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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암살자(들) 음모론적 서사로 얻은 것과 잃은 것

암살자(들) 음모론적 서사로 얻은 것과 잃은 것
[사람들]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다룬 영화 암살자(들) 이 역사 왜곡 논란 속에서 16일 오전까지 관객 수 310만 명을 돌파했다. 사진은 지난 4일 서울의 한 영화관에 걸린 암살자(들) 포스터. 2026.10.4. 연합뉴스 영화 ‘암살자(들)’에서 동성일보 기자 한영일(이민호)의 형 한상일(정우성) 극동상사 회장은 문태광(문세광) 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날 개통식을 한 서울 지하철 1호선 건설에 참여해 박정희 정권에 막대한 정치자금(리베이트)을 빼돌리는 데에도 가담한, 당시의 강력한 한일 ‘정경유착’의 상징적 인물 가운데 하나로 등장한다. 박정희의 ‘만주인맥’ 백선엽 당시 교통부장관 그 한일 정경유착은 어느 정도였으며 어떤 모양새를 하고 있었을까. 그 단면을 당시 일본의 자본과 기술을 끌어들인 서울 지하철 1호선 건설 담당 주무장관 백선엽 당시 교통부장관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을지 모른다. 백선엽은 6.25전쟁 때 다부동 전투 등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이자 한국의 첫 4성 장군이 된 인물이지만, 박정희 ‘만주인맥’의 핵심 중 한 사람이기도 했다. 박정희는 1940년 4월에 일제의 대륙 침략군인 관동군 산하 신경군관학교 2기로 입교했고, 백선엽은 비슷한 시기에 봉천군관학교 9기로 입교했다. 1932년에 설립된 일제 괴뢰국 만주국 최초의 군사학교 봉천군관학교는 단기 속성 초급장교 양성학교였다. 백선엽 외에 정일권, 신현준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신경군관학교는 1939년에 설립된 정식 4년제 군사학교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본뜬 것이었다. 박정희와 이한림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대한민국 국군 건설의 중추가 바로 일제가 대륙침략과 식민지배를 위해 양성해낸 이들 ‘만주인맥’이었고, 그들 모두 ‘박정희 시대’에 크게 출세했다. 백선엽이 봉천군관학교에 들어가기 2개월 전인 1940년 2월부터 조선사람들에게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꿀 것을 강요한 일제의 ‘창씨개명’이 시작됐다. 백선엽의 일본식 이름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였던 것으로 한때 알려졌다.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1932년 상하이 훙커우(홍구)공원에서 열린 천장절(일본 국왕 생일 기념일) 겸 상하이 사변 전승 축하기념식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맞아 사망한 일제의 상하이방면군 총사령관(육군대장)이다. 백선엽이 하필 그 시라카와 대장을 흠모해 자신의 일본명으로 삼았다는 얘기는 그러나 사실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봉천군관학교 공식문서에 남아 있는 그의 이름은 시라카와 마사오(白川政雄)라고 한다. 백선엽이 그런 오해 또는 착각을 불러일으킨 것은 일본의 대륙침략군 대장 시라카와와 성씨가 같은데다, 그가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몸담은 데가 일제가 만주지역의 조선 항일독립운동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만든 ‘간도특설대’였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문세광 사건’ 당시 백선엽은 교통부장관으로 서울 지하철 1호선을 일본의 자본과 기술을 끌어들여 짓는 데 공을 세웠고, 그 시절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한일간 정경유착과 리베이트(사업 수주를 매개로 빼돌린 막대한 불법 정치자금) 관행에서 그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건 자연스럽다. 영화 중에 극동상사 한상일 회장이 역설하는 자기행동의 정당화 논리도 바로 그런 관행을 배경에 깔고 있다.    지난 4일 서울 성북구에 있는 영화 암살자(들) 의 주연 배우 유해진 자택 앞에서 보수단체 회원들이 제작사와 배우를 규탄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2026.10.4. 연합뉴스 한일 정경유착에 금이 가게 만든 김대중 납치사건 그 강력한 한일 정경유착 통로에 큰 금이 가게 만든 사건이 바로 전 해인 1973년 8월 8일 도쿄 그랜드팰리스(팔레스) 호텔에 투숙 중이던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이후락이 수장이던 당시 중앙정보부(KCIA) 요원들이 백주의 대낮(오후 1시 무렵)에 납치해 죽이려다 실종 5일만에 서울 자택 근처에서 풀어준 사건이다. 주권 침해를 비난하는 일본 내의 급격한 여론 악화와 야당의 거센 정치공세, 국제적인 비판 속에 파탄 위기에 직면했던 한일간 정경유착 통로를 복구시킨 것은 그해(1973년) 11월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의 일본방문과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총리와의 회담에서 합의된 정치적 결착(사건 진상규명 없는 봉합)이었다. 한일 권력자들 모두에게 절실했던 것은 진상규명이 아니라 신속한 정치적 봉합으로 그것을 덮어버리는 것이었다. 1961년에 출범한 미국 존 F. 케네디 정권은 달러 위기와 재정적자, 베트남전쟁 개입 등에 따른 막대한 대외원조 비용을 줄여야 했고, 미국 냉전정책의 동아시아 최전선인 한국 방위부담의 상당 부분을 미국의 냉전전략 아래 급성장하던 일본에 전가하려 했다. 일본은 그것을 기화로 일본의 전쟁책임 회피와 한국의 반일감정 등으로 막혀 있던 한일관계를 뚫고 일본 자본과 기술을 투입해 한국을 자국 경제권에 포섭하려 했다. 그렇게 해서 1965년의 한일협정과 청구권 문제가 한국 내의 거센 저항에도 타결됐다. 미국은 6.25전쟁 중인 1951년에 발효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당시부터 한일 양국에 국교정상화와 청구권 문제 타결을 압박하며 종용했다. 그로써 지금에 이르는 이른바 한미일 동아시아 삼각 동맹체제의 기본 틀이 구축됐다.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 팔레스 호텔에서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납치됐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김대중 씨가 납치 닷새 뒤 풀려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나무위키 흔들린 한미일 삼각동맹 복구 위해 일본 간 김종필 김종필의 당시 방일은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금이 가 흔들리는 한일 유착관계, 나아가 한미일 동맹(공조)체제를 긴급 복구하기 위한 조치였다. 김종필은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유감(사죄)의 뜻을 담은 박정희 대통령 친서를 전달하고 상당액의 정치자금을 다나카에게 건넸으며, 박 정권은 그와 함께 납치사건에 연루된 김동운 주일공사를 소환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그에 호응해 일본은 자국의 ‘김대중 납치사건 특별수사본부’를 해체함으로써 사태는 정치적으로 봉합됐다. 자작극 설과 충돌하는 김종필-다나카 겅치결착 이런 사실은 영화 ‘암살자(들)’가 문태광(문세광) 사건을 박 정권이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야기된 한일관계 경색과 정치적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벌인 ‘자작극’일 수 있음을 암시하는 음모론적 서사를 배경에 깔고 있는 것과 충돌한다. 김종필 파견으로 겨우 사태를 수습해 가던 박 정권이 유신헌법 공포(1972년 10월 17일)로 영구집권체제를 구축한 최고 통치자의 부인을 죽음으로 몰아간 위험천만 도박까지 벌이면서 한일관계를 다시 뒤집어 놓을 정치공작을 자작으로 감행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작극일 경우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그로 인해 입게 될 엄청난 손해와 위혐부담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다. 아마도 미국도 한미일 삼각동맹을 다시 뒤흔들어 놓을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영화 암살자(들)는 자작극 가능성을 극 전체 중 어디에서도 명시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얼핏 미국 언론보도 쪽에서 그런 얘기가 나왔다는 정도만 언급하고 지나갈 뿐 단 한 번도 자작극이라 주장한 대목이 나오지 않는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지난 5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배우자인 고 육영수 여사의 충북 옥천 생가를 방문해 역사 왜곡 논란을 빚고 있는 영화 암사자(들)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6.10.5. 연합튜스 영화적 장치로는 성공한 음모론적 서사 그럼에도 암시 차원의 음모론적 자작극 서사를 배경에 깐 것은 관객의 몰입도를 높이고 당시의 시대상황을 밀도있게 재현해 내는 영화적 장치 내지 도구로서는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역사적 사실(fact)과 역사적 진실(truth)은 다를 수 있다. 당시 각각의 역사적 사실들은 영화에서처럼 모두 직접적인 인과관계로 묶여 순차적으로 진행된 것은 아니지만, 사실과 허구(픽션)를 뒤섞어 재구성한 압축과 생략, 집중과 증폭을 통해 박정희 유신독재체제의 성격과 당시 한국의 정치·사회·경제적 상황을 박진감있게 되살려 관객 앞에 펼쳐 놓는데 매우 효과적으로 동원(활용)됐다. 역사적 사실들의 예술적 변용을 통한 역사적 진실 드러내기라고 할까. 그런 점에서 암살자(들)는 매우 성공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1974년 8월 15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8.15기념식 행사장에서 단상 쪽으로 달려나가 권총으로 저격하는 문세광이 제압당하기 직전 모습.   나무위키 영화가 겨냥한 것은 자작 여부 아닌 ‘시대적 진실’ 사람들은 영화 암살자(들)가 재구성한 ‘문세광 사건’이 박 정권의 자작극이냐 아니냐로 갑론을박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영화가 겨냥한 것은 ‘문세광 사건’이 자작극이냐 아니냐의 사실관계를 추적해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일어나게 만든, 또는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상황, 그 ‘시대적 진실’을 더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그 사건이 일어나기 4년 전인 1969년에 박정희는 장기집권을 위해 1회 중임을 허용한 기존 헌법의 대통령 연임 제한 규정을 고쳐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한다”고 고친 개헌안을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시켰다. 그렇게 해서 치러진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는 634만 2328표를 얻어 539만 5900표를 얻은 김대중보다 94만 6928표를 더 얻어 당선됐다. 당시 선거는 ‘이후락이 이긴 선거’라는 말이 돌았을 정도로 중앙정보부 등 권력기관이 깊숙이 개입한 관권선거, 부정선거라는 비판을 받았다. 당시 64만 5000명 정도이던 국군 상비병체제에서 군 장병들은 비밀투표가 아니라 누구를 찍는지를 지켜 보는 사실상의 공개투표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들이 퍼졌다. 당시 울산에서는 박정희의 득표율 76%가 81.2%로 둔갑한 사건이 적발되기도 앴다. 대학생들과 시민들의 3선개헌 반대 시위로 세상은 시끄러웠고, 1970년에 전태일 사건, 김지하의 오적 필화사건 등이 일어났다. 그해에 일본 신좌익 적군파가 일본항공의 보잉 727 요도호를 공중납치해 평양으로 갔다. 세상은 점점 더 위험하고 혼란스러워졌다. 1971년에 고려대를 비롯한 서울의 대학들에 위수령이 발동되고 무장한 군인들이 캠퍼스를 점령했다. 그해 12월 6일 박정희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뒤이어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선포했으며, 다음해 10월에는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는 등 정당과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유신헌법을 공포해 3기 연임이 아니라 영구 연임체제를 구축했다. 그해 2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적대국이었던 중국 수도 베이징을 전격 방문했고, 일본은 그해 9월 재빠르게 중국과 수교했다. 미국의 전면적인 반공주의 냉전전략에 기대고 있던 박정희 정권은 그런 경천동지할 변화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기존체제가 더는 그대로 유지되기 어렵다는 것을 예감하지 않았을까. 다음해인 1973년 12월에 헌법개정청원권운동본부가 결성되는 등 반유신 저항운동은 오히려 점점 더 거세졌고 박 정권은 1974년 1월 대통령긴급조치 1호를 발령(9호까지 이어짐)하는 등 탄압의 강도를 높여 갔다. 그해 4월에는 교수와 학생 등 1024명을 연행한 민청학련사건 을 발표했고 그들 중 일부를 가려내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날조 발표하고, 다음해 4월에 8명에 대해 전격적으로 사형을 집행했다. 그들을 포함한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은 2005년 이후 모두 서울 중앙지법 재심부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게 된다. 그렇듯 쌓여가는 모순을 해소하지 않고 억눌러 덮으려고만 한 경직된 체제는 5년 뒤 궁정동 안가의 비극을 거쳐 결국 스스로 무너졌다. 문세광 사건도 그리로 이어진 연결고리 중의 하나였다. 김대중은 1971년 4월 27일 치러진 대선 약 한 달 뒤 제8대 국회의원선거를 하루 앞둔 5월 25일 전남 무안에서 야당후보 지원 유세를 나갔다가 14톤 대형트럭이 그가 탄 차를 정면으로 들이받는 사고로 동승했던 보좌진 등 3명이 사망하고 그 자신은 고관절 등을 크게 다쳤다. 공작냄새가 짙은 의문의 그 사고로 평생 고통을 받게 되는 상처 치료를 위해 김대중은 1972년 8월에 일본에 갔고 그 두 달 뒤 유신헌법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유신반대 싸움을 시작했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그런 상황에서 일어났다. 음모론적 자작극 서사 배경으로 영화가 잃은 것 암살자(들)이 음모론적 자작극 서사를 배경에 깔면서 영화로는 성공했지만 잃어버린 것도 있다. 문태광(문세광)의 개인 서사와 그가 왜, 무엇을 위해 그 사건을 일으켰는지가 자작극 배경 서사에 가려 지워졌다. 그 결과 그는 북한 및 재일총련(조총련)의 박정희 제거 공작에 동원당한 수동적 도구(한국정부 발표)였거나, 박 정권과 중앙정보부가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한일 유착관계를 복원하고 국내의 정치적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그 사건을 기획했다는 자작극에 동원된 허수아비 희생양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전락했다.   1974년 8월 24일 구속 송치되는 문세광. 나무위키 가려진 문세광 개인 서사와 또 다른 시대적 진실 문세광 사건을 그런 정치공작적 시각으로만 보면 그를 중심으로 전개된, 그를 그 사건으로 내달리게 만든 또 다른 시대적 진실을 볼 수 없게 된다. 1951년 12월생인 문세광은 오사카에서 석면제조업을 운영하던 경남 진양군이 고향인 재일동포 집안의 3남으로 태어났다. 일본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그는 세이키(成器)상업고등학교(지금의 오사카학예고) 시절에 김일성 선집과 모택통(마오쩌둥) 어록 등 좌파서적을 닥치는대로 읽었다. 그때 당시 세이카(精華)여고 사회과학연구회 부장을 맡고 있던 1950년생 일본인 여성 가와카미 미키와 사귀게 됐다. 가와카미는 당시 조선문제나 부락(천민)해방운동 등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두 사람은 연인사이가 됐다. 차별받는 조선인 문제와 부락민 해방운동에 관심이 있었다면 당시 대두했던 급진적 좌파세력인 신좌익에 경도돼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좌익은 무장투쟁을 버리고 희외주의 노선을 채택한 일본공산당과 사회당 등 좌파정당의 관료주의적이고 교조적인 기존 노선을 거부하고 폭력적인 체제변혁과 세계혁명을 추구했다. 신좌익은 적군파, 연합적군파로 대중과 괴리된 소영웅주의적 극좌 폭력노선으로 치달리다 1972년 2월의 자폭적인 ‘아사마 산장’ 사건으로 자멸한다. 가와카미와 사귄 문세광의 사상적 취향도 그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가와카미는 문과 결혼하기를 원했으나 문이 결혼은 한국여성과 하겠다며 거절했다. 그가 보수적 민족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당시 일본사회 진출이 극도로 제한돼 있던 차별받는 재일동포 청년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일본인으로 귀화하거나 스포츠·연예계 또는 파친코 등 이른바 풍속산업계로 진출하는 것이었고, 조국(남북한) 통일을 출구로 삼는 진보적 정치사회운동에 가담하는 것은 또 다른 선택지의 하나였다. 현실이 차갑기 때문에 더 뜨거운 청년들 생겨나” 영화 ‘암살자(들)’에서 일본에 간 동성일보 한영일(이민호) 기자에게 그의 형 한상일(정우성)이 운영하는 극동상사 도쿄지사 직원 이강자(심은경)가 한 말이 그런 일본 현실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의미심장한 대사 가운데 하나였던 그 말은 다음과 같다. 여기는 차가운 현실이에요. 아무리 뜨거운 청년들이 온다고 해도 이곳의 겨울을 바꿀 수는 없어요. …하지만 영일 씨, 현실이 이토록 차갑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늘 더 뜨거운 청년들을 만들어내나 봐요. 그 뜨거움이 아니면 이 차가운 겨울을 조금도 녹일 수 없으니까요.” 이런 세계에서 살아간 당시 20대 초 나이의 뜨거운 청년 문세광이 과연 아무것도 모르는, 정치공작극에 동원된 수동적 도구에 지나지 않는 존재였을까? 가와카미는 1971년에 오사카 남서부의 센슈(泉州)지방 노조연합회 서기를 하고 있던 요시이 유키오와 결혼했다. 가와카미 미키의 이름도 남편 성을 따라 요시이 미키가 됐다. 요시이 미키는 결혼 뒤에도 문세광과의 관계를 지속했으며, 사건 당시 문의 일본인 신분의 여권발급과 한국 입국 등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고교시절부터 정치운동에 가담했던 문세광 사건 당시 문은 재일한국청년동맹(한청)에 소속돼 활동하고 있었다. 고교 2년 때 중퇴하고 오사카 재일한국인거류민단(민단) 이쿠노 구 북지부에 들어가 공장에 다니기도 했고 빌딩 외벽 유리청소도 하면서 생활하다 민단 오사카 본부 사무원이었던 여성과 결혼했다. 1972년 7월 4일 남북이 7.4공동성명을 동시에 발표했을 때 이미 한청에서 활동 중이던 문은 박정희 정권을 지지했던 민단 집행부와 대립했고, 한청은 민단 산하단체에서 제외됐다. 그 과정에 한국 중앙정보부가 깊숙이 개입했다. 김대중이 신병 치료와 일본 정치인들과의 교류를 위해 일본에 간 것은 7.4 남북 공동성명 발표 직후인 1972년 8월이었고, 이후 미국과 일본을 오가던 그가 ‘한국민주회복 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미국본부를 만든 것은 다음해인 1973년 7월 6일이었다. 그 달 10일에 김대중은 다시 일본에 갔고, 한청 멤버들은 망명 정객 김대중의 ‘비서단’으로 활동했다. 박정희 유신체제 반대를 위해 뭉친 셈이다. 그 다음달 8일에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났다. 그런 문세광을 KCIA가 알고 있었다는 건 당연지사 영화 암살자(들)와 관련해, 한국 중앙정보부의 일본 주재 요원이 문세광 사건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거나 감시 또는 지원하고 있었고, 문세광이 체포된 직후 일본인으로 알려졌을 때 그가 재일동포 문세광이라는 사실 등을 구체적으로 알린 사람이 바로 그 중앙정부부 주일 요원이었다는 얘기들이 돌았다. 그리고 마치 그것이 중앙정보부가 문세광을 자작극에 활용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공작한 증거처럼 인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확인되지 않은 설이다. 다만 그 중앙정보부 주일 요원이라는 사람이 자작극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 전부터 문세광을 알고 감시해 왔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보인다. 주일 중앙정보부 요원이 박정희 반대 정치운동을 열심히 벌이고 있던 재일동포 한청 멤버를 몰랐다면 그건 직무유기에 해당할 것이다. 주일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한청과 문세광은 늘 감시해야 할 요시찰 대상이었을 것이다. 다만 그 사실을 중앙정보부가 문세광을 일찍부터 공작대상으로 찍어 지원하고 키워서 박정희 암살기도를 가장한 정치공작적 자작극에 활용한 증거로 둔갑시키는 건 무리다. 그렇게 하려면 훨씬 더 정교한 논리와 증거들이 필요하다. 그 요원이 문세광을 일찍부터 알았다는 것과 그가 문세광을 자작극 하수인으로 고용하거나 조종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북한과 조총련 배후 조종 정부 발표의 신빙성 그리고 문세광의 한청 활동을 김대중의 직접적 영향과 연결하는 것도 무리다. 문세광은 김대중을 알기 전부터 민단 등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했고, 당시 일본을 풍미한 신좌익의 급진적 변혁사상에 경도돼 있던 문세광은 ‘비서단’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독자적으로 박정희 유신체제 반대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있었다. 문이 조총련 및 김호룡과 협력했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분명해 보이나, 그것이 한국정부가 사건 뒤에 발표한 대로 북한 및 조총련이 박정희 암살공작 사건의 배후이고 문세광은 그들에게 동원되고 조련당한 아무것도 모르는 허수아비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는 쪽으로 자동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 암살자(들)가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듯이 철저한 언론통제 및 조작이 일상화돼 있던 당시 한국사회 상황을 생각하면 그런 식의 정부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도 없다. 5.16 쿠데타 뒤 반공을 국시로 선포하며 등장한 박정희 정권은 그 18년 뒤 무너질 때까지 반북 반공이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미국으로부터도 정권안보를 보장받게 해주는 알파요 오메가였다. 당시 혼란스럽고 복잡하고 위험했던 의혹 투성이의 정치적 위기상황에서 북괴 와 조총련의 지령에 의한 재일동포의 대통령 암살 기도라는 사건 규정과 발표는 그런 상황을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잠재워 줄 수 있었다.  그런 사건 규정은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사람들은 반신반의했을 것이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그런 점에서 그럴듯한 음모론적 자작극 설이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유포되는 것 자체가 신문사에 정보기관원이 상주하면서 기사 하나하나의 크기와 제목까지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체포, 수감, 해고를 포함한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한 언론통제를 일상화했던 유신독재체제의 보수극우 수혜자들의 자업자득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의 발표를 누가 믿겠는가. 동성(동아)일보의 자유언론실천선언이 터져 나온 것이 영화에서처럼 문세광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진 않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도록 몰아간 유신독재의 폭력적 시대 상황은 역사적 사실(fact)과는 좀 다를지 몰라도 그 시대의 역사적 진실(truth)의 한 단면을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진실 가리는 자작극이냐 아니냐는 소모적 논란 문세광은 누군가가 만들어낸 암살공작에 동원된 수동적 도구였을 가능성도 물론 배제할 순 없지만, 복합적인 배경을 지닌 재일동포 청년으로서의 그 자신이 민족해방이든 계급해방이든 정치적 모험을 실현하기 위해 요시이 미키와 이와사 사토시 또는 마에다, 이케다 등 여러 이름으로 등장하는 수수께끼의 사나이(유연석) 또는 여러 인물들의 협력을 얻어 그것을 독자적으로 감행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어쩌면 그 두 가지가 부분적으로 겹쳐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쪽일 가능성이 자작극 쪽보다 더 높을 수도 있다. 물론 이건 그의 행위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문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얘기다. 지금 시대에 급진좌파든 극우든 폭력적 소영웅주의 정치행위를 지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통령 부인의 머리를 관통한 총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그 사건의 뒷감당을 두려워한 경호요원들을 비롯한 권력층의 책임회피 또는 위기관리를 위한 은폐공작 때문일 수도 있고, 의도하지 않았으나 이미 터져버린 사건을 정권 강화에 역이용하려 한 계산 결과일 수도 있다. 문이 비표도 없이 국립극장 현장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자작극을 뒷받침하는 방증자료일 수도 있지만 그날 경호체제 미비나 단순한 실수 탓일 수도 있다. 책임자들은 그 책임을 힘없는 아랫것 들에게 몽땅 덮어씌워 기강을 세우는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춤으로써 흔들리는 자신들과 체제의 안위를 지키려 했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그 사건이 박 정권의 자작극이냐 아니냐는 부차적인 문제일 수 있다. 암살자(들)는 자작극 여부를 규명하기 위한 영화가 아니라, 그 사건을 둘러싼 해결되지 않은 의혹들을 통해 박정희 유신독재체제의 억압과 저항, 분단과 냉전이 만들어낸 1970년대 한국사회의 정치적 긴장과 구조적 모순 등 당대의 역사적 진실에 한 발 더 가까이 가려는 시도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자작극 여부를 둘러싼 소모적인 논란은 오히려 진실에 대한 접근을 방해할 수 있으며, 그것을 바라는 정치세력도 있는 듯하다.한승동 에디터 sudohaan@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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