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년 전 알기 쉬운 미적분 쓰고 지식 보급, S. 톰슨 [뉴스] 요크의 교사 집 아들, 왕립학회 회원이 되다
실베이너스 필립스 톰슨(Silvanus Phillips Thompson, 1851~1916)은 영국 요크의 퀘이커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가르치던 부덤 학교(Bootham School)를 다녔고, 나중에는 그 학교 교단에 교사로 섰다. 왕립광산학교에서 물리와 화학을 더 익힌 뒤 1876년 브리스틀대학 물리학 강사가 되었고, 1878년에는 교수가 되었다. 1885년에는 런던 핀즈버리 기술대학의 책임자로 옮긴 뒤 죽을 때까지 30년 넘게 학생을 가르쳤다. 1891년에는 영국 왕립학회 회원이 되었다. 회원은 이름 뒤에 FRS (Fellow of the Royal Society)라는 영광의 글자를 붙일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훗날 그 글자만 책 표지에 올리고 정작 이름은 감추는 별난 짓을 한다.
실베이너스 필립스 톰슨(위키피디아)
보이지 않는 빛을 눈앞에 꺼내 놓다
1895년 말 독일의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Wilhelm Conrad Röntgen, 1845~1923)이 엑스(X)선을 발표했다. 소식이 영국에 닿은 이튿날 톰슨은 벌써 같은 실험을 되풀이했다. 1896년 3월에는 런던 임상학회에서 첫 공개 시연을 해 보였다. 그해 왕립연구소 성탄 강연의 제목은 「빛,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 강연은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7)가 1825년에 시작한 아이들 대상 행사인데, 톰슨은 그 패러데이의 평전도 썼다. 켈빈 경 윌리엄 톰슨(William Thomson, Lord Kelvin, 1824~1907)의 공식 평전도 맡았다. 다만 초반에 거들던 켈빈 경이 완성 전에 세상을 뜨는 바람에 주인공의 검수는 받지 못했다.
1896년에 그는 우라늄 소금이 보이지 않는 선을 내뿜는다는 사실도 관찰했다. 빛에 반응하는 약품을 바른 유리판, 곧 옛 사진 필름 격인 건판을 알루미늄판으로 가리고 그 위에 우라늄 소금을 올려 두었더니, 건판이 알루미늄판을 뚫고 검게 변했다. 프랑스의 앙리 베크렐(Henri Becquerel, 1852~1908)과 거의 같은 시기였다. 두 사람 모두 그 현상을 초(超)인광 쯤으로 여겼으니 방사능이라는 이름은 아직 없었다.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은 베크렐과 피에르 퀴리(Pierre Curie, 1859~1906)·마리 퀴리(Marie Curie, 1867~1934) 부부가 나눠 가졌다. 톰슨에게는 훗날 그의 이름을 단 기념강연과 은메달이 남았다. 영국 방사선학회가 1918년부터 해마다 여는 강연이다. 상은 파리가 가져가고 강연은 런던에 남은 셈이다.
그는 과학사 연구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자석 연구의 선구자 윌리엄 길버트(William Gilbert, 1544~1603)의 평전을 썼다. 전화기 발명자는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 1847~1922)이 아니라 독일의 교사 필리프 라이스(Philipp Reis, 1834~1874)라고 끝까지 고집하기도 했다. 이렇게 고집을 부려도 문헌이 따라붙는 사람이었다.
1900년의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위키피디아)
한 바보가 하는 일은 다른 바보도 한다
1910년 톰슨은 『Calculus Made Easy』(2016년 한글 번역본 제목 알기 쉬운 미적분 )을 냈다. 저자 이름은 없고 F.R.S. 세 글자뿐이었다. 표지 문구는 한 바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바보도 할 수 있다 는 고대 원숭이 속담 이었다. 서문에서는 계산을 해내는 바보가 이토록 많은데 다른 바보가 그 요령을 익히는 일이 어렵고 지루하다고 여겨지는 게 놀랍다며 능청을 떤다.
첫 장의 제목은 대략 예비 공포에서 당신을 구해 드립니다 다.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3~1727)과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는 미적분을 누가 먼저 만들었느냐로 평생 으르렁거렸다. 톰슨은 그 보물을 아예 길바닥에 풀어 나눠 준 셈이다. 이 책은 지금도 팔린다. 1998년에는 마틴 가드너(Martin Gardner, 1914~2010)가 편집한 판도 나왔다.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위키피디아)
예는 예, 아니오는 아니오
톰슨은 평생 퀘이커교도였다. 퀘이커는 맹세조차 사양하고 예는 예, 아니오는 아니오 라고만 말하는 사람들이다. 1895년 맨체스터 회의에서 톰슨은 「과학자가 진실한 퀘이커일 수 있는가」를 강연했고 결론은 그렇다 였다. 무오류의 사람도, 교회도, 책도 없다는 것이다. 정확히 생각하고 정확히 말하는 버릇은 퀘이커교의 특징이면서 과학의 방법이 갈수록 굳혀 주는 것이라고 했다. 1915년 스와스모어 강연 「진리의 탐구」에서는 마음속의 빛이 과학자에게는 직관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이 정직함은 값이 비쌌다. 보어전쟁(1899~1902) 때 영국정부가 남아프리카에서 민간인을 수용소에 가두고 학대하자 그는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1901년 개편된 런던대학교의 책임자 자리를 놓친 것도 이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1916년 6월 그는 세상을 떠났다. 유럽을 휩쓴 1차 세계대전 때문에 마음 깊이 괴로워하던 때였다.
25세 무렵의 실바누스 톰슨(위키피디아)
한국에서 읽는 톰슨, 무엇을 배울까
첫째, 쉬운 말은 민주주의의 기반시설이 아닐까. 한국에는 수학을 일찌감치 포기한 학생을 뜻하는 수포자 라는 말이 있고 관청 서류와 판결문에는 아직도 일반인이 못 알아듣는 말이 넘친다. 어려운 말로 쌓은 담장 안에서 권위는 편안하다. 2024년 12월 3일 밤 국회로 달려간 시민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난해한 법리가 아니라 계엄이 무엇이고 왜 위헌인지 알려 주는 쉬운 말이었다. 헌법과 법률을 바보도 할 수 있는 일 로 풀어 주는 사람이 더 많아지면 어떨까.
둘째, 숫자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법원 판단과 검증으로 근거가 없다고 가려진 부정선거 주장이 숫자 몇 개를 들고 광장을 메운 적이 있다. 정확히 생각하고 정확히 말하라는 톰슨의 퀘이커식 과학은 이런 데 쓰라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부터 근거를 따지는 훈련을 시키면 음모론 시장은 훨씬 좁아질 것이다.
셋째, 과학을 대하는 태도다. 2024년 윤석열 정권에서 연구개발 예산이 수조 원 깎이면서 연구현장에서는 비자발적 실직이 늘고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는 이도 나왔다. 나눠먹기 를 걷어 낸다는 명분은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 예산을 늘려도 한번 꺾인 연구자의 마음까지 예산표처럼 되돌리기는 어렵다. 톰슨은 기술교육에 30년을 바쳤고 아이들 앞에서도 강연했다. 한국에도 과학자가 시민과 아이 앞에 서서 쉬운 말로 이야기하는 전통이 자리 잡도록 제도로 뒷받침하면 어떨까.
넷째, 쓴소리의 값이다. 톰슨은 정부를 비판하고 자리를 놓쳤다. 정권에 쓴소리를 한 학자와 공익신고자가 값을 치르는 일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문제는 값을 치르는 사람을 칭송하는 일에서 그치지 않고, 애초에 값을 치르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다섯째, 이웃의 퀘이커다. 한국에서 퀘이커 하면 함석헌(1901~1989)이 떠오른다. 그는 민중을 씨알 이라 부르며 가르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생각할 친구로 대했다. 어려운 학문을 쉬운 말로 풀려 한 톰슨과 마음이 통한다. 바보도 알아볼 만큼 쉽게 쓰인 진실은 지워지지 않는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요크 부덤 스쿨(Bootham School) 본관 정면에 설치된 톰슨 기념 명판(영국 물리학회 후원)(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