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에 책상 대신 바리케이드 앞에 선 빅토르 위고 [사회혁신]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라는 이름을 들으면 대개 두 가지 반응이 나온다. 하나는 아, 노트르담의 꼽추! , 다른 하나는 장발장! 둘 다 틀리지 않았지만 둘 다 위고의 절반도 못 본 거다. 위고는 소설가이기 전에 시인이었고, 시인이기 전에 극작가였으며, 그 모든 직함 위에 정치인이라는 감투까지 얹고 살았던 인물이다. 한마디로 19세기 프랑스판 팔방미인 인데, 문제는 이 양반이 가만히 앉아서 글만 쓴 게 아니라 평생 권력과 시비를 걸며 살았다는 점이다.
1875년의 위고(위키피디아)
왕당파 도련님, 좌파가 되다
위고는 1802년 프랑스 동부 브장송에서 나폴레옹 군대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왕당파 집안 출신이었으니, 어린 위고는 한마디로 금수저 보수 가정에서 자란 셈이다. 십 대 시절 일기에 샤토브리앙(François-René de Chateaubriand, 1768~1848)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 고 적었다는 일화는 유명한데, 열한 살짜리가 벌써 문호가 되겠다고 다짐했다니 요즘 같으면 자기소개서에 쓸 법한 조숙함이다. 1822년 첫 시집을 내고 그해 결혼했으며, 1825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이쯤 되면 그냥 왕실이 예뻐하는 모범생 작가로 늙어 죽었을 법한데, 위고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위고는 점점 왼쪽으로 기울었다. 1848년 혁명과 망명객들과의 교류를 거치며 한때 옹호했던 군주정과 결별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기 시작한 것이다. 부유하고 명망 높은 작가가 굳이 약자의 편을 들고 나서는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마련이라, 오늘날 식으로 표현하면 영락없는 강남좌파 였다. 다만 위고의 좌파행보는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 1851년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 1808~1873)이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 자리에 오르자, 위고는 직접 시민군을 조직해 거리에 나가 맞섰다. 글만 쓰던 책상물림이 갑자기 바리케이드 앞에 선 것이다.
장 알로의 빅토르 위고 초상화, 1825년.(위키피디아)
19년의 망명, 그리고 레 미제라블
결과는 뻔했다. 반정부 인사로 찍힌 위고는 벨기에로 도망쳤다가 다시 영국령 해협의 저지섬과 건지섬으로 옮겨 다니며 무려 19년간 망명생활을 했다. 그런데 이 망명이 위고에게는 오히려 인생최고의 창작기가 되었다. 잡다한 사교모임이나 의회 일정에 끌려 다닐 필요가 없어진 덕에, 시집 『징벌』(1853), 『명상시집』(1856)에 이어 1862년에는 그 유명한 『레 미제라블』까지 완성해냈다. 빵 한 조각 훔친 죄로 19년을 갇혀 지낸 장발장 이야기를, 정작 작가 자신도 19년간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써냈다는 사실은 우연치고는 너무 절묘하다.
위고는 권력자에게 미운털이 박혀도 할 말은 하는 사람이었다. 미국의 노예제 폐지론자 존 브라운(John Brown, 1800~1859)의 사형을 막아 달라고 호소했고, 멕시코를 침공한 프랑스에 맞서 싸운 베니토 후아레스(Benito Juárez, 1806~1872) 대통령을 지지하면서도, 정작 후아레스가 처형하려던 막시밀리아노 황제(1832~1867)의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부탁하는 등 진영논리에 갇히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사형제 폐지를 평생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1870년 나폴레옹 3세가 몰락하자 위고는 파리로 돌아왔고, 1885년 세상을 떠났을 때는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져 팡테옹에 안장되었다. 그의 80번째 생일을 기념해 살던 거리 이름이 아예 빅토르 위고 거리 로 바뀌었을 정도였으니, 죽기 전에 이미 살아있는 전설이 된 셈이다.
1829년의 빅토르 위고, 아실 드베리아의 석판화(위키피디아)
한국에 던지는 질문
위고의 일생을 들여다보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권력자가 헌법 절차를 무시하고 군대를 동원해 권력을 틀어쥐려 할 때, 글 쓰는 사람이 책상을 떠나 거리로 나서야 하느냐는 질문이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는 한국사회에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펜을 들 것이냐, 거리로 나갈 것이냐, 위고는 둘 다 택했다. 망명지에서도 글을 멈추지 않았고, 기회가 되면 직접 무기를 들고 맞섰다.
더 흥미로운 대목은 위고가 보여준 정치적 일관성과 유연성의 균형이다. 그는 진영의 노선을 무조건 따르지 않고, 적의 적이라 해도 그 인물이 부당하게 죽임당하는 것은 막으려 했다. 오늘날 한국정치가 진영 논리에 갇혀 같은 편의 잘못은 눈감고 상대편은 무조건 악마화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는 것과 대조적이다. 또한 위고가 19년의 망명 생활을 열패감에 젖어 보내지 않고 오히려 최고의 창작기로 바꾸어낸 것은, 지금 한국사회에서 정치적 좌절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권력은 유한하지만 기록과 목소리는 남는다는 것, 그것이 위고가 20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거리의 이름으로 살아남은 이유일 것이다.
레미제라블(1862) 원본에 에밀 바야르(Emile Bayard)가 그린 코제트 삽화(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