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시설에, 3년 무인도에 감금…국가는 어디 있었나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는 1959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전남 영광의 영산보아원으로 보내졌다. 그의 기억에는 부모의 품도, 따뜻한 집도 없었다. 삶의 시작은 이미 시설이었다. 그가 혼자였던 것은 아니다. 여섯 살가량 위의 큰형, 세 살 위의 작은형과 삼형제가 같은 시설에 맡겨졌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집안은 급격히 무너졌다. 어린 세 형제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어머니와 큰이모는 결국 아이들을 보육원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잠시만 맡긴다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형편이 나아지면 다시 데려오겠다는 약속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삼형제에게 보육원은 잠시 머무는 곳이 아니라 인생의 대부분을 삼켜버린 공간이 되었다. 무려 30년 가까운 세월을 감금까지 당하며 살아야 했던 이종욱씨 이야기이다.
영산보아원은 마치 작은 시골마을처럼 여러 채의 한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문을 통과하면 대여섯 채의 한옥이 시설의 중심을 이루었고, 한 동마다 네 개의 방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다. 생활동 외에도 관리자가 머무는 관리동이 따로 있었고, 조회와 각종 행사가 열리는 강당동도 별도로 자리했다. 생활공간은 넉넉하지 않았다. 방 하나에는 열 명 안팎의 아이들이 함께 생활했다. 잠을 잘 때면 아이들은 서로의 몸이 닿을 정도로 다닥다닥 누워야 했다. 개인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큰형, 작은형과 함께 신생아 때 이곳으로 보내졌지만 함께 생활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형제들을 서로 다른 방으로 배정했다. 한 지붕 아래 있으면서도 형제는 남이나 다름없었다. 같은 밥을 먹어도 함께 앉지 못했고, 밤이 되어도 같은 이불을 덮을 수 없었다. 형이 어디에서 자는지 알면서도 찾아갈 수 없었고, 동생이 울고 있어도 곁에 있어 줄 수 없었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에게 마지막 남은 가족마저 시설의 규율 속에서 흩어져 살아야 했다. 시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원장의 집과 그 옆으로는 커다란 방죽이 자리잡고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늘 보이지만 쉽게 다가갈 수 없는 풍경이었다.
영산보아원 생활 당시의 이종욱씨.
당시 영산보아원에는 일반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밤이 되면 자체 발전기를 가동해 생활에 필요한 전기를 공급했어요. 발전기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적막했던 시설에 기계음이 울려 퍼졌고, 희미한 전등불이 방 안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그 불빛은 오래가지 않았어요. 발전기가 멈추면 다시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습니다. 아이들은 그 어둠 속에서 서로의 숨소리에 의지한 채 밤을 견뎠습니다. 영산보아원의 풍경은 아직도 머릿속에서 선명합니다. 저에게 영산보아원의 한옥은 따뜻한 집이 아니었습니다. 열 명의 아이들이 한 방에서 부대끼며 잠들던 곳이었고, 형제조차 함께 지낼 수 없었던 공간이었죠.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한옥들은 기억 속에서 여전히 어둠을 품고 있습니다. 그곳은 단순한 보육시설이 아니라, 가족이 흩어지고 어린 시절이 멈춰버린 공간입니다.”
영산보아원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는 했다. 하지만 학교에 가는 날보다 가지 못하는 날이 훨씬 더 많았다. 아이들은 시설에서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수업보다 노동이 먼저였다. 출석부에는 이름이 있었지만 교실에는 빈자리가 반복됐다. 초등학교는 한글을 배우고 세상을 익히는 시간이다. 또래 아이들이 교과서를 펼쳐 글자를 익히고 받아쓰기를 하는 동안 그는 시설의 일을 해야 했다. 학교보다 중요한 것은 시설 운영에 필요한 노동력이었다. 결국 그는 글을 배우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한글을 익힐 기회를 잃었고, 성인이 되어서도 읽고 쓰는 일은 평생의 어려움으로 남았다. 교육을 받을 권리는 있었지만, 실제 삶에서는 한 번도 보장받지 못했다. 지금도 그는 기본적인 숫자와 자신의 이름정도만 읽을 수 있을 정도다. 그의 삶에서 빼앗긴 것은 교육만이 아니었다. 그는 1959년에 태어났지만, 보육원의 기록에는 1964년생이었다. 다섯 살이나 어린 아이가 된 것이다. 그는 왜 자신의 생년월일이 바뀌었는지 어린 시절에는 알지 못했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 의미를 조금씩 이해하게 됐다. 시설에 오래 머무를수록 국가는 그만큼의 지원을 했다. 기록상 나이가 어릴수록 보호기간은 길어졌고, 시설은 더 오랫동안 지원금을 받았다. 반대로 실제 나이가 더 많았던 아이들은 기록보다 훨씬 큰 체격으로 성장해 있었다. 서류상으로는 어린아이였지만, 현실에서는 이미 성인 못지않은 노동력을 가진 아이들이었다. 아이로 등록되어 있었지만, 노동은 어른처럼 해야 했다. 나이는 서류 속에서만 어려졌다. 몸은 실제 나이만큼 자랐고, 그 몸은 농사일과 허드렛일, 시설 운영을 위한 노동에 동원됐다. 교육을 받아야 할 시간은 노동시간으로 바뀌었고, 교과서 대신 삽과 호미를 들었다. 기록 속 다섯 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다. 그 다섯 해는 학교에서 글을 배울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시간을 잃었다. 대신 남은 것은 읽지 못하는 글자와 몸에 밴 노동의 기억이었다. 국가는 그를 보호 대상 아동으로 기록했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보호보다 강제노동에 가까웠다. 노동 현장으로 보내진 순간, 그의 미래도 함께 빼앗겼다. 그가 잃은 것은 다섯 살의 나이가 아니라, 다섯 해의 어린 시절이었다.
시설을 떠난다고 과거가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세 형제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큰형은 지금도 생존해 있지만 작은형은 약 10년 전 세상을 떠났다. 오랜 세월 술에 의존하며 살아왔고, 결국 과도한 음주가 그의 생명을 앗아갔다. 사람들은 고아원 문을 나서는 순간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고 생각하지만, 어린 시절 몸에 새겨진 공포와 수치심은 성인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이라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나 복합 트라우마라는 이름으로 설명될 질병이지만, 당시 작은형은 그것을 홧병이라고만 알았다. 그 기억을 잊기 위해 선택한 것이 술이었다. 술을 마시는 동안만큼은 악몽이 잠시 멈추었다. 어린 시절의 굶주림도, 관리자들의 폭력도, 버려졌다는 절망감도 희미해졌다. 그러나 술은 상처를 치료하지 못했다. 그의 죽음을 단순히 알코올 중독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알코올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다. 시설에서 보낸 어린 시절, 가족과 단절된 삶, 폭력과 결핍 속에서 쌓인 상처는 평생 치유되지 않았다. 술은 그 상처를 잊기 위한 가장 손쉬운 진통제였고, 결국 가장 치명적인 독이 되었다.
작은 형을 죽인 것은 술이 아니었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든 그 시간의 시설과 국가가 형을 죽인 겁니다. 작은형의 죽음은 한 개인의 음주 문제가 아니라, 시설보호 체계가 남긴 상처가 수십 년 뒤에도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저와 우리형제의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국가와 사회가 ‘보호’라고 불렀던 공간이 한 인간의 평생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묻는 현재의 이야기이며, 살아남은 형제가 목격한 다른 아이의 죽음을 통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마지막 분노입니다.”
그가 영산보아원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기억나는 것은 학교도, 놀이도 아니었다. 소와 누에, 그리고 끝없이 이어졌던 노동이다. 어린아이들이 하루를 보내야 했던 공간은 보육시설이라기보다 거대한 농장이었다. 영산보아원은 광범위한 농지와 산림을 소유하고 있었다. 당시 원장은 영광 일대의 부동산 재력가였으며, 시설 주변의 논과 밭, 뒷산 상당 부분이 그의 소유였다. 그 넓은 땅을 유지하는 노동력은 대부분 아이들이었다. 시설에서는 50여 마리의 소를 사육했다. 원생 두 명이 소 한 마리를 전담해 돌봤다. 새벽이면 외양간을 치우고 여물을 먹였으며, 여름에는 소를 끌고 산과 들을 돌며 풀을 뜯게 했다. 누에를 키우기 위한 거대한 뽕밭도 있었다. 아이들은 뽕잎을 따고 누에를 돌보는 작업에 매달렸다. 1년에 두 번씩 키워야 했던 누에는 쉬지 않고 잎을 먹었고, 아이들도 쉬지 않고 뽕잎을 날랐다. 논농사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약 50마지기에 달하는 논에서는 모내기와 김매기, 벼베기와 탈곡까지 대부분의 농사일에 원생들이 동원됐다. 가을이면 황금빛 들판은 풍성했지만, 그 풍요는 아이들의 것이 아니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쥔 채 일하다가 밭의 고구마와 무를 몰래 캐 먹는 일이 생존을 위한 본능이 되었다.
영산보아원에서 구도재생원(신안보육원)으로 전원 당시의 이종욱씨 아동기록카드.
배고픔은 아이들에게 또 다른 위험이었습니다. 추수가 끝난 논에서 벼 이삭을 주워 손으로 비벼 먹곤 했는데, 제대로 익히거나 가공하지 않은 나락을 허겁지겁 삼키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오랫동안 제가 앓았던 담석증이 열악한 식생활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복통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시설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은 기억이 없습니다. 배를 움켜쥐고 고통을 호소해도 병원으로 보내주는 일도 드물었어요. 결국 15년이 넘도록 담석증을 안고 살아야 했지요. 서른을 넘긴 뒤에야 비로소 수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보다 더 참담한 기억도 있습니다. 함께 생활하던 한 친구는 배에 물이 차오르는 증상을 보였지만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시설 안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이들은 죽음의 이유를 설명해 주는 어른도, 슬퍼할 시간도 없이 다시 일터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겨울을 준비하는 일도 원생들의 몫이었다. 영산보아원 뒤편의 산 역시 원장의 소유였다. 아이들은 산으로 올라가 마른 나뭇가지를 모으는 정도가 아니라 소나무를 대량으로 베어 장작을 만들었다. 잘라낸 나무를 어깨에 메고 산길을 내려오는 일은 어린아이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노동이었다. 불을 피우는 일도 계속됐다. 아궁이에 넣을 장작을 패고, 벼를 수확한 뒤 남은 볏짚을 모아 땔감으로 사용했다. 외양간에서는 소에게 먹일 쇠죽을 큰 가마솥에 끓였다. 뜨거운 증기 앞에서 삽으로 쇠죽을 젓는 아이들의 모습은 농촌의 일꾼과 다르지 않았다.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시설을 유지하고 운영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노동이었다. 영산보아원의 기억은 그래서 한 사람에게는 단순한 어린 시절의 추억이 아니다. 시설은 아이들을 보호하는 곳이어야 했지만, 그의 기억 속 영산보아원은 어린 노동력 위에서 운영되던 또 하나의 거대한 농장이었다.
영산보아원은 1952년 설립되었으며, 1989년 민간이 운영하는 아동보호감호 시설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1999년 구타와 폭력에 시달리던 원생들의 집단 탈출 사건 등으로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던 시설이다. 1972년 이종욱 씨는 목포의 구도재생원으로 두 형들, 그리고 다른 원생들까지 함께 옮겨졌다. 신안군 압해면 구도에 위치했던 시설은 목포시 죽교동 유달산 자락으로 옮겨지면서 이후 신안보육원으로 개명되었다. 그의 불행은 구도재생원에서 더욱 처참했다.
구도재생원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달력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벽에는 날짜를 알려주는 달력이 걸려 있지 않았고, 아이들은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알 수 없었다. 계절은 산의 나무와 바람으로 짐작할 뿐이었다. 시간을 잃어버린 아이들은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 자신의 삶이 얼마나 흘러갔는지 알 수 없었고, 언제 입소했는지, 언제 생일이 지났는지, 언제 졸업해야 하는 나이인지조차 희미해졌다. 날짜를 모른다는 것은 단순히 달력을 보지 못하는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기억하고 계획할 권리마저 빼앗기는 일이었다. 형식적으로는 학교에도 다녔다. 원적은 목포북초등학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에 가는 날보다 가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았다. 중학교는 입학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게 교육권을 박탈당했다. 아이들의 하루는 교실보다 시설의 일터에서 더 많이 흘러갔다. 구도재생원의 운영자는 백발이었다. 이종욱 씨의 기억 속에서 그는 단순히 시설장이 아니었다. 목포에서 원진극장을 소유할 정도의 상당한 재력을 가진 인물로 알려져 있었고, 지역 유지로 통했다. 시설의 아이들은 원장 개인의 사업과 분리된 삶을 살지 못했다. 이종욱 씨 역시 원진극장에서도 일했다. 관리자는 ‘영화를 공짜로 보여준다.’는 말을 조건으로 그에게 영사기를 돌리는 일을 맡겼다. 어린 소년에게 영사기를 다루는 일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필름을 끊기지 않게 연결하고, 상영 시간을 맞추며, 기계를 관리하는 일에는 상당한 집중력과 책임이 요구됐다. 하지만 그 노동에 대한 임금은 없었다. 시설에서는 누가 시키면 일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교육을 받아야 할 나이에 노동 현장을 전전했고, 어떤 일이든 이유를 묻지 않은 채 동원됐다.
실제 나이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기록은 그의 삶을 또 한 번 가두었다. 이미 성인이었지만 그는 스물다섯 살 무렵에야 시설을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퇴소’라는 말은 자유를 의미하지 않았다. 시설은 그를 사회로 돌려보내는 대신 또 다른 감옥으로 보냈다. 목적지는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외딴 무인도였다. 구도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약 30분. 사람이 사는 마을도, 불빛도 없는 작은 섬이었다. 그곳에는 움막 같은 집 한 채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시설 관계자는 그를 그곳에 내려놓고는 한 달 뒤 다시 오겠다며 떠났다. 그에게 맡겨진 일은 ‘수정’이라 불리는 보석을 캐는 노동이었다. 그중에서도 자수정 채취가 그의 일이었다. 산비탈의 흙을 긁어모아 채반에 담고 바닷물에 여러 번 씻어내면 흙은 떠내려가고 작은 수정 조각들만 남았다. 그는 매일 같은 일을 반복했다. 한 달 동안 모은 한 박스의 수정은 관리자가 배를 타고 와 모두 가져갔다. 그 대가가 얼마였는지, 어디에 팔렸는지, 누구의 수입이 되었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그가 받은 것은 임금이 아니라 한 달을 버틸 최소한의 식량이었다.
한 달에 한 번 관리자가 가져다주는 식량은 보리쌀과 단무지가 전부였습니다. 식수는 움막에서 약 500미터 떨어진 곳까지 걸어가 길어 와야 했어요. 부족한 식량은 직접 해결해야 했습니다. 바다에 낚싯줄을 드리워 물고기를 잡기도 하고, 갯벌에서 조개 같은 것을 주워서 구워먹으며 겨우 끼니를 이어갔어요. 전기와 사람의 흔적도 없는 섬에서 혼자 살아남았습니다. 시설장의 아들 원장은 가끔 지인들과 낚시배를 타고 섬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원장 일행이 낚시를 즐기는 동안 배를 정리하고, 짐을 나르고, 식사를 준비하는 등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야 했습니다. 섬에서도 노동자였고, 심부름꾼이었으며, 자유를 빼앗긴 시설 원생이었습니다.”
무인도 생활은 육체적인 노동보다 고립감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사람 하나 없는 섬에서 그는 하루하루 같은 일을 반복했다. 산에서 흙을 퍼 나르고, 바닷물에 씻어 수정을 골라내는 작업이 끝나면 다시 적막뿐이었다. 말을 나눌 사람도,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다. 어느 날, 그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섬 곳곳에 불을 지펴 연기를 피워 올렸다. 누군가 이 연기를 보고 자신을 발견해 주기를 바라는 구조 신호였다. 얼마 뒤 노를 저어 다가오는 작은 배 한 척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가까스로 섬을 빠져나왔다. 잠시나마 자유를 얻은 것 같았다. 하지만 희망은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 붙잡혔다. 그리고 다시 그 무인도로 돌아가야 했다. 탈출은 실패로 끝났으며, 수정 채취 작업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전과 다름없이 산에서 흙을 퍼 나르고, 바닷물에 채반을 흔들며 보석을 골라내는 노동을 계속해야 했다. 외부와 단절된 섬에서의 삶은 그렇게 다시 시작됐다. 한 차례 탈출을 시도했다는 사실은 그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오히려 무인도는 더욱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이 되었고, 강제노동의 시간은 끝을 알 수 없이 이어졌다.
그는 단 한 번도 임금을 받지 못했다. 근로계약도 없었고, 노동의 대가도 없었다. 시설에서 시작된 강제노역은 퇴소 이후에도 끝나지 않았다. 사회로 복귀해야 할 청년는 이름 없는 섬에서 홀로 보석을 캐며 청춘을 잃어갔다. 오늘날까지도 그는 자신이 머물렀던 그 섬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기억 속에는 거친 파도 소리와 움막, 한 달에 한 번 다가오던 배, 그리고 끝없이 반복되던 채반질만 남아 있다. 누군가에게는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수정이었지만, 그에게 수정은 착취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 작은 보석 하나하나에는 임금 없는 노동과 빼앗긴 청춘,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고립된 한 인간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다.
3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끝이 없을 것 같던 무인도 생활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일찍 퇴소하면서 헤어져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큰형이었다. 큰형은 흩어진 동생들을 찾기 위해 구도재생원 관계자들을 설득한 끝에, 작은형을 먼저 찾았고, 마침내 이름 없는 무인도에서 수정을 캐며 살아가던 이종욱 씨의 행방까지 확인했다. 그날 마침내 섬을 벗어났다. 그러나 배에 오르기 직전, 그의 눈앞에는 쉽게 잊히지 않는 장면이 펼쳐졌다. 시설 관리자들은 머리 전체에 부스럼이 가득한 한 여성을 데리고 왔다. 초점 없는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움막으로 향했다. 관리자는 그녀에게 수정 채취 작업을 시키기 위해 이종욱 씨가 머물던 자리를 그대로 넘겨줬다. 그는 자신이 빠져나온 자리에 또 다른 사람이 채워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무인도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노동도, 착취도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사람만 바뀌고 있었을 뿐이다. 무인도를 벗어난 날, 그는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어 또 다른 사람이 그 섬으로 들어갔다. 그 장면은 이종욱 씨에게 지금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자신은 살아 나왔지만, 누군가는 다시 그 자리를 대신해야 했던 현실. 그것은 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사람을 소모품처럼 대했던 시설 운영 방식의 민낯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무인도 감금생활 당시 수정채취에 강제 동원된 이종욱씨의 모습을 AI로 생성했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뒤 그가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자신의 신분을 되찾는 일이었다. 시설은 그의 출생연도를 실제보다 다섯 살 늦게 기록해 두었다. 큰형과 함께 신분을 바로잡은 끝에 그는 비로소 1959년생이라는 본래의 나이를 되찾았다. 국가가 인정하는 자신의 이름과 나이를 되찾기까지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신분을 되찾은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병무청은 곧바로 입영통지서를 보냈다. 그는 서울 대방동에서 방위병으로 복무하게 됐다. 하지만 군대 역시 새로운 삶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 학교 대신 시설과 노동현장을 전전했던 그는 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문맹이었다. 고아원 출신이라는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부대에서는 조롱과 폭행이 이어졌다. 글을 모른다는 이유로 맞았고, 고아라는 이유로 또 맞았다. 보다 못한 이모가 직접 부대를 찾아왔다. 이 아이는 학교를 다니지 못했습니다. 글을 모르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사정을 설명하며 선처를 부탁하기도 했다. 시설에서 시작된 차별과 폭력은 군복을 입은 뒤에도 계속됐다. 세월은 또 흘렀다. 평생 그리워했던 어머니와도 만났다. 하지만 반가움보다 낯섦이 먼저 찾아왔다. 기억속에 존재하지 않았던 데다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탓이기도 했다. 시설을 벗어났다고 해서 그의 삶이 곧바로 제자리를 찾은 것은 아니었다. 한때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상대 집안은 문맹이라는 사실과 고아원 출신이라는 이유를 들어 결혼을 반대했다. 가난보다 깊었던 것은 사회가 찍어놓은 낙인이었다. 결국 그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미래를 포기해야 했다. 생계를 위해 그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용접공으로 일했고, 막노동판을 전전했으며, 건물 관리원으로도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어린 시절 배움을 빼앗긴 사람에게 세상은 결코 넉넉한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안정된 직장을 갖는 것도, 평범한 삶을 이어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지금 그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아간다. 혈압약과 우울증 약을 복용하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세월이 남긴 것은 몸의 병만이 아니었다. 시설과 무인도에서 겪었던 폭력과 고립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았다. 이종욱 씨의 삶을 돌아보면 숫자 몇 개가 선명하게 남는다. 30년의 시설생활. 3년이 넘는 무인도 감금과 강제노동. 그리고 그 이후에도 이어진 차별과 빈곤. 그의 인생은 개인의 실패로 설명될 수 없다. 보호를 받아야 할 한 아이를 국가와 사회가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고, 배움 대신 노동을, 가족 대신 시설을, 자유 대신 감금을 허용한 결과가 지금의 삶으로 이어졌다. 잃어버린 어린 시절은 돌아오지 않는다. 배우지 못한 시간도, 가족과 함께하지 못한 세월도 되돌릴 수 없다. 이종욱 씨의 삶은 한 사람의 불행한 개인사가 아니다. 국가의 보호 체계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을 때 한 인간의 삶이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그리고 그 기록은 과거의 비극으로만 남아서는 안 된다. 같은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기억하고, 진실을 밝히고, 책임을 묻는 일. 그것이 오늘 우리가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이유다.
이득신 시민기자 dsshine2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