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할 자리 를 떠나 산으로 간 부산의 역사 기념사업 [행사]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다. 부산의 역사 기념사업이 꼭 그렇다. 3·1운동 기념탑은 동래 마안산 꼭대기에 세워졌다. 항일학생의거 기념탑은 초읍 어린이대공원 안에 세워졌다. 용두산공원에 있던 4·19 위령탑은 영주동 구봉산 자락으로 옮겨졌고, 부산의 유일한 민주화운동 기념시설인 민주공원도 그 산자락에 있다.
그러나 1919년의 만세는 학교와 장터에서 터졌다. 1940년의 학생 항거는 운동장과 거리에서 일어났다. 1960년과 1979년의 함성도 거리에서 울렸다. 사건은 사람들이 모이는 평지에서 일어났는데, 기념은 사람들이 잘 오르지 않는 산으로 갔다.
베를린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나치 비밀경찰 본부 터에는 ‘테러의 지형’ 기록관이, 장벽이 서 있던 베르나우어 거리에는 장벽 기념관이 들어섰다. 기억할 대상을 옮겨 전시하지 않고 기억이 생겨난 자리를 지켰다. 그곳에서는 . 이 글은 그 이유와 결과를 묻는다.
마안산 꼭대기의 3·1독립운동기념탑
부산 3·1독립운동기념탑은 1995년 8월 동래 마안산 정상에서 기공식을 열고 이듬해인 1996년에 준공되었다. 건립 취지는 부산에서 전개된 3·1운동을 기념하고, 그 정신을 후대에 잇는 민족정신 교육의 장으로 쓰자는 것이었다.
동래 마안산 꼭대기에 들어선 부산 3.1독립운동기념탑
부산의 3·1운동은 어디에서 일어났는가.
○ 3월 11일: 부산진 일신여학교 학생들의 시위
○ 3월 13일: 동래고보 학생이 중심이 된 수천 민중의 봉기
○ 3월 18일·19일: 범어사 명정학교 학생과 군중이 합류한 동래 장터 시위
○ 3월 29일: 구포 장날, 대형 태극기와 현수막을 앞세운 대중집회와 주재소 습격
○ 4월 5일: 기장 장날, 청년들이 중심이 된 수천 명의 궐기
학교와 장터였다. 마안산 산꼭대기에서 만세가 터졌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탑을 동래에 세운 것은 동래 장터의 만세를 염두에 둔 것이겠지만, 탑이 선 자리는 장터가 아니라 장터를 내려다보는 산 위였다.
결과는 ‘기념탑 따로, 기념식 따로’였다. 기념행사는 처음에는 탑 앞에서 열렸던 듯하나 몇 해 지나지 않아 동래고등학교로 옮겨 갔다. 동래시장에는 별도로 ’동래 만세거리’ 표석이 섰고, 해마다 재현행사도 이 거리에서 열린다. 근래에는 재현행사가 기념탑 참배로 시작하기도 하지만, 기념식과 만세 행진의 무대는 여전히 학교와 시장 거리다. 탑은 행사의 출발 의례로 잠시 불려 나올 뿐이다.
마안산 꼭대기의 탑을 알고 있는 부산 시민은 과연 얼마나 될까.
어린이대공원 안의 항일학생의거기념탑
부산항일학생의거기념탑은 2004년 11월 23일 초읍 어린이대공원 안, 학생교육문화회관 광장에서 제막되었다. 부산시가 10억 원을 들였고, 높이 11.3m의 주탑과 의거 학생들을 형상화한 군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초읍에 있는 부산항일학생의거기념탑
기념하는 사건은 1940년 11월 23일의 이른바 ’노다이 사건’이다. 이날 부산공설운동장, 지금의 구덕운동장에서 제2회 경남학도 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가 열렸다. 일본인 심판의 노골적인 편파 판정에 동래중학교(현 동래고)와 부산제2상업학교(현 개성고) 학생 1천여 명이 항거했다. 학생들은 거리로 나섰고, 배속장교 노다이 대좌의 관사로 몰려가 돌을 던졌다.
사건의 중심 장소는 구덕운동장이다. 그런데 탑은 그곳과 아무 연고가 없는 어린이대공원에 섰다. 추진 측은 부지 문제를 들 것이다. 역사적 장소에 부지를 얻기가 쉽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노다이 사건에는 두 번째, 세 번째 장소가 있었다.
○ 보수동: 학생들이 「황성옛터」와 민요를 부르며 행진한 길
○ 영주터널 부근: 노다이 관사로 몰려가 투석한 곳
○ 부산헌병대 자리: 헌병대가 각 경찰서에 지시해 귀가하는 학생들을 대거 검거한 곳
이 가운데 어느 한 곳이라도 제대로 노력했다면 장소성을 살린 부지를 찾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어린이대공원 입구에서 조금 걸어 오르면 오른쪽에 등을 돌린 듯한 조형물이 서 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어린이 놀이시설의 장식물쯤으로 여기고 지나친다. 장소를 잃은 기념탑 앞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할까.
산 위로 옮겨진 4·19 위령탑
4·19 위령탑은 처음부터 산 위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1961년 시민 성금으로 용두산공원에 세워졌다. 용두산은 항쟁이 벌어진 시가지와 가까웠다. 그 탑이 2007년 2월 15일 중앙공원 일대, 영주동 산 위로 옮겨졌다. 유족회의 숙원사업이자 사적시설 확충사업이었고, 영령봉안소도 함께 들어섰다. 그 결과 희생자를 기리는 공간은 항쟁의 거리에서 더 멀어졌다.
1960년 4월 부산의 항쟁은 학교와 거리에 있었다. 동래고 학생들은 동래에서 거제리·양정·전포동을 거쳐 범일동까지 행진했다. 4월 19일 오후 동부산경찰서 앞에 모인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기관총과 소총을 쏘았고, 총상을 입은 사람들은 범일동의 병원으로 옮겨졌다. 경남공고 3학년 강수영은 경찰의 총에 맞아 부산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이전이 불가피했다면 항쟁이 격렬했던 곳이나 발포로 희생자가 생긴 현장, 또는 그 인근으로 옮겼어야 한다. 그런 자리는 지금도 남아 있다. 사건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오히려 경남공고 교정의 강수영 추모비와 2010년 서면에 세운 4·19 표석 같은 작은 표지들이다. 시 차원의 공식 기념식은 해마다 산 위의 위령탑 앞에서 열린다.
충혼탑에서 바라본 전경. 4·19위령탑과 민주공원이 보인다. 산 위의 기념시설로 자리잡았다.
민주공원과 ’클러스터’의 논리
민주공원은 1999년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 20주년에 맞춰 같은 중앙공원 안에 문을 열었다. 지금도 부산에서 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시설은 이곳 하나뿐이다. 그러나 1979년 10월의 함성은 부산대 교정과 온천장, 서면, 남포동·광복동 거리에서 울렸다. 10월 17일에는 동아대 학생들도 구덕캠퍼스에서 가두로 나서 도심의 시민항쟁에 합류했다. 학생들은 경찰서로 연행되고 삼일공사에서 조사받은 뒤 15헌병대에서 군사재판을 받았다. 이 가운데 어느 곳에도 항쟁을 기억하고 배우는 기념 공간은 없다. 기념시설은 산 위에 홀로 있고, 항쟁의 장소는 기념 공간 없이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다.
문제는 이 분리가 지금도 되풀이된다는 점이다. 중앙공원에는 이미 위령탑과 4·19 광장, 광복기념관이 있다. 여기에 민주공원 부속 사료관이 더해졌고, 가칭 YS 민주역사기념관도 같은 자리에 추진되었다. 2022년 연구용역은 새 기념관을 ’앵커시설’로, 부산시는 2023년 ’민주주의 클러스터’를 정책 목표로 내걸었다. 입지의 근거는 버스정류장과 공영주차장에 가깝다는 접근성이었다.
이름은 앵커에서 클러스터로 바뀌었지만 기준은 같았다. 접근성과 집객, 기존 시설과의 거리였다. 항쟁이 일어난 장소는 어느 문서에서도 기준이 되지 못했다. 산 위로 옮겨 간 시설이 다시 다음 시설을 산 위로 부르는 셈이다. 시설끼리 가깝다고 역사적 연관성이 생기지는 않는다.
이 논리는 박형준 시정에서 정책이 되었다. 2022년 12월 연구용역이 새 기념관을 클러스터의 앵커시설로 지목했고, 부산시는 2023년 3월 ’민주주의 클러스터’를 정책 목표로 받아들였다. 같은 달 시민 1000명 조사에서는 민주주의 미래관을 원한 응답이 50.1%로, 대통령 기념관을 원한 37.9%보다 많았다. 그런데도 사업은 가칭 YS 민주역사기념관 쪽으로 기울었고, 2024년 설계공모는 ’역사클러스터’를 내걸었다. 무엇을 기념할지가 정해지기 전에 입지가 먼저 정해졌고, 그 빈자리를 특정 정치인의 이름이 채웠다.
시장은 바뀌었다. 그러나 장소를 묻지 않는 기념정책의 관성까지 바뀐 것은 아니다. 민주공원 주변의 기념시설 확충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전임 시장이 시작한 사업이라는 이유로 목적과 입지를 그대로 이어받는다면, 시장의 교체는 기념정책의 변화로 이어지지 못한다.
전재수 시정은 박형준 시정의 우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부마민주항쟁기념관을 독립된 정책 과제로 다뤄야 한다. 부마항쟁기념관은 다른 시설의 부속이나 클러스터의 한 조각으로 끼워 넣을 문제가 아니다. 항쟁이 일어난 자리에서 자기 기록을 보존하고 연구하고 전시할 공간이다. 「부산광역시 부마민주항쟁 기념 및 지원에 관한 조례」는 기념시설 조성을 시장이 추진할 사업으로 명시하고 있다. 역사적 장소를 중심으로 후보지를 검토하고, 건립 기본계획과 정부 지원 협의, 재원 확보를 구체적인 일정으로 내놓을 책임은 이제 전재수 시장에게 있다.
기념시설은 있되 기억의 장소는 없다
가장 쉬운 답은 땅이다. 산과 공원은 시유지라 보상도 민원도 없다. 그러나 땅이 쉬웠다는 것은 설명이지 변명이 되지 못한다. 기념사업의 첫 질문이 ’어디에 세울 수 있나’였지 ’어디서 일어났나’가 아니었다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높은 곳에 탑을 세워 우러러보게 하는 방식도 돌아볼 일이다. 그것은 권위주의 시대 충혼탑과 동상의 문법이다. 항거와 저항을 기리는 탑이 그 문법을 그대로 빌려 쓴 것은 역설이다.
장소에 관한 논의는 이 문제를 더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는 공항과 고속도로, 대형 쇼핑몰처럼 역사도 관계도 정체성도 없이 통과와 소비의 기능만 남은 공간을 ’비장소’라 불렀다. 오제가 꼽은 비장소의 또 다른 특징은 과거는 없고 오직 지금 이 순간만 존재하는 ’현재성’의 지배다. 에드워드 렐프는 장소의 고유한 의미가 지워지고 어디서나 같은 모습으로 표준화되는 현상을 ’무장소성’이라 했다. 역사학자 피에르 노라는 집단의 기억이 머무는 곳을 ’기억의 장소’라고 불렀다.
부산의 기념시설들은 역사를 기리려고 세웠으면서 정작 역사가 일어난 자리에서는 떨어져 나왔다. 기념시설이 있되 기억의 장소는 되지 못한, 비장소의 한 모습이다. 그사이 진짜 역사의 장소는 ’배제된 장소’로 남았다. 구덕운동장도, 보수동 골목도, 동부산경찰서 앞도, 옛 15헌병대 터도 그날을 알려 주는 기념 공간이 없다. 기억은 산 위에서 행사 날에만 불려 나오고, 시민의 일상에서는 멀어진다.
기억은 사건의 자리에서 가장 힘이 있다
다른 도시들은 다른 길을 택했다. 베를린의 슈톨퍼슈타인은 나치에게 희생된 사람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 앞 보도에 이름과 생몰 연도를 새긴 작은 황동판이다. 추모를 한곳에 모으지 않고 일상의 거리로 흩어 놓아, 평범한 거리 전체가 기억의 장소가 되었다.
광주는 5·18 기념시설을 한곳에 모으지 않았다. 계엄군 법정과 영창을 복원한 5·18자유공원, 헬기 사격의 탄흔을 간직한 전일빌딩 245, 금남로의 옛 전남도청이 사건의 자리에 있다. 서울의 민주화운동기념관은 2025년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 문을 열었다. 고문이 이루어진 건물 자체가 전시의 중심이다.
이들에게 사건의 자리는 곧 기념의 자리다. 부산은 그 반대로 기념의 자리를 정해 놓고 사건을 그리로 불러왔다.
기념사업은 산에서 내려와야 한다
이미 세운 탑을 모두 다시 옮기자는 말은 아니다. 다만 앞으로의 기념사업은 질문의 순서를 바꿔야 한다. 먼저 ’그날 어디였나’를 묻고, 그다음에 ’무엇을 세울 수 있나’를 물어야 한다. 비장소가 된 역사의 자리에 다시 의미를 불어넣는 일, 곧 장소의 회복이다.
큰 탑이 아니어도 된다. 구덕운동장 입구의 안내판, 보수동 골목의 표석, 동래 장터 바닥의 동판, 동부산경찰서 자리의 기념판 하나가 산 위의 10억 원짜리 탑보다 더 많은 시민에게 말을 건다. 장소를 확인하고, 증언을 기록하고, 이름을 돌려주는 일은 지금 바로 시작할 수 있다. 이렇게 흩어진 현장을 걸어서 잇는 것이 ’부산 기억의 길’이고, 부마항쟁의 현장을 잇는 것이 ’시월길’이다.
그 첫 시험대는 부마민주항쟁기념관이다. 4대 민주항쟁 가운데 독립된 기념관이 없는 것은 부마항쟁뿐이다. 이 기념관마저 접근성과 시설 집적을 이유로 산 위에 올린다면 부산은 같은 잘못을 또 한 번 되풀이하게 된다. 옛 15헌병대 터와 송상현광장 일대는 부산대와 부산여대 시위대가 서면으로 향하던 길이 만나고, 연행된 사람들이 구금되고 재판받은 자리다. 장소성은 입지를 판단하는 여러 기준 가운데 하나지만, 그것을 기준에서 빼면 기념관은 또 하나의 비장소가 된다.
부산의 역사는 산 위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장터와 운동장, 교정과 거리에서 일어났다. 기념도 그 자리로 내려와야 한다.
참고
정광민, 『성찰적 부산론 — 모두가 살고 싶은 부산을 위하여』(헤로도토스, 근간)정광민 시민기자 vietho@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