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 랭 사인 지은 로버트 번스는 세리 출신 [사람들] 로버트 번스(Robert Burns, 1759~1796)라는 이름을 들으면 새해전야에 부르는 노래 올드 랭 사인 부터 떠올린다. 한국에서도 졸업식이나 송년회에서 곡조만은 익숙하게 들어봤을 노래다. 그런데 이 노래를 지은 사람이 세금 걷는 관리, 즉 국가권력의 말단 실행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스코틀랜드 서남부 에어셔의 가난한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난 번스는 젊은 시절 내내 밭을 갈며 등이 휘는 노동을 했고, , 동시에 왕과 귀족을 조롱하는 시를 몰래 써서 돌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겉으로는 체제 안의 공무원, 속으로는 체제를 흔드는 반골이었던 셈이다.
알렉산더 네이스미스 작 로버트 번스 초상화, 1787년(위키피디아)
신분이 뭐가 대수냐
번스가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이유는 단지 서정시를 잘 써서가 아니다. 그는 신분질서 자체를 비웃었다. 1795년에 쓴 인간은 인간일 뿐 이라는 시에서 그는 계급장은 기니 금화에 찍힌 도장일 뿐, 인간의 값어치는 그 자체로 정해진다 는 취지의 구절을 남겼다. 쉽게 말해 너 귀족이라며 대단한 척하는데, 그 작위라는 거 동전에 찍힌 무늬랑 다를 게 뭐냐 는 소리다. 18세기 유럽 귀족사회에서 소작농의 아들이 이런 말을 공공연히 떠들었으니, 지금으로 치면 SNS에서 재벌가를 향해 네 성이 뭐라고 유세냐 라고 쏘아붙이는 격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시를 처벌하기보다 노래로 만들어 불렀다. 풍자가 너무 재미있어서 검열이 따라잡지 못한 경우다.
스코틀랜드 사우스 에어셔주 얼로웨이에 있는 번스가 살던 초가집(위키피디아)
혁명의 시대, 위험한 붓끝
번스가 살던 시기는 프랑스혁명(1789)이 유럽전역을 뒤흔들던 때다. 그는 노예제 폐지 운동가 윌리엄 로스코(William Roscoe, 1753~1831), 페미니즘의 선구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1759~1797) 같은 급진 지식인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1793년 프랑스 왕 루이 16세가 처형되자 영국지배층은 벌벌 떨며 급진파를 단속했는데, 번스는 오히려 위증한 멍청이를 위해 눈물 흘릴 필요 없다 는 식의 냉소를 남겼다.
같은 해 그는 스코틀랜드여, 피 흘려 싸운 자들이여 라는 애국적이면서도 봉기를 촉구하는 노래를 썼다. 세리라는 신분 때문에 이런 시들은 대개 익명으로 발표되거나 조심스럽게 유통되었다. 겉으로 순응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저항의 노래를 퍼뜨리는 이중생활, 이것이 번스가 서른일곱 짧은 생애 동안 짊어진 긴장이었다. 그는 지병인 류머티즘성 심장질환으로 1796년 세상을 떠났지만, 죽기 몇 주 전까지도 선동이든 신성모독이든 쓰겠다 는 편지를 남길 만큼 굽히지 않았다.
번스 초가집 내부의 번스 가족을 묘사한 모습(위키피디아)
한국이 새길 대목
번스의 이야기가 한국에 주는 시사점은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첫째, 그는 권력을 정면으로 들이받기보다 웃음과 노래로 에둘러 조롱함으로써 오히려 더 널리, 더 오래 퍼지는 저항을 만들었다. 판소리나 탈춤에서 양반을 풍자하던 우리 민중예술의 전통과 닮은 지점이다. 정색하고 싸우면 검열관이 먼저 달려들지만, 웃기면서 찌르면 대중이 먼저 외운다.
둘째,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한국사회가 다시금 절감했듯, 권력은 언제든 표현의 자유를 옥죌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한다. 그런 시절일수록 예술가와 시민이 풍자와 해학의 언어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번스가 그러했듯, 웃음은 검열보다 질기다.
셋째, 그는 국가기관의 녹을 먹으면서도 양심의 붓을 꺾지 않았다. 공직에 있는 이들이 침묵을 강요받을 때, 완전한 침묵과 완전한 폭로 사이에 제3의 길, 즉 풍자와 은유로 진실을 전하는 길이 있음을 그는 몸소 보여주었다. 지금 한국에서 공익신고자와 양심적 공직자들이 겪는 딜레마와도 무관하지 않다.
번스는 죽었지만 전 세계 서구인들이 새해전야에 부르는 올드 랭 사인 과 새해 1월 25일 번스 나이트 라는 축제로 그의 노래와 시는 되살아난다. 스코틀랜드 전통음식인 해기스를 썰며 그의 시를 낭송하는 스코틀랜드인들처럼, 한국도 언젠가 웃음과 풍자로 권력을 발가벗기는 전 국민적 축제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진지함만으로는 못 이기는 싸움이 있다. 가끔은 함께 웃고 서로 웃겨야 이긴다.
스코틀랜드 리스(Leith) 버나드 스트리트에 있는 데이비드 왓슨 스티븐슨의 번스 동상, 1898년 제작(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