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저격 사건 최종선과 이건우 증언에 담긴 의미 [사회혁신] 영화 ‘암살자(들)’이 역사를 왜곡했다는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의 엉뚱한 공격에 시달리고 있다. 1974년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문세광의 육영수 저격 사건에 대한 수사가 완벽했고, 이에 따라 사법적 단죄가 깔끔하게 이뤄졌더라면 애초에 이런 영화가 만들어질 이유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당시 수사가 숱한 의문점을 남겼고 섣부른 재판이 많은 논란 거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이런 사실을 외면한 채 12.12 군사쿠데타나 5.18광주민주화운동처럼 사법적 단죄가 일단락된 사안을 뒤집으려 황당한 음모론을 제기한다는 식으로 몰아붙이고 있으니 어이없기 짝이 없는 일이다.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다룬 영화 암살자(들) 이 역사 왜곡 논란 속에서 관객 수 200만명을 돌파했다. 4일 영화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암살자(들) 은 3일까지 누적 관객수 204만 명을 넘겼다. 이로써 올해 개봉한 작품 중에 9번째로 200만명을 넘긴 작품이 됐다. 사진은 이날 서울의 한 영화관 암살자(들) 상영시간표 모습. 2026.10.4 연합뉴스
김대중 납치 사건과의 연관성
육 여사 저격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대중 납치사건과 연결지어 생각해봐야 한다. 1973년 8월 8일 일본 망명 중이던 야당 정치인 김대중이 도쿄 시내 호텔에서 납치됐다가 닷새 뒤에 서울 동교동 자택 근처 도로에서 발견되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이 일로 대한민국 정부는 심각한 외교적 곤경에 몰렸다. 일본은 왜 자국의 주권을 무시한 채 남의 나라 땅에서 자국 정치인을 체포해가는 황당한 짓을 벌였는지 묻고 차관 중단 등 강경한 대응책을 내놓고 급기야 김종필이 일본을 찾아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은 일본 내 차별에 시달리던 교포 2세 젊은이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안겼고, 유신정권과 정보공작 정치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 평소 박정희 전 대통령을 몹시 싫어했던 문세광은 이런 불만에 거사를 결행하려 마음먹었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그가 그런 엄청난 일을 꾸밀 만큼 사상적으로, 기술적으로 준비 된 상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어설픈 소아병적 영웅심리가 온갖 음모론이 싹트는 자양분이 된 것은 물론이다.
대학가를 비롯한 반유신 저항의 물결은 정권에 상당한 압박으로 다가와 탈출구가 필요했던 것은 사실이다.
육영수 모살 의혹이란 음모론과 별개로, 육 여사가 안타까운 죽음을 맞은 뒤 중정의 수뇌부에 중요한 변화가 생긴 점도 들여다보아야 한다. ‘피스톨 박’ 박종규 경호실장이 물러나고 1950년대 이등중사로 박정희, 김종필 등과 인연을 맺어 5.16 당시 박정희 부의장 경호부대 책임자로 14년 동안 그를 경호한 차지철이 후임자로 떠오른 것이다.
허술했던 경호가 음모론 불씨 키워
문세광(당시 23세)은 1968년 병사한 문병태와 육말란(당시 47세) 사이에 3남으로 태어났다. 육 여사와는 종씨라 이모 뻘이 될 수 있는 사이였다. 문세광은 재일교포 민단 계열의 청년동맹 회원으로 있다가 1972년 제명됐다. 그의 책꽂이에는 김일성 선집과 모택동 선집이 꽂혀 있었는데 펼쳐 읽어 본 흔적이 전혀 없었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남조선 인민의 투쟁을 도와주자’는 격문이 걸려 있었던 것으로 보아 조총련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볼 수 없었다.
1974년 1월 8일 중정이 유신헌법에 따라 긴급조치를 발표했다. 신직수 부장에 김재규 차장이었다. 김기춘과 현홍주가 검사로 파견돼 있었다. 같은 달 22일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가 공고됐고, 20일 뒤 투표가 행해졌다.
7월 18일 밤, 오사카 시내 다카쓰 파출소 숙직실에 도둑이 들어 잠든 순경의 주머니에서 창고 열쇠를 꺼내간 누군가가 권총 두 정을 가져갔다. 같은 달 24일 일본 외무성에서 요시이 유키오란 이름의 여권이 발행됐다. 요시이는 처자식이 있는 문세광과 함께 해외 여행을 다닌 여자친구의 남편이었다.
8월 6일 문세광이 문제의 여권 이름으로 대항항공 편으로 김포공항에 입국, 조선호텔 1030호실에 투숙했다. 오사카에서 훔친 권총 중 하나를 트랜지스터 라디오 속에 숨겨 반입했다.
광복절 경축식이 오전 10시에 열리는데 문세광은 8시쯤 리무진을 빌려달라고 했는데 마침 없어서 팔레스 호텔 소속 포드 20M를 대신 타고 장충단공원 국립극장 현관까지 바로 들어갔다. 최고급 차량을 타고 온 관계로 출입 비표가 없는데도 소지품 검사도 받지 않고, 복도에 선 채로 중얼거리는 문세광에게 경호실 직원이 다가와 빨리 식장 안에 들어가라고 재촉했는데 가운데 줄 C열 맨 뒤 좌석에서 세 번째 줄 통로 옆 자리가 비어 있어 앉았다.
10시 20분쯤 박 대통령의 기념사 중간에 가운데 뒷자리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리더니 문세광이 절룩거리며 뛰어나가 20걸음을 떼 대통령 앞 10m 지점에서 멈췄다. 대통령 연단을 향해 두 손을 받쳐 조준사격했는데 방탄 연단을 뚫지 못했다.
문세광의 이상행동을 가장 먼저 눈치챈 박종규 실장이 왼쪽 뒷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며 앞으로 튀어나오다 권총을 오른손으로 옮기면서, 오른손에 들고 있던 신문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이미 이때 육 여사의 몸은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었고, 박 실장은 육 여사 앞에서 그녀를 가리려 했고, 동시에 정체 불명의 남성이 육 여사의 의자 뒤에 몸을 숨겼다. 문세광이 주춤거리는 틈을 타 경호실 직원들이 달려들어 제압했고, 문세광이 놓친 권총이 허공에 튀어올라 김영목(당시 32. 서울시립교향악단 바이올리니스트)의 뺨에 상처를 내고 바닥에 떨어졌다.
문세광의 권총에는 원래 네 발의 총알이 장전돼 있었는데 1탄은 자기 발 복숭아뼈를 스치듯 했고, 2탄은 대통령 연단에, 3탄은 육 여사 머리에 맞추고, 4탄은 권총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문세광이 제압된 뒤에도 한 발의 총소리가 나 맨오른쪽 줄 앞에서 8번째 줄에 있던 장봉화(당시 17, 성동여실고 2학년 광복절 합창단 일원)가 총알을 맞았다.
1975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 8명의 사형 선고가 대법원에서 확정되자마자 다음날 곧바로 처형했다. 1974년 1월 10일 민청학련이 결성돼 반유신 시위가 확산됐다며 1975년 7월 9일 7명의 사형이 확정됐다. 1976년 연두기자 회견 때 포항 석유 개발 발표로 반전을 꾀했으나 삼일절 민주구국선언으로 이어졌고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으로 남북간에 긴장까지 고조됐다.
최종선 씨와 형 최종길 교수..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 화면 갈무리
최종선, 형의 죽음을 파헤치려다 문세광과 마주치다
숱한 의문점이 제기됐는데 그중에 가장 도드라진 두 사람의 증언을 되새겼으면 한다. 당시 수사 검사와 판사 등의 주장을 보수 매체들이 큼지막하게 보도했으나 모두 잘못된 수사와 재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인데 실체 규명을 방해하는 발언들을 거르지 않고 인용했다.
당시 중정 요원이었던 최종선(당시 29세) 씨와 이건우 서울시경 감식계장의 증언은 여러 모로 긴요하다. 유튜브 채널 ‘매봉쇼’를 진행하는 봉지욱 기자가 연휴 내내 소개했던 두 사람은 각각 2005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2021년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등에도 소개됐던 사람들이다. 최 씨는 중정 입사시험에 수석 합격해 근무하고 있었는데 친형인 최종길(당시 42세) 서울대 법대 교수가 1973년 10월 19일 간첩 혐의로 중정 6국에 끌려가 조사를 받다 투신 자살한 것으로 발표돼 큰 충격을 받았다. 최 씨는 정신병원에 위장 입원해 신변 안전을 확보한 뒤 형의 죽음을 몰래 캐다 다시 출근하라는 중정의 연락을 받고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육 여사 피격 사실을 듣고 부랴부랴 당일 밤 남산 중정 조사실로 달려갔다가 문세광과 마주쳤다. 중정 6국은 모두 특별수사본부 수사통제반에 들어간다는 얘기를 듣고 일하게 돼, 사건 직후 중정이 조선호텔 객실에 들어가 확보했다는 여행 트렁크를 처음 열어봤다고 증언했다. 최씨는 문세광이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으라고 해 얼굴을 보고, 여권 사진과 동일한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여권에 이시이 유키오란 일본 이름이 적혀 있어 일본인이라고 생각해 신원 발표문을 직접 작성했다. 이 문서를 김일두 서울지검장이 발표했는데 최씨에 따르면 실제 수사는 중정 6국이 주도했다는 것이다.
최씨는 남산 조사실에서 Y(그는 언젠가 이씨라고 성만 소개한 적이 있다)란 안면이 있던 중정 동료도 만난다. Y는 중정 조사 6국에서 근무하다 8국으로 전출돼 해외 공작 업무를 했던 것 같은데 휴가라며 사건 당일 밤 남산 조사실에 나타나 함께 수사통제반에서 일하게 된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Y는 북한을 동경하며 박정희를 매우 싫어하는 문세광을 찾아가 자동차를 사주는 등 환심을 사려 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있었기 때문에 문세광의 진짜 신원, 살아온 이력 전체가 중정에 곧바로 알려졌다는 것이 최씨의 주장이다.
여행사 여직원 등이 문세광이 묵었던 조선호텔 객실에 야간 투어 등으로 전화를 걸었을 때 한국 남성이 전화를 받더라고 진술한 사실은 당시 수사 기록에도 남아 있다. 당시 수사본부는 이런 진술을 받고도 문제의 남성을 수사하지 않았다.
최씨는 또 신원 발표문을 작성한 뒤 궁금해 마침 서울대 병원에서 육 여사 소생 수술에 참여한 신경외과 레지던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용태를 물었다고 했다. 대화 끝에 육 여사 상태를 물었는데 뒤가 없어 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통상 이마에 총알을 맞았다면, 뒤가 이런 상태가 된다는 게 최씨의 주장이다. 문세광은 무대 왼쪽에서 연단을 향해 달려가며 총격을 가해 정면을 바라보던 육 여사를 실수로 저격했다면 얼굴 옆면에서 옆면으로 진행하게 된다. 그런데 뒤가 없다는 것은 총알을 정면으로 맞았다는 얘기가 된다.
1981년 1월 중정 감찰실에서 근무하다 미국으로 건너가 생활하며 산자여 말하라 는 제목의 책을 발간해 같은 주장을 펼친 최씨는 오는 14일 귀국해 17일 친형 최종길 교수 사망 53주기 추모식에 참석하는 한편, Y의 신원을 공개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봉지욱 기자는 전했다. 봉 기자는 본인 주머니를 털고 여러 사람이 비용을 대 최씨의 항공권을 발급했으며, 3주정도 머무를 예정인 최씨의 체류 일정에 맞는 비용을 마련하고 있다고 알리기도 했다.
1989년 국정감사에 나와 육 여사 저격탄에 대해 증언하는 고 이건우 서울시경 감식계장.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화면 갈무리
이건우 감식계장 15년 만의 증언 너는 목숨이 몆 개냐
1차 수사 결과가 사건 당일 밤 자정쯤 발표됐고 다음날 현장감식이 벌어진 점도 이상하다. 현장감식에 나선 이건우 감식계장(영화 암살자(들) 의 박지환 배우)은 문세광이 실제 발사한 탄환의 탄착 순서는 ‘1탄 오발 → 2탄 연단 → 3탄 태극기 → 4탄 천장’이었다고 1989년 월간 다리 와의 인터뷰, 국정감사 등에서 주장했다. 33년간 근무하던 경찰을 1983년 정년퇴직한 그는 1989년 작가 노가원과 함께 영부인 암살자 란 책을 펴냈다.
그의 주장은 문세광이 실제 발사한 4발의 탄착지점이 육 여사를 맞힌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세광의 탄환이 육 여사를 맞혔다고 판단했던 공식 결론과 정면충돌한다.
당시 합동수사본부는 국립극장 현장에서 모두 7발의 총성이 울렸다고 발표했다. 1탄 (문세광 오발-탄두 수거), 2탄 (문세광 사격, 연단 목재에 맞은 탄흔 확인), 3탄 (문세광 불발), 4탄 (문세광 사격, 육 여사 치명상을 입힌 탄환 회수 못해), 5탄 (문세광 사격, 무대 뒤 태극기 근처 벽면에 박힌 탄환), 6탄 (경호관 응사, 합창단원 장봉화 양을 맞혀 사망케 한 경호관 탄환 확인), 7탄 (경호관 응사, 무대 바닥 및 벽면에 박힌 탄환)이라고 했다.
따라서 4탄 천장’이라는 이씨의 주장은 그야말로 폭발적인 주장이었다. 그런데 이를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당시 피격탄이 현장에서 회수됐다는 기록과 증언이 존재하지만 이후 누구에게 인계됐는지, 어떤 절차로 보관됐는지, 문세광의 권총과 개별 탄도 대조가 이뤄졌는지를 보여주는 완결된 공개기록을 현재 확인하기 어려운 것이 음모론의 출발점이다. 육 여사를 관통한 탄두가 실제 문세광의 38구경 권총에서 발사됐는지를 보여주는 탄두의 회수 → 인계 → 보관 → 탄도감정 → 감정결과로 연결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1989년 국회 국정감사에 나와 증언하기도 했던 이씨는 서울대 병원을 찾아가 수술 집도의 등을 만나려 했으나 중정 요원들이 방해해 만나지 못하고 대신 약국 공중전화로 통화했다. 집도의를 찾아 관통 부위가 어디냐 고 물었더니 두부관통총상이요 라고 답했다.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고 재차 물었더니 난 이만 바빠서요 라고 말하며 뚝 끊어버렸다는 것이다.
감식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총알을 회수해 간 중정이 집도의 접촉을 왜 한사코 막았을까 이상한 대목이다. 또 장봉화 양이 문세광의 총에 맞은 것이 맞느냐고 문제제기를 했더니 부장검사가 넌 모가지가 몇 개냐.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 고 무서운 겁박을 하더란 것이다. 요즘 같으면 그냥 겁주려 하는 말인가 보다 넘길 수 있겠지만 당시로선 소름끼치는 위협이었다.
현장검증 때 문세광이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도 문제다. 현장검증에 참여하지도 않은 김영수 검사(나중에 국가안전기획부 1차장, 문화체육부 장관도 지냄)가 연합뉴스 인터뷰를 통해 현장검증을 통해 사실관계가 다 확인됐다 거나 어처구니없는 경호 실패가 문제 라거나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실존 인물을 왜곡해선 안된다 같은 발언을 늘어놓았다.
수사 결과는 문세광의 1탄이 다리 허벅지에 맞아 절뚝거렸다고 했는데 나중에 이 계장이 보니 멀쩡하게 잘 걸어다니더라는 것이다. 문세광이 권총을 발 뒤꿈치 두꺼운 양말 속에 넣어뒀다가 꺼내려다 격발되면서 오발돼 이 과정에 가벼운 화상을 입었는데 총상을 입었다는 핑계로 현장검증에 나오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란 얘기다.
이 계장이 1999년 세상을 떠나 그의 증언을 들을 기회가 없다는 점은 안타까운 대목이다. 형사사건은 증거로만 판단해야 하는데 확정판결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판단의 핵심 물적 증거였어야 할 탄두의 회수·인계·감정 과정이 현재 공개된 기록만으로 충분히 확인되느냐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이런 점이 문세광을 사건 발생 128일 만에 서둘러 처형해야 했던 이유와 맞물려 각종 음모론이 자랄 수 있는 자양분을 만들어준 셈이다. 임병선 에디터 byeongseon1610@mindl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