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씨알의 삶을 살다간 박재순 박사를 기리며 [사람들] 박재순 박사님의 부고를 접하고 마음이 참으로 먹먹했습니다. 한 분의 학자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슬픔만은 아닙니다. 우리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살아내시고, 인간과 생명, 자유와 신앙의 의미를 평생 묻고 또 물으셨던 한 분의 어른을 떠나보내게 되었다는 아쉬움이 큽니다. 박재순 박사님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함석헌 선생님이 떠오릅니다. 박재순 박사님께서는 젊은 시절 함석헌 선생님을 만나신 뒤 평생 그분의 사상을 연구하고 씨알의 정신을 이어오셨습니다. 그 만남은 한 젊은 철학도의 지적인 관심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박재순 박사님께 평생의 스승이 되셨고, 씨알사상은 박재순 박사님의 삶과 사상을 이루는 중요한 뿌리가 되었습니다.
함석헌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씨알은 이름 없는 민중을 뜻하면서도, 동시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한 인간을 뜻합니다. 역사의 주인은 권력자나 제도만이 아니라 자기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박재순 박사님께서는 이 씨알의 의미를 평생 깊이 탐구하셨습니다. 그러나 박재순 박사님의 씨알사상은 함석헌 선생님의 말을 되풀이하는 데 머물지 않았습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님과 함석헌 선생님,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사상을 함께 살피시면서 한국 현대사상 속에 흐르는 깊은 정신의 맥을 찾아내셨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정신이었습니다. 사람을 깨우는 정신이었고,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정신이었으며, 서로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정신이었습니다. 박재순 박사님께서는 철학을 책 속에 가두지 않으셨습니다. 신학도 교리의 울타리 안에 가두지 않으셨습니다. 철학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일이었고, 신학은 인간과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묻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박재순 박사님의 삶에서는 학문과 신앙, 사상과 실천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는 시대의 아픔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1970년대 유신독재의 엄혹한 시대를 지나면서 민주주의와 인간의 자유를 고민하셨고,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어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에는 한울회 사건으로 다시 국가권력의 폭력을 겪으셨습니다.
한울회 사건은 기독교 청년들이 성경을 공부하고 신앙과 사회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던 모임을 국가권력이 반국가단체로 몰아붙인 사건이었습니다. 박재순 박사님께서는 그 일로 고문을 당하시고 긴 시간 감옥에 계셔야 했습니다. 그러한 고난은 한 사람의 삶을 무너뜨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박재순 박사님께서는 고난에 머무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고난을 통하여 인간의 자유와 양심, 국가와 권력, 신앙과 진실에 대한 질문을 더욱 깊이 품으셨습니다. 자신이 당한 고통을 복수와 증오로 돌려세우기보다 생명과 자유에 대한 사유로 승화시키셨습니다. 저는 그것이 박재순 박사님의 삶에서 참으로 귀한 모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박재순 박사님께서는 몸의 고통도 겪으셨습니다. 어린 시절의 장애와 건강의 어려움도 있으셨고, 여러 차례 삶의 고비를 지나오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고통을 삶의 전부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고통을 통하여 생명의 소중함을 더 깊이 바라보셨습니다. 박재순 박사님께서 말씀하시는 생명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의 생명이었고, 억압받는 사람의 생명이었으며, 이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생명이었습니다. 씨알 하나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는 한 그루 나무가 들어 있듯이, 한 사람의 인간 안에도 헤아릴 수 없는 생명의 가능성이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제가 박재순 박사님과 깊은 인연을 맺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십여 년 전 제가 제도권 교회를 나와 작은 교회를 개척하면서 함석헌 선생님의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고, 부산에서 함석헌 책읽기 모임을 만들어보고 싶어 박재순 박사님께 도움을 청한 적이 있습니다. 박사님께서는 제 부탁을 귀하게 받아주시고 함석헌 선생님과 씨알사상을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될 십수 권의 책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몇 년 뒤 제가 감리교단에서 은퇴하면서 한국교회의 현실을 걱정하여 다시 전화를 드렸을 때 박사님께서는 저는 진즉부터 교회 출입을 그만두었습니다. 이미 교회는 졸업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제게도 박철 목사님도 이제 교회는 졸업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는 그 말씀이 조금 낯설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말씀의 깊이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은 신앙을 버리라는 뜻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떠나라는 말씀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제도로서의 교회보다 더 깊은 신앙을 바라보라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교회가 하느님보다 커져서는 안 되고, 교리가 사람보다 앞서서는 안 되며, 종교가 인간의 양심과 자유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으로 저는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박재순 박사님께서는 교회를 비판하면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신앙의 본질을 더 깊이 찾으셨습니다. 그분께 하느님은 교회라는 건물 안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셨을 것입니다. 생명 가운데 계시고, 사람의 양심 가운데 계시며, 고통받는 사람의 삶 가운데 계시는 분이셨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박재순 박사님의 신앙은 인간을 작게 만드는 신앙이 아니라 인간을 깨어나게 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씨알이 자기 안의 하늘을 발견하도록 하는 신앙이었습니다. 박재순 박사님께서 평생 연구하신 씨알은 결코 거대한 존재가 아닙니다. 씨알은 작습니다. 그러나 씨알 하나가 땅에 묻히면 그 안에서 생명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어둠을 견디고, 겨울을 견디고, 마침내 싹을 틔웁니다. 저는 박재순 박사님의 삶도 그러했다고 생각합니다. 화려하게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오래 공부하셨고, 깊이 생각하셨으며, 시대의 고난을 견디면서도 생명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의 마음에 씨알 하나씩을 심어주셨습니다.
이제 박재순 박사님께서는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하지만 박사님께서 평생 품으셨던 씨알까지 떠난 것은 아닙니다. 박사님께서 남기신 책 속에 씨알이 살아 있고, 박사님의 글을 읽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씨알이 살아 있으며, 박사님께서 가르치고 말씀하셨던 사람들의 삶 속에도 그 씨알이 살아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박사님께서 평생 던지셨던 질문이 우리 곁에 남아 있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가. 신앙은 어떻게 인간을 자유롭게 해야 하는가. 교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 안의 씨알은 지금 깨어 있는가.
이 질문들이 살아 있는 한 박재순 박사님의 삶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박재순 박사님께서는 이제 긴 공부를 마치셨습니다. 시대의 고난도 내려놓으시고, 몸의 아픔도 내려놓으시고, 평생 품으셨던 질문도 잠시 내려놓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평안히 쉬셨으면 합니다. 저희는 박사님께서 걸으셨던 길을 기억하겠습니다. 함석헌 선생님께서 박사님께 건네주신 씨알의 정신을 기억하겠습니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사람을 존중하고, 양심의 자유를 지키며 살아가셨던 박사님의 삶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박사님께서 남기신 질문을 저희의 질문으로 품고 살아가겠습니다.
박재순 박사님, 한 시대의 아픔을 견디며 씨알의 길을 걸어오신 선생님을 기억합니다. 권력보다 양심을, 폭력보다 생명을, 증오보다 사랑을, 절망보다 희망을 붙드셨던 삶을 기억합니다. 함석헌 선생에게서 배운 씨알의 정신을 가슴에 품고 한평생 걸어오신 그 길이 이제 우리에게 이어졌습니다. 부디 이제는 모든 고통과 억울함을 내려놓으시고 평안히 쉬십시오. 그러나 선생님이 걸어온 길은 쉬지 않을 것입니다.
작은 씨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고 다시 생명을 틔우듯, 선생님의 삶과 정신도 누군가의 마음에서 다시 싹을 틔울 것입니다. 그 씨알이 자라 숲이 되고, 그 숲에서 다시 사람들이 서로의 손을 잡을 것입니다. 박재순 박사님의 영원한 안식을 빌며, 그가 사랑했던 생명의 길을 우리도 묵묵히 걸어가겠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사람답게 살 것인가. 저희는 그 질문을 품고 다시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박재순 박사님의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그리고 박사님께서 평생 사랑하셨던 생명과 씨알의 정신이 이 땅에서 오래 살아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박철 시민기자 pakchol@empas.com