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 10년 갇힌 그람시가 파시즘을 이겼다 [뉴스] 왜소한 남자, 거대한 두려움
키 150㎝ 남짓, 등이 굽고 평생 병약했던 한 남자가 있었다.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의 파시스트 정권은 이 남자를 재판에 넘기면서 검사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 두뇌가 20년간 작동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몸을 가둔 게 아니라 머리를 가두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감옥이야말로 이 남자를 세계사상사에 이름을 새기는 작업실이 되어 주었다. 그 남자가 바로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다.
1916년의 그람시(위키피디아)
사르데냐의 가난뱅이, 토리노의 논객이 되다
그람시는 1891년 이탈리아 사르데냐 섬의 소읍 알레스에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고, 척추가 휘는 병까지 얻었다. 토리노 대학에 들어갔지만 생활고와 정치 활동에 몰두하느라 학위는 끝내 따지 못했다. 대신 그는 신문쟁이가 되었다. 노동자들이 읽는 신문에 날카로운 글을 쓰며 이름을 알렸고, 1921년에는 이탈리아공산당을 창당하는 주역이 되었다. 1924년부터는 당을 이끄는 자리에까지 올랐다.
시대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1922년 무솔리니가 권력을 잡으면서 이탈리아는 파시즘의 그늘로 들어갔고, 1926년 그람시는 결국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다. 겉으로는 재판을 거친 합법적 구금이었지만, 실상은 입을 틀어막으려는 정치 탄압이었다.
어린 시절의 그람시, 1897년경(위키피디아)
감옥에서 쓴 3천 장의 노트
여기부터가 진짜 흥미로운 대목이다. 몸이 갇힌 그람시는 대신 머리를 풀어놓았다. 10여 년의 수감 생활 동안 그는 서른 권이 넘는 공책에 3천 쪽이 넘는 글을 썼다. 이것이 훗날 『옥중수고』로 불리는 저작이다. 검열을 피하려고 마르크스라는 이름 대신 에두른 표현을 쓰기도 했고, 건강이 갈수록 나빠져 나중에는 손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1937년 4월, 조건부 석방 직후 그는 로마에서 숨을 거둔다. 향년 마흔여섯.
그람시가 남긴 원고는 곧바로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다. 동지였던 팔미로 톨리아티(Palmiro Togliatti, 1893~1964)를 비롯한 이들이 편집을 맡아 조금씩 세상에 내놓았고, 완전한 판본은 1975년에야 나왔다. 죽고 나서 40년 가까이 지나서야 그람시는 비로소 온전히 읽히기 시작한 셈이다.
그람시가 수학했던 토리노 대학교의 본부 건물(위키피디아)
총이 아니라 마음을 점령하라
그람시가 던진 질문은 단순했다. 왜 마르크스가 예언한 혁명은 서유럽에서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가. 그는 답을 이렇게 정리했다.
지배계급은 총칼로만 다스리지 않는다. 학교, 언론, 종교, 문화를 통해 사람들이 스스로 지금의 질서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이렇게 힘이 아니라 동의로 유지되는 지배력을 그람시는 문화적 주도권 이라 불렀다. 흔히 헤게모니라는 말로 번역되지만, 요점은 총보다 생각을 먼저 점령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람시는 두 가지 싸움을 구분했다. 단번에 국가권력을 빼앗는 기동전과, 참호를 파듯 시민사회 곳곳에서 서서히 진지를 넓혀가는 진지전. 총으로 궁궐을 점령해도 사람들 머릿속이 바뀌지 않으면 오래 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또한 그는 지식인을 두 부류로 나눴다. 기존질서를 대변하는 전통적 지식인과, 새로운 계급과 함께 성장하며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유기적 지식인. 지금 식으로 말하면 강단에 앉은 학자보다, 현장에서 사람들과 함께 언어를 만들어내는 이들이 진짜 힘을 가진다는 이야기다.
모스크바 모호바야 거리 16번지에 있는 그람시 기념 명판. 명판의 문구는 다음과 같다. 이 건물에서 1922년부터 1923년까지 국제 공산주의 및 노동운동의 저명한 인물이자 이탈리아 공산당 창립자인 안토니오 그람시가 활동했다. (위키피디아)
그렇다면 한국은?
2024년 12월 3일 밤, 한국은 계엄이라는 이름의 기동전을 목격했다. 총으로 국회를 막으려던 시도는 결국 실패했다. 그런데 그람시식으로 보면 정작 눈여겨볼 대목은 그날 밤이 아니라 그 이후다. 계엄을 옹호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방송과 유튜브와 종교 강단 한쪽에서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극우 유튜브가 젊은 세대의 일부에게 파고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그람시가 말한 문화적 진지 싸움이다. 권력은 총으로 잠깐 빼앗을 수 있어도, 사람들의 상식과 언어를 붙잡지 못하면 반드시 되돌아온다.
한국의 진보 진영이 그람시에게 배울 점은 여기에 있다. 선거에서 이기고 국회의석을 늘리는 일은 기동전의 승리일 뿐이다. 정작 오래 가는 승부는 학교 교실에서, 동네 도서관에서, 유튜브 댓글 창에서, 일터의 점심시간 대화에서 벌어지는 진지전이다. 반헌법 행위를 저지른 이들의 이름과 행적을 낱낱이 기록하고 널리 알리는 작업도 결국 진지전의 일부다.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법으로 단죄해도 같은 세력은 다른 얼굴로 되돌아온다.
그람시는 감옥에서 몸이 묶인 채로도 생각만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의 두뇌를 20년간 멈추게 하겠다던 검사의 다짐은 실패했고, 오히려 그람시의 사유는 백 년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도 세상 곳곳에서 작동하고 있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로마 시미테로 아카톨리코에 있는 그람시 무덤(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