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 충격과 공포의 긴급조치 시대…김민기 징집 [사람들] 1973년 서울대 문리대 10·2 시위의 파장은 대학가를 넘어 시민사회로 확산했다. 유신헌법 철폐와 민주화를 향한 학생들의 외침은 시민사회를 깨워 종교계, ‘재야’와 야당이 개헌 청원을 위한 국민운동에 나서도록 했다. 언론계로도 번져, 2차 언론자유 운동이 터졌다.
박정희 정권의 언론 통폐합 조처에 따라 과 통합될 기자들이 먼저 움직였다. 그들은 10월 19일 ‘외부 압력 배제, 사실 보도 충실’ 등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채택했고, 이어 11월 말까지 대다수 신문과 방송들이 선언문을 발표했다.
전선이 확대되자 유신정권은 일단 유화책을 내놨다. 일단 달래놓고 보자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과 10부 장관을 교체하고, 구속 및 연행 학생을 석방했다. 학원 자율 및 언론자유의 확대를 약속했다. 다만 유신헌법만은 건드리지 말라고 쐐기를 박았다. 원흉이 유신헌법인데, 그것만은 용인하라는 것이니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유신의 동토에서 깨어난 재야인사들이 1973년 11월 5일 서울 종로구 YMCA에서 시국 간담회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 가운데 양복 입은 이가 김재준 목사, 그 왼쪽이 함석헌 선생, 지학순 주교, 소설가 이호철, 오른쪽 맨 앞 김지하, 계훈제, 법정, 천관우. 사진출처: 동아일보
유신 철폐를 촉구하는 목소리와 행동은 오히려 더 번졌다. 12월 24일 서울 YMCA에서 출범을 알린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은 단 하루 만에 10만여 명이 동참했다. 100만 명이 아니라 500만 명도 넘어설 기세였다.
박정희 정권은 긴장했다. 양단 간의 결단을 해야 했다. 유신헌법을 포기하든가, 유신 철폐 운동의 뿌리를 뽑든가 둘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유신 철폐는 정권의 퇴진과 같은 말이었으니, 선택은 하나였다.
유화책을 발표하고 채 열흘도 되지 않아 유신의 하수인들은 강경 조처를 떠벌이기 시작했다. 26일 김종필 국무총리는 ‘특별 선언’을 통해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에 대해 엄하게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라고 경고했다. 28일엔 정부 대변인인 문공부 장관이 유신체제에 대한 부정이나 도전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쐐기를 박았다.
하수인들의 겁박만으로는 시국 상황이 불안했던지 29일엔 박정희가 직접 등판했다. 그는 담화문을 내어 개헌 청원 운동을 사회불안을 조성하려는 불순한 움직임”이라고 규정하고, 유신체제를 부정하는 일체의 불온 언동과 소위 개헌 청원 서명 운동을 즉각 중단하라”라고 ‘최후통첩’과도 같은 경고장을 던졌다.
1974년, 새해는 유신체제에 대한 이런 시민사회의 저항과 박정희의 최후통첩이 정면충돌하는 가운데 밝았다.
12월 31일 윤보선 전 대통령과 유진오 신민당 당수 등 재야, 정치권 지도자들은 ‘민주 체제의 회복’을 건의했고, 1월 4일 개헌 청원 운동본부는 서명자가 30만 명을 넘어섰다고 발표했다. 1월 7일에는 공화당 초대 총재와 당 의장을 지낸 정구영과 공화당 사무총장을 역임한 예춘호가 공화당에서 탈당했다. 같은 날 이희승, 김광섭, 이호철, 백낙청 등 문인, 지식인 61명이 개헌 즉 유신헌법 철폐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튿날인 8일 오후 5시 라디오에선 박정희의 날카로운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만지작거리던 비장의 카드, 아니 예리한 칼날 하나를 국민 가슴팍 앞에 들이민 것이었다. ‘긴급조치 제1호’였다. 유신헌법이 유신헌법을 보위하기 위해 대통령에게 부여한 초헌법적 권한이었다. 헌법을 부정·반대·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 금지, 헌법 개정 폐지 주장·발의·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했고, 이를 위반하면 영장 없이 체포해 군법회의에 회부,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개헌 청원 운동의 봉쇄를 겨냥한 것으로,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을 최고 15년 징역형으로 엄벌하겠다는 것이었다. 긴급조치 앞에서 국회의 입법권과 사법부의 재판권 등 삼권분립은 모두 휴지 조각이 되어 버렸다. ‘유신헌법’ 혹은 박정희의 유신 정권에 관한 한 찬동 이외의 모든 표현의 자유를 박탈했다.
1974년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구속되자 전국의 가톨릭 사제와 신도들이 원주 원동성당에 모여 지학순 주교 석방을 촉구하고, 정부의 강압정책을 규탄하고 있다. 사진출처: 오마이뉴스, 지학순정의평화기금제공
이 조치에 따라 개헌 청원 운동을 주창하고 추진한 장준하를 비롯한 함석헌·천관우·안병무·문동환·김동길·법정·김숭경·김윤수·계훈제·이상순·이정규·백기완 등 각계 대표들은 차례로 체포돼 구속됐다. 1월 14일 구속된 장준하와 백기완에 대해서는 3월 2일 비상군법회의에서 15년과 12년 형을 각각 때렸다. 서울지검 공안부는 2월 25일 유신헌법 철폐를 촉구했던 이호철, 임헌영, 김우종, 장을병, 장병희 등의 문인을 ‘간첩단’으로 엮어 구속했다. 이른바 문인 간첩단 사건이었다.
1974년 3월 12일 문인간첩단조작사건 재판 장면.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런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던 김지하는 절규했다. 시작부터 1974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라고 내지르는 시 ‘1974년 1월’이었다.
… 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 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 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 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하면 그 시간 다시 쳐 온 눈보라를 죽음이라 부르자 모두들 끌려가고 서투른 너 홀로 뒤에 남긴 채 먼 바다로 나만이 몸을 숨긴 날 낯선 술집 벽 흐린 거울 조각 속에서 어두운 시대의 예리한 비수를 등에 꽂은 초라한 한 사내의 겁먹은 얼굴 그 지친 주름살을 죽음이라 부르자 그토록 어렵게 사랑을 시작했던 날 찬바람 속에 너의 손을 처음으로 잡았던 날 두려움을 넘어 너의 얼굴을 처음으로, 처음으로 바라보던 날 그날 너와의 헤어짐을 죽음이라 부르자 언젠가는 돌아올 봄날의 하늬 꽃샘을 뚫고 나올 꽃들의, 잎새들의 언젠가는 터져 나올 그 함성을 못 믿는 이 마음을 죽음이라 부르자 아니면 믿어 의심치 않기에 두려워하는, 두려워하는 저 모든 눈빛을 죽음이라 부르자 아아 1974년 1월의 죽음을 두고 우리 그것을 배신이라 부르자 온몸을 흔들어 온몸을 흔들어 거절하자”
긴급조치의 비상대권을 꺼내든 박정희 정권이 그랬던 것처럼, 학생운동 지도부도 이판사판이었다. 오히려 더 큰 한 방을 도모했다. 10·2 시위 때도 잠행하며 얼굴을 묻고 이듬해 봄 ‘춘계 공세’를 준비했던 이들이 물밑에서 전국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철, 유인태, 서중석 등은 10·2 시위가 수그러들던 11월 말부터 전국적인 규모의 시위 혹은 투쟁을 조직하고 있었다. 영남 지역은 여정남과 이강철, 호남은 윤한봉이 맡는 식이었다. 12월 중순 정권의 유화책으로 나병식, 김병곤, 정문화 등 구속된 학생들이 풀려나면서 움직임은 더 활발해졌다. 재야 양심 세력은 물론 6·3세대와도 핫라인을 연결했다. 4·19 세대의 이수병과 유근일, 6·3 세대의 김지하, 이현배 등이 측면에서 이들을 도왔고, 종교계의 박형규 목사, 지학순 주교 등이 지원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이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모습. 재판관이 군복을 입고 있으며, 군복입은 재판관 가운데 종이 뭉치를 들고 서 있는 이가 재판장 이세호 육군대장이다. 사진출처: 오마이 뉴스
선언문, 성명서 등 각종 유인물의 공신력을 높이고, 대의를 뚜렷이 하기 위해 명시할 단체 명칭이 필요했다. 1972년 조영래, 심재권 등 몇몇이 이름부터 구상했다가 내란 세력으로 조작된 민주주의수호전국청년학생총연맹을 참고했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라고 지었다. ‘청년’을 포함한 것은 학교를 졸업한 선배 세대는 물론 대학 밖의 노동자, 봉급 생활자, 농민 등 당대의 모든 젊은이를 포함하기 위한 것이었다.
명칭은 그럴듯했다. 그러나 이 명칭이 가져오게 될 후과는 혹독했다. ‘민청학련’은 시위다운 시위 한 번 하지 못한 채 대한민국 유사 이래 최대의 조직 사건으로 과장 왜곡 조작되어, 반정부 이적단체의 국가 변란 기도 사건을 상징하는 이름이 됐다. 그뿐 아니라 ‘인민혁명당 재건위’라는 가상의 상부 조직까지 조작돼, 아무런 관련도 없는 활동가 8명이 어이없는 이유로 사형을 당하는 결과까지도 낳았다.
학생들의 뜻은 원대했지만, 그들의 계획은 엉성한 조감도에 불과했다. 중앙 단위의 책임 있는 조직도 존재하지 않았고, 손발에 해당하는 일선 조직도 구성돼 있지 않았다.
이에 비해 긴급조치(4호)의 폭력은 과연 충격과 공포였다. 까딱하면 사형에 무기징역이고 웬만하면 15년 징역형이었다. 게다가 중앙정보부는 이미 연말부터 ‘민청학련’ 관계자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중정은 이 기회에 학생운동의 뿌리를 발본색원하고, 재야와 야당까지도 일망타진할 시간만 재고 있었다.
개학이 됐다. 묘한 긴장 속에서 3월이 다 지나가는가 싶었는데, 3월 21일 경북대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3월 28일 서강대, 4월 1일 연세대에서도 시위가 열렸다. 기대와 달리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채 주동자만 체포되는 것으로 정리됐다. 이미 노출돼 도피 중이었던 지도부는 4월 3일을 전국적인 거사 일로 잡았다. 그러나 이 정보마저 중앙정보부에 흘러 들어갔고, 정부는 그날을 기해 긴급조치 4호를 발동했다.
순전히 ‘민청학련’을 겨냥한 조치였다. 이 단체를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일체의 집회와 시위 그리고 소요를 금지하는 내용이었다. 학생의 수업이나 시험 거부도 동조 행위로 간주했다. 문교부 장관에게는 폐교 등 강력한 행정 조치권을 부여했다. 학교 당국에는 학생들을 감시하고 시위를 저지하는 데 앞장서도록 강제했다. 13일에는 일제히 주동자들을 현상 수배했다. 이른바 ‘수괴급’의 현상금은 사상 최고인 2백만 원에 이르렀다. 아파트 한 채 값이었다.
중앙정보부의 기획은 시간이 갈수록 원대해졌다.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 움직임을 발본색원하고 또 유신에 대한 불만과 거부 움직임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쐐기를 박으려 했다. 그러자면 민청학련을 북한과 연계된 정부 전복 음모로 만들어내야 했다.
이런 기획 속에서 조작된 것이, 5월 27일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2차 인민혁명당 사건(인혁당 재건위 사건)이었다. 1차 인혁당 사건의 잔당이었던 인혁당 재건위가 북한의 지시를 받아 암약하던 중 반정부 친북 학생들을 모아 민청학련을 조직해 유신체제 전복을 기도했다는 게 중정이 그린 그림이었다. 1차 인혁당 관련자 일부를 조직의 수괴로 삼아 2차 인혁당 재건위를 조작하고, 이를 민청학련의 상부 조직으로 조작했으며, 상하부 조직이 북괴의 지령을 받아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려 기도했다는 식으로 ‘뻥튀기’했던 것이다.
이 그림의 모태라는 1차 인혁당 사건부터가 조작이었다. 1964년 6·3 항쟁 당시 ‘굴욕적인 한일국교정상화 회담’에 반대하는 학생과 시민들의 저항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사건이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의 변란을 도모했다는 대규모 지하조직 인민혁명당 관계자 57명을 구속하거나 수배했다. 하지만 검찰 수사 단계에서 고문과 협박에 의한 진술만으로 조작한 혐의임이 드러났고, 수사 검사 3명이 기소를 거부하면서 사표를 냈다. 그러나 검찰은 중앙정보부의 강압에 따라 13명에 대해 반국가단체 찬양 고무 혐의로만 기소했고, 1심 재판부는 두 사람에 대해서만 유죄를 인정하고 나머지는 무죄를 선고했다. 정권은 사법부의 판결에 뒤집어졌고, 강력한 압력을 행사해 2심과 대법원이 1심 판단을 뒤집고 11명에 대해 유죄 선고를 하게 했다.
1975년 4월 8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이 확정된 8명은 18시간만인 9일 새벽 사형이 집행됐다. 사법역사상 가장 수치스런 재판으로 꼽히고 있다. 사진 윗줄 왼쪽부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김용원,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아랫줄 왼쪽부터 여정남, 우홍선, 이수병, 하재완 사진출처: 나무위키
1975년 4월 8일 대법원 전원협의체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상고 기각으로 원심이 확정되자 유가족들이 오열하며 항의하고 있다. 재판장은 민복기 대법원장이었다. 사진출처: 나무위키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공안 당국은 긴급조치 4호,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1,024명을 체포해, 253명을 군법회의에 송치했다. 이들 중 180명을 기소했는데 민청학련 본사건 관련자는 32명에 불과했다. 7월 9일 속전속결로 열린 비상군법회의에서 검찰은 민청학련 피고인 32명 가운데 7명에 대해 사형, 7명은 무기징역을 구형했으며, 나머지는 20년 혹은 6년 형을 구형했고, 재판부는 불과 나흘만인 13일 검찰의 구형대로 선고했다.
2차 인혁당 사건으로 기소된 21명에 대해서는 비상군법회의가 군 검찰이 구형한 대로 8명 사형, 7명 무기징역, 나머지는 15~20년 형을 선고했다. 이듬해인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피고인들의 상고를 기각, 원심대로 형량을 확정했고, 법무부는 사형 선고를 받은 8명에 대해 선고 18시간 만인 이튿날 새벽 사형을 바로 집행했다.
근대 사법 체계 아래서 가장 신속한 사형 집행이었다. 통상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돼도, 혹시 있을지 모를 잘못된 판단을 우려해, 집행은 최대한 늦추는 게 선진국은 물론 당시 제3세계 독재국가에서도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사법 살인’. 국제법학자협회는 대한민국 사법부의 사형 판결과 법무부의 사형 집행에 대해 이렇게 규정하고,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정했다. 1995년 김영삼 정부 때 한국의 법관들은 이 재판을 ‘우리나라 사법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으로 꼽았다.
국제 사회에서 ‘살인자’로까지 낙인찍히고, 외교적으로 고립된 마당이었으니, 박정희 정권은 더 눈치 볼 게 없었다. 공영 방송사는 물론 민영 방송, 신문사 편집국(혹은 보도국) 데스크까지 꿰찼다. 기사를 최종 출고하는 편집부장과 편집국장 옆에 자리를 놓고, 중정 요원과 문화공보부 공무원이 상주하며 기사의 내용, 제목, 크기를 검열했다. 이들은 빨간 색연필을 들고, 인쇄되기 전 편집본에 밑줄을 죽죽 그어가며 어떤 기사는 삭제하고, 제목을 바꾸고, 문장을 수정하고, 심지어 낱말을 바꾸라고까지 지시했다.
거리에 깔리는 신문들은 그런 검열의 결과물이었다. 10‧2 시위, 개헌 청원 운동, 문인들의 유신헌법 철폐 촉구 성명 등 시민사회의 동향과 여론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고, 정권의 선전 선동, 국민을 협박하는 사건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신문이 거의 유일한 시민들의 눈과 귀 역할을 하던 시절이었다. 방송의 보도 기능은 사족과 같았다. 그런 시절에 신문이 ‘찌라시’로 전락했으니, 시민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4년 10월 24일 오전에 동아일보 기자 180여 명, 오후에는 조선일보 기자 150여 명이 박정희 유신 정권이 자행한 언론 침탈에 맞서 자유언론 실천을 선언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또는 각 신문사 정문 앞에 모아놓고 불태웠다. ‘정론’을 자부하던 였지만, 신문사 앞에서는 그런 ‘화형’을 피할 수 없었다. 수치심과 분노를 참다못해 기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10월 24일 편집국에 상주하면서 최종 데스크 노릇을 하던 기관원들을 몰아내고, ‘자유언론 실천 선언’을 발표했다.
앞서 두 차례의 선언이 있었다. 1971년 4월엔 기자들의 1차 언론자유 수호 선언, 1973년엔 기자들의 자유언론 수호 선언이 계기가 되어 벌어진 2차 언론자유 수호 운동이 그것이었다. 세 번째 선언은 앞선 두 차례와 낱말 하나가 달랐다. 앞선 것들이 ‘언론의 자유를 지키겠다’라는 의미의 ‘수호’였던 것과 달리 3차는 ‘언론의 자유를 적극 실천하겠다’라는 의지를 담은 ‘실천 선언’이었다. 실제로 기자들은 기관원들의 편집국 출입을 막았고, 사전검열도 원천적으로 거부했다.
박정희 정권은 난처했다. 사전검열을 거부했다고 유력 언론사를 폐간했다가는 ‘사법 살인’에 더해 ‘언론 학살’ ‘표현의 자유 유린’ 정권으로 낙인찍힐 수 있었다. 고민은 2달 가까이 계속됐다. 사태는 다른 언론사로까지 확산 조짐을 보였다. 다시 한번 특별한 조처가 필요했다. 이때 중앙정보부가 낸 꾀가 광고주 압박이었다.
1974년 광고 없이 인쇄된 동아일보. 오른쪽 사진은 동아일보 광고 해약은 광고주와 업무상 문제이지 정부로서는 그 관계를 깊이 모른다고 발뺌하는 정부 발표를 실은 기사. 사진출처: 한겨레신문
당시 는 일주일 전에 예약해야 실을 수 있을 정도로 광고가 넘쳤다. 그러나 12월 16일께부터 광고란이 비기 시작하더니 12월 26일 자부터는 아예 광고란이 백지로 나갔다. 중앙정보부가 광고주들을 일일이 압박해 에 광고를 싣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는 광고가 빠져나간 자리를 빈 채로 내보내는 ‘백지 광고’로 맞섰다.
1974년은 ‘죽음’으로 시작해, ‘백지’ 혹은 ‘황무지’로 저물고 있었다. 김민기는 이 죽음의 광란 속에서 향후 학생운동의 새로운 ‘장’이 될 마당놀이 한 판을 펼친 뒤 징집된다.곽병찬 언론인 chankb195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