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 소송 정부 패소···진짜 책임져야 할 사람 어디로 [뉴스] 지난 2월 엘리엇 ISDS 불복소송 승소 브리핑하는 정성호 당시 법무부 장관. 연합뉴스 자료사진
미국계 사모펀드 엘리엇에 패소했던 국제투자분쟁(ISDS) 판정을 뒤집기 위해 기존 중재판정을 취소하는 판결을 받아냈던 한국 정부가 환송중재에서 재차 패소했다. 이재용 회장의 불법 승계와 국민연금이 지원하도록 정권이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엘리엇 소송의 빌미를 제공했는데 이에 대한 책임 규명은 온데간데 없고, 몇 년에 걸친 소송 비용과 연 5% 안팎의 지연이자가 누적돼 국고 부담만 키웠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이대로 우리 정부의 패소가 확정되면, 약 680억원의 배상 원금과 지연이자 등 1500억 원대를 물어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유사한 쟁점으로 계류 중인 다른 ISDS 사건들까지 영향을 미칠 것을 감안하면 잠재적 재정 손실과 대외 신인도 하락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런데도 역대 정부끼리, 정파끼리 책임 떠넘기기 공방을 벌일 조짐을 보이니 한심한 일이다.
법무부는 엘리엇 ISDS 사건의 환송중재 판정부가 지난달 30일 오후 7시(한국시간)쯤 한국 정부의 패소 판정을 선고했다고 다음날 밝혔다. 판정문에 따르면 정부가 엘리엇에 지급해야 할 배상원리금과 소송 비용 가운데 엘리엇이 정부에 지급해야 할 소송 비용을 상계하면 약 1억 1300만달러로, 선고일 기준 환율(1355원)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1530억원이다.
원 중재판정부와 동일한 3명의 중재인으로 구성된 환송중재 판정부는 2015년 당시 한국 정부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 합병에 찬성하도록 개입한 행위와 엘리엇의 손해 사이에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이 사건은 엘리엇이 2018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근거해 ISDS를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하는 과정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에 부당하게 개입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중재판정부는 2023년 6월 정부의 배상책임을 인정해 엘리엇에 배상금과 지연이자 등을 지급하라고 판정했다.
정부는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가 한미 FTA상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조치가 아닌 만큼 중재판정부에 관할권이 없다며 같은 해 7월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한동훈 당시 법무부 장관이 정부와 야당에서 뜯어말리는 이들이 많았는데도 본인이 밀어붙였다고 자랑삼아 얘기한 사실은 많은 이들의 기억에 분명히 각인돼 있다.
1심 법원은 2024년 8월 정부의 소송을 각하했지만, 이듬해 7월 영국 항소법원은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사건을 1심 법원으로 돌려보냈다.
1심 법원은 올해 2월 국민연금을 국가기관으로 볼 수 없다는 정부 측 주장을 받아들여 원 중재판정을 일부 취소했다. 2023년 판정 이후 약 2년 8개월간 이어온 취소소송에서 정부가 승소한 것이다. 법원은 당시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 과정에 개입한 행위 자체는 한미 FTA상 관련성 있는 조치에 해당한다고 보고, 이 같은 정부의 개입과 엘리엇의 손해 사이 인과관계 등을 다시 판단하도록 사건을 중재판정부로 돌려보냈다.
정부와 엘리엇 모두 이에 항소하지 않으면서 원 중재를 맡았던 판정부가 다시 사건을 심리했으나, 판정부는 정부의 개입과 엘리엇의 손해 사이 인과관계를 인정해 다시 정부 패소로 결론 내렸다. 이에 따라 취소소송 승소로 원 중재판정 일부를 무효화했던 정부는 7개월 만에 다시 배상 책임이 있다는 판정을 받았다.
엘리엇 측은 이번 판정에 대해 한국 정부가 실질적 근거도 신빙성도 없이 지연을 위해 원 중재판정에 불복하는 바람에 납세자들이 부담해야 할 금액만 약 1890만 달러(약 254억 원)가 늘었다 고 주장했다. 아울러 엘리엇은 중재판정부는 한국 정부의 위법한 개입이 없었다면 국민연금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반대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며 이번 판정을 환영하며 정부가 이제 판정을 수용하길 바란다 고 강조했다. 엘리엇은 한 걸음 나아가 이번 사안을 매듭지음으로써 한국 자본시장이 왜 코리아 디스카운트 에 시달려 왔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재벌 비호의 한 시대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 이라고 덧붙였다.
법무부는 이번 판정에 대해 관계부처,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 등과 함께 본건 판정문을 면밀하게 분석해 필요한 후속 조치에 최선을 다하겠다 고 밝혔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015년 5월 7일 경기도 평택 고덕 국제화계획지구에서 삼성전자 반도체 평택공장 기공 발파식을 마친 뒤 이재용 삼성 부회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2015.5.7 연합뉴스 자료사진
탈법 경영권 승계로 원인 제공한 이들은 입장 표명 없어
국내 형사판결이 국제 법정 패소 불러왔다 엉뚱한 화살
경영권 불법 승계가 국제소송을 불러왔는데 이재용 회장이나 삼성 그룹은 이번 패소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내놓지 않고 있다. 오히려 광고 수입에 민감한 매체들은 국내 형사재판에서 국가권력의 부당 개입을 입증해낸 논리가 국제 통상법정에서 패소하는 데 결정적 증거로 작용했다고 엉뚱한 곳에 화살을 돌리고 있다.
물론 그런 측면이 전혀 없지는 않다. 2017년 탄핵 정국 이후 특검은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 등을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했고, 대법원은 2022년 이들의 유죄를 확정했다. 2018년 엘리엇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ISDS에서 엘리엇 측의 핵심 입증 자료는 한국 검찰의 공소장과 법원의 유죄 판결문이었다. 사법기관이 직접 국가권력이 국민연금을 동원해 주주에게 손해를 끼쳤다”고 인정한 기록이 고스란히 국가의 배상 책임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로 쓰인 셈이다. 국내 형사재판에서는 국민연금이 복지부의 위법한 지휘를 받는다고 판단한 반면, 국제법정에서는 독립된 기관이라고 주장하는 법리적 상충이 발생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분석은 불법 경영권 승계에 눈감고 박근혜 정부 때 최순실과 정유라의 승마 말 로비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를 좌우했던 국정농단의 폐해에 대한 역사적 단죄의 의미를 지나치게 가벼이 여기는 분석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지난달 28일 법무부는 스위스 승강기업체 쉰들러 측이 법정 제기기간 안에 프랑스 파리 항소법원에 취소소송을 내지 않아 약 3250억원 배상청구를 전부 기각한 지난 3월 14일의 중재판정이 그대로 확정됐다고 밝혔다. 정부가 쓴 소송비용 약 96억 원도 쉰들러 측에서 받을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쉰들러는 현대엘리베이터의 2대 주주였다. 쉰들러는 2013~2015년 유상증자 등으로 지분율이 약 35%에서 15% 안팎으로 낮아졌다고 주장했다. 공정거래위와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의 조사가 부족했다는 논리였다. 2018년 10월 중재신청통지가 접수됐고 약 8년이 걸려 소송이 이어졌다.
청구액은 약 4900억원에서 최종 약 3250억원으로 조정된 것으로 전해졌다. 중재판정부는 우리 당국의 조치가 자의적이거나 차별적이지 않다고 봤다. 한국 법원에서 이미 주주대표소송으로 구제를 받았다는 점도 반영됐다는 보도가 있다.
더욱 앞서는 론스타 사건이 있다. 2022년 8월 론스타에 약 4000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정이 나왔다. 정부는 이후 판정 취소를 신청했다. 당시 야권에서는 승소 가능성이 제로라는 비판이 나왔다고 보도됐다. 법무부 장관 후보자였다가 자진 사퇴한 김승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런 지적에 앞장섰다고 무소속 한동훈 의원이 인사청문회 준비 국면에서 주장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취소 절차는 본안을 다시 따지지 않아 승소가 어렵다는 평가가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2025년 11월 취소위원회가 배상 의무를 모두 취소했다. 소송비용 약 73억 원 환수 결정도 함께 나왔다.
한동훈 의원은 지난 2월 엘리엇 사건이 영국 법원 취소소송에서 이겨 약 1600억 원의 배상 의무가 잠정 소멸되고 환송 중재로 넘어가자 대단한 승리라도 거둔 듯 기고만장했다. 한 의원이 장관이던 2023년 8월 만든 법무부 국제법무국이 큰 공을 세운 것으로 떠들썩하게 알려진 것은 물론이다.
다만 쉰들러는 국제법무국 출범보다 앞선 2018년에 시작돼 한 의원이 주도했다고 보기 힘들다. 그는 엘리엇 승소 직후 페이스북에다 당시 소송 제기를 뜯어말리던 민주당에 반성과 성찰을 촉구했다. 정성호 당시 법무부 장관은 엘리엇 승소를 두고 한 번에 얻은 결과가 아니라고 밝혔다. 론스타도 20년 넘게 이어진 분쟁이라 여러 정부와 실무진이 거친 결과로 봐야 한다. 쉰들러 사건도 2018년부터 여러 정부를 지나왔다.
문제는 이런 ISDS 소송이 줄줄이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란 다야니 가문의 2차 소송도 남아 있다. 메디슨 캐피털의 소송도 진행 중이다. 론스타도 취소된 부분에 대해 2차 ISDS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지적이 있다. 쿠팡 미국 투자사들은 올해 1월 ISDS 중재의향서를 냈다. 중재의향서는 정식 중재 전에 서면으로 알리는 절차라 분쟁이 시작된 것은 아니다. 지난 4월에는 90일의 사전협상 기간이 끝났다는 보도가 나왔다. 정식 중재 제기 여부는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쉰들러 승소가 다른 분쟁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 예상되지만 그렇다고 모두 패소할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사건마다 쟁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ISDS 배상금은 결국 국가 재정에서 나가는 돈이라 세금과 이어지기 때문에 최대한 신중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 의원은 엘리엇에 패소한 사실이 알려진 1일 페이스북에 간단히 입장을 밝혔다. 지난 엘리엇 소송 전부 승소 이후, 후속 절차에서 이재명 정부가 더 세심하게 마무리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고 밝혔다. 친정 정당인 국민의힘에서도 가장 정상적이지 않은 청년 대변인이 잘 되면 내가, 잘 안 되면 내가? 라고 비아냥댄 것은 웃픈 정치현실을 드러낸다.
엄청날 수 있는 파장에 견줘 너무도 간결한 반응이긴 했다. 평소 그의 유난한 SNS 활용과 비교하더라도 로 키 (low-key)로 넘기려는 속내가 엿보여 씁쓸하고, 책임을 돌리려는 태도가 안쓰럽기까지 하다.
무소속 한동훈 의원이 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개정 형소법 시행 D-1 토론회 : 검찰 폐지, 내일부터 지옥문이 열린다 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26.10.1 연합뉴스
임병선 에디터 byeongseon1610@mindl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