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도 않은 말 때문에 단두대 오른 마리 앙투아네트 [사회혁신] 열다섯 살에 팔려온 신부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1755~1793)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1세(Francis I, 1708~1765), 어머니는 합스부르크 제국을 다스린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a, 1717~1780)다. 막내딸로 태어난 그녀는 정치의 도구로 쓰였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오랜 반목을 끝내기 위한 결혼동맹, 그 제물이 열네 살 소녀였다. 1770년, 한 살 어린 프랑스 왕세자 루이(훗날 루이 16세, Louis XVI, 1754~1793)와 결혼식을 올렸다. 두 나라의 화해를 상징하는 혼인이었지만 정작 프랑스 백성들은 오스트리아 여자 를 곱게 보지 않았다. 시집 온 첫날부터 그녀는 이방인이었고, 죽는 날까지도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1774년 시아버지 루이 15세가 죽자 남편이 왕위에 올랐다. 열여덟 살 왕비는 준비 없이 나라의 얼굴이 되었다.
1775년경의 마리 앙투아네트 초상화(위키피디아)
케이크나 먹으라지 는 누가 지어낸 말인가
마리 앙투아네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문장이 있다. 굶주린 백성이 빵이 없다고 하자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 고 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말은 그녀가 한 적이 없다. 이 표현은 그녀가 프랑스에 오기 훨씬 전, 사상가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의 자서전에 이미 등장한다. 왕비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떠도는 험담이 그녀에게 씌워진 것이다. 그런데도 이 한마디는 지금까지 그녀를 규정하는 대표 문장으로 남았다.
왜 하필 그녀였을까. 답은 간단하다. 미워할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라 살림이 거덜 난 진짜 이유는 오래된 전쟁 빚과 귀족들의 세금면제, 낡은 신분체제였다. 그러나 복잡한 구조적 문제를 설명하는 것보다 사치스러운 외국 여자 왕비 하나 를 손가락질하는 쪽이 훨씬 쉽고 통쾌했다. 그녀는 실제로 화려한 옷과 도박을 즐기긴 했지만, 나라를 거덜 낼 정도의 지출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팸플릿 제작자들은 입에 담기 힘든 성적 모함까지 곁들여 그녀를 짐승처럼 그렸다. 근거 없는 소문이 인쇄물을 타고 퍼지면 그것이 곧 사실이 되어버리는 구조, 18세기 프랑스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마리아 안토니아 대공비, 장 에티엔 리오타르(Jean-Étienne Liotard) 그림, 1762년 경(위키피디아)
목걸이 사건, 억울해도 여론은 믿지 않는다
1785년 벌어진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은 이 구도를 더 극적으로 보여준다. 사기꾼 잔 드 라모트(Jeanne de La Motte, 1756~1791)가 왕비의 이름을 도용해 추기경 로앙(Cardinal de Rohan, 1734~1803)에게서 초고가 목걸이를 가로챈 사건이다. 정작 왕비 본인은 이 거래를 알지도 못했다. 재판 결과 그녀의 결백이 밝혀졌지만 대중은 믿지 않았다. 구린 구석이 있으니 저런 일에 이름이 오르내리지 하는 정서가 더 크게 자리 잡았다. 진실이 밝혀져도 한번 씌워진 낙인은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몸소 겪었다.
마틴 반 마이텐스의 초상화, 1767-1768년경(위키피디아)
혁명, 그리고 단두대
1789년 프랑스혁명이 터지고 왕실은 파리로 끌려가 사실상 감금생활을 했다. 1791년 그녀는 연인이라 알려진 스웨덴 귀족 악셀 폰 페르센(Axel von Fersen, 1755~1810)의 도움으로 국외 탈출을 시도했으나 바렌이라는 마을에서 붙잡혔다. 이 실패한 탈주는 그녀를 반역자로 낙인찍는 결정타가 되었다. 1793년 1월 남편 루이 16세가 먼저 단두대에서 처형되었고, 그해 10월 16일 그녀도 같은 광장에서 목이 잘렸다. 재판과정에서는 일곱 살 아들에게 강요된 거짓 진술까지 동원되어 그녀를 파렴치한 인간으로 몰아갔다. 사실 여부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군중은 확인된 죄인이 아니라 미리 정해둔 범인을 원했을 뿐이다.
1793년 10월 16일 마리 앙투아네트의 단두대 처형: 왼쪽은 사형 집행인 상송이 군중에게 마리 앙투아네트의 머리를 들어 보이는 모습. 작자 미상, 1793년(위키피디아)
한국에 남기는 물음
이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이유가 있다. 근거 없는 말 한마디가 한 인물의 평생 이미지를 결정짓는 구조, 억울함이 밝혀져도 대중의 인상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 현상, 복잡한 정치·경제문제의 책임을 특정 인물 하나에게 몰아 짊어지우는 손쉬운 해결법. 이런 장면은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반복된다. 지금 우리사회에서도 검증되지 않은 말이 순식간에 퍼져 사실처럼 굳어지고, 한번 찍힌 낙인은 진실이 드러나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 일이 흔하다. 2024년 12월 3일 밤 계엄사태 이후로도 진실과 책임을 둘러싼 공방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누군가에게 모든 화살을 돌려 문제를 손쉽게 끝내려는 유혹은 늘 존재한다. 그러나 구조적 문제는 한 사람의 목을 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혁명 이후 프랑스가 겪은 혼란이 이를 증명한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사람들이 그녀를 어떤 사람이라 믿고 싶어 했는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그 간극을 메운 것은 활자와 소문, 그리고 분노의 배출구를 찾던 대중의 심리였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러나 그 법정이 진실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이 왕비의 생애가 똑똑히 보여준다.
1781년 샤를 르 클레르크 작, 루이 16세의 흉상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자녀들과 함께 묘사된 마리 앙투아네트(왼쪽은 도팽, 오른쪽은 마담 루아얄)(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