견으로 1992년 8월 30일 자 동아일보에 게재됐다.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현재 지리산 정상 천왕봉의 표지석 뒷면에는 ‘韓國人의 氣像 여기서 發源되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희용 촬영)
한자도 다른 포천시와 가평군의 운악산 정상석
천왕봉 정상석 글씨는 복원됐으나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정상석을 둘러싼 시비는 끊이지 않는다.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과 가평군 조종면의 경계를 이루는 운악산은 화악산, 감악산, 관악산, 송악산(북한 개성)과 함께 경기 오악(五岳)의 하나로 꼽히는 명산이다. 가장 높은 동봉(비로봉)에는 정상석이 두 개다.
동쪽 비석 전면에는 한자로 ‘雲嶽山 毘盧峯’이라고 새겨져 있고 기단부에 ‘해발 937.5m 가평군’이라고 명기했다. ‘雲岳山(東峰)’이라고 적힌 서쪽 비석에는 ‘포천시’라고 새긴 석판을 세워놓았다가 최근에 치웠다. 두 지방자치단체가 한 봉우리에 비석을 각각 설치한 것도 이례적일 뿐 아니라 ‘악’과 ‘봉’의 한자도 서로 달라 헷갈리게 만든다. ‘岳’이나 ‘嶽’ 모두 ‘큰 산’을 뜻하지만 고유명사 한자는 일관되게 적는 게 관행이다.
경기도 운악산의 두 정상석. 왼쪽은 가평군이 세운 것이고 오른쪽은 포천시가 건립했다. 포천군이라고 새긴 표석은 지금은 치워진 상태다. (이희용 촬영)
탐방객에게는 가평 운악산이 훨씬 익숙하다. 가평 쪽 등산로 입구가 서울에서 접근성이 좋고 주차장도 널찍한 데다 인근에 천년고찰 현등사가 있기 때문이다. 2023년 현등사 가는 길에 출렁다리를 설치해 관광객이 더 늘었다. 지난 9월에는 포천 쪽 해발 800m 지점 깎아지른 절벽에 출렁다리와 잔도로 이뤄진 운악산 구름길이 조성돼 판도가 바뀌었다. 주말에는 포천 등산로 입구에 주차 전쟁이 벌어지고 구름길에는 인파로 체증을 빚는다.
파주 감악산 주봉보다 높은 양주시 감악산 임꺽정봉
또 다른 경기 오악인 감악산은 파주시 적성면, 양주시 남면, 연천군 전곡읍 접경지대에 놓여 있다. 파주 쪽에 범륜사와 운계폭포가 있어 흔히 파주 감악산으로 불린다. 2016년 파주시가 등산로 초입에 출렁다리를 만들어 관광객을 끌어들이자 양주시는 2021년 깎아지른 암벽에 하늘길 데크를 만들어 맞불을 놓았다.
삼국시대 몰자비(글자가 마모돼 알아볼 수 없는 비)가 있는 비봉(675m) 북쪽에는 파주시 적성주민자치위원회가 설치한 검정색 표지석이 있다. 2022년에는 양주시가 남쪽에 양주시와 파주시 명칭을 병기한 새로운 정상석을 세웠다. 양주시는 대부분 등산객이 파주 감악산으로만 알고 있다”면서 장군봉, 악귀봉, 형소봉, 구름재 등에도 표지석을 세우고 두 행정구역 이름을 명기했다.
그러나 이곳보다 남쪽으로 400m 떨어진 임꺽정봉에 676.3m라고 새긴 비석이 있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양주시는 새 정상석을 세울 당시 해발고도를 실측한 결과 비봉과 임꺽정봉 높이가 각각 673.4m와 676.3m여서 임꺽정봉이 정상으로 확인됐으나 대부분 자료에서 비봉을 감악산 정상으로 표시해왔다는 점과 헬기장 조성 등으로 지형 변화가 있었을 가능성 등을 고려해 675m라고 새긴 표지석을 비봉에 설치했다”고 설명했다.
경기도 감악산의 예전 정상석(왼쪽 위), 감악산 최고봉인 임꺽정봉의 정상석(오른쪽 위), 2022년 17일 양주시가 개최한 감악산 새 정상석 제막식(아래). (이희용 촬영, 양주시)
‘포천 명성산’ 팔각정에서 2.8km나 더 올라가는 ‘철원군 명성산’
억새밭으로 이름난 명성산은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이동면과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에 걸쳐 있다. 대부분 등산객은 영북면의 산정호수 쪽에서 시작해 억새밭 조망지점인 이동면의 팔각정(748m)까지 갔다가 내려와 포천 명성산으로 잘 알려져 있다.
등산용품 전문업체 블랙야크가 100대 명산 완등 캠페인을 벌일 때 인증 지점이 팔각정이어서 포천시가 바로 옆에 대형 우체통과 ‘鳴聲山 해발 922.6m 포천군’이라고 새긴 비석을 세워놓았다. 인근에 군부대 사격장이 있어 안전 문제를 우려한 블랙야크가 명성산을 100대 명산에서 제외한 뒤로도 이 비석 때문에 정상으로 착각해 그곳에서 하산하는 등산객이 많다. 지금은 높이 표시가 지워져 있다.
정작 명성산 정상은 팔각정에서 2.8㎞ 더 올라가야 한다. 이곳에 한글로 ‘명성산 923m’라고 적힌 표지석이 설치돼 있고 옆에 철원군이라고 표시된 나무 말뚝도 있다. 팔각정과 정상의 중간 지점인 삼각봉(906m)에도 포천시를 명기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명성산의 정상석 바로 옆에 철원군 표시가 있는 정상목이 서 있다(위). 정상에서 2.8㎞ 떨어진 해발 748m 지점에 세워진 포천군이 세운 정상석(아래). 현재 해발 922.6m라는 표시는 지워져 있다. (이희용 촬영)
감악산·화악산·학가산·면봉산·비계산에도 정상석 두 개
경남 밀양시와 경북 청도군에 걸쳐 있는 화악산 정상에도 ‘華岳山(화악산) 海拔(해발) 931.5m 淸道山岳會(청도산악회)’라고 새긴 비와 ‘화악산 밀양의 主山(주산) 해발 931.5m’라고 적힌 표지석이 각각 세워져 있다. 경북 학가산(안동·예천)과 면봉산(포항·청송), 경남 비계산(합천·거창)도 정상석이 두 개다.
경기도 감악산과 이름이 똑같은 산이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과 충북 제천시 봉양읍 접경지대에도 있다. 정상부가 속해 있는 제천시가 꼭대기(945m)에 ‘충청북도 제천시’라고 새긴 비석을 세우자 원주시도 400m 떨어진 지점(930m)에 빗돌을 조성했다. 등산객들은 각각 제천 정상석과 원주 정상석이라고 부른다.
충북 제천시와 강원도 원주시가 각각 세운 감악산의 두 정상석. (이희용 촬영)
가야산은 상왕봉이 주봉, 칠불봉이 최고봉”
경남 합천군과 거창군, 경북 성주군에 자리한 가야산은 팔만대장경을 모신 합천 해인사를 품고 있어 유명해졌다. 등산로도 일찍부터 해인사 쪽으로 조성됐고 정상으로 알려져온 상왕봉(1430m)도 합천에 속해 합천 가야산이 익숙하다. 상왕(象王)은 ‘코끼리 가운데 가장 큰 코끼리’란 뜻으로 부처를 가리킨다. 소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우두(牛頭)봉이라고도 한다. 봉우리 꼭대기에는 ‘합천군’을 명기한 우두봉(상왕봉)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2004년 성주군 요청으로 국토지리정보원이 위성 GPS측량기로 측정한 결과 성주군의 칠불봉이 상왕봉보다 3m 더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 성주군은 ‘七佛峯 1433m 伽倻山 頂上’이라고 새긴 표지석과 칠불봉 전설을 담은 안내석을 설치했다. 이와 함께 가야산 전체 면적 60만㎢(국립공원 구역은 76.92㎢)의 약 61%인 37만㎢가 성주군에 속해 있으니 성주 가야산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경남 합천군이 설치한 우두봉(상왕봉) 표지석(위)과 경북 성주군이 세운 칠불봉 정상석(아래). 오랫동안 우두봉이 가야산 최고봉으로 알려졌으나 GPS 측정 결과 칠불봉이 3m 더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희용 촬영)
불암산과 수락산을 서울 노원구 아닌 남양주시에 돌려달라”
경기도 남양주시는 지난 9월 2일과 3일 불암산과 수락산 정상석을 잇따라 교체했다. 수락산은 남양주시와 의정부시, 서울 노원구에 걸쳐 있고 불암산은 남양주시와 노원구 접경 지역에 놓여 있지만 두 산 정상은 모두 남양주시에 속한다.
그러나 대부분 등산객이 노원구에서 오르내리고 주요 관광자원과 시설물도 그쪽에 몰려 있다 보니 서울의 산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남양주시는 산 이름과 지자체명을 운허체(雲虛體)로 음각한 비석을 새로 제작해 세우고, 일부 포털 사이트에도 서울 노원구로 표시된 위치정보를 정정해 달라고 요청해 바로잡았다. 운허체는 항일운동에 참여하고 불경 번역에 힘쓴 운허 스님(1892~1980)의 필적을 토대로 남양주시와 봉선사가 공동 제작한 글씨체다.
남양주시가 지난달 초 설치한 수락산과 불암산의 새 정상석. (남양주시)
북한산 백운대는 고양시. 도봉산 신선대는 서울
단위 면적당 탐방객이 가장 많은 국립공원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북한산의 정상 백운대(836m)는 행정구역이 경기도 고양시다. 따라서 전문 산악장비 없이도 오를 수 있는 서울 최고봉은 백운대가 아닌 도봉산 제2봉인 신선대(726m)다.
경기도는 도립공원 2호 연인산에 ‘Global Inspiration 세계 속의 경기도’ 슬로건을 새긴 정상석을 새로 설치했다. 이러다가 전국 유명 산의 정상석마다 지자체 명칭으로 도배될 지경이다. 고양시도 남양주시를 본떠 백운대에 행정구역 명칭을 새기려고 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최근 들어 지자체들이 앞다퉈 정상석을 새로 설치하고 지자체 명칭까지 새기는 것은 지자체의 인지도와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탐방객을 불러들이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젊은이들이 정상석에서 이른바 ‘인증샷’을 찍는 유행도 여기에 한몫했다. 그러나 한 봉우리에 정상석이 두 개씩 있고 빗돌마다 지자체 이름을 새기는 것은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지리산 천왕봉의 사례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이희용 줌렌즈 hoprav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